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울 도리기
큰구름 홍성래
홍수는 화재 보다 더 무섭다. 불탄 자리에는 재라도 남지만 물 지난 남는 게 없다는 얘기다. 모든 경우에 통용되는 건 아니지만 홍수로 인한 피해가 화재로 인한 피해보다도 더 무섭다는 말일 것이다. 나는 여러 차례 홍수의 피해를 경험하였다.
첫째는 1972년 중1때다. 홍수로 마을이 모두 잠겼다. 남자 어른들은 끝까지 마을을 지키고 우리 7남매는 엄마를 따라 비를 쫄쫄 맞으며 뒷산을 넘어 피난을 갔다. 재를 넘어 처음 만난 건물은 지붕에 십자가가 있는 조그만 동네 교회였다. 어머니는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부탁하셨다. 방문이 열리는데 아랫방은 살림방이고 윗방은 십자가를 모신 곳이 보였다. 아주머니는 방이 없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먹을 것은 가지고 왔으니 처마 밑에라도 쉬게 해달라고 하니 비가 새서 안 된다고 하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비가 샌 흔적은 없다. 지붕 위의 십자가는 사랑을 말하지만 지붕 아래 사는 사람은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 1972년 8월 19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종교와 인간에 대하여 실망한 사건이다.
낙담을 하고 있는데 그 옆집에 사시는 분이 오셔서 “아이고. 왜 여기에 계세요. 우리 집으로 오세요”라고 하신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마음으로 따라가니 우리 동네 24가구 중 12집이 거기 있었다. 그 집은 모든 방을 청소하고 소여물을 끓이는 가마솥을 깨끗이 씻고 밥을 지어 사람들을 먹이고 재웠다. 날이 밝아 비가 그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서 수해 뒷정리를 하였다.
두 번째 수해는 1990년이다. 영월교육지원청에 근무할 때인데 41명의 직원 중에서 11가구가 피해를 입었다. 전화 받을 사람만 남기고 전직원을 고루 나누어 수해복구를 내보냈다. 수해 이전에 사이가 나쁜 사람이 있었는데 일부러 그 집으로 수해복구를 가게 하여 화해를 하기도 했지만, 내가 수해복구지원을 간 집은 부부공무원의 집이었는데 점심때가 지나도 음료수와 빵 하나 없었다. 똑같이 수해를 만난 옆집 분이 오셔서 밥은 먹었느냐고 하여 고개를 저으니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하여 일은 엉뚱한 집에서 하고 점심은 다른 집에서 먹으며 또 한 번 사람을 다시 보았다.
세 번째 수해는 1991년, 태풍 루사 때 피해를 입은 삼척 미로초등학교 수해복구다. 영월교육지원청에서 버스를 타고 직원들과 함께 왔는데 정말 처참하였다. 운동장엔 뻘과 나뭇가지들이 켜켜이 쌓여서 퍼내고 들어내도 자리가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
넷째는 2020년 장마다. 유난히 길고 지루했다. 연이은 태풍과 오랜 장마로 삼척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수해피해가 막대했다. 내가 사는 영월은 대략 십년 주기로 수해를 입었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좋아했던 삼척의 장미공원이 홍수에 휩쓸리는 것을 보면서 가슴 아팠다.
그 외에도 수해로 인하여 아픈 경험이 몇가지 더 있지만 오랫동안 내 가슴을 눌러왔던 것은 1972년 수해 때 하룻밤 잠자리를 청하다가 거절당한 그 십자가 아래서의 기억이 가장 아팠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교회에 가자는 권유를 받으면 먼저 그 기억이 떠올라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올해 여름에 초등과정 문해교원 양성과정 연수 중에 강사가 가장 기뻤던 기억과 가장 슬펐던 기억을 써보라는 말에 그 사건을 기재하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강사가 깜짝 놀라더니 나보고 그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야기하였다. “중1때 그 사건이 나는 가장 슬펐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생각만 하면 아팠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것을 쓰면서 나는 결심했습니다. 이제는 놓아버리자. 그날 우리를 거절한 그 중년의 여전도사와 딸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은 미워하지 않고 그 분들도 행복한 마음으로 주위에 사랑을 전파하는 삶을 사시길 빌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수해의 흔적으로 내 가슴에 48년간 자리 잡았던 마음의 멍울 도리기를 하고서야 깨달았다. 미워하는 마음은 가장 먼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고, 용서하는 마음은 가장 먼저 나를 편안하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