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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李康年) 1858~1909.10.13 호 운강(雲崗) 자(字) 낙인(樂人)
이강년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문경군 가은면 도태리(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에서 이기태(李起台)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대로 벼슬하지 못한 한적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이강년은 1880년 무관에 급제하여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折衝將軍 行 龍釀衛 副司果)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벼슬아치 출신으로서 동학운동에 참여한 예는 극히 드물지만 민족적 정의감이 그로 하여금 동학의 척왜(斥倭)운동에 참여하게 한 것이다. 그는 농민군을 거느리고 관군에 대항하고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 이어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이 노골화 되었다.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강년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일인들을 소탕하고자 결심하였다. 처음에 훈척(勳戚) 심상훈(沈相熏)을 찾아가 함께 거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가 응하지 않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제천의 유인석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1월 11일 출생지인 문경에서 봉기하였다. 그전에 그들의 기미를 알아채고 달아나는 안동관찰사 김석중, 순검 이호윤, 김인담 등 3인을 생포하여 농암시장에서 그들이 적의 앞잡이 노릇한 것을 규탄하고 효수(梟首)하였다.
일련의 사건으로 소모한 의병을 거느리고 안동의 창의대장 권세연을 만나 군사상의 문제를 의논하였으며, 1월 15일 고모성에서 적병을 맞아 교전하였다. 1월 29일 제천으로 유인석을 찾아 보고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로써 유인석의 막하에서 유격장이 되었다. 이때 김상태, 민순호 등이 문경에서 거의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점으로 보아 이강년은 대체로 생장지인 충청도에서 활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월 1일 전군장 홍대석과 함께 6초(哨)의 군사를 거느리고 수안보의 병참을 공격하였으며, 2월 13일 9초를 거느리고 중군 윤기영과 함께 문경 평천으로 진군하였다. 4월 장기렴이 거느리고 관군에게 제천 의진이 패하자 유인석은 거수지계(去守之計)를 정하고 요동으로 건너갔다. 이때 이강년은 후군장(後軍將)을 맡아 유인석의 뒤를 쫓아 압록강을 거쳐 만주로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소백산맥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7월에 소백산에서 일단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에 은신하였다.
1897년 4월 요동으로 건너가 유인석을 만나고 7월에 다시 단양으로 돌아왔다. 을미의병 활동중에 유인석에게 깊은 감화를 받았으므로 그 이후 호남, 영남지방의 선비들을 만나 성리(性理), 전고(典故), 예악(禮樂)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하여 자기 수양에 골몰하였다. 또한 1899년 충주에서 화서(華西)의 문집을 출간할 때 충주에까지 가서 편집.간행.배포에 앞장섰다.
1907년 3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므로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단양, 제천, 원주, 연풍, 영월, 횡성, 강릉, 청풍, 충주, 문경, 예천, 영주, 봉화, 안동 등 3도 14군을 휩쓸며 적과 대적하였다. 특히 1907년 7월 5일의 제천전투에서 500여명의 적을 토멸하여 사기가 충천하였고 이어서 경상, 강원, 충청 일대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이때에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동료 진위대 군인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민긍호 의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판서 심상훈이 원주 배양산으로 찾아와 노고를 치하하였다. 조정으로 돌아가 고종에게 그 전과를 아뢰었다. 고종은 이강년에게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제수하며 다음과 같은 밀조(密詔)를 내렸다.
“아! 나의 죄가 크고 악이 충만하여 황천이 돌보지 않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강한 이웃이 틈을 엿보고 역적 신하가 권세를 농락하여 4천년을 내린 종묘사직과 3천리 넓은 강토가 하루 아침에 오랑캐의 지역이 되었도다. 생각하면 나의 실날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종묘사직과 만백성을 생각하니 이것이 애통하다. 선전관 이강년으로 도체찰사를 삼아 지방 4도에 보내니 양가(良家)의 재주있는 자제들로 각각 의병을 일으키게 하여 소모장을 임명하되 인장과 병부(兵符)를 새겨서 쓰도록 하라. 만일 명을 쫓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와 수령들을 먼저 베이고 파직하여 내쫓을 것이며, 오직 경기 진영의 군사는 나와 함께 사직에 순절(殉節)할 것이다.”
이때 주천에 40여 의진이 모여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중군장 김상태, 우군장 이중봉, 우선봉장 백남규, 좌군장 이용로, 좌선봉장 하한서, 감군장 이세영, 전군장 윤기영 등의 편제를 갖추었다. 7월 15일 행군을 시작하여 문지동을 거쳐 마수막에 이르러 충주를 치고자 하여 산하의 의진을 풀어서 작전을 실시하였으나 각 의진이 시기를 지키지 않아 충주 진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불당곡의 이주승의 집에서 머물면서 「국수원류(國讐源流)」「군계」「12귀 통고문(通告文)」등을 지어 군율을 가다듬었다. 이어서 풍기 도촌에서 김기찬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를 총살하여 친일행위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7월 30일 문경 주흘루에 주둔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였는데 적은 밤을 틈타 도망하였다. 원주에 묻어둔 탄환을 보충하여 전력을 보강시켰으며, 이 때 공을 세운 이만원을 도총독장, 권용일을 우군선봉장에 임명하였다. 청풍의 조동교, 여주의 김현규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다. 특히 김현규 의진에는 해산군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8월 2일 적군이 초곡에 이르러 대전하게 되자 조동교와 김현규가 군대를 이끌고 가버려 작전의 허가 드러나 모항령전투에서 32명의 인명피해를 보게 되었다.
다음날 혜국사 승려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용기백배하여 갈평으로 진격하여 적을 쳐부수고 총과 탄환, 투구 등을 노획하였다. 이튿날(4일) 다시 갈평에 나가 순검 1명을 총살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에서 적의 대장 과전삼태랑과 육군보병 대토촌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6일에는 대승사에서 적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였다. 8일 후군장 신태원이 문경 적성에서 참패하여 아군 36명이 순국하였다. 이후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단양 유치, 영월 병두, 연풍 등지에서 적과 대치하였으나 전세는 다소 불리하였다.
그리하여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대전하여 적 200명을 사로잡았고, 9월 27일 죽령에서 다시 적 200명을 사로잡았으며, 10월 5일 단양 고리평에서 적 80명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해졌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고 산중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적과 대치하게 되자 전세는 불리해졌다. 10월 6일의 소백산정에서의 전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한 불리한 여건속에서도 10월 23일 풍기 백자동전투에서 다시 적 100명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이강년은 그간의 과로와 연이은 패전이 원인이 되어 득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월 12일 풍기 복상동에서 적을 만나 대적하였으나 그 결과는 대패였다. 이때 이강년은 “내가 거의한지 12년에 이와 같이 패배한 때는 없도다” 하고 탄식하며 부하 장병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 다음해 봄을 기약하고 의진을 해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강년은 끝내 해산시키지 않았다. 11월 21일 전동 월계봉, 12월 3일 낭천 간척리, 그리고 12월 5일 경기도 건천에서 각각 대적하여 전투를 전개하였다.
1908년에는 주로 경기도 지역에서 활약하였는데 용소동에서 적 100여명을 사로잡은 것을 비롯하여 대청리 갈기동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1908년에 이강년의진이 가장 빛나는 전과를 거둔 전투로는 3월 12일의 강원도 인제 백담사의 전투와 안동 서벽, 4월 6일 봉화 내성전투 그리고 4월 8일의 안동 재산의 전투를 들 수 있다. 1908년 3월 12일 백담사 전투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12일 적이 많이 들어오므로 쳐서 무너뜨렸다. 이튿날 새벽에 파수병이 3번이나 급한 정세를 보고하기를 적 500여명이 북쪽에서 온다고 했다. 군중이 모두 나가 좌우로 독려하며 반날을 격전하니 적이 크게 무너지므로 추격하여 무찔렀는데 적의 죽은 자가 수백여명이며 우리 군사의 사상자도 수십여명이었다. 이날 간성 신흥사로 옮겨 주둔하고 군사를 교련시켰다. 다음날 다시 오세암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이들 이강년부대는 하루를 교전하고도 여력이 남아 있어 군대를 이끌고 설악산을 넘나들며 훈련하였으니 이들의 능란한 기동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일대는 일찍이 관동 의진의 민긍호가 활약하던 지대로서 그가 체포된 후 곧 이어 이강년부대가 장악한 것이다. 이때 이강년은 이준명, 정원팔 등 260명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산악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그후 이강년은 강원도를 떠나 4월에 경북 일월산을 거점으로 삼고 산하 의병장인 변학기, 성익현, 김상태, 정경태, 백남규, 정연철 의진 4,000여명을 서벽에 주둔시켰다. 이에 대하여 일본군은 영천수비대를 파견하였으므로 이들과의 전투가 불가피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 수백명을 사로잡고 20여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적들은 내성으로 퇴군하였으며 의진 역시 내성쪽으로 행군하여 유진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적 수백명이 영천으로부터 온다고 파수병이 고하였다. 이강년은 먼저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맞이하여 싸웠다. 반나절 동안 전투하여 적을 물리쳤으며 이때 설치한 설복비계(設伏秘計)에 대하여 의진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의진이 안동 재산에 이르자 대구로부터 적의 내습이 있었다. 이강년은 이만원, 권용일을 동구에 매복시키고 하한서를 왼쪽에 성익현을 오른쪽에 매복시키고, 백남규는 분병(分兵)하여 양쪽에 매복하도록 한 후 이강년은 갑사(甲士)들을 거느리고 남산에 올라가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적은 의병 복장으로 변장하고 의병기를 들고 달려왔다. 적이 깊숙히 들어올 때를 기다려 복병이 일제히 사격을 하고 이강년은 산 위에서 독전하였다. 탄환이 빗발처럼 쏟아지자 적은 놀라고 짓밟혀 죽은자가 과반이 되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달아났다. 아군의 사망자는 10명, 부상자 8명이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강년은 10여년간에 걸친 의병활동에서 비견될 바 없이 혁혁한 공로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능숙하고도 대담한 전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강년은 6월 4일 청풍 까치성전투에서 퇴로가 막혀 고전하던 끝에 적의 탄환이 복사뼈에 맞아 적에게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도선봉 하한서 및 7명이 전사하였다. 이들을 돌아보면서 마을사람들에게 “내가 잡힌 몸이 되었으니 별 수 없다. 전사한 사람들을 잘 매장하여 주기 바란다.” 고 부탁하고 제천으로 압송되었다. 처음에 일인들이 그의 부상을 치료하고자 하였으나 거절하고 일음일식(一飮一食)하였다. 그나마 일본인이 가져다 주는 것은 쳐다 보지도 않았다.
그 후 그는 이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탄환의 무정함이여/ 발목을 다쳐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 맞았더라면/ 욕됨 없이 저 세상에 가는 것을/ (丸子太無情 과傷足不行 若中心腹裏 母辱到瑤京) 서울로 압송된 후 평리원에 이송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9월 19일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으니 그의 애국충정은 길이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첫댓글 상세한 자료 잘 봤습니다. 어려운 시대의 義로운 삶을 산 선열들에게 숙연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