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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묵상글 들 ( 연중 2주 금요일-사제와 사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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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2주 금요일-사제와 사도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당신이 원하시는 열둘을 부르시고 사도로 세우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 히브리서는 계속해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래서일까 오늘 독서와 복음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주제는
사제와 사도인데 틀림없이 어제 제 친구의 장례 미사를 다녀온 영향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라 하는데 그 계약이란
하느님께서 우리의 하느님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이는
마치 중매쟁이가 남남으로 살던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며칠 전에도 얘기했지만 사제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개자 또는 중매자입니다.
중개자와 중매자의 뜻이 비슷하지만 중매자가 서로 모르던 사람들
또는 알더라도 관계가 없던 사람들의 관계를 맺어주는 존재라면
중개자는 둘 사이에 서로의 뜻을 전달하고 조정해주는 자라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사제란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개자와 중매자인 존재인데
어제 장례를 치룬 제 친구는 이런 면에서 훌륭한 사제였습니다.
우리가 사제란 제사인 미사를 잘 봉헌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하기
쉬운데 제 친구는 미사도 열심히 봉헌한 친구였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개자와 중매자라는 면에서 훌륭했던 친구입니다.
사제로 38년을 살면서 교구 사제들에게는 사제 생활의 꽃이라는 하는
본당 신부는 3년밖에 하지 않았지만 어디서건 또 누구건 어렵지 않게
다가올 수 있도록 자기 곁을 내준 사제였고, 그렇게 하여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알도록, 또 하느님께 다가가도록 해준 친구였지요.
이 친구는 이렇게 자기가 살고싶은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삶을 살았는데 하느님께서는
야속하게도 이 친구에게 병을 주셔서 마지막 7년을 병중에서 살게 하셨지만
병 중에도 유쾌하게 살면서 주변에 걱정이 아니라 기쁨을 주며 살았습니다.
죽기 한 달 전에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이 친구는 그 병원에 있는
다른 환자들을 방문하여 기도해주고 자기가 일생 취미로 찍은 야생화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 전시함으로써 다른 환우들에게 밝음을 선사했습니다.
이렇게 생을 마친 이 친구를 어제 보내면서 저는 하나도 슬프지 않았고,
오히려 저는 이 친구가 자랑스럽고 부러웠습니다.
건강한 저는 큰 고통을 겪은 적이 없기에 큰 고통을 통과한 사람은 누구건
고통을 겪은 것만으로도 존경하는 편인데 이 친구는 고통을 잘 통과하였고,
자기를 이 세상에 부르시고, 사제로 부르시고, 고통에로 부르신 주님께
끝까지 순명하고 갔으니 어찌 자랑스럽지 않고 부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주님은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사도로 세우십니다.
사도는 중개자 또는 중매자인 사제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열둘을 세웠다고 표현하는데
세웠다는 것의 뜻이 바로 기둥을 세웠다는 뜻이고,
이스라엘 집안의 열두 기둥으로 세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셨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 열둘이 모두 기둥감이 못되는 자들 같습니다.
그러니 이는 주님께서 훌륭한 사람을 뽑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3년을 옆에 끼고 또 데리고 다니시며 제자와 사도로 키우시고,
돌아가신 다음에는 좌절과 절망으로 키우시고 마침내는
성령으로 키우시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사제와 사도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라고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이 부르심을 사는 신앙인들이 되기로 결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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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연중 제2주간 금요일 /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두셨던 열두 사람을 뽑아 당신의 제자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깊은 친교를 나눕니다. 열두 제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똑똑하지도 않고, 이른바 ‘스펙’이 좋아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을 성숙시켜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은 때로는 성격이 급하고 또 어리석으며, 어떤 때는 현세의 권력과 이익에 눈이 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친교를 통하여 죄의 회개와 용서 그리고 사랑을 배웁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큰 죄를 지은 베드로가 우리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약한 사람임을 알고 회개하여,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자신의 고향을 떠나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주님께 선택받는다는 것은 어떤 합당한 자격과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 사랑이 가득한 마음,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과 회개와 뉘우침 그리고 용서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현실적 삶의 풍요로움과 마음의 평화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더욱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에 넘쳐 살아가는 신자들은, 미사 전례 때 참회를 통하여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를 통하여 매번 파견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은총이고 감사기에, 미사의 마지막에 하는 응답으로 이렇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신우식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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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남철에 쇳가루가 붙어있듯.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마음에 두셨던 사람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마르3,13-14).
성경에서 산이란 하느님이 계시는 곳, 하느님의 뜻이 밝혀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산에 오른다는 것은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으러 간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불렀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15,16), 는 말씀대로 입니다. 산에 오르셔서 부르셨다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대로 처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밤새워 기도하신 결과입니다.
그런데 부름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보면 특별히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나운 사람이 섞여 있었습니다. 신중하게 뽑으셨는데 가리옷사람 유다가 거기 있었고, 남을 등쳐먹는다는 공적인 죄인 세리 마태오, 열혈당원 시몬, 천둥의 아들이라 불리는 야고보, 성질 급한 요한, 다혈질적인 베드로 등 그야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속을 아셨을까요? 아니면 모르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그런 사람은 제쳐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품고 가십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은 당시 상황에서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세리들은 이스라엘 점령 세력인 로마인들과 협력하는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여 무력 투쟁을 하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적대관계에 있던 이들까지도 하느님 백성공동체로 모아들이셨습니다. 갈등과 적대관계의 극복뿐만 아니라 차별과 소외와 배척을 넘어서 모든 사람을 하느님 품 안에 모으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름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새 생활을 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함께 지냈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하면서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오늘을 사랑으로’ 살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지내는 것”은 그분 가까이 머물면서 그분을 믿고, 배우며, 닮아 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스승과 공동운명체가 됨으로써 스승의 사명에 참여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석에 쇳가루가 오래 붙어있으면 그 쇳가루도 자력을 지니듯이 열두 사도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에게서 생명력을 받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고 구원사업을 펼치게 됩니다.
“유다’라는 말은 “찬미하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진 유다가 왜 주님을 찬미하지 못하고 배반자가 되었을까? 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몸은 같이 있어도 마음은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몸과 마음이 그분과 함께 있지 않으면 유다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지내야 듣고 보고 체험한 바를 전할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선포하는 바를 살면 그 안에 능력이 주어집니다. 저희는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마르9,28-29). 고 말씀하셨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며 꾸짖으셨습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사탄을 쫓아낸 것입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제쳐놓은 사람들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접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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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님.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연중 2 금)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이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그분께서는 먼저 부르시고 제자들은 그분께 응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이토록, 당신께서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성소는 당신이 원하신 것이요, 당신이 주신 선물이요, 은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나아온” 이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 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이제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열 두 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갱신하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을 선포하십니다. ‘세우다’란 말의 원어의 뜻은 ‘만들다’, ‘창조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 새 이스라엘이 세워지고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둘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결국, 이 “열둘”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곧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μαθετεσ)의 의미와 동시에,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나라를 선포하고 다니는 “사도”(αποστολοσ)라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제자요 사도인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가?
그것은 우선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 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처럼, 한 몸을 이루며,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서로 안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계시는 곳에 제자도 있어야 하고, 스승이 파견한 일을 사도가 하게 됩니다. 곧 제자와 사도의 신원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이’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함께 지내되, 누구와 함께 지내느냐?’ 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물들어 간다. 섞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악에 물들고 선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선에 물들어가듯,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 하느님이 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되어 간다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과 함께 지내며,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마르 3,14)
주님!
당신이 불러 뽑으셨으니, 저는 분명 당신의 사람입니다.
당신을 저의 거처로 내어주시고,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실행하고, 당신 뜻 안에 살게 하소서.
당신 뜻의 실천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으로 녹아나고,
당신 뜻에 맞는 예배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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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연중 제2주간 금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13-19: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신 곁에 있게 하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여정을 시작하시며 열둘을 부르시어 당신의 모든 제자 가운데 그들에게만 사도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제 그들과 깊은 친교를 나누며, 당신이 하시는 일에 협조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즉 공생과 파견이라고 할 수 있다(6,6-13). 파견된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대로(1,34.39)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기적을 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열두 사람을 가려 제자단을 만드신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함께 사귀고 또한 그분이 하신 것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그분에게 흠뻑 젖어 세상에 전할 말씀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선발하신 열두 제자들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어부도 있었고, 세관원도 있으며, 혁명당원 즉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도, 그리고 똑똑하다는 사람들도,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싸우는 투사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아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람들로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이 제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이것은 교회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모여온 것을 말하고 주님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보편적인, 가톨릭적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가르침, 복음은 받아들이려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것임을 제자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사도들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새로운 이름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마치 구약에서 성조들이 시련을 이겨냈을 때,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셨던 것과 같이, 즉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몬은 베드로라 불렸고, 사울은 회개하고 나서 바오로가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천둥의 아들들이라 하였고, 레위를 마태오라고 불렀다. 마태오 복음에서 세리 마태오라고 한 것은 그 회개의 표시로 자신의 이름에 세리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는 것은 신원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은 이제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살아가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여정을 함께 하는 그분의 친구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이 복되다는 것은 예수님의 친구로 함께 간다는 것이다.
주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분과 함께 살고 그분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이 그분과 함께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참된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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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 3, 13)
부르심으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게된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신다.
따름은
다름아닌
예수님
자체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사람의
부르심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우리 마음을
예수님께
두는 것이다.
부족하고
약한 부분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참된 삶의
행복이
예수님께
있음을
알게된다.
부르심과
따름은
하나이다.
따름이
사라지면
부르심도
생명을 잃는다.
부르심에
생명을
더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맞아들임의
살아있는
부르심이다.
날마다
십자가이고
날마다
부르심이다.
온 마음으로
온 삶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삶이
부르심의
가장 큰
의미이다.
부르심을 통해
드러나는
가장 좋은
사랑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우리자신이다.
부르심과
따름으로
성숙해지는
사랑이다.
사랑은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임을
믿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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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메시아 백성의 정체성 ⓹ : 계약과 계명 그리고 인맥 만들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 중 세 번째는 왕직입니다.
왕직은, 정체성의 뿌리가 사제직이요 줄기가 예언자직이라면 정체성의 꽃과 열매에 해당됩니다.
세상의 왕들은 백성을 억눌러 다스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섬기러 오셨으므로
그리스도의 왕직이란 말은 내용상으로 종의 직무 또는 봉사 직무란 뜻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과 새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이로써 첫째 계약은 낡은 것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 맺으신 이 계약은 영원한 계약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시나이 계약은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맺으신 사랑의 계약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이 과정을 발전적 해체라고 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열두 명으로 국한하여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면서도 대체하는 무리로서,
장차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불러 모으는 사명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모으시려는 파스카 과업은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범위를 뛰어넘어 온 인류로까지 보편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러한 계약의 연속성에 대하여 오늘 독서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재자가 되셨습니다”(히브 8,6).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계약 상대가 된 이 제자들을 소개하면서,
이들이 사도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알려줍니다.
첫째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일이며, 둘째는 세상에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고,
셋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행사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과업, 즉 메시아 백성을
모으고 하느님의 파스카를 완성하기 위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독서에서 히브리 서간의 저자가 강조하듯이,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과 마음 속에 내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히브 8,10).
이 열두 제자에게 사도로서의 직무를 부여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실제로 발을 씻어주라는 뜻이 아니라 서로 섬기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내 계명이다.”(요한 15,12) 하신 유언의 의미입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계명을 ‘공동합의성’이라고 해석하여
온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문서를 반포하여 당부하였습니다.
메시아 백성으로 모인 신자들이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에 있어서
각자 모두를 성령께서 이끌고 계심을 잊지 말고 서로의 신앙감각을
존중하여 논의를 함으로써 공동의 합의로 결론을 도출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랑의 이 계명을 가톨릭 평신도, 수도자 그리고 성직자들이
공동합의성과 신앙감각 존중의 방식으로 지키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보게 되면
아마도 ‘인격적인 민주주의’라거나 또는 ‘가톨릭 민주주의’라고 부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와 관계에 있어서도 메시아 백성인 교회가 세상에 빛을 비추는 셈이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곳곳에 공동체를 세우면서도 이러한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는 어느 곳에 도착해서도 노동하는 삶으로 모범을 보이며 인격적인 감화를 주고자 노력했으며,
그렇게 해서 신자들을 얻으면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지도자를 내세워주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결코 그 공동체에 눌러 앉아서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발휘한 사도로서의 권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직 신앙 연륜이 짧은 공동체 안에서 궁금한 문제가 생기거나 다툼이 생기는 경우,
그에게 문의해 오거나 조정을 부탁하기도 했으므로, 사도 바오로는 다른 여러 곳에
계속해서 선교하기 위해서 그들 공동체에 대해서는 편지로 대답하거나 조정을 시도했습니다.
그의 많은 사목서간들이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으로서,
그가 신앙 공동체들을 인격적으로 건설했다는 흔적입니다.
특히 말년에 쓴 로마서 16장에 보면, 그가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함께 했거나 도움을 받은 선교사들의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로마는 아직 방문도 하기 전인데도, 그곳에 그가 알고 있는 이들이 대단히 많은 것으로 보아
사도 바오로가 구축해 놓은 선교사의 네트워크가 방대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혈연, 지연, 학연 등에다가 이해관계를 도모하기 위한 인맥이 인간관계의 대부분입니다만,
메시아 백성은 복음적 가치를 지키고 관철하기 위하여 복음적인 인맥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사도로 양성하셨듯이, 그리고 사도 바오로가 광범위한
선교사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듯이, 우리네 인간관계도 복음화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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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황님께서 성탄 미사를 봉헌하면서 코로나19 백신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백신은 부유한 나라의 국민에게만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공기를 모두가 공짜로 이용하듯이, 햇빛을 모두가 공짜로 받듯이, 바람을 모두가 공짜로 느끼듯이 백신은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한 나라의 국민은 무료로 백신을 맞도록 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탄을 맞이하는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에 작은 연못이 있었습니다. 연못 속에는 붕어가 두 마리 살았습니다. 어느 날 붕어는 서로 싸우고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물은 더러워졌고, 결국 연못에는 한 마리의 붕어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1년 분명히 보았습니다. 바이러스는 여권이 필요 없었습니다. 바이러스는 국경도 필요 없었습니다. 바이러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멀리 이동하였습니다. 우리 모두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서 백신은 공공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7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법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례성사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하느님의 법을 받아들이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성사입니다. 견진성사는 성령의 은사를 받아 신앙이 깊어져 열매를 맺는 성사입니다. 고백성사는 허물을 벗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일치의 성사입니다. 병자성사는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성사입니다. 혼인성사는 하느님의 축복 속에 성가정을 이루는 성사입니다. 신품성사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제를 선발하는 성사입니다. 충실한 성사생활은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켜주는 강력한 백신입니다.
교구 성소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예비신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후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 제단, 감실, 성작, 성합, 제의와 같이 전례에 필요한 성물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의자, 컴퓨터, 세탁기, 운동기구와 같이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기숙사를 축성할 때 후원자들을 초대하였습니다. 기숙사 현관 입구에는 후원자들의 명단을 적은 동판을 만들었습니다. 신앙인들의 이름은 어느 곳에서 볼 수 있어야 하나 생각합니다. 기부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에, 자선과 나눔을 한 사람들의 명단에, 누군가를 도와준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의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지금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주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명단에 신앙인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함께 복음을 전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우리들 각자의 이름이,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기억되고 기록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충실해야 합니다. 주어진 능력과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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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연중 제2주간 금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소聖召의 신비
- 주님은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신다 -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그림처럼 묘사되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셨다.’는 서두의 대목도 깊은 묵상 자료가 됩니다. 여기서 택한 강론 제목 ‘성소의 신비-주님은 원하시는 사람을 부르신다-’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르치는 것은 호숫가에서 하시고, 기도하시거나 당신 제자들에게 중요한 일을 하실 때에는 군중에게서 떨어져 산으로 오르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산과 호수 사이임을 봅니다. 참 상징성이 깊습니다.
산이 참 많은 나라 한국이요 산이 들어가는 지명도 많습니다. 제 경우만 해도 예산禮山의 봉산鳳山이 고향이고 중고등 학교는 덕산德山에서 나왔습니다. 예禮와 덕德의 고향이라 해서 예산, 덕산입니다. 추사 김정희의 고향도 예산입니다. 얼마전 감동깊게 읽은 추사 김정희 평전이었습니다. 책 표지의 글귀도 잊지 못합니다.
‘추사 김정희;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이어 한자 산숭해심山崇海深이란 말마디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산숭해심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바로 추사 김정희의 인물됨됨이와 동시에 저는 복음의 예수님의 모습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명당은 배산임수背山臨水라 산을 배경으로 하여 강이나 하천,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을 꼽습니다.
그러고 보니 산의 기도처와 호숫가의 가르침터를 지닌 예수님은 명당에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더불어 공자의 ‘지자요수 덕자요산智者樂水, 仁者樂山’ 즉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산과 호수를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새삼 요셉수도원이 불암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주님의 큰 천복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늘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불암산이기 때문입니다. 앞에 호수나 바다는 없어도 저는 푸른 하늘을 바다처럼, 흰구름을 바다의 섬처럼 생각하며 바라보기도 합니다. ‘하늘과 산’에 이어 ‘하늘과 강’의 비유 역시 제가 좋아합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 안으로는 하느님 바다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강’처럼 내적여정의 삶을 살아가는 분도 수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열두사도를 뽑으십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소의 신비요 우리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도 성소를 판단할 수도 없고 성소의 호오나 우열을 비교할 수도 없음을 봅니다. 다 각자 하느님만이 아시는 고유의 성소요, 성소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열두사도의 면면이 참 다양하기가 흡사 하나하나가 고유의 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유상종, 예수님은 자기에 맞는 비슷한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선입견이나 편견없이 하느님의 안목으로 있는 그대로의 고유한 사람을 뽑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의 시야와 통찰은 얼마나 높고 깊은지 말그대로 하느님을 닮아 산숭해심입니다.
문득 어제 읽은 천년고찰 실상사에 관한 기사가 생각납니다. 산속에 있는 절이 아니라 유일하게 마을 한복판에 자리잡은 절입니다. 혹자는 실상사를 두고 “어디를 가든 내가 풍경의 중심이 되는 땅”이라 하니 흡사 주님 안에 있는 성소자들인 우리를 상징하는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그 현실에 중심이 된다는 뜻으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라는 말마디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실상사 종무실 안내판의 글씨 내용도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미쳐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홀로도 빛나고 함께도 빛나라!”. 또 주로 산을 촬영하는 작가의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산을 내버려 두고 건들이지 말라”, 그대로 산과 같은 형제들과의 평화로운 관계를 상징하는 말마디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서로 내버려두고 건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열두 사도에 대한 복음 말씀도 사도들은 물론 우리의 신원을 분명히 해줍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우선 제자로서 주님과 함께 머물러 배우는 관상의 시간에 이어 파견되어 사도로 활동하는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 밖으로는 예수님의 활동을 위임받는 활동의 사도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과 함께 관상의 제자들로 미사참여후 활동의 사도들로 삶의 제자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사도의 활동에 앞서 제자의 관상이 우선적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의 새계약의 대사제 예수님은 복음의 예수님보다 더 심원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사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열두 사도보다 더 잘 배워 깨달아 깊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하는 네가지 새계약의 특징은 그대로 대사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1.새계약은 외적인 법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새겨지는 내적인 법을 뜻한다.
2.새계약은 옛계약과 달리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양자를 완전히 일치시켜 ‘하느님의 백성’과 ‘백성들의 하느님이 되게 한다.
3.새계약은 백성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 그분의 뜻을 직접 알 수 있게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 법을 우리들 마음에 새겨 주시기 때문이다.
4.새계약의 특징은 사죄와 용서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죄를 사해 주신다.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죄를 용서한다는 말씀이다.
바로 예레미야 예언자의 새계약은 그대로 대사제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새롭게 부르시고 당신 관상의 제자로, 활동의 사도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중심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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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새벽을 열며.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빠다킹 신부님.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사회 심리학 교수 폴 피프(Paul Piff)는 ‘모노폴리’를 이용한 실험을 했습니다. 모노폴리는 주사위를 던져 판 위를 이동하며 도시를 사고 건물을 짓는 보드게임입니다. 솔직히 이 게임을 잘 모르겠지만 설명을 들으니, 저 역시 어렸을 때 많이 했던 ‘브루마블’ 게임 같은 것 같습니다.
그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동전을 던져 소위 ‘금수저’ 참가자와 일반 참가자로 나누었습니다. 금수저 그룹은 일반 그룹보다 두 배에 달하는 자금을 받았고, 보드판을 한 바퀴 돌아 출발점을 지날 때마다 받은 보너스도 두 배였습니다. 그리고 주사위도 두 배로 더 던져서 더 많이 움직일 수 있는 혜택도 주어졌습니다. 과연 어느 팀이 이겼을까요?
당연히 금수저 그룹이 이겼습니다. 그런데 게임 후 승리의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이 머리를 잘 써서.”, “특정한 부동산을 잘 구매했기 때문에” 등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받은 특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당연히 받고,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감사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받은 혜택은 당연하고, 좋은 결과가 일어난 것은 자신이 잘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반대로 나쁜 결과를 얻게 될 때는 운이 없거나, 다른 누구 때문이라면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부정적 생각과 긍정적 생각 때의 뇌 혈류량을 측정해보니, 긍정적 생각을 할 때의 뇌 혈류량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즉,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증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받은 특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는 아닐까요?
지금의 나는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부르시기에 지금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과 재주 때문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은 참으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하느님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파견으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받아서 주님처럼 놀라운 표징을 세상에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남들보다 많이 공부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 많은 봉헌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기도와 묵상을 열심히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제자들은 교만하지 않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착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살았고, 순교의 길을 행해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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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나이를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언제나 자신을 새롭게 만들기 때문이다(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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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데이비스 대학의 심리학자 로버트 에몬스는 192명의 학생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 일기를 쓰게 했습니다.
A 그룹은 기분 나쁜 일에, B 그룹은 감사한 일에, C 그룹은 일상적인 일에 초점을 맞추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
일주일 뒤, B 그룹의 행복도가 가장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혹시 몰라 1년 동안 이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결과는 역시 B 그룹의 행복도가 제일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B 그룹은 질투를 느끼거나 신경질을 내는 경우가 줄었고, 좌절감을 겪는 일도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질투, 신경질, 좌절감 등... 우리가 피하고 싶은 감정들입니다. 그런데 감사의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좌절을 헤쳐나갈 힘은 눈앞의 시련에 감사해 할 때 비로소 우리 안에서 솟아납니다.
감사를 하면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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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연중 제2주간 금요일.<사도>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3-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면서,
그 교회의 주춧돌로 삼기 위해서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19-22).”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묵시 21,14).”
1) 열두 사도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특별히 뽑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뽑으셨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특별한 ‘장점’과 ‘자질’이 있었기 때문에 뽑으셨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 사랑, 희망, 희생정신, 예수님에 대한 충성심, 열정 등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뽑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열정(뜨거움)입니다.
예수님은 ‘미지근함’을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이 말씀은 뜨겁든지 차든지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미지근한 것은 찬 것과 같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뜨겁지 않은 것은 모두 찬 것입니다.)
사도들은 대단히 열정적인(뜨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삶을 보아도 그렇고, 그들의 죽음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도 바로 그 ‘열정(뜨거움)’입니다.
2) 사도들에 관해서 말할 때,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들의 부족한 점, 실수,
잘못 등을 언급하면서 그들도 우리처럼 부족하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만 말하고 그들의 위대함을 말하지 않는다면,
또 사도들을 세속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대단히
불공평한 일이고, 의도적으로 사도들을 깎아내리는 죄가 될 뿐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사도들의 부족한 점, 실수, 잘못 등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그들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들도 자신들의 부족한 점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고,
결국 위대한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3) 사도들의 직업, 학력, 출신 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뽑으실 때 그런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일부러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뽑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업, 학력, 출신 같은 것은 보지 않으시고,
사도가 될 만한 자질만 보시고 그들을 뽑으셨습니다.
좋은 예가 마태오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사도가 될 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지 세리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직업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자질만 보셨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마태오가 세리였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집착하고, 그것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과 집착은 특정 직업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4)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직접 보았습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배반자 유다 대신에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의 장면을 보면,
바로 그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열두 사도의 임무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예수님 부활을 증언하는 임무’입니다.
이 증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증언입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일도 복음 선포에 포함됩니다.)
5)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가 배반자가 되어서
사도단에서 탈락한 것은 ‘영원한 수수께끼(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잘못 뽑으셨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것이 원래 하느님의 계획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도 사도로 뽑힐 때에는
분명히 뽑힐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탈락한 것은 그 자신이 선택한 일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끝까지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다가 모두 순교했는데,
그것도 그들 자신들이 선택한 일입니다.)
순교자가 되든지 배반자가 되든지 간에 아무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과 멸망은 각 개인이 각자 스스로 선택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장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배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배반자가 지옥에서 겪는 고통 가운데에서 가장 큰 고통은
아마도 ‘후회’와 ‘절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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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마르3,13)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사도는 '출가제자'입니다. 지금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네요.
반면 신자들은 '재가제자'입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제자'였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습니다.
열두 사도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부와 세리와 같은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 로마의 앞잡이인 세리, 그리고 반로마세력인 열혈당원 등.
이는 '12'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와 일맥상통합니다.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12부족을 상징하는데, 열두 제자들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구하시겠다는 '큰 사랑의 드러남'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했고,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자신들의 목숨을 건지려 줄행랑을 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향해 가실 때, 예수님의 십자가도 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당신의 최측근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세상 기준과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제자들은 '대기만성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도 참제자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성령을 받고, '참제자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실망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이렇게 부족한 나를 당신 제자로 뽑으셨다는 것을 꼭 기억합시다!
그리고 아직도 많이 부족하고 자주 넘어지는 제자이지만, 끝까지 견디면서 성령체험과 성령의 힘으로 다시 태어나는 참제자가 됩시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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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의 전환을 보여 주십니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온 때에, 그들과 맺은 계약과는 다르다."(히브 8,8-9)
히브리서 저자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예레 31,31-34 참조)을 인용하여 옛 계약과 새 계약의 관계성을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성조들과 계약을 맺으셨던 하느님께서 이제는 먼저 새 계약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 계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히브 8,10)
이번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법을 돌판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에 새겨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존재 안에 각인시키시겠다는 뜻이지요. 이는 사실 새삼스런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 존재 안에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는 순간부터 이미 하느님의 마음이 스며들었으니까요.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마르 3,16)
열둘은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그대로 이어받은 완전한 숫자입니다. 야곱이라는 한 아버지의 열두 아들에게서 번성한 구약의 백성이, 저마다 다른 출생과 성장배경을 지닌 채로 예수님께 모여와 영적으로 형제자매를 이룬 새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확장됩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마르 3,13)
선택 기준은 에수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 주도권이 철저히 예수님께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열두 사도의 선정은 편애과 불공정일까요?
사실 제자됨이 세속적 영화나 명예, 재물과 번영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뒤따르는 삶이니, 모르지 않고서야 마냥 부러워할 일도 아니겠지요. 안다면 오히려 부르실까 봐 외면하거나 줄행랑을 놓을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마르 3,14-15)
열두 사도를 뽑으신 목적입니다. 당신과 함께함, 복음 선포, 치유와 구마의 권한 부여라 요약할 수 있지요. 기존의 종교 권력은 먼저 율법 지식을 머리에 넣어주고, 율법이 정한 예식을 익히도록 이끌겠지요. 예수님의 제자 양성은 함께함, 복음 선포, 구마와 치유 권한 부여라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법을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 새겨주는 방식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공동생활에서 기도와 사랑을 배우고, 복음 선포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체험하며, 구마와 치유 권한을 통해 연민과 자비를 성장시킵니다. 하느님의 법이 돌판에서 하느님 모상인 인간 내면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첫째 계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히브 8,13)
하느님께서 구약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새로운 계약이 에수님을 통해 펼쳐집니다. 옛 것에 매여 죽은 문자와 씨름하던 만물이 비로소 새로운 숨을 들이키는 때입니다. 옛 계약에서 새 계약으로의 전환이라는 '비연속성'과,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사도를 통해 하느님 백성을 구성하는 '연속성' 모두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들어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새로운 법이 마음에 새겨진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율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이시지요. 말씀이 통째로 우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니 글을 몰라도, 신분이 낮아도, 민족이 달라도 하느님의 뜻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스러움과 부족함을 아시고도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 곁에 두시고, 얕은 지혜와 아둔한 혀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초라한 연민이나마 치유와 위로의 도구로 쓰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저마다 받은 우리의 소명이 금수저, 흙수저처럼 태생적이지 않고 저마다의 영혼 깊이 새겨진 사랑의 흔적이니 우리는 행복합니다. 제자로 부르심 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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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리더는 살려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전삼용 요셉 신부님.
마르코 복음은 제대로 보니 정말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공동체를 통해 병이 치유 받고 죄의 용서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이에서 분란의 원인이 된 터라 아마 공동체의 리더의 자격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바오로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서운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 복음을 보면 아무래도 리더는 규율보다는 자비와 사랑이 앞서야 한다고 믿는 것은 확실합니다. 장발장에게 자비를 베풀었던 주교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도 역시 리더로서의 예수님의 특별한 모습이 나옵니다. 일단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고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이는 “사랑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지 않으냐?”라고 물으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사랑을 깔아 누르는 집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에 마음이 몹시 아프고 슬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십니다.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곧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안식일에 그렇게 자비를 베풀면 그들에게서 보복이 온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참사랑은 자신이 죽는 두려움도 넘어섭니다. 자기 생각을 먼저 한다면 사랑을 베풀 수도 없고 그러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리더는 자비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이유는 자신의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돈과 명예와 육체적 편안함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사랑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세속-육신-마귀에 빠진 지도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는 사랑한다며 공동체를 이끌지만 결국 공동체를 이용해 자기 배를 불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많은 수가 수백, 수천억 원을 횡령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 때 경제가 발전하고 모든 것이 나아진 것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자만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들은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배를 먼저 채우려는 리더는 공동체에 해를 끼칠 수밖에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음을 잘 압니다. 남미 나라들이 잘 살다가 그렇게 몰락한 이유도 자기 배나 불린 지도자들 때문이고 카다피와 같이 가족들이 배를 불리는 나라의 시민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놀라운 것은 많은 가난한 이들이 그들 때문에 가난한데도 여전히 그들을 또 뽑아준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가난할 줄 알아야 자녀가 배부를 수 있는 것은 진리입니다.
남극을 탐험한 두 탐험가가 있습니다. 우선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입니다. 1911년 12월에 남극에 도착했지만, 그 뒤 9개월 동안 연락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1912년 11월에 그의 일기장과 시신이 발견됩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사처럼 죽을 것이며.. (중략).. 안타깝지만 더 쓸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꿈이 사라졌다.”
스콧을 비롯한 7명의 대원은 모두 그렇게 사망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년 뒤 1914년 8월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Henry Shackleton, 1874~1922)도 27명의 동료와 함께 남극에 도착했지만 역시 조난을 하고 맙니다. 그들은 남극에서 무려 1년 7개월을 버티고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새클턴은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원들을 위로해주고 용기를 주고 팀을 하나로 만들어 갈라지지 않게 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조난한 곳에서 사우스조지아 섬까지는 무려 1280km. 그토록 멀고 까마득한 곳을, 겨우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위로,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야 합니다. 그 바다에는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만만찮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섀클턴은 해냈고 또 3000m가 넘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산을 넘는 등의 4개월간의 고생 끝에 조난 후 643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모두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스콧 선장도 훌륭한 탐험가였지만 섀클턴은 동시에 훌륭한 리더였습니다. 자신의 팀을 하나로 만들 줄 알았고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차리는 지도자 앞에서는 공동체가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는 지도자의 피로 결속됩니다.
피를 내어주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지도자가 있고 공동체의 피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리더가 있습니다. 일본은 이미 저출산이 자기 나라에 큰 위기가 될 줄을 알면서도 노인에게만 돈을 썼습니다. 노인 복지는 잘 되었을 수 있지만, 경제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정책을 편 이유는 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노인 인구가 많으니 그들에게만 잘해주면 정권을 오래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일본은 정권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라도 망해갑니다.
우리는 자신과 자신의 정당이 지금 피해를 보아도 결국 우리나라 미래의 발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살리려는 리더는 공동체를 죽일 것이고 자신을 죽일 줄 아는 리더만이 공동체를 살릴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일 줄 모르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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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마르코 3장 13-19절
"그 무렵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근사한 설렁탕집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습니다.
점심을 한끼 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뺑뺑 돌아다녀도 문을 연 음식점이 없더군요.
아이들은 보채고, 큰 마음먹고 한번 쏠려고 했었는데...
"이를 어쩌나? 집에 돌아가서 라면이나 끓여야 하나?"하고 고민하던 중에 아이 하나가 연중무휴, 24시간 영업하는 근사한 설렁탕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우리는 로또복권에 당첨이라도 된듯이 크게 떠들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눈치 없는 한녀석이 "신부님!" 하고 크게 소리치다 보니 사장님이 제 신분을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불쌍하게 생긴 아이들 얼굴과 그에 못지 않은 제 얼굴을 연신 바라보시던 사장님은 크게 선심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저희 앞에 놓여진 음식을 보고 저희는 깜짝 놀랐습니다.
옆 식탁과는 완전히 비교가 되었습니다.
밥도 꾹꾹 눌러 담아주셨지만, 설렁탕 그릇 밑에 깔린 고기의 양이 벌써 달랐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큰 파전까지 하나 서비스로 주셨는가 하면 괜찮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10000원이나 디스카운트를 해주셨습니다.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 죄송했지만, 불쌍한 저희들을 위해 각별한 마음을 써주신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 측은지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 열심히 기도하신 다음, 당신의 구원사업을 협조해줄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평소에 눈여겨 보아두셨던 사람들 명단을 몇배수로 뽑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심사숙고를 거듭하십니다.
그것도 부족했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산에 들어가셔서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당신 구원사업에 잘 협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식별하기 위해 밤새워가며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 그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가련한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 "측은지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은 덕중의 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측은지심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됩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덕 역시 측음지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영육간의 고통들, 영육간의 배고픔과 목마름, 좌절과 한계, 너무도 무거운 십자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십니다.
하루 온 종일, 당신 백성을 향한 구원사업에 매진하십니다.
밀물처럼 다가오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단 한명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다 대면하십니다.
그들의 고통 앞에 눈물 흘리시고 잘 해결되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청하십니다.
당신 홀로 힘으로는 중과부적임을 절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능력과 자질을 똑같이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우리의 협조를 강력히 요청하고 계심을 저는 강하게 느낍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의 두손이 되어드리고, 두 발이 되어드리는 하루이길 빕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되어드리고, 주님 기적의 능력이 되어드릴 수 있도록 우리의 가진 바를 기꺼이 내어놓고 나누는 하루이길 빕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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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2. 김 로마노 형제님.
2021년 1월 22일 금요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열 두 사도 (마르3,13-19) 제1독서<그리스도는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 이십니다.>(히브8,6-13) 형제 여러분, 6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7 저 첫째 계약에 결함이 없었다면, 다른 계약을 찾을 까닭이 없었을 것입니다. 8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 9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이 내 계약을 지키지 않아 나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10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1 그때에는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제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 13 하느님께서는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첫째 계약을 낡은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곧 사라집니다. 화답송 시편 85(84),8과 10.11-12.13-14(◎ 11ㄱ)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리라. ○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여 주시고, 당신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마르3,13-19)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14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연중제2주간 금요일 제1독서(히브8,6-13)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 (6) 히브리서 8장 6절의 상반절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뛰어나심에 대한 묘사인데, 이것은 히브리서 1장 4절에 그가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이라는 묘사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히브리서 8장 6절은 모든 동사가 완료 능동 직설법으로 되어 있는데, 후반절의 '중재자'라는 용어는 법적 중재자를 의미하는데, 사제가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에 서듯이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이에 서신다는 것이다(히브9,15; 12,24; 1티모2,5). 이것은 대사제의 직무와 역할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에서 '세워진'은 완료 수동 직설법이고, 히브리서 저자는 '더 나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모세의 계약보다 우월한 예수님의 권위를 드러낸다. 이것은 히브리서 7장 7절의 '윗 사람에게서'의 '위'를 뜻하는 '더 높은', '더 나은', '뛰어난', '훌륭한', '더 가치있는'에 해당하는'크레이토노스' (kreittonos; better)라는 단어를 통해 대조가 나타난다. 히브리서의 핵심은 모세의 계약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계약을 비교함에 있는데, 이것이 히브리서의 반복된 주제이다. 한편, '계약'을 뜻하는 구약의 용어인 '베릿'(berit; covenant)은 정의하기에 쉬운 용어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A와 B가 계약을 맺을 때 송아지 한 마리를 가져와 자르고 (죽이고), 그 갈라진 틈으로 지나간다. 그것을 '계약을 맺는다'에 해당하는 '카랏 베릿'(karat berit)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말하자면 계약을 어긴 당사자는 그 잘려진 송아지처럼 죽는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예레34,18). 그래서 '베릿'(berit)이라는 히브리 단어를 'covenant'라는 영어로 번역한다. 이것은 A와 B가 인격과 생명, 존재를 뜻하는 '피'로서 맺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교환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을 대표로 하는 모세와 하느님과의 계약에서 나온 '계약의 산물'인 '십계명'(신정법; 神定法)을 어기면 죽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까, 동물이 사람 대신에 속죄 제물로 번제단에서 바쳐졌고, 이제 신약에 와서는 수많은 동물들 대신에 무죄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상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일과 하느님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는 의로운 백성이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히브리서 8장 10절에서 인용되는 예레미야서 31장 31~34절 중의 말씀인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은 하느님의 법이 외적 행위에 대한 규정이 아니라 내적인 갈망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경건하고 의로운 백성이 되는 목적은 그대로 이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계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는 인간의 죄성과 불완전함과 나약함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로마7장; 갈라3장).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업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은 무상으로 주어지지만, 동시에 자신의 구원과 성화를 위해 끊임없는 회개와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계약 앞에서, 하느님의 자신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온전히 믿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쳐 회개해야 하며, 그 사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으로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실천하고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연중 제2주간 금요일] 열두 사도 (마르 3,13-19) 13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 산에 올라가시어~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그 아버지의 뜻이 곧 당신의 운함이라는 말씀입니다. 14ㄱ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 열둘~ 구약의 12지파(아들)를 신약의 12 사도로- 교회를 세우심입니다. 그 교회는 하느님나라 백성들의 모임인데~ (묵시7, 4)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인장을 받은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든 지파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 12지파 ⅹ 12사도 = 144 ⅹ1000 하늘의 충만입니다. 하늘의 인장- 자격 없는 타마르를 회복시켜 주었던 그 인장입니다.(창세38;18참조) 창조주, 그 전능하신-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신의 약속입니다. 그 구원의 인장, 약속으로 완성하시는~ 그 하느님 나라 백성을 의미하는 숫자가 144,000명입니다. 그 숫자만 구원 받는 그런 잘못된 생각은 헛된 망상일 뿐입니다. (2고린1, 22)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 14ㄴ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15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주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 주님과 하나 됨을 뜻합니다. 그렇게 주님과 하나 된 후, 복음 선포입니다. 그랬을 때 복음 선포가 마귀를 쫓는 힘입니다. 구마는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곧 권한입니다. (마태17, 18)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호통을 치시자 아이에게서 마귀가 나갔다. 바로 그 시간에 아이가 나았다. = 말씀으로 호통 치십니다. 칼날 같은 말씀입니다. (히브4, 12)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 사도란, 지도자란,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말씀, 그 칼로 사람 속에 들어있는 그 이기적 죄 성을 들쳐 내어 잘라 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계명을 뱀의 유혹으로 사람의 말, 계명으로 잘못 받은 12지파의 잘못, 그 더러운 영의 거짓 가르침을 12사도가 잘라내는 그 구마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을 구마의 능력으로 갖지 않고 사람의 뜻을 충족시키는, 만족시키는 그 사람의 말로 갖고, 고집하면 그것이 곧 뱀, 더러운 영의 말을 계속 먹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물-말씀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 이지만~ 사람의 말 그 가르침은 영원을 줄 수 없는 다시 목마르게 하는 곧 끊어질 죽음의 물입니다. 16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 시몬(물이 없는 자갈)에게 물이 주어집니다. 베드로(물이 나오는 반석)가 됩니다.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 그 하느님의 말씀, 그 복음이 주어집니다. 17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19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 그런데 기도하신 후 뽑으신 제자가 배반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하고 다른 제자들 도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기도가 잘못된 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 만을 위해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도 예수님도 알고 계셨지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우리 자신들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맡기신 겁니다. (로마3,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 구원은 100% 하느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십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히브11,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 사라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 (창세18, 12)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 =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없었던 사라에게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이 낳으신 겁니다. 믿음이란~ 하느님께서 꼭 이루실 것을 믿는 겁니다. 그 믿음이 있을 대 희망만이 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 그 약속이 계시기에 우리는 늘 희망입니다. ♡ 아멘 -*^ㅇ^*-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복음(마르3,13~19)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14~15) 마르코 복음 3장 14절의 '세우시고'에 해당하는 '에포이에센'(epoiesen; he appointed; he ordained)의 원형 '포이에오'(poieo)는 사람의 행위와 관련될 경우에는 어떤 물건의 외형을 '짓다', '만들다'(마태17,4) 또는 '일하다', '노동하다'(마태20,12)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께 적용되면 무에서 유를 '만들다','창조하다'(마태19,4)는 의미가 된다. 열두 제자를 세우신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마르3,11), 제자들 역시 인위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신적 권능에 의해 세워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단어가 계약적 관점에서는 '추종자를 지명하다'는 뜻으로 '어떤 것을 다른 성질의 것으로 만들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모나고 고집스럽고 우직한 갈릴래아 출신 어부나 탐욕스러운 세리 등을 당신의 제자로 새롭게 변화시키셔서 복음 전파와 선교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기셨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단어가 구약적 관점에서는 왕이나 사제에게 직책을 부여하는 표현도 되므로,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사람들을 하느님 나라의 대사로 지명하여 세우신 것이 된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본문 이하 본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본문의 '함께 지내는 것'과 본문 이후에 나오는 '복음 선포'와 '구마 행위'를 추가하여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하지만, 원문에는 '~하기 위하여'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 '히나'(hina; that ~may)가 두 번 사용된 사실을 감안하면, 우선 '예수님 당신과 함께 지내는 것'과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하는 것'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이 옳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제자 선택의 첫번째 목적은 당신과 '함께 지내는 것'이다. 즉 참된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자야 된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그분의 사상, 정신, 마음, 인품, 삶의 가치관과 방식, 고난을 비롯한 인생 문제를 다루는 방식, 나아가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것들을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 제자됨의 일차적인 목적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선택의 두번 째 목적은 '파견' 즉 '복음 선포를 위해 보내는 것'이다. '그들을 파견하시어' 앞에도 '~하기 위하여'라는 뜻을 가진 '히나'(hina) 접속사가 또 사용되었다. 그리고 '파견하시어' 다음에 나오는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에 해당하는 '케륏세인'(keryssein; to preach)과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에 해당하는 '에케인'(echein; to have)는 모두 부정사 현재형으로서 '파견'의 이유를 나타낸다. 즉 이것은 파견된 제자의 사명으로서 '복음 선포'와 '구마'를 명령하시고 지적하신 것이다. 여기서 '파견하시어'에 해당하는 '아포스텔레'(apostelle; he might send ~out)는 '사도'에 해당하는 '아포스톨로스'(apostolos)의 동사형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제자'란 '예수님께서 전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세상 안에서 선포하는 자들' 이며, 세상으로 보내어지지 않고 교회 안에서 머물기만 하는 자들은 주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에 해당하는 '케륏세인'(keryssein; to preach)은 특히 진리와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므로, 주님의 제자된 자는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제 파견된 제자들의 두번 째 사명인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는 것'에 대한 말씀이 마르코 복음 3장 15절에 나온다. 이 구절은 병행 구절인 마태오 복음 10장 1절, 1장 21~28절, 32절, 3장 10~12절을 참고하면, 병을 고치는 치유 행위와 관련되거나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마르코 복음 3장 15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가 단순히 관념적 구원을 강조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질적 변화까지 가져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 본문을 통해 한 가지 더 강조되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나라의 확장이란 사탄의 세력의 축소라는 사실이다(에페6,12). 여기서 '마귀들'로 번역된 '타 다이모니아'(ta daimonia; devils; demons)는 명사 복수형으로서 '사탄'의 졸개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은 타락한 천사로서의 마귀들의 존재를 부정해서도 두려워해서도 안되는데, 그것은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자는 그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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