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사랑하며
릴라(leela)
민지영
……나는 산 중턱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울퉁불퉁 누런 산비탈을 그야말로 날듯이 뛰었다. 그렇게 한참을 뛰다 보니 신명이 나다 못해 내 몸이 중력을 무시하고 날 것만 같았다. 한 발짝만 허공으로 내딛는다면 이미 치켜든 두 팔을 날개 삼아서 훨훨 날게 되리라, 그럴 수만 있다면! 하지만 나는 내가 날개가 아닌 두 발을 사용해서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가속이 붙은 두 발은 이미 나의 의식적 제어를 넘어서 반자동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허용치 않을 그 팽팽하고 견고한 균형이, 나의 서투른 시도로 인해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 순간 자유로운 희열에서 두려움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망설였다. 날고 싶은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결국 나는 그렇게 계속 망설이며 비탈을 달렸다.
위의 이야기는 몇 년 전 내가 꾸었던 꿈이다.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아쉬움이었다. 아! 꿈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한 번 날아나 볼걸.
당시에 나는 유학 생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고 이 생생한 꿈을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에 깊이 두지 않았었다. 몇 년이 흐른 지금에야 나는 이 꿈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두려움. 이것이 지난 꿈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이다. 처음에 아쉬움으로 느낀 것처럼 만약에 내가 그것이 꿈이란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정말 날 수 있었을 것이다. 깨어난 후의 나는 그것이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 꿈에서 발목이 부러졌더라도, 고통이 나를 엄습했더라도 그건 꿈일 뿐, 실제의 나는 다치지 않음을 당연히 알고 있다. 만약 꿈 속에서 내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니면 알지 못하더라도 궁극적인 믿음이라도 있었다면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듯 날아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이곳 역시 허상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마치 생생한 꿈처럼, 우리는 오감을 가지고 중력의 무게를 느끼며 산다. 그 무게는 우리의 두려움과 비례하고 거기서 나는 무지와 무명의 고통을 떠올리게 된다.
어릴 적 나는 특히나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는데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선생님에게서 꿀밤 맛을 한 번 본 뒤로는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묻지 않게 되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락을 싸오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날 하루 종일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었다. 아마 다 큰 어른들은 내 이야기를 보고 웃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가 내 고통을 알았겠는가? 명품 가방이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뱃속에 파리가 있다는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건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언젠가 어느 신부님께 고해를 했을 때 그분이 들려준 일화로 어린 나이에 10원을 훔친 죄책감을 40년 동안 키워오다 힘겹게 고백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사업에 실패하는 일이 목숨을 포기할 만큼 엄청난 고통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더 많을 뿐, 세상에는 여전히 이런저런 고통의 사유를 가진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런 관찰을 통해 우리는 고통이란 결국은 상대적임을 깨닫게 되지만,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도 많은 것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그러한 것을 자각할 때는 이렇게 스스로 지난 날을 돌아보거나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가치가 한정적임을 깨달을 때뿐이다.
‘…영화관에 가서 관객을 살펴보라. 흐느끼며 우는 사람도 있고 웃는 사람, 흥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지켜보라.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스크린 위에는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영상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오쇼 라즈니쉬의 말이다. 이 문장을 보았을 때 나는 참 새삼스러움을 느꼈다. 미리 짜인 빛과 그림자, 소리만이 존재하는 어둠 속에 사람들은 분리된 지정석에 앉아 같은 내용물을 감상한다. 비록 친구나 가족이 옆자리에 앉아 손을 잡고서 영화를 관람하더라도 몰입하는 순간부터 그런 것은 거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떡보다 콩고물에 더 관심이 있다면 모를까).
묘하게도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그들은 사실상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 같이 살아줄 수는 있지만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리고 그들은 빠져든다.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는가 하면 웃고 숨을 죽인다. 관객 모두가 그들 밖에 없는 듯 일대 일의 교감을 맛본다. 그러나 사실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빛 그림자와 소리뿐이다. 참 소름 끼치는 비유가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보라,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한 편의 드라마에 이입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돈까지 지불한다. 만족스럽게 이입이 되지 않을 때는 비평도 하고 말이다. 그래, 우리의 삶도 사실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우리의 본질은 위대한 영혼이고 이 삶은 우리 스스로 선택하여 연극을 하고 있다는 말을 믿는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내 몸’과 ‘내 집’과 ‘내 가족’을 사수하려 애쓴다. 사실 ‘나’라는 믿음이 없다면 그토록 절박해질 수 없을 것이고 절박하지 않다면 고통에 이토록 몰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절절한 감정이입과 관계 없이 우리에게 영화가 단지 유희이듯 ‘나’라는 것이 없다고 당연히 믿게 되면 우리 삶에 심각함이란 사라져버릴 테니까. 그러면 연극에 몰두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이 연극을 혼신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라즈니쉬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릴라(leela), 즉 유희라고 그는 말한다.
헤세에게도 삶의 정점에는 유희가 있었다. 유희라는 단어는 가볍다. 그리고 광활하다. 어릴 적 나에게는 도시락과 선생님의 꿀밤만으로도 세상이 꽉 찼었지만 이제 나는 자랐고 내 공간이 넓어진 만큼 꿀밤과 도시락의 비중은 작아졌다. 그것은 잊혀졌으며 다시 되돌리자 가볍고 즐거운 것이 되었다. 그리고 유희는 말 그대로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삶을 두려움에서 유희로 바꿀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이다. 그리고 앎은 자연스레 믿음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나는 발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을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온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꿈 밖으로 나오자 꿈 안에서 사실 내가 당연히 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현상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지만 그 믿음이 굳어지자 앎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앎은 순간 나를 가볍게 했으며 여유롭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종종 꿈에서 하늘을 난다. 한 번은 안개 낀 기차역을 걷다가 하늘을 날았다. 날 수 있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순간 둥실 발이 떠오르던 그 느낌을 기억한다.
얼굴을 스치던 안개도, 내 시야에 펼쳐지던 하얀 안개 구름도. 어느 순간인가 옅어지며 사라지는 안개처럼 꿈도 나를 그렇게 스쳐 지나가고 나는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삶도 결국 꿈이라는 걸, 또한 더 가벼운 보폭으로 걸어도 되겠지?
릴라, 유희의 가르침이 항상 모두와 함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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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