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론 .......................... 2 박경로 (경북대학교) 제1부 세계와 한국의 무역 동향 제1장 세계와 한국의 무역 동향, 1948-2013 ........................ 15 김낙년 (동국대학교)
제2부 동태적 발전과정으로서 한국의 무역성장 제2장 제 1장 수출지원정책의 형성과 경공업제품 수출 ..................... 51 이상철 (성공회대학교) 제3장 수출지향적 경제성장과 중화학공업화 ..................... 69 박기주 (성신여자대학교) 제4장 중간재의 생산과 교역에 대한 역사적 조망 ..................... 105 김두얼 (명지대학교) 제5장 수출의 성장 요인: 1960-2013 ..................... 130 박이택 (고려대학교)
제3부 무역의 성장과 경제•사회적 변화
제6장 한국의 무역성장과 고용, 소득분배 ..................... 174 임동민 (고려대학교) 제7장 무역의 성장과 사회적 변화 ..................... 212 박경로 (경북대학교)
총 론 박경로 (경북대학교)
지난 50년 동안 이룬 우리나라의 무역 성장과 관련하여 2013년에 언론들은 두 가지의 주목 할 만한 기사들을 보도하였다. 12월 5일의 제50회 무역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나라의 무역이 성장해온 경이로운 기록들에 관해 되돌아보는 보도들이 그 하나다. 예를 들어 연합뉴스 12월 5일자 기사는 “수출 5천600배 성장…對中수출 세계 1위국 부상”이란 제목 하에 50년간 연평 균 19.2%의 증가율을 기록한 한국의 수출은 세계 90위에서 7위로 상승했다는 화려한 기록들 과 함께 2013년에는 "무역 1조 달러, 최대수출, 최대흑자“라는 3관왕을 달성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른 하나는 1998년 이후 두 번째로 한국경제에 관한 종합적인 분석과 진단을 내놓은 맥킨 지 글로벌 인스티튜트(McKinsey Global Institute)의 보고서(2013)를 소개하는 보도들이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이 거둔 놀라운 성과를 가능케 했던 대기업중심의 수출주도 성장모델이 “고용 없는 성장”을 초래함으로써 중산층 붕괴와 인구 노령화, 가족의 해체와 같은 사회발전 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제 한국의 성장모델로서 그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를 전후하여 한국의 언론들은 중산층 붕괴 현상에 대해 여 러 측면에서 보도하였다. 하지만 맥킨지 보고서 이후 대기업중심의 수출주도 성장모델에 대한 고민은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이 책은 이토록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한국 무역의 성장 역사를 여러 각도에서 정리하고 자 시도하였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이토록 놀라운 무역 성장을 이루었고 그에 따른 한국 경제 와 사회의 변화는 어떠한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한국 무역 성장의 놀라운 성과
1) 한국의 무역 성장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원동력이다. 농업중심의 산업구조가 공업중심으 로, 그리고 다시 첨단 기술과 다양한 문화를 소화하는 능력이 중요한 산업구조로 탈바꿈해온 과정이고 수출 기업이 거의 없던 나라에서 수만 개의 수출 기업체가 생겨난 과정이며 수많은 무역 거래의 장벽을 극복해온 과정이다. 또한 이러한 집단적인 역사적 경험을 통해 한국인들 의 의식과 마음이 변화해온 과정이다. 1960년에 우리나라는 수출 3300만 달러(세계 112위), 수입 3억4400만 달러(59위), 무역총 액 3억7600만 달러(67위)였고 1964년에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에는 세계 수출 89위였 고 1인당 GNP는 103 달러에 불과했다. 당시 에티오피아, 튀니지, 카메룬 같은 나라들의 수출 규모가 1억 달러 정도였고 필리핀이 7억 달러, 대만이 4억 달러였다. 1964년에 수출이 1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정부는 수출로 한국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 경제개발 5 개년 계획의 방향을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으로 수정하고, 한국경제의 성장엔진으로서 ‘수출드 1) 이 부분은 『주간무역』 (2013)을 중심으로 요약한 것이다.
라이브’ 정책에 시동을 걸었다. 1964년부터 상공부가 주도하여 ‘수출진흥종합시책’을 매년 수 립하고, 1965년부터 대통령이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매월 주재하였다. 1967년부터 구로 수출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경공업수출에 힘썼고 1967년에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에 가입하였다. 1969년에는 수출 6억2300만 달러(57위), 수입 18억2400만 달러(32위), 무역총 액이 24억4700만 달러(38위)를 기록했다. 10월 유신을 통해 더욱 본격적인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확립했던 1970년대에는 수출주도 정 책을 가속화함과 동시에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여 더욱 놀라운 수출 실적을 올렸다. 1970년 4월 1일에는 포항종합제철이 준공되었고 그 해 12월 31일 제7회 수출의 날에는 수출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1970년대 초반에는 경남 마산과 전북 이리의 수출자유지역이 본격 가동에 들어가고 구로공단이 확충되면서 섬유, 의류, 신발, 피혁 등의 경공업 제품 수출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73년에 정부는 1980년대 수출 100억 달러 달성 목표를 정하고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1975년에는 수출의 대형화를 유도하기 위한 ‘종합 무역상사 제도’를 도입했다. 1977년 12월 22일 제14회 수출의 날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돌 파했다.
그 해 우리나라 1인당 GNP도 1000 달러를 넘었다. 1970년대에는 경공업 수출확대와 함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시행되면서 여천(석유화학), 창원(기계), 거제(조선), 구미(전자), 온산(비철금속) 등에 업종별 공업단지가 대규모로 조성되었다. 한국수출입은행(1976년 7월)이 설립됐으며, 서울 삼성동에 ‘한국종합전시장(당시 KOEX, 현 COEX)’이 개관(1979년 7월)하였 다. 현대조선중공업은 1973년 12월에 울산 조선소를 준공하여 74년부터 대형 유조선을 수출 하기 시작하였고, 현대자동차는 1976년 6월에 국산 자동차 포니를 미국에 처음으로 수출하였 다. 1970년에 우리나라는 수출은 8억3500만 달러(세계 52위), 수입은 19억8400만 달러(32위), 무역총액은 28억1900만 달러(40위)였는데, 1979년에는 수출 150억 달러(20위), 수입 203억 달러(16위), 무역총액 353억 달러(16위)를 기록했다. 1980년대에 중화학공업화로 인한 과잉투자의 부담과 개방 압력을 맞아 경제에 대한 과도한 정부주도를 지양하고 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에서도 수출주도 성장전략 은 여전히 중요하였다. 1979년 3월에 이미 경제안정화 정책이 발표되었고 1980년대 초반에는 구조조정을 수반하는 산업합리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1979년의 제2차 오일쇼크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 세계경제가 침체되면서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가 심화되었다.
1982년에는 우리나라 수출비중의 42.9%에 해당하는 278개 수출품목이 선진국으로부터 수입규제를 받을 정도였다. 선진국의 통상압력이 지속되면서 우리나라는 1980년대에 해마다 수입자유화 조치를 취해야 했다. 미국은 공정무역(Fair Trade)을 앞세워 통상압력을 강화했는데 1988년에 ‘슈퍼 301조’ 의 출현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1979년에 68.9%였던 수입자유화율은 1988년에 94.8%까지 상 승했다. ‘개방화’와 ‘산업합리화’가 추진되는 가운데서도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지속적 으로 추진되었다. 1985년에는 조선 수출이 50억 달러를 돌파하여 의류를 제치고 수출 1위 품 목으로 올라섰다. 그 해에는 무역업 허가요건이 신용장기준 50만 달러에서 5만 달러로 대폭 완화되고 1987년에는 ‘대외무역법’이 제정됨에 따라 1980년에 2,677개에 불과했던 무역업체 수가 1987년 말에는 1만3,547개로 증가했다. 플라자 합의가 이루어지고 엔고와 저금리, 달러 약세, 저유가의 3저 현상이 시작되면서 우리나라는 1986년에 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여 1989년까지 4년간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1987년에는 3저 호황에 힘입어 섬유 류와 전자제품 수출이 단일 품목으로 수출 100억 달러를 넘어섰고, 그해 11월 24일에는 수출 이 사상 처음으로 400억 달러를 돌파했다. 3저 호황기에는 경공업 품목의 수출이 부흥을 맞 이하는 한편, 컴퓨터, VTR, 컬러TV의 수출이 급증하고 반도체 수출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1987년 6월의 민주화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임금 인상 투쟁이 시작되는 가운데 1988년에는 우리나라 수출이 600억 달러를 돌파하고 세계시장 점유율 2.1%를 기록하면서 세계 수출 순위 12위로 올라섰다. 이 해 우리나라 무역액은 최초 로 1,000억 달러를 돌파하여 세계 12위 무역대국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의 민주화와 경제 성장으로 우리나라는 대만, 홍콩,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Four Asian Tigers)’으로 불리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80년에 우리나라 수출은 175억 달러 (세계 23위), 수입은 223억 달러(19위), 무역총액은 398억 달러(19위)였는데 1989년에는 수출 이 623억 달러(13위), 수입은 615억 달러(13위), 무역총액은 1,238억 달러(12위)로 증가했다. 1990년대에 들어 임금인상과 노사분규, 인력부족 등의 영향으로 의류와 신발 등 경공업 제 품의 수출경쟁력이 급격이 약화되자 수출기업들은 동남아 지역으로 생산기지를 이전하기 시작 했다. 경공업을 중심으로 시작된 해외투자 붐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세계화’ 바람으로 연결됐다. 대우, 삼성, 현대, LG 등은 글로벌 경영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종합 상사들은 해외투자에 앞장섰다. 1989년의 동서독 통일과 1991년의 소련 붕괴, 1992년의 한중 수교가 이어지면서 1990년대 초반에 한국 무역업계에는 ‘북방교역’의 바람이 몰아치면서 생필 품을 중심으로 북방수출 특수가 생겨나기도 했다. 1993년에는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조선 수주 세계 1위를 기록했다. 1994년에 ICT산업 발전을 위해 문민정부가 별도의 부처로 출범시킨 정보통신부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까지 존속되면서 우리나라 IT산업이 발 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1993년 11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체결되어 유럽 단일 시장이 출범하고 1999년부터 단일 화폐인 유로화가 도입됐다. 1994년에는 미국이 캐나다 및 멕시코 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했다. 1986년부터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1994 년에 타결되고 1995년 1월부터 다자간 무역협상을 총괄하는 WTO(세계무역기구) 체제가 공식 출범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반도체, 자동차, 선박, 컴퓨터, 직물, TV, 석유화학제품 등이 수출을 주도했다.
1994년에는 반도체가 단일 품목으로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고 삼성물산 이 단일 기업 최초로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1995년에는 우리나라 수출이 사상 최초로 1,000억 달러를 달성했고, 반도체 수출은 1999년에 단일 품목 최초로 200억 달러를 돌파했 다. 1993년에 무역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전환되고, 1997년에는 신고제로 전환되면서 무 역업체 수는 6만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1996년에 우리나라는 OECD에 가입했으나 1990년 이 후 무역수지 적자가 누적되면서 1997년 11월에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외환위기를 겪 게 되었다. 1997년 12월 16일에는 자유변동환율제도가 도입되면서 그해 12월 24일에는 달러 당 원화 환율이 역대 최고치인 1964.8원까지 폭등하기도 했다. 1999년도에는 대우그룹이 해 체되는 등 대마불사의 신화가 깨어지고 한국경제에 구조조정의 태풍이 불었다. 외환위기는 중 화학공업화와 수출주도 성장과정에서 몸집을 불려왔던 재벌 체제와 관치금융을 개혁할 기회이 기도 했다. 1998년에는 수출에 총력을 기울여 390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1990년에 우리나라 수출은 650억 달러(세계 11위), 수입은 698억 달러(11위), 무역 총액은 1,348억 달러(12위)를 기록했다. 1999년에는 수출이 1,437억 달러(12위), 수입은 1,197억 달러(14위), 무역총액은 2,634억 달러(13위)로 10년 동안 각각 2배 가까이 증대하였 으나 무역순위는 변동이 없었다.
2000년부터 무역업은 신고제가 폐지되고 완전 자유화되면서 무역업체 숫자는 2002년에 9 만9,000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통관 수출실적이 있는 수출기업은 2000년이후 지금까지 3만개 내외에 머물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우리나라 수출은 2001년과 2009년에 글로벌 경기침체의 여파로 수출이 감소한 것을 제외하고는 가파른 수출성장세를 이어갔다. 수출은 2004년에
2,000억 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2006년에는 3,000억 달러, 2008년도에는 4,000억 달러를 넘 어섰다. 이는 2001년 11월에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2004년부터 세계경제가 달러 약세 덕분에 전례 없는 호황을 맞이하게 된 것을 배경으로 한다. 글로벌 경기 호황을 배경으로 수 출이 급성장했지만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 수출 순위는 2006년과 2007년 세계 11위에서 2008년에는 다시 12위로 낮아졌다. 하지만 2008년 9월 미국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금융위기와 2010년 유로존 재정위기를 계기로 진행된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서 우리나 라의 수출은 향상된 산업경쟁력에 기초하여 세계 7위로 올라섰다. 2011년에는 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5,000억 달러를 넘어서면서 무역 규모가 1조 달러를 돌파하여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9번째로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한 국가가 되었다. 2013년에는 세계에서 수입 규모가 가장 큰 나라가 된 중국 시장에서 일본을 제치고 수출 1위의 국가가 되었으며 사상 최대의 무역수지 흑자를 내게 되었다. 이처럼 무역액과 무역품목을 중심으로 반세기에 걸친 한국 무역의 역사적 기록을 살펴보면, 한국 무역의 성장은 정태적인 비교우위론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물론 자원이 부족하 고 상대적으로 인력이 풍부했던 공업화 초기에 경공업을 중심으로 한 수출지향 성장전략을 채 택한 것이나 농업을 과감하게 개방한 것은 비교우위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경공업에 서 중화학공업으로, 더 나아가 고급기술에 기초한 소재 및 전자기기, 정보통신산업으로 끊임 없이 주력 수출산업을 전환해온 과정은 변화하는 국제환경에 적응하고 도전하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온 동태적 발전과정이었으며 후발국이 선진국을 추격(캐치업 catch-up)하는 과정이 었다
.2) 무역성장의 내면화와 ‘고용 없는 성장’ 체제의 정착 동태적 캐치업 과정에서 한국 경제, 특히 무역이 보인 성과는 경이로운 기록의 연속이다. 1960년에 세계 112위의 수출 규모를 가졌던 나라가 50년만인 2010년에 세계 7위 국가로 변 신했다는 사실은 한국 무역과 경제의 성장이 얼마나 엄청난 성취를 거두었는지를 웅변해준다. 앞서 공업화에 성공한 선진국들이나 동아시아 신흥공업국들(NICs), 그리고 그에 뒤이은 중국 등의 공업화 과정을 고려하면서 장기적이고 세계적인 차원에서 비교사적으로 보자면, 한국 무 역 성장의 역사는 20세기 후반의 세계 경제 변화 속에서 나타난 동아시아 국제분업구조의 재 편 과정에 대한 성공적인 동태적 적응과정이다. 하지만 1960~70년대에 수출주도 성장모델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선택된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는 한국의 정치사회적 발전에 장기적인 영향을 끼치는 초기조건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의 경제정책 결정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국 무역성장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 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국제분업체계의 변화를 고려하면서 산업과 고용 구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한국의 무역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첫 번째 단계는 1960~80년대로서 국가주도의 수출주도 성장정책을 통해 고용이 증대하여 무역의 혜택이 국민 2)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을 비교우위론으로 설명하기 곤란하고 동태적 발전경제 전반에 파급되었던 시기이다. 이는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전환과 민주화에 성공한 시기 로서 국제분업 구조에서 일본을 따라잡는 데 성공한 시기이기도 하다. 두 번째 단계인 1990년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시장자유화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노동집 약적 산업이 해외로 생산을 옮기고 대기업의 자본집약적 투자가 늘고 해외투자가 시작된 시기 로서 수출 증가가 제조업의 고용 증대에 기여하는 역할이 줄어들기 시작한 시기이다.
구체적 으로는 국내에서 임금이 상승하고 제조업 인력 부족이 심해지며, 중국의 무역 확대로 동아시 아 분업구조가 변화하면서 경공업을 중심으로 수출 기업들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고 중 화학공업 부문에서 대기업들이 자동화 등 노동절약적 투자를 확대하며 글로벌화를 시도하였 다. 또한 관치금융과 대마불사에 익숙해 있던 대기업들이 풍부해진 해외자본을 배경으로 벌인 과잉투자 때문에 외환위기를 맞이하여 심각한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산업과 고용구조의 전환 은 더욱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는 저부가가치 산업을 중심으로 중국 등에 추격을 당하는 동 시에 조선과 전자산업 등에서 일본과 일정정도 경쟁 상태에 진입한 시기이기도 하다. 세 번째 단계인 2000년대는 무역의존도가 더욱 커지는 가운데 구조조정과 기술혁신에 성공 한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생산의 해외이전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시기로서 본격적으로 “고용 없 는 성장”이 정착된 시기이다. 조선과 화학 등 일부 중부가가치 산업에서 중국의 추격이 본격 화되면서 수출 증대를 위해 기술 개발과 혁신이 강하게 요구받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문에 대기업들 사이에서도 일본 등 선진국과 경쟁에서 성공한 기업들과 그렇지 못한 기업들로 분화가 일어나고, 생산성과 임금이 낮은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이 전체 고용의 90%와 70% 정 도를 담당할 정도로 변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가계소득의 증가가 경제성장의 속도에 훨씬 못 미치게 된 시기이다.3)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의 상당 기간이 첫 번째 단계에서 국가주도로 진행된 수출주도 성장전략의 부작용에 대해 비판했던 정치세력이 집권했던 시기라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와 고용 없는 성장의 원인을 신자유주의에 포위된 민주화 세력의 실패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 과정을 지배해온 신자유주의의 위력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지난 50년 동안 일관되게 대기업중심의 수출주도 성장전략을 고수해온 것에 대해서는 제도의 지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 다고 생각된다. Greif (2006)가 논의한 바와 같이 경기의 규칙은 경기 참여자들이 다른 참여 자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데에 대한 신념을 제공하기 때문에 제도적 균형의 이동은 매 우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또한 Sokoloff and Engerman (2000, 2002)이나 Acemoglu, Johnson and Robinson (2002)이 지적한 바와 같이 불평등의 자기강화적 속성이나 기득권자 들의 이해관계와 능력, 혹은 기존의 제도를 전제로 투자한 사회구성원들의 보수성 때문에 제 도의 지속성은 매우 강할 수 있다. 아울러 Acemoglu and Robinson (2013)의 지적처럼 경 제 정책이나 제도의 변화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에도 영향을 끼치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새 로운 정치적 균형은 다시 경제 정책이나 제도의 선택에 제약조건으로 작용한다.
한국 경제가 대기업중심의 무역성장에 기초하여 거둔 놀라운 성취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 의 양극화와 성장모델의 지속불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생각할 때 무역성장을 세계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그것이 경제와 사회의 변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새로운 각도에서 고민할 필요가 제 3) “수출의 고용유발계수는 지난 1996년 27.3에서 1997년 25.4, 1998년 29.4, 1999년 31.9 등으로 오 름세를 보이다가 2000년에 26.7로 떨어진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엔 12.5까지 추락했 다. 최종 수요 항목별 고용유발계수 추이를 보면 수출의 하락폭이 투자와 소비보다 더 빠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우리 수출품목 구조가 노동절약적인 방향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낙 균, 한진희 (2012), 이은석, 이정욱, 박나연, 김유신 (2012). 이 책의 구성 제1부에서는 세계와 한국의 장기간에 걸친 무역 동향을 분석하였다. 1. 세계와 한국의 무역 동향, 1948-2013 (김낙년) 이 글의 과제는 세계 무역의 장기적 동향 속에서 한국의 무역이 어떻게 추이했고, 무역구 조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초점을 맞추 었는데, 그로부터 밝혀진 주요 사실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 무역과 한국 무역의 장기 동향을 살펴보았다. 세계 무역에서는 각 지역의 부침 이 거듭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상대적으로 퇴조하는 가운데 유럽과 일본의 지위가 높아졌으며, 1970년대 이후 정체한 유럽과는 달리 일본의 성장은 1980년대 중엽까지 지속되 었다. 그 이후 일본의 지위가 하락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와 ASEAN이, 다시 1990년대 중엽 이 후에는 중국의 부상이 두드러졌다. 주요 업종을 선정하여 어느 나라가 수출을 주도했는지를 살펴보면,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압도적 우위, 일본의 진출, 그 후 동아시아를 비롯한 다른 지 역의 대두가 확인된다. 다만 일반기계와 수송장비, 철강, 화학제품과 같이 전통적인 숙련이나 기술이 중요한 업종에서는 주도국의 교체가 서서히 진행되었지만, 의류와 같은 경공업이나 전 기기계 등의 업종에서는 주도국의 교체가 빨랐다. 그 속에서 한국무역은 급성장하여 세계무역 에서의 비중이 상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출에서 비교우위 업종이 1960년대에는 1차 산품에 서 경공업 제품으로, 그리고 1990년대에는 다시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제품으로 이행하였다.
둘째, 각국(또는 지역)의 무역이 어떻게 추이했는지를 살펴보는데 그치지 않고, 무역품 생산 을 위해 각국(지역)이 어떤 의존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구명하고자 하였다. 근래에는 수출품을 생산하기 위한 공정(tasks)이 한 나라에서 모두 이루어지기보다는 그 일부가 국경을 넘어 분 산(fragmentation)되고 있고, 그에 따라 중간재의 교역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러한 수직 전문 화(vertical specialization)의 진전은 1980년대 이후 일본이 동아시아나 ASEAN에 중간재를 공급하고 이들 지역을 경유하여 최대의 소비지인 미국으로 수출하는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 다. 1990년대 중엽 이후 중국의 급속한 부상으로 이 지역간 무역구조가 중층화되었다. 즉 아 시아의 대미수출에서 중국이 부가가치 생산의 가장 하류에 파고 들어옴에 따라 동아시아와 ASEAN은 중국에 수출을 위한 중간재를 공급하는 위치로 밀려 올라갔고, 다시 그 위의 상류 에 일본이 위치하는 지역간 무역구조로 변모하였다.
셋째, 각국의 무역통계는 총수출 기준으로 작성되어 왔는데, 이를 부가가치 기준으로 바꿀 경우 무역 실태에 관한 종래의 인식이 어떻게 수정되는지를 검토하였다. 예컨대 A국에서 B국 으로 수출된 중간재가 B국에서 가공되어 다시 C국으로 수출되는 경우 그 중간재의 가치는 A국의 수출통계와 B국의 수출통계에 이중으로 잡히게 된다. OECD-WTO에 의한 부가가치 무 역(Trade in Value Added)에 따르면, 2009년의 총수출 중에서 평균 26%가 이중계산에 의한 과대평가로 드러났다. 한국이나 중국과 같이 수출의 수직 전문화가 빠르게 진행된 경우에는 수출의 증가율이 실제보다 과대하게 나타난다. 특히 한국의 수출은 1995년 이후 총수출 기준 에서는 세계의 평균보다 빠른 성장률을 보였지만 부가가치 기준에서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였 다. 무역수지에서도 종래의 인식이 수정된다. 부가가치 생산의 하류에 위치하는 중국 등이 미 국 등의 소비지에 수출하는 경우 종래의 총수출 기준에서는 모두 중국의 대미 무역흑자로 잡 혔지만, 부가가치 기준에서는 그 중 일부가 중국에 중간재를 공급하는 아시아의 다른 지역의 대미 무역수지 흑자로 귀속되므로 중국의 대미흑자와 함께 대 아시아 무역적자가 모두 줄게 된다. 그 결과 각국(지역)의 무역수지 총액에는 변화가 없지만, 그 국가별 수지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났다.
제2부에서는 동태적 발전과정으로서 한국 무역 성장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수출지향 성장 전략의 채택과 경공업제품 수출, 중화학공업화, 중간재 교역, 수출의 성장 요인 등에 대해 살 펴본다. 2. 수출지원정책의 형성과 경공업제품 수출 (이상철)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구조는 그 이전 시기에 비해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역구조의 변화였다. 1960년대 무역구조의 전환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 에는 이 시기 본격화된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있었다. 물론 1960년대 초에 이루어진 무역정 책 및 산업정책에서의 전환이 경공업 제품의 수출을 촉진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1965년 무렵의 한국 무역정책의 틀은 그 이전과는 상이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단일변동환율제도의 본격적 실시와 수출금융과 조세감면 등과 같은 간접적 수출지원정책의 채택을 통해, 제조업 제품의 수출을 지원하는 정책전환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무역정책의 기본틀은 이후 1970년대까지 유지되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 초기에 채택된 수출지향공업화전략과 그 이전의 정책과의 단절을 강조하는 견해는 현재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박정희 정부가 채택한 수출지향공업화전략이 그 이전의 정책과 어느 정도 단절 적 특성을 갖고 있으며, 나아가 박정희 정부 이전 정부의 경제정책으로부터의 전환 그리고 박 정희 정부 내에서의 경제정책의 전환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이를 위 해 1959년 합동경제위원회(Combined Economic Board : CEB, 이하 합경위) 산하에 설치되 었던 수출진흥분과위원회(Export Promotion Committee of the Combined Economic Board : CEBEP)의 운영과정 그리고 1960년의 ‘경제개발3개년계획’, 1961년 건설부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안’, 1962년 1월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원안)(이하 ‘원계획’)’, 그리고 1964년 2월의 ‘보완계획’에 나타난 수출 관련 계획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이 시기 수출지원정책의 주요 내용들이 급작스럽게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원조의 감소에 대응하여 외환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커짐에 따라 수출 확대를 지원하는 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또 합경위 수출진흥분과위원회의 설치와 운영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역시 수출을 확대 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원조가 감소하는 가운데 점증하는 외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제조업 제품의 수출 확대 는 불가피하였다. 건설부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안’에서도 이와 관련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국의 지원 아래 1950년대 말부터 조사되고 준비된 수출지원정책의 도구들은 당시 이러한 정책의 입안 과정에 관여했던 경제관료에 의해 이후 정교화되고 구체화되어 갔다. 수출보조 금, 수출금융, 각종 조세감면, 무역진흥기구의 설치, 해외전시기능의 강화, 수출검사제도, UN 군납, 그리고 보세가공과 같이 1960년대 들어서 실현된 각종 정책은 이미 1959년부터 제안되 고 검토되고 일부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와 민주당 정부 아래 부흥부와 상공부 에 소속되었던 이들 경제관료는 박정희 정부에서도 계속해서 경제기획원과 상공부 등에서 근 무하면서 수출지원정책을 다듬어나가는 역할을 수행해 나가게 된다. 쿠데타 직후 마련된 ‘원안’의 내용에서 나타난 주요 특징 – 내포적공업화에 대한 강조와 제 조업 수출에 대한 상대적 경시 등 – 은, 무역정책의 큰 틀의 형성과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파 악해 본다면, 오히려 1950년대 말부터 준비되고 있었던 수출지향적 공업화정책의 형성이라는 큰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수출지향적 경제성장과 중화학공업화 (박기주) 한국경제는 수출 지향적 성장전략을 추구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해 중화학공업 제품 중심의 수출구조 고도화를 달성하였다.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추진하게 되는 배경 중에 중요했던 것은 1980년 수출 목표 100억 달러 달성이라는 목표였다. 본장에서는 수 출 지향적 성장전략이 중화학공업화 정책이라는 산업정책으로 이어지는 배경과 내용 및 그 결 과를 살펴보았다. 1950년대는 물론이고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도 중화학공업은 아직 영세하고 수입대체적인 것에 불과하였으며 전자공업을 제외하면 수출산업으로의 육성이 아직 구상되고 있지 않았다. 1964년 이래 무역은 매년 40% 정도의 성장률을 보였고 1964년에 1억 달러, 1967년에 3억 달러, 1970년에 1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거의 전적으로 경공업 제품의 수출에 의존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공업 제품 중심의 수출은 자본재와 수출용 원자재의 수입 증가를 동반하였으며 다른 개도국의 추격과 국내 임금 상승으로 인해 경쟁력을 점차 상실할 위기에 있었다. 게다가 미국을 위시한 선진 각국으로부터 한국산 섬유제품에 대한 수입 규제 가 강화되고 있었다. 1970년대의 수출지향적 중화학공업화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동태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할 필요가 있다. 중화학공업은 중후장대하며 방대한 투자를 필요로 하여 기업이 쉽게 진출을 결 정할 수 없었고 섬유와 의류 등의 경공업은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세계시장에서 아 직은 비교우위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시장의 작동에 의해 자연스럽게 중화학공업으로 산업 구조의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박 대통령은 1972년 말에 1980년도 수출 100억 달러의 목표를 설정하여 1970년대 정책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이는 사실상 수출 증대가 부서의 존재 가치이기 도 했던 상공부가 수출 목표를 계속 확대 수정한 결과에 기초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00 억 달러 수출 목표는 산업구조의 재편성을 통해 중화학공업이 수출산업으로 성장함으로써 달 성 가능한 것이었다. 상공부는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산업구조를 재편하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산업정책이 필요함을 주창하였다. 이에 수출지향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정 책이 등장하게 되며, 이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청와대 경제제2수석인 오원철이 기안하고 주 도하였다. 중화학공업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지원 정책은 사회가 불가피하게 부담하는 일종의 셋업 비용과도 같다.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연불수출금융을 비롯한 금융지원과 조세감면 및 보호관세 등 여러 방면의 지원이 있었다. 수출금융은 1960년대 정도는 아니지만 1970년대에 도 유효한 정책수단이었으며 특히 연불수출금융과 보험제도는 중화학공업 제품의 수출을 촉진 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보호관세는 중화학공업이 최적 규모를 실현할 수 있도록 외국 상품으로부터 국내시장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1970년대에 추진된 중화학공업화는 수출상품 구조와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가져왔다. 1980 년에도 중화학공업의 일부 업종은 여전히 수입대체 단계에 있었지만, 수출에서 경공업 제품은 비교우위를 상실한 반면 중화학공업 제품은 점차 비교우위를 획득해가고 있었다. 동태적으로 비교우위를 보인 산업은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대상이었으며, 따라서 중화학공업 정책은 전략 산업을 선택하고 육성하는 데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중간재의 생산과 교역에 대한 역사적 조망 (김두얼) 1945년 해방 이후 지금까지 7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우리나라의 무역 규모는 경이로운 증가 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무역의 증가 속에서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가 중간재 교역의 증가이다. 전세계 무역에 있어서 중간재 교역이 증가하는 양상은 보편적인 현상이며, 최근 추 계에 따르면, 전세계 무역의 50% 가량을 중간재 교역이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보다 더 높은 70-80%에 육박한다. 경제이론이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고 사회후생에 미치는 함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는 역사적 경험을 반추해 보는 것이 현상의 본질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법일 수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동기에서 우리나라의 중간재 교역의 증가 추세를 살펴보았다. 분석을 통해 파악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의 중간재 교역은 1960년대로부터 최근까지 큰 폭으로 확대되었다. 1960년대에는 20% 수준이던 것이 지속적인 증가를 통해 최근에는 80% 수준에 도달하였다. 둘째, 이러한 중간재 교역 증가 양상을 산업 별로 살펴본 결과, 중간재를 많이 수입하는 산업이 중간재를 많이 수출하고 있음을 확인하였 다. 그리고 중간재 수입과 수출 간에 존재하는 현재의 상관관계는 지난 20년 동안 상관관계가 지속적으로 상승한 결과였다. 셋째, 제품의 가공도가 높은 산업들일수록 중간재 수출이 수입 보다 높은 양상을 확인하였다. 이상의 결과를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가 1990년대 이후 세계적 인 분업체계 속에서 중간재를 수입해서 더 높은 수준의 중간재를 소비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중간재를 생산하는 능력을 확보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기술의 축적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기술 축적은 기본적으로는 기업의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정부 의 지원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처음 시작 하던 1960년대 초에는 양질의 중간재를 생산하기보다는 해외로부터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 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간재 생산으로 정책의 목표를 설정하였으며, 1970년대에 들 어서면 중간재 생산의 촉진을 통해 수출로부터의 수익을 높이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기본적으로 1973년 중화학공업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더욱 공고화되었다. 정부는 관세정책, 세재상의 우대, 금융 지원 등을 통해 중간재 생산을 촉진하였는데, 이러한 정책들이 실제로 중간재 생산을 얼마나 촉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향후 엄밀한 연구가 필요하 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중간재 교역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갈지, 그리고 정부는 이러한 중간 재 교역을 어떤 방향으로 유도할지와 관련해서는 명확한 방향을 설정하기 어렵다. 이것은 기 본적으로 중간재 생산 여부가 아니라, 중간단계건 최종단계건 할 것 없이 우리나라가 생산 과 정 중 얼마나 부가가치가 높은 단계를 차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중 요한 것은 당연히 기술개발이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미래에는 기술개발만큼이나 디자인, 홍보 등 서비스 분야의 중간재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서비스업 분야의 기여도를 높일 수 있는 정책 수립은 과거와 같은 접근으로는 큰 성공을 얻기 어렵다는 점에서 향후 우 리나라가 극복해야 할 장벽은 녹록하지 않다. 얼마나 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지 여부가 지난 50년 동안의 성공을 앞으로도 지속해 나갈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5. 수출의 성장 요인: 1960-2013 (박이택) 1950년대 한국의 수출입의 규모는 매우 보잘 것이 없어서, 거의 폐쇄경제라 볼 수 있는 상 태였으며, 그 마저도 수입이 수출을 월등히 능가하여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여서 자립적인 경제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수출은 매우 빠른 속도 늘어나서 세계적 으로도 대외개방도가 높은 경제로 변화되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 한국의 수출은 이렇게 놀라 운 속도로 늘어나게 되었는가? 그 요인을 고찰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성장이 반드시 높은 수준의 수출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고, 또 높은 수준의 수출 성장율만이 양호한 성장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한국의 높은 수출성장율은 한국의 성장의 본질 이라기보다는 한국의 성장의 유형적 특질이라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이와 같은 한국의 경 제성장의 유형적 특질은 ‘수출지향 발전전략’이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문제는 수출지향 발전전략의 실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한국에 있어 ‘수출지향 발 전전략’이란 낙후된 경제 상태를 발전된 경제로 변화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취해진 변형 전 략이다. 그것이 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전략을 취한 사람들이 어떤 성 장 모형을 염두에 두고 이와 같은 성장 전략을 취하게 되었는가를 분석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수출은 국경을 넘어 이루어지는 거래로서 국경 내의 거래에 비해 거래비용이 더 높을 것이 라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높은 거래 비용에도 불구하고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은 근거리 교역이 대체할 수 없는 교역의 이익이 있음을 의미하는데, 고전적인 무역이론은 자원 부존의 차이나 상대적 비교우위에서 찾았다. 헥셔-올린의 무역이론이 전자를 대변한다면, 리 카아도의 무역이론이 후자를 대변한다. 물론 최근에는 헥셔-올린의 무역이론이나 리카아도의 무역이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형태의 무역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이론이든 거래비용이 거래 금지적이라면 교역은 발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수출관련 거래비용을 낮출 수 있는 거래체계의 발전은 수출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의 수출지향 발전 전략은 사실 수출관련 거래비용을 낮추는 제도적 변화가 전개된 과정이었다. 더 나아가서 수 출관련 거래비용을 낮추는 제도적 체계는 수출관련 산업 생태계의 형태에도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어떠한 산업생태계를 형성하는 제도적 변화였는지도 분석할 필요가 있다. 무역을 수행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보다 편익이 보다 큰 경우라 할지라도, 무역에 관계된 두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무역으로부터 모두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다. 수출산업의 종사자들은 이익을 얻는 반면, 수입되는 상품과 경합하고 있는 상품을 생산하고 있는 산업의 종사자들은 손해를 볼 수 있다. 물론 무역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 그 이익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 게 적절하게 보상을 해주는 경우에는 모두 무역으로부터 이익을 얻게 되겠지만 이와 같은 재 분배 체계를 만드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따라서 무역은 무역마찰을 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무역불균형은 사실 저절로 잘 해결되지는 않는데, 이것도 무역마찰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무 역마찰을 합리적으로 잘 해결하지 못하면, 무역의 편익이 비용보다 큼에도 불구하고 무역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역에 우호적인 통상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수출의 성장을 야기한 요인은 다양하겠지만, 수출지향 성장전략, 무역에 있어 거래 비용을 줄이는 제도적 혁신, 우호적인 통상환경의 조성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수출의 성장 요 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 세 가지 점에 초점을 두고 고찰하였다.
제3부에서는 한국의 무역성장이 초래한 경제 및 사회의 변화에 대해 살펴본다. 6. 한국의 무역성장과 고용, 소득분배 (임동민) 이 글의 과제는 한국의 무역이 성장하는 동안에 고용구조와 소득분배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 지 고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무역성장이 경제에 미친 영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다. 이 글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과제를 검토한다. 첫째, 지난 50여 년간 경제가 성장하는 동안 한국의 경제구조와 산업구조가 어떻게 변화하 였는지 검토한다. 이를 위해 무역과 관련된 통계와 자료를 이용할 뿐만 아니라 산업연관분석 을 시도한다. 둘째, 경제구조와 산업구조의 변화가 고용구조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한다. 고용구조의 변화 를 산업연관표를 중심으로 이해한다. 최종수요의 발생은 산업생산을 유발하고 생산이 다시 노 동수요를 유발하는 파급 메커니즘에 기초하여 최종수요와 노동유발을 연결시킴으로써 노동유 발효과 분석은 물론 생산활동이 노동수요에 미치는 영향과 그 변동요인 등의 계측이 가능하며 산업부문별 노동생산성 등을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한국은행 2007, p.122-123). 셋째, 고용구조의 변화와 자본축적, 기술변화, 외생적인 경제변화가 소득분배에 미치는 영향 을 검토한다. 이를 위해 노동소득분배율의 변화를 파악하고, 노동소득분배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검토한다. 지난 50여 년간 한국의 무역성장과정에서 나타난 산업구조의 변화, 고용과 소득분배의 변화 에 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난 50여 동안 무역의 성장은 경제구조와 산업구조의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였 다. 1960년대 수출지향 중심적으로 공업화를 시작하던 때에 지배적인 산업이었던 농림어업은 현재에는 취업구성면에서나 생산액 측면에서나 규모가 가장 작은 산업이 되었다. 1960년대에 한국은 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재화를 생산하여 경쟁적인 세계시장에서 판매하였다. 수출의 성장과 함께 수출부문을 중심으로 공업화가 진행되었고 경제가 성장하였다.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변화하였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이 심화 되어 내부적으로 중화학공업화를 촉진하였다. 자본이 축적되어 생산과정은 자본집약적으로 변 화하였고, 기술발전은 노동대체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교육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였고 고 학력, 숙련노동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였다. 시장개방은 국내에서의 경쟁도 심화시켰다. 소득 수준의 상승은 경제의 서비스화를 촉진하였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금융의 결합은 서비스 업 발전에 새로운 과제를 부여하는 동시에 기회를 주었다. 서비스생산의 비중과 취업구성비가 증가하였다.
둘째, 고용구조의 변화는 경제구조와 산업구조의 변화를 반영하였다. 인구와 경제활동인구 가 증가하는 속에서도 농업취업자 구성비는 7.8%로 하락하였다. 축소되고 있던 제조업의 비 중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전기전자산업, 소재공업의 발달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서비스 산업은 모든 분야에서 성장하였다. 특히 정보통신, 금융 등의 생산자서비스와 교육 및 보건 등의 사회서비스의 비중이 크게 확대되었다. 제조업에서의 성장정체와 자본집약도의 증가로 고용을 창출하는 힘은 약화되었다. 모든 산업부문에서 취업(고용)계수와 노동유발계수가 하락 하였다. 그러나 자본집약도의 증가는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킨다. 최종수요액이 증가하여 노동 유발계수가 하락하면서도 취업유발구성비는 증가하였다. 민간소비의 취업유발구성비는 하락하 였지만, 수출의 취업유발구성비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수출의 증가는 정체상태이므로 민간소 비가 증가해야 최종수요의 확대와 고용창출이 가능한 상황이다.
셋째, 무역성장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와 고용구조의 변화는 소득분배에 많은 영향을 미친 다. 소득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국가별로, 시기별로 다른 작용을 한다. 경제성장률이 낮고 공업화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빈부격차가 크지 않고, 노동소득분배률도 낮을 수밖 에 없다. 수출을 매개로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진행되면 피고용자가 증가하고, 자영업자와 무 급종사자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농림어업과 개인서비스업이 줄어들고, 노동소득분배율이 증 가하였다. 그러나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축적이 이루어지고 노동대체적인 기술발전이 이루 어지면서 노동소득분배율이 하락하였다. 경제성장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서 경제의 서비스화가 심화되었다. 금융업과 같은 부가가치 창출력이 높은 서비스업은 임금은 높지만 노동소득분배 율이 낮고, 개인서비스업과 같이 부가가치창출이 낮은 서비스업은 임금은 낮고, 노동소득분배 율이 높다. 7. 한국의 무역성장과 사회의 변화 (박경로) 무역의 성장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일상생활의 변화와 사회구조의 변화, 의식의 변화에 대해 살펴보고 성장모델의 전환을 위해 요구되는 고민에 대 해 짚어보았다. 우선, 일상생활의 변화는 물질생활과 문화생활, 인구의 이동, 그리고 해외유학 과 국제결혼, 초국적기업의 확대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인들의 세계화된 삶에 대해 살펴보았 다. 폐쇄된 농업국민의 삶에서 가장 세계화된 국민의 삶으로 변화한 한국인들의 생활과 그 의 미를 상세한 통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무역의 성장으로 인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낮아지는 결혼율과 높아지는 이혼율, 늦어지는 초혼연령, 여성가구주세대와 1인가구, 한부모가구, 조손 가구의 증가 등과 같은 인구 노령화와 가족의 해체 현상, 즉 사회발전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현상들을 짚어보고 그 밑바탕에 중산층 붕괴에 대한 불안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이러한 불안이 근본적으로 1990년대 이후에 진행되기 시작하여 최근에 정착되고 있는 “고용 없는 성장”으로 인한 것이며, 이것이 국내외 환경의 변화로 인한 대기업중심의 수 출주도 성장모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끊임없는 산업구조 고도화를 통한 장기간에 걸친 무역성장은 개방의 효과에 대한 한국인들 의 매우 긍정적인 태도와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이례적일 정도로 낙관적인 기대를 낳았다. 아울러 고용 없는 성장의 지속으로 인한 새로운 이중경제의 정착과 관련하여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커져가고 있는 불신, 불안, 불만을 중심으로 사회의식을 살펴보았다. 끝으로 낙관과 불안이 공존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의식이 국가와 재벌 대기업의 주도로 장기 간 성공해온 무역 성장의 경험과 고용 없는 성장 경험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짚어봄으로 써 성장모델의 전환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들에 대해 짚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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