2018.07.17.火. 맑고 더운 초복날 여전한 논쟁, 확장된 개권과 축소된 생존권을 보는 차이差異
07월15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2.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인류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사실은 인류가 자연이나 다른 생명들을 어떻게 이용利用하고 취급取扱하고 있는지를 보면 대충은 짐작이 갈만합니다. 언제부터인가 반려견伴侶犬, 반려묘伴侶猫의 권리에 대해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고 그 주장만큼이나 생명의 평등이나 고귀함에 대해서 광범위하고 이성적인 논리를 펴내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이나 의견에 대해 공감共感을 하는 사람도 있고 반감反感을 갖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넓은 의미에서 그런 주장들이 상당부분 타당妥當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의 반론도 귀기울여봐야 한다고 역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반려伴侶라는 개념은 아니지만 인류가 육식을 계속하는 한 우리들의 식탁을 책임지고 있는 닭과 돼지는 어떻게 사육되고 있는지도 알아야할 듯합니다. 닭은 빨리 성체가 되고 끊임없이 알을 낳도록 하기 위해 사육장에 계속 불을 켜두기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합니다. 닭은 그렇게 빨리 자라고 무수한 알을 낳아 우리 식탁을 채워놓습니다. 닭은 생명체라기보다는 규격을 맞춰 만들어내는 학살虐殺로 쌓아올린 공산품工産品에 가깝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아무런 느낌이나 죄의식 없이 치맥을 즐기고, 고량주에 깐풍기(乾烹鷄는 이름에서처럼 닭고기로 만듭니다)를 먹고, 복날이면 땀흘려가며 삼계탕을 들고, 주말이면 가족들과 굽네 오리지날 콤보를 뜯습니다. 채식菜食인가 육식肉食인가 논쟁은 그만두고라도 이렇게 잔혹한 방식의 섭식문화攝食文化에 대해서는 왜 이의異議를 제기하지 않는 것일까요? 돼지나 소도 닭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약 토끼나 말고기가 대중화되어 음식점에서 팔고 특정한 날 사람들이 모여서 토끼나 말고기 요리를 즐긴다면 아마 그때도 반대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닭이나 돼지고기는 먹어도 되는 음식이지만 토끼나 말고기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요즘 반려견을 키우면서 옷을 입히고, 털에 염색을 하고, 생일잔치를 해주고, 죽으면 장례를 치러주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우리 이웃으로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못 먹는 어린이들이 있고, 질병과 전쟁난민으로 날마다 죽어가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고통이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각각 담장너머의 문제로 나와는 상관이 없거나 개별적인 일일뿐입니다. 생명의 평등에 대한 개념 확장이나 가치의 설정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관점觀點이란 나의 관점이고 마주선 곳에 항상 너의 관점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주장의 전제조건인 타협妥協(妥協: 타당하면 협조한다)과 이해理解가 가능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도 복날 보신탕을 먹기 위해 열악하고 잔인한 방식을 통해 개처럼 사육하고 개처럼 도살하는 것은 당연 반대합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개식용이나 동물학대 더 나아가서 채식菜食이냐 육식肉食이냐의 문제는 인류의 미래와 연관 지어 개별사안이 아닌 다양하고 총체적인 인류학적人類學的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지난 100여 년 동안 지극히 사랑해 마지않던 플라스틱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으로 돌아와 인류 건강의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태평양상의 거대 쓰레기 섬은 GPGP(Great Pacific Garbage Patch) 라고 하는데, 이제 호주보다 더 커져버린 태평양상의 플라스틱 쓰레기 섬과 여기에서 시간을 두고 분해된 미세 플라스틱이 모든 물고기와 생수병의 생수 속에 포함되어 당신과 당신 가족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쓰레기 섬이 태평양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북대서양, 인도양, 남태평양, 남대서양 등 바닷물이 환류 하는 곳에서는 최소한 다섯 개 이상의 거대한 플라스틱 쓰레기 섬이 날마다 몸집을 부풀려가고 있습니다. 지구 표면적 70%에 해당하는 바다 상황이 이리도 심각한데 플라스틱 사용에 대한 반대 집회는 왜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마치 ‘손톱 밑에 가시 드는 줄은 알아도 염통 밑에 쉬스는 줄은 모른다’ 는 속담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바다에서 매시간 커가는 플라스틱 쓰레기 섬이나 미세 플라스틱 공격이 인류생존에 관한 문제라면 개식용 문제는 문화의 이해나 개개인의 호불호好不好에 대한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낙관론자樂觀論者가 비행기를 만들었다면 낙하산은 비관론자悲觀論者가 만들어낸 유일한 발명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유사有史 이래로 우리에게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우리들에게 최소한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던 것은 남들의 지탄을 견뎌내면서 현실을 그대로 읽어낼 수 있었던 소수의 비관론자들이었습니다. 이미 깊숙이 병들어버린 지구상의 문제들을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하는지 막막하지만 일단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사용使用과 소비消費를 절제하는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플라스틱 박스, 플라스틱 의류, 플라스틱 빨대, 플라스틱 용기, 플라스틱 일회용 컵, 플라스틱 도시락, 플라스틱 봉지, 플라스틱 장난감, 플라스틱 막대, 플라스틱 공, 플라스틱 화폐, 플라스틱 주택, 플라스틱 사랑, 플라스틱 결혼, 플라스틱 인생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플라스틱 아닌 것이 거의 없습니다. ‘생활을 위한 편리는 반드시 나태와 후회를 동반하게 된다’ 는 현대판 격언이 슬슬 나올 때가 된듯합니다. 어느 가깝거나 먼 훗날, 인류의 종언終焉이 핵전쟁이나 일기변화로 인한 기아로 말미암을 줄 알았는데 생활의 편리를 위해 그저 사소한 발명품일 뿐인 플라스틱의 습격으로 말미암을 줄은 난 진정 몰랐습니다. 2050년이 되면 바다의 절반은 플라스틱이 점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예측은 벌써 지지난해 유력한 연구기관의 이름으로 발표된 바가 있습니다. 그렇군요. 하느님 맙소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