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갈색 머리 褐色毛髮 창술
위기의 늑대가리를 지켜보던 마상 위의 갈색머리 청년이 창을 거꾸로 들고, 나무 손잡이 쪽으로 한준의 옆구리를 향해 찌른다.
갑자기 제 3자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 한준은 창을 피하려면 상대를 결박한 틀을 풀 수밖에 없다.
하는 수 없이,
한준은 늑대가리를 옆으로 밀쳐버리고 창을 겨우 피한다.
또다시, 창 손잡이가 한준의 어깨를 겨냥하고 찔러온다. 늑대 가리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려는 의도다. 그러자 이중부가 긴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한준을 겨냥해 찌르는 창 자루를 쳐낸다.
그 사이, 한준이 재빠르게 일어나, 나귀의 등 안장 옆에 걸려있던 이중부의 창을 끌러, 창날 쪽을 쥐고 창자루를 이중부를 향해 던진다.
중부는 들고 있던 등이 굽은 막대기를 버리고, 한준이 던져주는 창을 받아쥐고 새로이 자세를 가다듬는다.
한준 자신도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기 창을 주워 들고 창날을 갈색머리를 향해 겨냥하며 자세를 바로 잡는다.
상대가 무기를 사용하니 자신들도 무기를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마상 위의 갈색머리 청년은 ‘흥’ 코웃음을 치더니
“둘이 함께 덤벼라”하더니,
“나는 창을 거꾸로 쥐고 너희 둘을 상대하겠다”라고 한다.
아주 자신만만한 어투다.
갈색머리 청년은 소년들이 창을 들고 있는 자세를 보자마자 이미, 그 수준을 간파 看破해 버린 것이다.
그러자 한준이,
“둘을 상대하든 말든 또, 창을 바로 쥐던 거꾸로 쥐고 하던, 그건 그쪽이 결정한 사항이고, 그것보다 먼저 말에서 내려 대결하는 게 공평하지 않을까요?”라고 당돌 幢突하게 말한다.
한준의 말뜻은,
이미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겠다는 것과 창을 거꾸로 쥐고 상대하겠다는 상대의 말을 이제는, 바꿀 수 없도록 한 번 더 확인하고 못을 박는 의미다.
또, 상대가 말 위에서 대결하면 지상의 낮은 곳에서 싸우는 자신들이 불리하니, 말에서 내려 동등한 지위 地位에서 대결하자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만 성사 成事시키려는 고단수 高段數 말솜씨다.
마상 위의 갈색 머리 청년은 한준이 하는 말뜻을 눈치채고는,
“하하하, 좋은 말재주를 가지고 있군 그럼, 창술 솜씨도 그 말재주만큼 되는지 구경 한번 해 볼까?” 하더니, 작은 오소리 가죽 포대를 말 안장에서 끄집어내 창날을 덮어씌우고 가죽끈으로 단단히 돌려 감싸 묶는다.
그리고는 마상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린다.
몸놀림 자체가 가벼우면서도 부드럽다.
고수의 면모가 드러난다.
순간, 한준이 갈색 머리의 가슴을 향해 창을 내찌른다. 선제공격을 가한다.
그러자 갈색 머리는 창 자루로 아니(창날이 없으니, 이젠 봉 棒이라 해야 할 것이다) 봉 자루로 가볍게 쳐낸다.
이중부도 박지형에게 배운 다물 타봉술을 창술에 적용하여 실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중부와 한준이 날이 시퍼런 철창으로 양쪽에서 찌르고 때려도 갈색 머리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침착하게 막으며, 오히려 상대의 양쪽을 번갈아 가며 찌르는 공격을 한다.
봉술이 신속하면서도 부드러워 여유가 넘친다.
그런데,
세 사람이 겨루는 대결 모습이 이상하다.
창을 들고 싸우는 소년 두 명은 창술이 아니라, 주로 때리는 타격식 봉술을 구사하고 있고, 봉을 들고 상대하는 갈색 머리는 찌르는 창술을 주로 사용하는 이상스러운 양상 樣相이다.
그러니까,
시퍼런 창 날을 사용하는 두 소년은 봉술을 구사 驅使하고, 봉을 들고 있는 청년은 창술을 전개하는 희한한 광경이다.
이는 이중부와 한준이 아직 체계적인 창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까닭이다.
창술은 찌르는 공격 동작이 팔 할 이상이고, 타 봉술은 말 그대로 때리고 막는 수법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중부는 봉 술만 익혔으니 창을 들고도 찌르는 창술보다, 때리는 타봉술을 주로 구사하고 있다.
한준 역시 형에게 기본적인 봉 술을 조금 배웠고, 나머지는 이중부에게 얻어맞으며 배운 타 봉술이 전부다.
그러니 넉 자 정도의 짧은 막대기로 시전 해야 할, 타봉 기술을 여섯 자가 넘는 긴 창으로 구사하니 속도가 느려지고 효력이 반감한다.
초보자나 하수들에게는 이 방법이 통할 수 있다.
그러나 고수에게는 어림도 없는 부질없는 애들 장난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흉노족의 갈색 머리는 자기 집안에 전래 된 특유의 창술인 ‘설뢰창법 雪雷槍法’과 당대 최고수, ‘창술의 달인’ 혈창루 血槍淚 사부님을 모시고 어릴 때부터 ‘혈루창술 血淚槍術’을 익혀, 창을 거꾸로 들고 봉처럼 사용해도 자연스러운 창술이 전개된다.
창날만 없다 뿐이지, 창술을 구사하는데 아무런 구애 拘礙가 없다.
이중부와 한준이 연합하여 양쪽에서 아무리 공격해봐도 갈색 머리의 옷깃도 건드리지 못하는 반면, 이중부는 벌써 이마를 두 번이나 맞은 충격이 상당하였으며, 가슴과 허리도 여러 차례 가격당하였다.
한준 역시 어깨와 복부 등을 수 차례 찔리고 얻어맞아 옷이 너덜거린다.
왼쪽을 막으면 어느새 아래쪽 무릎이 공격당하고, 아래쪽에 신경 쓰면 봉 자루 끝은 벌써 어깨를 강타하고 있다.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는다.
갈색 머리는 이제 두 소년을 갖고 놀고 있다.
머리를 때리고 싶으면, 정수리와 후두부 後頭部를 타격하고, 하체 下體를 찌르고 싶으면 허리 아래 허벅지와 종아리를 이리저리 맘껏 찔러댄다.
갈색 머리의 봉 술은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신기 神技에 가깝다.
신묘한, 한 자루 봉 자루가 하늘에서는 두루미가 날개 짓하는 것처럼 우아하게 현란한 춤을 추고, 땅 위에서는 비호 飛虎처럼 거칠 것 없이 마구 내달린다.
이 건 대결이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 毆打라고 봐야 한다.
봉 자루가 옆에서 보기에는 마구 찌르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때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봉 자루는 인체의 급소와 요혈만 골라 정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그러니, 맞고 있는 중부와 한준은 어쩔 줄 모른다.
도무지 힘을 쓸 수가 없다.
드디어 휘청대는 이중부. 여기저기 하도 많이 얻어맞아 하늘이 노랗다.
이제는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고, 들고 이는 창 마저도 버겁다.
방어는 고사하고 진력 盡力이 고갈 枯渴되어, 이제는 창을 앞으로 내밀 힘조차도 없다.
갈색 머리의 봉이 중부의 허리와 복부를 번갈아 찌르고, 연이어 종아리 안쪽을 강하게 가격하니, 중부는 그토록 애지중지 愛之重之하던 철창마저 손에서 놓쳐 버리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어 비틀거리던 한준도 어깨를 봉 끝에 두 번 연속 찔리고, 왼 발목을 세차게 얻어맞고는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진다.
두 소년은 거의 동시에 땅 바닥에 쓰러져 축 늘어져 버린다.
지켜보던 다섯 소년이 동시에 “와 아”하며 함성을 지른다.
참패다.
완벽한 패배다.
그것도 두 명이 한 사람에게, 또 자신들은 창날로 싸웠지만, 상대는 창 자루로 상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하게 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팽이와 늑대가리도 다친 발목과 팔을 각각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 요 녀석들 보통내기가 아닌데…. 역시 형님의 요리 솜씨가 멋집니다.”
동생 같은 어린놈에게 힘겨루기로 패배한 것을 형님이 대신 복수를 한 상황이니 쑥스럽다.
다들 팽이와 늑대가리에게 다가가 상처 부위를 걱정스레 바라본다.
팽이의 발목이 시퍼렇게 부풀어 오른다.
다친 발을 땅에 대고 힘을 줘보니, 아파서 제대로 서 있기가 곤란하다.
이중부가 엎드리면서 시전한 바닥 돌려차기에 호되게 당한 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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