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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21) 우상 숭배
천주교의 성화상 공경, 흠숭과 달라
우상 숭배란 하느님이 아닌 것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잡신이나 마귀, 권력, 쾌락, 조상, 국가, 재물 등 인간이 하느님 대신 다른 것을 숭배하고 공경하면 우상 숭배입니다. 하느님께서 유일한 주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곧 우상 숭배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개신교에서 천주교의 성화상 공경을 우상 숭배로 비난하지만, 천주교는 성모님을 신(神)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분께서 구세주를 낳으신 “주님의 어머니”(루카 1,43)이시기에 공경할 뿐입니다. 천주교는 초기 세계 공의회들에서 결정된 삼위일체 교리와 신앙 고백문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의 공동 유산인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느님만을 믿습니다. 마리아 공경은 4세기경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 이단을 단죄하고 그분의 신성을 강조하고자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로 선포하면서 공식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성화상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근거를 가집니다. 구약 시대부터 하느님께서는 강생하신 ‘말씀’으로 성취된 구원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형상을 만들도록 명령하시거나 허용하셨습니다. 구리 뱀, 계약 궤와 커룹 등이 그러한 것입니다(탈출 25,10-22 참조). 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는 모든 성인의 성화상 공경을 승인하였습니다. 성화상을 공경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화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성화상이 가리키는 대상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성화상 공경은 우상을 금지하는 첫째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 상에 표하는 공경은 존경을 표하는 공경이지, 하느님께만 드려야 하는 흠숭을 성화 상에 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화상은 다만 신자들의 영적 삶에 시청각적인 효과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성화상은 그 형상이 있는 곳에 그 공경의 대상이 계신다는 생각을 일깨워 주고 이들을 바라봄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성인 또는 성모님의 지극한 신앙과 순명의 정신을 우리가 되새기고 본받아 삶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는 특정 사물이나 상징 그 자체에서 영험한 힘이 나온다고 믿으면서 그 자체를 숭배합니다. 흔히 ‘부적’(符籍)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다양한 성화 상은 성인의 통공(通功)과 연관됩니다. 통공이란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공로를 서로 나누고 공유함을 뜻합니다. 지상의 순례자로 있는 사람, 죄의 용서와 정화가 필요한 죽은 이. 하늘에 있는 복된 이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어 오직 하나의 교회를 이루면서 자신의 선행과 공로를 나누고, 기도 안에서 영적 도움을 주고받음을 말합니다. 천주교는 이를 신앙 고백문에서는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천주교에서 성인의 성화상을 공경하는 이유는. 성화상들이 성인들이 보여 준 신앙의 모범을 따르도록 도와주고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20) 연옥
죽은 후의 정화 과정 ‘연옥’
개신교와 달리 천주교는 왜 ‘연옥’ 교리를 믿나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상선벌악의 교리에 근거한 천당과 지옥의 존재를 믿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1티모 2,4) 받기를 원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의 슬프고도 비참한 현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56항)을 겪게 된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의 결과로 누구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고, 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저승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은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 공로입니다.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지옥을 면할 수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기에 개신교는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연옥’에 대한 교리를 믿습니다. 연옥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죽은 뒤에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를 충만히 누리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흠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거쳐야 하는 정화 과정의 상태라고 가르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이 보장되기는 하지만,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0항) 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그리스도교는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전통을 간직해 왔습니다. 연옥의 정화 상태에 있는 영혼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면 그가 지은 죄의 남은 벌들이 감면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사도 신경에서 바치는 ‘모든 성인의 통공’은 개별 심판 이후 공적 심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정화가 필요한 영혼을 위한 기도와 미사성제가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개신교 일부에서는 천주교가 연옥 교리의 근거를 개신교가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마카베오서에서 찾는다는 이유로 반대하기도 합니다. 곧 마카베오서에는 우상 숭배에 빠져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의 전통(2마카 12,38-45 참조)이 담겨 있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죽은 이의 영혼이 자비를 입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성경 구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는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연도’라는 고유한 전통을 통해서 산 이를 위로하고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해 왔습니다. 천주교 신자는 산 이와 죽은 이 모두의 하느님께 구원을 청하면서 죽은 이의 영혼이 영원한 행복인 천국에 들도록 기도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8) 성경 권 이름의 차이
성경 각 권의 이름이 다른 천주교와 개신교
천주교와 개신교 성경의 각 권의 이름은 어떻게 다른가요?
천주교 신자가 개신교 성경을 대하면 성경 각 권의 이름부터 번역 내용의 생소함에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는 신구약 성경을 번역하여 출간한 「셩경젼셔」(1910년) 이후, 개역 작업을 거쳐 「성경전서 개역」(1938년)을 시작으로,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61년), 「표준 새 번역」(1993년)과 「새 번역」(2004년)을 거치면서 각 책의 제목을 그대로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천주교는 일치 운동의 일환으로 개신교와 함께 1977년에 출간한 「공동 번역 성서」를 오랫동안 공용 성경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2005년부터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여 독자적으로 출간한 「성경」을 천주교 공용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구약 성경 39권의 책 이름을 모세 오경(5권), 역사서(12권), 시가서(5권), 예언서(17권)로 분류합니다. 천주교는 구약 성경의 제2경전을 포함하여 총 46권을 경전으로 인정하며, 모세 오경(5권), 역사서(16권), 시서와 지혜서(7권), 예언서(18권)로 분류합니다. 신약 성경 27권을 개신교에서는 복음서(4권), 역사서(1권), 서신서(21권), 묵시서(또는 계시록, 1권)로 분류하는데, 천주교에서는 27권의 권수와 구분은 개신교와 같지만 복음서, 사도행전, 서간, 묵시록으로 구분합니다.
개신교의 성경 이름 줄여 쓰기(축약) 원칙에 따르면, 되도록 한 글자로 하되 그 한 글자는 책 이름의 첫 음절로 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마태 복음)는 ‘막’(마가 복음)과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한 글자 축약의 혼란을 막고자 다른 음절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여호수아), ‘스’(에스라), ‘사’(이사야) 등이 그렇습니다. 물론 두 권 이상의 책의 경우 구약은 ‘상하’(대상, 대후 등)로, 신약은 ‘전후’(고전, 고후 등) 등으로 표기합니다.
반면에 천주교에서는 통상 두 글자로 성경의 책 이름을 줄여 표기하지만(예: 창세, 탈출, 마태, 마르 등), 구약의 상하권의 책(예: 사무엘기 상권, 역대기 하권 등)과 신약의 서간들(예: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요한의 셋째 서간 등)에는 책 이름 앞에 ‘1, 2, 3’을 붙입니다(예: 1사무, 2역대, 1코린, 3요한 등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7) 성경의 권수
구약성경 권수가 다른 천주교와 개신교
천주교와 개신교는 왜 성경의 권수가 서로 다른가요?
천주교와 개신교는 성경을 같은 경전으로 사용하지만 구약성경의 권수가 서로 다릅니다. 천주교는 구약성경 46권과 신약성경 27권을 통틀어 모두 73권을 정경(正經)으로 인정합니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구약성경 46권 가운데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39권만을 경전으로 받아들여 모두 66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합니다.
천주교는 유다교가 히브리어를 모르는 유다인을 위하여 그리스어로 번역한 이른바 ‘칠십인역’을 초대 교회부터 구약의 정경으로 인정해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어로 기록된 7권의 구약의 책(토빗기, 유딧기, 마카베오기 상권, 마카베오기 하권,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도 제2경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종교 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가 유다교의 39권만을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들여 독일어로 번역한 뒤로 개신교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지 않는 7권의 칠십인역을 정경이 아닌 외경(外經)으로 간주하였습니다.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천주교가 7권의 칠십인역을 정경으로 최종 결정하자 개신교 쪽에서는 이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좀 더 분명히 표명하기에 이릅니다.
영국 성공회는 외경이 “교회가 신도에게 생활의 모범이나 교훈을 가르치려고 할 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외경을 근거로 하여 교리를 제정할 수는 없다.”(39개조 종교 조항 제6조)라고 밝히고, 1647년 웨스터민스터 신학자 총회에서 “외경은 영감으로 쓰인 책이 아니므로 정경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외경은 성경과는 달리 교회 안에서 어떠한 권위도 가지지 못하고, 인정되거나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신앙 고백 제1장 3절)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제2경전의 일부가 히브리어로 기록된 필사본이 1947년 사해 부근에서 발견되면서 개신교가 히브리어로만 된 구약을 정경으로 인정하던 논리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서학자들이 제2경전의 상당 부분이 예수님과 제자들, 또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서도 인용되었음을 밝혀냄으로써, 천주교에서 제2경전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정당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 정교회와 대한 성공회는 1977년에 완역되어 출간된 「공동 번역 성서」를 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제2경전을 성경의 끝부분에 따로 모아 놓았습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일부 개신교단에서도 「공동 번역 성서」를 인용하거나 사용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성경에 대한 출판과 유권 해석은 천주교의 경우 교도권에 맡겨져 있어 성경 번역과 교리 해석에 차이가 없는 반면, 개신교는 누구나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에 해석의 차이로 논쟁과 교단 분열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5) 구원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으로 얻는 구원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는 구원에 대하여 서로 다르게 이해하나요?
개신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야말로 구원을 얻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가르치면서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그래서 일부 개신교 교단은 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표현을 써가며 선교하기도 합니다.
반면 천주교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선행을 쌓은 뒤에, 내세에 하느님께 받는 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개신교 신자에게서 “당신은 구원을 받았나요?”라고 질문을 받으면 천주교 신자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확신을 표현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고백은 천주교나 개신교 신자에게 중요한 구원의 열쇠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구원을 얻으려면 합당한 선행과 죄에 대한 보속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의지적 협력을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나 16세기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인간의 나약함과 죄가 너무 깊어 인간의 선행과 보속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의화)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개신교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위임하신 맺고 푸는 권한(교도권)과 가톨릭교회의 오랜 신심 전통들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개신교의 신앙 전통을 세운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도 구원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고 강조하지만, 이에 따른 인간의 협력도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모든 것이 오직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여라. 그러나 네가 구원되는 것이 완전히 너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그렇게 협력하여라”라고 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종교 개혁가들은 전적인 믿음을 강조하면서 선행은 믿음에 따라온다고 가르칩니다. 한편 천주교는 실천 없는 믿음이 자칫 맹신으로 흐를 위험성을 경고하며 인간의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합니다. 이런 견해 차이가 구원의 조건에 대한 강조점을 달리하는 역사를 낳았습니다. 그 뒤로도 개신교 교단마다 교리 해석에 따라 구원을 얻는 믿음의 방식을 다르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1999년 10월 31일 교황청이 루터교 세계 연맹과 맺은 「의화 교리에 관한 합동 선언문」에 따르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무상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의화 논쟁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3) 세례
세례 성사, 천주교와 개신교 일치의 표지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는 같은 믿음을 가졌나요?
우리나라에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는 성경에서 알려준 대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내어 주시며 동시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풍요한 빛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가톨릭 교회 교리서」, 26항)을 하는 같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둘 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이천 년 전 역사 속의 한 인물이었던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인류의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 2항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이 계시로써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격적인 분으로서 구약의 선조들,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 성조들로부터 시작하여. 모세를 통하여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고, 그들의 우상 숭배와 죄악에 대한 심판과 용서를 통하여 인류의 창조 역사를 완성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구약의 선조들이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요한 14,9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역사에 들어오시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구약의 유다인들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구원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인류의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원조의 죄로 닫힌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기에 그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는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교회를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품고 부활과 영생의 희망 속에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세례는 같은 세례인가요?
세례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하는 신앙의 표지입니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세례성사는 집전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 지원자를 물로 씻는 동일한 예절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세례야말로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가 같은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고 있음을 밝혀 주는 중요한 일치의 표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공로로 죄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은을 세례의 표지로 얻습니다. 또한 세례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 자신도 우리 죄인과 연대하시기 위하여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기에(마태 3,13-17 참조), 세례는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가 인정하는 성사입니다.
천주교는 누구든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오면 예비 신자로 받아들이고 신앙생활로 안내합니다. 예비 신자가 일정 기간 교리 교육 기간을 거쳐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얻으면 정식으로 가톨릭 교회에 입교하게 되고, 교회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섬김의 직무에 동참하는 ‘왕직’(봉사직)과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따라 사는 ‘예언자직’, 그리고 십자가 희생 제사에 자신을 봉헌하는 거룩한 삶과 성사 생활을 통하여 ‘사제직’을 실천하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합니다.
대부분의 개신교는 누구든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오면 예배와 교회 생활로 안내하고 공동체와 친교를 나누며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세례를 받은 다음 세례를 준 교단의 신자로 등록됩니다. 이때 성공회와 정교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에서는 세례명을 쓰지 않습니다. 일부 개신교 교단은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세례를 표징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하고 신자들에게 세례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구세군의 경우에는 물로 씻는 세례 대신에 병사 서약식을 합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11) 실체 변화
축성된 빵과 포도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
개신교는 천주교의 성체 교리인 ‘실체 변화’를 믿지 않나요?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 제사를 기억하는 성찬례 또는 성만찬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성사(聖事)로서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종교 개혁 당시부터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명시적으로 하신 말씀(요한 6,22-71 참조)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찬례가 빵 나눔이라는 하나의 예식에 불과하며 그 안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현존하지 않고 다만 상징적이거나 영적으로만 존재한다고 가르칩니다. 루터의 경우 축성된 빵과 포도주의 형상에 빵과 포도주와 함께 예수님의 몸과 피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공재설’(共在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츠빙글리는 성찬례가 ‘상징’이자 ‘기념’일 뿐이며,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은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받아먹고 마시는 신자들의 믿음에 성령께서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신교계에서 거행하고 있는 성만찬은 천주교에서 거행하는 성찬례와는 다릅니다. 천주교는 “성체성사 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과 신성과 더불어 그분의 몸과 피가, 곧 온전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실제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계신다.”(트리엔트 공의회, 성체성사에 관한 교령, 법규 제1조: 덴칭거 1651항)는 것과 사제의 축성으로 “빵과 포도주의 온 실체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한다.”(위 법규 제2조)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를 천주교에서는 ‘실체 변화’라고 하고, 개신교에서는 ‘화체설’이라고 부릅니다.
천주교가 가르치는 실체 변화는 오직 신앙으로만 얻을 수 있는 성사적 신비입니다. 사제를 통하여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그 물리적 형태는 그대로 남지만, 그 빵과 포도주를 구성하는 본질이 먹고 마시는 음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 곧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19-20)라는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천주교가 가르치는 실체 변화는 신앙의 감각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신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성체의 신비를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현존 체험은 우리의 이성적 판단을 뛰어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천주교 신자는 성체를 모실 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갈라 2,20 참조)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어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사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며 바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일치의 여정] (9) 전구
성모님과 성인들을 통해 전구하는 중보 기도
개신교는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 기도하는 것을 왜 반대하나요?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한 분께만 기도를 바칩니다. 천주교 신자가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익숙하게 바치는 것은 자신의 기도를 하느님께 청해달라는 전구(轉求)에 속합니다.
‘전구’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신 간청하고 탄원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바치는 것은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 전달해 달라고 청하는 전구기도로, 하느님께 직접 청하는 기도와 다른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주 바치는 성모송에서와 같이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라고 하며 하느님 곁에 있는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하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우리의 청을 하느님께 전해주고 중개해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라고 강조하며 성모님과 성인들을 통하여 전구하는 중보 기도를 반대합니다. 성모님과 성인들을 공경하는 전통이 없는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하는 중보 기도는 불가능하다고 규정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직접 청할 수 있는 기도를 굳이 성모님이나 성인들을 통하여 바쳐야 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합니다.
천주교에서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하는 전통은 초대 교회부터 전승되어 온 것입니다. 그 때부터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하느님을 낳은 여인)라는 공경 신심이 커지면서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구원 사업의 협력자라는 인식이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나 그리스도를 닮아 완덕을 실천하며 목숨 바쳐 신앙을 증언한 성인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고 있다는 신심이 커졌습니다. 그 결과 지상에서 필요한 은총을 하느님께 청해 달라고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하는 교리가 확립된 것입니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느님께만 드리는 ‘흠숭지례’, 성모님께만 드리는 ‘상경지례’, 모든 성인에게 드리는 ‘공경지례’를 구분하였습니다. 이런 전통은 ‘성인들의 통공’을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 사이의 통교는 물론 지상에 사는 신자와 하늘나라에 있는 성인들과의 통교로까지 해석해 온 데 근거합니다. 그래서 성모님과 성인들에게 전구하는 전통이 예수님의 유일한 중개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믿는 이들과 예수님과의 직접 결합을 돕는다고 가르칩니다.(교회 헌장 60항 참조)
기도는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최근 개신교에서 예배 중에 합심과 청원의 의미로 중보 기도가 확산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성을 강조하며 이를 ‘성도간의 서로를 위한 기도’, ‘남을 대신한 기도’, ‘성도가 함께 올리는 간절한 청원’의 형태로 바치기도 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일찍이 ‘신자들의 기도’ 또는 ‘보편 지향 기도’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위한 기도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