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일주기를 맞이하며/전 성훈
지난 가을에 떠난 사람이 이 가을에 다시 돌아올 것 만 같다. 침을 삼킬 수 도 없어 아프다는 말조차 못하고 떨어지는 한 조각 노란 은행잎처럼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간 친구, 다시 가을이 깊어지니 새록새록 그 모습이 그리워진다. “어이, 술시가 되었으니까, 쌩 한 잔 어때?”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생맥주 한 잔 하자고 꼬드기는 친구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그를 처음 만난 건 50대 초반인 2004년 봄이었다. 같은 성당에 다녔지만 서로 얼굴을 모르는 사이였다. 동갑내기 몇 사람이 식사를 하며 동갑 신자를 모아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첫 모임에 13명이 참석하였다. 모임 명칭은 52년생 용띠라는 취지를 살려 약간은 치기어린 이름인 ‘용용 죽겠지’로 정했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은 세월이 십 몇 년 흐른 지금 7명 남았다. 먼 곳으로 이사를 했거나 어떤 연유로 모임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먼저 세상을 저버린 친구도 벌써 두 사람이다. K는 우리 모두가 좋아하던 보신탕 전문음식점을 하였다. 사정에 의해 그가 사업을 그만 둘 때까지 2개월마다 ‘용용’ 정례 모임을 그 곳에서 가졌다.
환갑을 맞이하면서 한두 해를 걸렀지만 우리는 꿈같은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의 목표는 우리나라 전국 한 바퀴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2012년 봄 서해안 여행을 시작으로 아산 공세리 성당, 꽃지 해수욕장, 안면도 수목원, 변산반도 채석강과 고즈넉한 내소사를 찾았다. 2015년엔 남해안 여행으로 함평 나비축제, 목포 유달산, 강진 다산초당과 백련사, 해남 땅 끝 마을, 해남에서 배를 타고 보길도를 거쳐, 고창 선운사를 찾았다. 2016년 남해안 여행으로 순천을 거쳐 소록도, 여수 향일암, 남해 미조항에서 멸치회와 멸치 쌈밥을 먹고 귀가 길에 진주촉석루에 올라 남강을 바라보았다. 2018년 봄 경상도 여행, 한국의 나폴리 통영에서 멍게비빔밥에 먹고 동피랑 벽화마을을,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 정상에 올라 한려수도를, 거제도 해금강과 외도-보타니아섬을 구경하고 부산을 거쳐 양산 통도사를 찾았다. 그해 가을에는 동해안을 두루 돌아 고성까지 갔다. 온양 간절곶에서 물메기 매운탕을, 경주 불국사에서 군밤과 구운 은행을, 구룡포 호미곶에서 꽁치과메기를, 죽변항에서 고래 고기와 대게를, 추암 촛대바위와 강릉을 거쳐 주문진에서 곰치국을, 고성에서 메밀막국수를 맛보았다.
K와 마지막 여행은 2019년 봄, 4박5일 일정의 제주도 나들이였다. 입담이 워낙 좋았던 그는 모임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며 배꼽을 잡도록 웃게 만들었다. 짬짬이 비속어나 욕설 또는 야한 소리를 섞어가면서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놓아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웃겼다. 내년에는 울릉도에 가자고 큰 소리로 바람을 잡고, 앞으로 5년 이내에 이 자리에 있는 여섯 명 가운데 한 두 명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너스레를 떨었던 친구, 그가 먼저 우리 곁을 떠나리라고 누구하나 생각하지 못했다.
태권도 유단자로 운동신경이 뛰어나 도봉구 족구 고문 노릇을 할 정도로 건강한 몸을 자랑하던 사나이, 어느 해 여름에는 친구들이 보신탕을 먹고 싶다고 하니까 야외에서 보신탕을 끓여주었고, 비가 쏟아지는 어느 여름날 저녁에는 집으로 초대해 추어탕을 대접하기도 한 멋진 친구, 2차 술자리에서는 늘 술값을 내던 의리 있고 배려심이 돋보였던 친구,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이는 얼굴로 해맑게 웃던 그의 모습을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 부인과 술 한 잔하고 거실에서 손을 맞잡고 춤추는 동영상을 찍어 친구들에게 자랑했던 K, 병이 깊어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함빡 웃는 가족사진과 영정사진을 조용히 준비했던 친구가 그립다.
누구나 혼자 가야하는 저 먼 길에 신이 주신 제비뽑기를 하여 먼저가고 나중에 갈 뿐이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는데 남은 사람은 애달파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씩 하나씩 떠나다보면 언젠가는 네 차례도 내 차례도 오기마련이다. 내가 떠난 후 영정 사진 앞에서 잘 가라고 술 한 잔 올려줄 친구가 남아있을지 궁금하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제법 친구들이 있을 때 손을 흔들며 떠나는 것도 바람직할지 모르겠다. 위령성월을 맞이하여 K를 생각하며 연미사를 봉헌하고 추억을 떠올린다. 친구야 함께 해주어 고마워, 나중에 거기서 만나 쌩 한 잔 하자꾸나. (2021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