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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분의 일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 창세기30;1-13(180318)
PW : 믿음 BIW : 깨달으라 AG : 빌하와 실바
TS :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추진해 가시는 섭리를 깨닫는 것이다.
이유야 다 있답니다.
어른은 못 타지만 어른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는 차는 무엇일까요? = 유모차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도 깎아주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 이발소, 미용실
요즘은 골프 치러 다니는 사람들이 꽤나 많습니다.
어떤 성도가 친구들과 어울려서 주일에 교회를 가지 않고 골프 치러 가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약속 시간보다 약 30분 늦게 도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가 ‘왜 이리 늦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지 않고 골프를 치러 간다는 것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교회를 가고, 뒷면이 나오면 골프를 치러 가라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으로 믿고 골프를 치러가겠다고 생각을 했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그러면 동전의 뒷면이 나온 모양이네” 하면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닐세. 계속 앞면만 나와서 뒷면이 나올 때까지 던졌지 뭐야!”
주일예배를 빠지려고 하면 이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참석하는 것도 얼마든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이유가 많아도 믿음으로 교회 나와서 주일예배를 드릴 때 축복의 주인공, 축복의 근원,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늘 아버지의 온전한 뜻에 순종하여 주일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주일예배에 즐겁게 참석하여 은혜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P4.
종, 하인, 하녀의 신분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살아가기 힘들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어딘가에는 여전히 종, 하인, 하녀라는 신분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종이나 하인이나 하녀라는 신분은 개인의 인권이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종이나 하인이나 하녀에게는 개인의 생각이란 있을 수 없다.
이들에게는 개인의 삶이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종이나 하인이나 하녀에게는 개인의 인권이니 인품이니 인성이니 생각이니 마음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은 사치품에 불과하다.
인간이라는 인권 자체가 인정받지 못한다.
짐승처럼 취급당하는 것이 다반수이다.
짐승과 차이점이 있다면 옷을 입을 수 있고, 서서 걸어 다닐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밥 먹을 수 있고, 이불을 덮고 집 안에서 잘 수 있다는 최소한의 생활 모습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종이나 하인이나 하녀는 짐승처럼 매매가 가능하다.
세상에는 이처럼 짐승취급당하면서 살아야 되는 수많은 인류가 존재한다.
이들의 삶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이들이 죽었다고 누가 슬퍼해 주거나 울어주는 이도 없다.
이들이 짐승처럼 대접받는다고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다.
법이 있어도 얼마든지 뇌물로 처벌을 피해갈 수 있다.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의식체계 때문에 법으로도 이들을 구출해낼 수 없다.
지금 북한의 주민들이 김씨3부자에 의해서 마치 종처럼, 하인처럼, 하녀처럼 살아가고 있다.
북한주민들에게 인권이니 자유니 인성이니 개인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의 주민들은 오직 김씨3부자를 위해서 살아야만 된다.
야곱이 낳은 12아들과 딸 하나 사이에는 4여인이 등장한다.
레아가 낳은 자녀는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과 딸 디나
라헬이 낳은 아들은 요셉, 베냐민
빌하가 낳은 아들은 단, 납달리
실바가 낳은 아들은 갓, 아셀
이렇게 12남1녀가 야곱의 자녀들이다.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는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야곱에게 시집오겠다는 여인이 없는 것이다.
야곱은 형 에서가 받아야 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는 죄(?) 때문에 형님에게 미운 털이 박혀서 형님을 피해서 잠시잠깐 외가댁으로 피해 있겠다는 명목으로 70대 초반에 밧단아람으로 건너가게 된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건너가지 않고 계속 가나안 땅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면 장가도 못가고,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고, 혼자서 쓸쓸하게 지내다가 세상에 왔다간 흔적보자도 남기지 못하고 죽지 않았을까 싶다.
야곱이 장가를 가지 못하면 하나님의 언약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하나님은 야곱을 장가보내기 위해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밧단아람으로 보내는 작전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게 된다.
하나님은 아버지 이삭이 에서 형님에게 축복하려고 하는 것을 어머니에게 감동을 주어서 축복을 가로채게 하신다.
이에 형님이 불같은 화를 내게 하시고, 잠시 피해 있는다는 명목으로 가나안을 떠나서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잠시 머물던 곳, 어머니 리브가의 고향인 밧단아람으로 건너가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건너갈 때는 잠시잠깐 외가댁에 갔다가 돌아올 마음으로 갔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20년 동안 밧단아람에 붙들어놓는다.
하나님은 야곱을 외가댁에서 결혼시키면서 13남매를 낳게 하신다.
아주 작은 보잘것없는 재물이었지만 야곱의 재산을 모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신다.
하나님은 밧단아람에서 낳은 자식들과 재물들을 기반으로 거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 히브리민족을 형성할 수 있는 기초석을 놓아가도록 역사하시고 계신다.
야곱이 70대 초반에 밧담아람으로 건너가서 7년 동안 더부살이하고 난 후에 70대 후반에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게 된다.
레아가 먼저 1주일 전에 결혼하고, 1주일 후에 라헬과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야곱의 마음에는 늘 라헬을 연모하는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라헬이 야곱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면서 산다.
레아는 남편의 살가운 사랑과 마음을 받으면서 살지 못한다.
레아는 늘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 꿀뚝 같았지만, 마음먹은 만큼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지 못한다.
그럴 때에 레아는 아들들을 낳게 된다.
라헬은 왠지 모르게 남편의 사랑은 언니보다 훨씬 많이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임신이 되지 않아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
이미 레아는 4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라헬은 임신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당시 고고고고대시대 사회에는 종이 자식을 낳아도 종의 자식이 아니라 주인의 자식으로 인정하던 시기이다.
라헬은 자신의 몸종인 빌하가 자식을 낳으면 자신이 낳은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라헬은 남편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종인 빌하를 통해서 아이를 임신하도록 요구한다.
야곱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을 품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것도 아내의 몸종을 품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야곱의 신분이라는 것은 외삼촌 라반의 조카이면서 데릴사위라는 신분이다.
레아와 라헬의 남편이라는 신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야곱의 신분이라는 것은 종, 하인이나 다름없는 신분에 불과하다.
종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주인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되는 것이 종의 신분이다.
야곱은 종이라는 신분이기 때문에 주인들, 곧 라반이나 레아나 라헬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만 되는 신분이다.
야곱의 신분은 데릴사위라는 신분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권한도 없는 종이나 다름없는 신분이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자신의 신분이 종이라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주인이 시키는 대로 순응할 수밖에 없다.
야곱은 주인인 라헬이 자신의 몸종인 빌하를 통해서 자식을 낳도록 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없다.
주인의 요구에 야곱은 자신의 몸을 바칠 수밖에 없다.
하는 수 없이 야곱은 빌하에게 아기씨를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단과 납달리이다.
그러자 레아의 차례가 된다.
레아도 자신의 멈춰버린 아이 출산을 몸종을 통해서 더 많은 자녀를 낳고 싶은 마음으로 야곱에게 자신의 몸종인 실바에게도 아기씨를 넣어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야곱은 레아의 요구도 거절할 수 없어서 레아의 몸종인 실바에게도 아기씨를 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갓과 아셀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레아에게도, 라헬에게도 자식을 더 낳을 수 있도록 태를 열어주신다.
야곱은 두 여주인의 요구에 의해서 4여인을 통하여 13남매를 낳게 된다.
D4.
여기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면서 빌하와 실바 여인을 좀 더 묵상해 보려고 한다.
① 라헬이 언니처럼 자녀를 잘 낳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라헬이 언니보다 1주일 늦게 결혼하기는 했지만, 언니 레아보다 훨씬 더 많은 남편의 사랑을 받은 여인이다.
어쩌면 라헬이 언니 레아보다 더 많은 부부관계를 가지면서 사는 것이다.
라헬이 언니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살면서 원하는 대로 자녀를 낳았다면 자신의 몸종인 빌하라는 여인을 통해서 대리로 아들을 낳아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라헬이 자녀를 출산하지 못하는 것이 빌하가 두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요인이 된다.
누군가의 슬픔과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될 수 있다.
누군가의 고통과 역경이 누군가에게는 기쁨과 즐거움이 될 수 있다.
누군가가 우리들 때문에 불행해 질 수도 있고, 고통과 역경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런가하면 누군가 때문에 우리들이 행복해지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② 라헬이 자녀를 낳지 못하면 못 낳는 대로 체념하고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노력해 봐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라헬은 체념하면서,
“아무래도 생명의 주인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축복을 주시지 않나 보다. 언니가 이미 4아들이나 낳았기 때문에 언니가 낳은 조카를 내 아들인 것처럼 여기면서 언니를 도와서 잘 키워야지!”하는 마음이었다면 구태여 ‘빌하를 통해서 자식을 낳아야지.’하는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라헬은 자신도 아이를 낳아서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지 못한다.
라헬은 자신도 아이를 낳아서 엄마가 되고, 모성애를 가진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라헬은 여인의 몸으로 태어나서 살았던 삶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도 언니 레아는 4아들씩이나 낳는 동안 라헬은 전혀 임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처럼 산부인과 의학이 발달한 시대였다면 매일 산부인과에 찾아가서 시험관 아기, 체외수정, 대리수정 등등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서 출산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학적인 도움을 받아서 출산할 수 있는 때가 아니다.
순전히 자연 임신을 해야만 자녀를 출산할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라헬은 언니처럼 자녀를 낳고 싶은 욕망은 날로 더 심해지는데, 자녀를 낳을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자신의 몸종인 빌하에게 대리모역할을 시켜서라도 자식을 낳고 싶어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욕구 때문에 라헬은 빌하라는 몸종의 태를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빌하가 몸을 빌려주어서 낳은 아들이 단과 납달리이다.
후에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가장 견고하고 싸움을 잘하고 튼튼한 지파가 바로 단지파이다.
단지파는 어떤 싸움이든지 가장 앞에서 선봉장에 서기도 하고, 광야에서 행진할 때는 가장 뒤편에서 어떤 무리들도 공격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방패막이역할을 감당했던 지파이다.
바로 빌하가 낳은 단지파이다.
빌하가 단을 낳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단지파를 통해서 역사하시려던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납달리지파도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당당하게 한 지파를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견고하게 감당한 지파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일에는 이유와 목적이 없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단지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원대한 포부와 계획과 섭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뿐이다.
하루를 천년처럼, 천년을 하루처럼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부분 부분에, 구석구석에, 하나하나에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주권과 포부와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인도되어지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기는 그 포부와 계획과 섭리 속에는 우리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③ 레아는 이미 많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레아는 이미 4아들을 낳은 엄마이기 때문에 4아들을 잘 키우면서 아들들만 바라보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4아이를 낳아서 다둥이 엄마로 알려진 김지선씨는 아이를 낳으면 저절로 클 줄 알고 4아이를 낳았다고 하면서, 아이 키우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알았다면 4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들 하나 키우기도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그런데 레아에게는 머슴아만 4명이다.
4명의 머슴아를 키운다는 것은 마치 전쟁터나 다름없다.
이렇게 힘들게 4명의 머슴아를 키우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더 이상 자녀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동생 라헬이 빌하를 통해서 자식을 낳으려고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엄마가 되고 싶었으면 저럴까? 나도 4아들을 낳아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모성애가 강해지는데 동생도 그렇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측은하고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빌하를 통해서라도 자식을 낳은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축하하고 격려하고 위로해 주었다면 구태여 레아가 실바를 통해서 자신이 멈춰버린 아이출산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레아는 동생의 그런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한다.
‘자신에게도 실바라는 예쁘고 튼튼한 몸종이 있지 않나? 나도 실바를 통해서 대신 아이를 더 많이 낳아야겠다.’라는 강한 경쟁심, 욕구가 살아나면서 실바의 몸을 사용하여 아이를 낳으려고 한다.
그래서 실바의 태를 통해서 태어난 아들이 갓과 아셀이다.
하나님은 레아의 몸종 실바가 낳은 두 아들 갓과 아셀을 통해서 각각 갓지파, 아셀지파로 세워가면서 실바에게 두 지파의 어미가 되는 축복을 주신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인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반드시 +를 이루어 가시는 역전의 명수,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시다.
④ 레아와 라헬에게 실바와 빌하 외에 다른 몸종은 없었을까?
성경에 기록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고고고대사회는 씨족사회, 공동체사회, 대가족사회, 가부장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라반의 집에는 많은 여인들이 몸종이라는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레아와 라헬은 주인이기 때문에 많은 몸종들을 거느리고 있다.
레아에게는 실바 외에 다른 몸종들이 있고, 라헬에게도 빌하 외에 다른 몸종들이 있다.
예쁘고 튼튼해서 아이를 잘 낳을 것 같은 몸종들이 더 많이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빌하와 실바가 선택받은 것일까?
빌하나 실바가 아니라 다른 몸종들 중에 다른 누군가가 선택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빌하와 실바 여인이 선택받지 못하고 다른 몸종들이 선택받았다면 성경에 빌하와 실바가 아닌 다른 여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진다.
빌하와 실바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여인의 반열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빌하와 실바 여인이 받을 축복을 다른 여인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라헬은 빌하를, 레아는 실바를 선택하여 대리모 역할을 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빌하와 실바는 많은 여종들 가운데서 특별하게 선택함을 받은 여종들이다.
이렇게 선택받아서 빌하와 실바 여인도 당당히 야곱의 여인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형성하는 공로를 세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다.
그러므로 레아나 라헬은 친정에서 주인행세하면서 밧단아람에서 자식 낳기 경주를 할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다.
몸종의 신분으로 주인이 자식 낳기 경주에 동원되는 것에 대해서 빌하도, 실바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후에 레아와 라헬이 아들들과 몸종들을 데리고 아버지 라반을 떠나서 자신들이 종처럼 부려먹던 남편 야곱을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시댁으로 들어올 때 생각과 마음이 달라진다.
더 나아가서는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이스라엘의 12지파가 형성되어지고, 이스라엘 나라가 건국되어지는 과정 속에서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구나.”라고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지금은 잘 이해되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강력한 주권과 섭리에 의해서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구나.’라고 깨닫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란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늘 아버지의 원대한 계획과 포부를 깨닫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를 창조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분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다고, 우리의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다 해서 안 계시는 분이 아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으로 만져지지 않아도, 우리의 피부로 느껴지지 않아도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은 온 지구촌뿐만 아니라 온 우주계까지 주인이 되어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과 교회와 생업터전과 진로에도 직접 간섭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다.
인간이 의식하지 않아도, 깨닫지 못해도, 고백하지 않아도 여호와 하나님은 여전히 존재하시고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계획과 비전과 섭리를 강력한 주권으로 성취해 가시는 분이다.
L4 & B4
하나님은 한낱 몸종에 불과한 빌하와 실바의 일생에도 찾아오시고 간섭하시고 역사해 주시는 분이다.
한낱 여주인의 몸종에 불과했던 빌하도, 실바도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 각각 두 지파의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주신다.
두 아들을 낳아서 젖을 먹이면서 강한 모성애를 가진 여인으로 세워지는 은혜와 축복을 받는다.
이런 일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비전과 섭리와 계획에 의해서 추진되어진 일이다.
우리 가정과 교회와 우리 자녀들, 우리 주변에 있는 그 누군가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계획과 비전과 섭리를 따라서 역사해 가실 수 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들이 “왜 이렇게 되었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아니 이럴 수가 있나?”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인도하심과 이끌어주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믿음으로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어떻게 인간이라는 존재가 크고 놀랍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깊고 넓고 높고 긴 구원의 뜻을 다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눈곱만큼도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과 계획과 섭리와 비전을 깨달을 수 없는 무지몽매한 죄인에 불과하다.
그만큼 우리의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다재다능하시고 무한하신 분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못 하시는 일이 없고, 안 되는 일이 없는 분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교만하거나 거만하거나 죄를 범할 수 없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고 교만하고 거만하고 뻔뻔하고 온갖 추악한 죄악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있다.
자칭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 자칭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들, 자칭 신령하다고 하는 사람들, 자칭 성경 박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곡해해서 엉뚱한 짓거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절대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나약하고 유한하고 무익한 존재이다.
그래서 저는 너무너무 부족하고 아주 나약하고 무익한 목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것이 10000가지라고 한다면, 그 10000가지 중에서 단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도록 깨달음의 은혜를 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온전한 10000가지 중에서 단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깨닫고, 그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폭적으로 순종하면서 믿음으로 사는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한다.
우리 신앙인들은 성삼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축복의 세계를 만분의 일이라도 깨달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가지신 온전한 뜻을 만분의 일이라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① 흘러간 역사(歷史)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역사(歷史, history)의 주인이신 분이다.
역사는 곧 그의 이야기이다.
The His Story가 바로 역사라는 것이다.
곧 우리 하나님의 이야기, 우리 예수님의 이야기가 바로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나온 역사를 그냥 스쳐 지나가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지난 역사를 다시 반복하시는 분이다.
성경의 요소요소를 잘 살펴보거나 지난 인류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은 지난 역사를 반복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계심을 깨닫게 된다.
② 흘러간 역사를 분별하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배우면서 역사의 흐름을 깨닫게 되면 앞으로 일어날 새로운 역사도 어렴풋하게라마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나 세계역사를 살펴보면 지나간 역사가 다시 반복되어 나타나는 현상을 수없이 볼 수 있다.
‘지나온 과거 역사가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역사도 이렇게 흘러가겠구나.’라고 짐작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이다.
반복적으로 일어난 것이 역사이다.
믿음의 역사도 반복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인은 한국사를 잘 배우고 익혀야 한다.
아울러 지구촌 시대이기 때문에 세계 역사도 잘 배우고 익혀야 한다.
성경을 잘 안다고 하면서 한국의 고대역사를 잘 모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어쩌면 성경의 구약시대는 우리나라의 고조선시대와 같은 시대이다.
성경을 잘 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고조선역사를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심각하게 고민하며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고 배울 수 있다면 공부하면서 배웠으면 좋겠다.
역사를 왜곡해서 배워서도 안 되고, 역사를 왜곡해서 가르쳐서도 안 된다.
전교조라는 단체에서 새롭게 만들고 있는 초등학생을 위한 역사교과서에 근현대사 부분에 정말 믿을 수 없는 교과서를 만들고 있어서 정말 큰일이구나 싶다.
수많은 민족의 피를 빼앗은 6∙25한국전쟁의 주범, 북한의 김일성3부자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영웅이요 희망이요 지도자라고 가르치겠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대통령은 미국의 앞잡이, 기회주의자, 독재자라고 가르치겠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경제적인 발전의 발판을 만들어놓은 박정희대통령을 친일파라고 하면서 매도하고 있다.
우리 어린아이들이 배우고, 앞으로 우리의 손자손녀들이 배워야할 국사교과서를 왜곡해서 가르치겠다고 하는 것은 정말 큰일이구나 싶다.
③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심, 감동하심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고, 역사 자체가 그 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성삼위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어느 지역이나 민족에게나 항상 임재하시고 감동을 주시고, 역사하시는 분임을 인정해 드려야 한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들도 뒤에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이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진행되어지는 일들이다.
하나님께서 진행해 나가시는 역사는 인간이 믿음으로 고백하든 말든 전혀 상관없다.
인간이 믿음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되는 것이고, 인간이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이 관여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과 결정에 의해서, 전폭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권세에 의해서 진행되어지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은 믿음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에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역사를 그대로 인정해 드리는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과 감동하심을 그대로 고백하고 인정해 드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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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중한 설교 자료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