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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보암의 불안한 마음 / 열왕기상 12:25-33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는 생물 가운데, 역사를 가진 유일한 생물은 인간입니다. 다른 생물의 세계에는 역사에 대한 기록도 없고, 역사를 통해 배우는 통찰력 같은 것도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역사의 기록을 가지고 있고, 그 기록을 통해 과거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역사를 통해, 가장 배우지 못하는 생물 또한 인간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면, 같은 실수를 선조가, 아버지가 그리고 자녀가 합니다.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습니다. 우리 삶의 성공의 열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습니까? 부유한 것과 많이 배운 것, 그리고 배경이 좋은 것은 인생이 성공하는 데 유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인생의 성공은 결국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 살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있어야, 인생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가에 성공은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할 때, 삶의 목표와 비전이 하나님의 기대와 소원에 조율 되어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공을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마 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다 해도, 손을 펴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을 그냥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우선순위로 두고, 하나님을 존중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십니다.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서, 신앙 선배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무나 쉬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통해 배우고 있습니까?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면, 삶의 길을 열어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이 가장 필요한 순간 과연 우리는 그분을 의지합니까? 잘 알고 있는 것과 온 몸으로 실행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척 지혜스럽지만, 반면에 무척 어리석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예를 보면 그의 별명은 ‘지혜의 왕’ 이었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잠언과 지혜로운 말들을, 역사상 가장 많이 남긴 왕도 솔로몬 이었습니다. 가장 평화롭고 부유한 시대의 왕이었습니다.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모든 복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의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가 복을 받은 것은, 백성을 좀 더 잘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했던, 그의 마음의 중심을 본 하나님께서, 구한 것 외에 다른 것도 다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로 더 잘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을, 스스로 유지해 보려고 꾀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외교정책을 한답시고, 그는 천명의 부인을 두었습니다. 그 당시 풍습은 아내로 맞이한 여자가 믿고 있는 이방 신까지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여인들은 다 왕의 딸들이었습니다. 산마다 신전을 지어주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산마다 천명의 여인들이 가지고 온 이방 신의 산당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이 결과 솔로몬의 아들 대에 가서 나라는 쪼개지고 맙니다.
신앙이 종교로 전락하게 되는 원인의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간이, 오로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만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피조물의 자리에서 벗어난 불의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굳게 세우시고,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해, 인간을 상대로 일을 추진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대로 자신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평가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곡해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신앙이 아닌 종교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로보암에게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로보암의 모습이 오늘 현대 교회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서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하였습니다.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백성들은 르호보암을 왕으로 섬기기를 거절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남쪽 유다 지파만이 여전히 르호보암을 왕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에게 한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들의 신앙문제입니다.
26-27절 “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이것을 보면 여로보암의 염려가 무엇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이 있는 다윗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 제사를 드린 후에, 다시 북쪽으로 돌아와서 변함없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섬긴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고 불안해 할 것도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고, 또 백성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여로보암으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다윗의 집을 출입하다보면, 결국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 르호보암에게로 기울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르호보암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상황까지 상상하는 여로보암의 마음에, 불안감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을 다윗의 집으로 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윗의 집에 가지 않고서도, 백성들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줘야 했던 것입니다.
28-29절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들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말처럼 여로보암이 취한 조치는, 신의 형상을 만든 것입니다. 성전에만 신이 있다고 여겼던 백성들에게, 신을 만들어 제공함으로써, 일단 성전에까지 가지 않아도 신을 만날 수 있고, 신 앞에 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입니다.
31-32절 “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이 말처럼, 제사를 드릴 성전을 대체할 산당을 만들고,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없으면 안되는 제사장을, 레위 지파가 아닌 보통 백성들 중에서 세우고, 절기를 지내는 날짜도 유다와 비슷하게 정하여 세워서, 신이라 하며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으로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성전까지 가지 않아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줌으로써,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은 도대체 뭡니까? 분명 여로보암이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절기의 날짜를 임의로 변경할 수 없음도 알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아니고서는 제사장이 될 수 없음도 알 것입니다. 제사는 성전에서만 드려져야 한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이 시킨대로, 제사하고 분향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여로보암이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든 하나님의 말씀이든, 그 모든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들이 여로보암이 만든 종교를 쉽게 따라가는 것은, 그동안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섬겼던 것이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관계성에서, 이스라엘이 신으로 인정하는 하나님을, 함께 신으로 인정하는 것에 불과했음을 알게 합니다. 곧 기독교를 믿는 집안에 태어난 사람이, 내 집안이 신으로 믿는 하나님을, 자연히 신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로보암이 행한 것이나, 여로보암이 행한 일을 받아들이는 백성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인간에게서, 어떤 폐단이 나타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폐단이란, 신앙이 종교화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어짐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자기의 뜻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미련한 나의 생각보다 더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고, 내 뜻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사라져야 할 악한 것에 불과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종교화 되어버리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만 남게 됩니다.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을 하나 꿰차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들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인위적으로 종교를 만들어 내고 있는 여로보암에게서, 지금 우리들의 현실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자신을 왕으로 섬기는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를 원했다면, 곧 그들의 생명을 생각했다면, 그들이 비록 다윗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 제사를 드리도록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로보암 자신도 생명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생명의 문제 또한 도외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섬기는 백성으로 붙들어 놓는 것에만 관심을 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여로보암과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장 귀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목사라면, 성도들을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성도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문제 때문이라면, 교인들이 자신보다 복음을 더 선명하게, 증거하는 교회로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의 현실은, 생명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의 문제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온통 자신을 위해 신을 하나 꿰찬 사람들이 모여서, 종교놀이하고 있는 모습만 난무할 뿐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두려움은, 내 교인들이 다른 교회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의 관심과 마음이 생명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도들이 이러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목사라고 하는 자리를 굳게 지키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서, 사람을 자신의 교회에 붙들어 놓고,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여로보암과 같은 모습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교회의 경쟁도 무엇입니까? 서로 내 교인 뺏기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목사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저 교회는 이런 것 하고, 저런 것 하면서 재미있던데’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이 목사로 하여금, 패배감과 상실감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들은, 자기 교회의 교인이 다른 교회의 이런 저런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유사 종교를 하나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어왔던 종교와 비슷한 종교를 하나 만들어 내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에게 붙들어 놓기 위해 애를 씁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인간의 존재를 보지 않은 결과인 것입니다. 고전 3:21-23절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사도는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왜 사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사람이 자랑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도, 결국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편에서 세상을 보면, 큰 교회도, 자신의 위치도, 자신의 업적도, 결코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구역과 자리와 영역 싸움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랑거리에 손상을 입지 않기 위해 살아갈 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목사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유사 복음을 만들어 내게 되고, 교인들 역시 자신을 위해 살기 때문에, 진리냐 진리가 아니냐에 관심이 없이, 다만 신앙의 겉모습만 유지하는 것으로 자신을 성도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씀이 전하는 그대로 증거해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뜻에 서서, 인간이 선호하는 말을 증거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설사 교회를 떠난다고 해도,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주님 편에 서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속에 생명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심리상태를 잘 읽고, 그것을 적절히 이용도 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헛똑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백성들을 기만해서, 백성들을 죄에 빠지게 했습니다. 여로보암은 그렇게 해 놓지 않으면 자기가 희생되든지, 아니면 적어도 자기의 후계자가 희생될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왕위도 확고히 하고, 또 자기 왕조를 안정되게 잡아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의 집 안에 남자는 한 명도 남김이 없이 쓸어 버리되, 거름을 쓸어 버림 같이 말갛게 쓸어 버림을 당하리라’ 하셨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 같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리는 주님 앞에 매달려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도움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복을 받고도,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일단 복을 받고 나면, 우리 스스로 머리를 써야 그 복을 유지하는 줄 압니다. 우리는 혹시 솔로몬이나 여로보암처럼,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잊고, 우리 힘으로 살려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살면서 이런 죄를 수 없이 짓습니다.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합니다. 우리 삶의 성공의 열쇠는 주님 인 것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성공의 열쇠입니다. 염려는 오직 기도로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신 것 같지만 무릎만 꿇으면, 눈을 감아도 바로 눈 앞에 보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것을 삶에 적용하는 자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화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흔들리고 변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마음중심에 지켜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말씀만이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최소한 여로보암이 저질렀던 죄를 따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시 무의식 중에 염려로 인해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도록, 우리의 중심을 열어주시고, 영안을 열어 주는 주님의 보혈의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믿음, 가정,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지키게 하옵소서. 예배를 존중하며, 세상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게 하옵소서. 우리의 믿음과 인생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전략을 깨뜨리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견고하게 서게 하옵소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도록 하는 모습이 우리 속에 있게 하시고, 선지자들이 외쳤던 것처럼, 인격적인 여호와에게로 돌아가는 삶을 세상에 외치게 하옵소서. 매 순간 순간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우리가 되게 하시고, 이 일을 위해 우리가 부름 받았음을 알게 하옵소서.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실패를 통하여 교훈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실패의 원인을 교훈으로 삼아, 또 다시 실패의 자리에 서지 않게 하옵소서. 여로보암의 실패가 우리의 실패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는 진리의 길만을 가게 하옵소서. 현실이 어렵다고, 힘들다고 진리의 길에서 떠나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는 죽어도 진리의 길에서 죽게 하옵소서. 망해도 진리의 길에서 망하게 하옵소서. 그것이 결국 사는 길이고 우리 가정과 사회를 살리는 길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