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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76:1-6 하나님이
이 시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에 따라 전쟁을 좋아하여 용맹스럽고 전쟁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잘 갖춘 원수들을 놀라우신 권능으로 막아주신 은혜와 진리를 찬송한 것입니다.
1. 본 시편의 표제는 “아삽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지휘자를 따라 느기놋 에 맞춘 노래 - 칼빈) 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죽은 이후에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가 여호사밧 왕의 통치 때에 쳐들어왔던 암몬 족속들로부터 유대인의 구원을 노래한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왕하 19장에 있는 앗수르 사람들로부터 구원을 말한다고 봅니다.
산헤립의 지휘를 받았던 앗수르 군대는 유대를 공략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수도 예루살렘성도 맹렬하게 공격했었습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앗수르 군대는 한밤중에 천사의 손을 통해 무서운 살육을 감행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이적적인 역사로 포위망을 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왕하 19:35).
이 시에서 저자는 매우 적절하게 하나님께서 활과 칼과 방패를 꺾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의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교회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시므로 이 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심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주저하지 않는 성도들의 용기를 노래합니다.
2. 본문 1절은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퇴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인간적인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제든지 기억하고 있어야 할 여호와의 도우심이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펼치사 특별하신 방법으로 택한 백성과 그들의 성을 자기의 보호아래 두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알려지심과 그 이름의 위대함’ 이라는 말이 어떻게 나왔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그러한 이적적인 간섭에 의해 패주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현저하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 76 편
3. 본문 2절은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입니다.
이 구절은 왜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를 도망시킴으로서 예루살렘 성을 구원하사 자기의 보호아래 두셨는지 그 이유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그것을 정하사 그것에서 자기의 이름이 불려지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첫째로 성의 구원에 대한 묘사에 의해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자기 권능을 행사하사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심으로서 모든 영광이 자신에게 속한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동시에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권리를 주장할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그의 원수들을 물리쳐 주신 것은 다른 생각에서가 아니고 다만 유대 민족을 값없이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실예를 통해 하나님은 교회를 보호하는 자신의 권세를 아무도 대적할 자 없음을 증명함으로서 모든 성도들로 자기 그늘 밑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부르시고 용기를 갖도록 해 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의 이름이 자신에게 값진 것이라 한다면 교회를 보존하심으로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이 그의 뜻이라고 확증하실 때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에 부여하시는 특별한 보증이며 담보물 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상영되는 특징을 가진 극장이기에 우리는 항상 가장 큰 주의를 기울여 교회에 베풀어진 은총들, 즉 모든 세대들이 마땅히 기억해야 할 특별한 은총을 우리들의 배은망덕으로 망각 속에 싸이게 하거나 묻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지금 하나님이 보이는 장막에서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해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 가운데 아니 우리들 안에 계속 거하시기에 우리가 위험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보호아래 완전한 안전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땅에 예루살렘 성전이 서 있을 동안 하나님의 옛 백성들에게 구원의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성전으로 택하사 자신의 성령으로 거하실 수 있도록 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오늘날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더할 나위없는 관심을 가져 주시리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말을 단순히 “살렘”이라고만 하여 이 도시의 복합 명사를 사용하지 않고 단순 명사를 사용한 것은 창세기 14장 18절에서 볼 수 있는 매우 고대 형태의 이름을 적용시킨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말이 복합 명사로 변하여 살렘 앞에 여부스(Jebus)가 덧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부스라는 이름은 사사기 19장 10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후대 중간기 시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그곳이 여부스 족속의 거주지였기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입니다.
시편 76 편
그러나 이 말의 어원을 보다 정확하게 살펴보면 이 말은 “볼 것이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יראה(예레)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고 말한 것입니다.
4. 본문 3-4절은 “(3)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
(4)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입니다.
1)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유다에게 알려지신 독특한 방법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성 보호를 위해 행하신 그의 권세의 놀라운 증거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이 비유 속에는 택한 백성에 대한 원수들의 멸망이 묘사되었습니다.
그들은 갑옷과 전쟁 무기를 빼앗기기 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제어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화살과 방패와 칼” 즉 모든 전쟁무기들이 ‘깨어졌다’ 는 말씀은 교회의 이러한 원수들이 교회를 해칠 수 있는 세력을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상 그들은 해침을 당하지 않은 상태에 있을때도 상처를 입었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그들의 전쟁무기에 일어난 것으로 표현하는 환유법(換喩法)은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רשפים(레샤핌)이란 말을 ‘신호하는 무기’ 라고 번역합니다.
이 말은 ‘불’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화살’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어떤 때는 새까지도 이런 말로 불렸는데 그것은 새들의 신속성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시편 91편 5절에서는 날아가는 것을 화살에 비유했습니다.
2) 여기에 덧붙여 4절에서는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주는 약탈한 산보다 더 영화로우시며 더 무서우시도다 - 칼빈) 라고 했습니다.
“약탈한 산” 이란 포악하고 약탈을 일삼는 나라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노략질과 약탈로 가장 극심했던 자가 땅을 가장 넓히고자 하는 자요,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고자 했던 자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기서 격렬함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자 하는 위대한 임금들을 오직 먹을 것만 위해 살며 수풀에 뒤덮인 산에서 왕궁을 지어 놓고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고 사는데 익숙해 있는 맹수들에 비유합니다.
옛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들은 예루살렘을 격렬하고 맹렬하게 공격하는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권세로 완전히 압도하심으로 신실한 자들이 공포에 짓눌려 있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
시편 76 편
5. 본문 5-6절은 “(5)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용기있는 자는 탈취를 당하여 저희 잠을 잤고 힘있는 모든 자들은 자기 손을 찾지 못하였도다 - 칼빈)
(6)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입니다
여기서는 원수를 멸망시킨 하나님의 능력이 또 다른 표현 형식을 통해서 찬양됩니다.
우리가 “탈취를 당하여”라고 번역한 동사는 אשתוללו(에쉬톨렐루)인데, 이 말은 שלל(샬랄)에서 온 것으로서 ה(헤) 대신에 א(알렙)이 붙여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 말을 ‘어리석은 자가 되어’로 번역한 것은 너무 강조된 해석입니다.
그들이 지혜와 용기를 빼앗겼다는 점을 말하는 데는 그 의미가 똑같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의 적합한 의미를 고수해야만 합니다.
하반절에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로 쓰인 것으로 그들이 손이 잘린 사람이나 불구가 된 사람들처럼 싸울 능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자랑하던 그들의 힘이 완전히 압도당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잠을 자고” 란 말씀도 같은 문제를 말합니다.
그들이 전에는 활동적이고 단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마음이 뒤집혀 나태함과 노곤함으로 잠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택한 백성의 원수들이 전에 자랑하던 영웅적인 용기와 그들이 사로잡혀 있던 오만함을 빼앗겨 버려 그들의 생각, 마음, 손, 즉 그들의 정신적 또는 육체적 기능 중 어떠한 것도 모두 자기들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모든 은사와 능력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을 알며 하나님께서는 경우에 따라 자기가 주었던 지혜를 그들에게서 빼앗아 버림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나약하게 만들고 전쟁을 향해 부당하게 사용하던 손을 돌이키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힘을 멸절시켜 버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이 원수들에게 용기와 능력을 일으켜 주신 데는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그 곳에 내포한 의도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을 높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도 같은 내용을 확증합니다 이 말씀은 이 원수들이 가진 성격이 어떤 것이었든지 하나님께서 고개만 한번 끄덕이심으로 무력하게 되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도움의 수단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데 큰 군대를 필요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입김만으로도 모든 공격들을 굴복시키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시편 76 편
시76:7-12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오늘은 박윤선의 강요 부분으로 서론을 시작합니다.
1. 이 시인은 유다를 구원하기 위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찬송합니다(1-9) 하나님께서는 역사상에 공의로우신 심판을 날마다 나타내시지는 않으십니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땅위의 인종(人種)이 단시일 내에 다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사 사람들의 죄를 오래 참아주시며 당장 벌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다가 한번 공의(公義)롭게 심판하시는 한 날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1절에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 바 되셨으며” 라고 하였고,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공의로우신 심판을 하시지 않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공의로우신 심판을 나타내실 때에는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그 앞에서는 꼼짝 못합니다(3-8).
역사상 심판은 날마다 있는 것이 아니고 이따금 있는 법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9절에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 성격이 이러한 줄을 알고 믿음으로 굳게 서서 모든 억울한 일도 잘 참아 나아가며,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한 날을 내다볼 줄 알아야 된다.
2.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나 필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실 때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인은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10절).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사람들의 악행도 필경은 별 수 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이용될 뿐입니다.
잠16:4절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롬9:17).
그러므로 신자들은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으면서도 필경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날을 내다보고 미리부터 찬송해야 됩니다(10-12).
시편 76 편
1. 본문 7절은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입니다.
“주”를 반복한 것은 하나님만을 말하고 모든 것들은 배제하고자 하는 의미입니다.
세상 권세는 무엇이든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실 때 즉시 사라져 ‘무’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두려워하실 분이십니다.
악인이 비록 교만으로 가득 차 거의 폭발할 정도에 이르렀더라도 하나님의 모습과 임재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라고 한 다음 구절에 의해 입증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시기에 단지 게으른 방관자로 보여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분노를 발하기 시작하신다면 그 즉시 모든 악한 자들이 멸망하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얼마동안 화를 입지 않고서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포악함으로 구름을 꿰뚫고 올라간다 할지라도 우리는 조금도 개의치 말고 진노의 때가 임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이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진실한 신자들을 핍박하기 좋아하는 악인들이 바로 그러한 행위로 이런 두려운 일을 자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본문 8절은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입니다
시인은 “하늘” 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나서 사람의 행운이나 노력에 의한 것으로 묘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심판을 보이지 않게 행사하시기에 그 심판들이 땅에서부터 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경건하고 용맹한 임금을 일으키사 이러한 임금들의 통치를 통해서 거룩하고 합법적인 행사들이 나타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 심판이 하늘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심판은 특별한 종류의 것이기에 특별히 언급함으로 구별됩니다.
시인이 ‘하나님의 판결을 선고하시매’라고 한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을 단지 눈으로 보는 것보다도 마치 천둥소리와 같이 크게 울리게 하여 그 소리로 모든 사람들의 귀가 멍하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움츠러들게 하는 강력한 천둥을 암시하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확신합니다.
“땅이 잠잠하였나니”란 말씀은 감히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노를 발하던 악인들이 하나님께 승리를 빼앗기고 공포에 싸여 있는 것을 적절하게 가리킨 것입니다.
시편 76 편
그들을 복종시킨 것은 오직 두려움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이 이와 같은 잠잠함의 원인으로 묘사되는 것은 마땅합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들을 억제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하나님께서 억지로 복종시키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천둥을 발하실 때마다 만물이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고 바로 그때 악인들의 격동해 있던 오만함이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반기를 들 때에, 얻는 것이 무엇인가 를 경고 받습니다.
큰소리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같으신 음성을 멸시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번개로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본문 9절은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입니다.
하나님이 이 판단을 행하심에서 보이고자 하시는 큰 목적이 여기 선포됩니다.
그 목적은 자기 모든 백성들을 향한 아버지 같은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입으로가 아니라 손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모든 자들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시는지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일어나신” 이라는 말은 악인들이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들에게 이처럼 많은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분’ 이라고 한 것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석에 오르셔서 자기 교회를 특별히 돌보아 주신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다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버리실 수 없음이 마치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불가능 하신 사실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집니다.
하나님을 심판주로 부른 것은 불의하게 압제를 당하는 불쌍한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땅의 모든 온유한 자” 또는 “겸손한 자”란 말씀은 환난을 당하면서도 높은 것을 구하지 않고 겸손하게 인내함으로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고난이 가져다 주는 최상의 열매는 그 고난을 통해 우리의 마음에서 모든 교만을 추방하고 온유와 절제로 돌이키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지켜주심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도움과 은총을 베풀어 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심을 분명하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시편 76 편
4. 본문 10절은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은 원수들이 장차 하나님께 굴복한 후 하나님께 승리의 찬송을 돌리게 될 것, 즉 자기들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에 정복당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다 세련된 의미를 이끌어 내는데 하나님은 마치 바로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으셨다고 하신 말씀처럼(출14:4, 롬9:17) 악인들을 격동케 하여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실 때 자신의 영광을 가장 현저하게 행사하심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문맥상 매우 교리에 적합한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의역함으로서 그 본래의 단순한 의미를 잃기 쉽습니다.
즉 처음에는 하나님과 교회의 원수 등의 격렬함이 만물을 다 혼란 속에 몰아넣어 마치 하나님과 교회를 어둠 속에 봉해버린 것 같다 할지라도 마침내는 자기들이 애쓰고 시도하려 했던 모든 것들이 결코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케 되리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단순히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는 말씀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הגר(하가르)란 단어는 ‘허리에 두르다’란 의미를 가지기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대명사 “주”를 덧붙여 ‘모든 교회의 원수들이 아직 근절되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중 남은 자들을 멸하도록 태세를 갖추시리이다’ 라는 의미의 말로 봅니다.
그러나 다른 해석은 보다 단순합니다.
비록 이 원수들이 자기들의 잔인함을 드러내기를 그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효과적으로 억제하사 그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막으실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동사를 ‘주께서 다발로 묶을 것이다’라고 해석해도 역시 잘 어울립니다.
프랑스어로 ‘Tu trousseras” 즉 ‘주께서 다발 지을 것이다’ , ‘보따리로 쌀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들이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사 만물을 보다 복된 상태에 임하게 해주실 때까지, 그리고 악인들의 미친 생각을 발로 짓밟으사 그들을 부끄럽고 혼란하게 만드실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새로운 문제들이 일어난다면 악인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들의 분노에 대한 생각을 억제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동시에 우리는 매순간마다 새로운 분노가 일어난다 해도 놀라지 않도록 합시다.
시편 76 편
세상 끝 날에 이르도록 사단은 그의 동료들과 하수인을 거느리고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려 하기 때문입니다.
5. 본문 11절은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입니다.
성도들은 이제 감사드릴 줄 알아야 한다는 권면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풀어 주신 한가지 복을 위해 서원 제사를 드리는 일이 있어 자기들의 안전함이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음과 자기들은 그 안전함에 대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음을 이 의식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달음으로서 이것을 다시금 새롭게 신앙생활에서 실천하라고 깨우침을 받는 것입니다.
“갚으라”는 말씀은 변치 말아야 할 것, 즉 단순히 갑작스럽게 생각없이 깨닫지 말고 자기들의 구원에 대한 기억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음을 항상 증명해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이 자기들의 구원의 주인이 되심을 자신에 진지하게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엄숙미를 고수하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도록 모든 사람을 자극하여 주는 것도 무익한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반절에 ‘사방에 이웃하는 모든 자’ 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그토록 특별하신 계시는 이방의 할례 받지 않는 민족들에게서도 찬송을 받으실 만한 것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가장 문맥과 일치하는 해석은 이 말씀이 레위인들 또는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이 사방에 있다’고 말한 것은 일리에 맞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여행하고 있었을 동안에는 회막이 진(陣) 가운데 설치되며, 또 언약궤를 놓아두었던 시온산도 온 나라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레위인들은 성전 일을 맡도록 교육 받았고 성전 지킴과 관할을 위임 받았습니다.
למודא(라모라) 를 주석가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보고 ‘두려운’으로 번역하는데 이 “경의” 라는 말은 때로 수동적 의미를 취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 경우도 있습니다.
만일 이 말을 이방인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면 그 의미는 그들이 하나님께 공물로 바쳐질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위축되어 더 이상 감히 하나님께 어떤 반항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시편 76 편
저자는 하나님의 현저한 권능의 증거를 제시한 후 그것을 경외할 만한 것으로 올바로 선포합니다.
6. 본문 12절은 “저가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저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입니다.
히브리어 בצר(바차르) 라는 말이 경우에 따라 ‘강하게 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기에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그런 의미로 번역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구절 안의 두 문장에서 같은 의미가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상반절에서는 방백들에게서 이해력과 지혜가 빼앗기는 것을 의미하고 하반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오만함을 거꾸로 낮추시게 될 것이기에 그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고 확신합니다.
일이 잘 되어 가기를 바라고 행하는 일 중에서 가장 없어서는 안될 것이 바로 통찰력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이 고통중에 빠져 있는 큰 난국을 헤쳐 나아가지만 악한 자들은 그와 반대로 자기들의 교활한 꾐에 지나치도록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이 구절은 지식을 빼앗아 가는 것과 명석하고도 기발한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려는 자를 눈이 어두워지도록 만드시는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방백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원수이기에 하나님이 땅의 열왕들을 굴복시키기에 충분하도록 두려운 분임을 분명하게 확증합니다.
“방백들의 심령을 꺾으시리니” 또는 그들이 심령이 탈취를 당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정신이 멀게 하신 폭군이나 강탈자들에게 국한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모든 창의력과 연구를 집중하여 해로운 일만 저지르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입니다.
시77:1-6 내가 내 음성으로
저자가 확실치 않은 이 시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환난을 당할 때에 드려야 할 기도의 일반적인 형식을 가르쳐 주십니다.
즉 성도들이 가장 잔악한 핍박 아래 있을 때라 할지라도 하늘을 향해 기도드리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될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내용은 특별한 개인의 슬픔이 아니고 택한 백성의 애가(哀歌)와 탄식입니다.
성도들은 지난날 자기들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총을 증명해 주었던 구원을 찬송함으로 보다 더 진지하게 기도드릴 수 있는 활력과 용기를 얻습니다.
아삽의 시, 영장으로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
1. 본문 1절은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입니다.
이 말씀은 어떤 주석가들이 설명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드렸던 간구를 하나님께서 못들은 체하셨다는 것, 즉 허사로 돌아갔음을 알게 될 때에 느끼는 놀라움을 가리키는 단순한 하소연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시는 저자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현실적인 감정이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서 예비하고 계심을 자기가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돌이켜 본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자가 기록하는 것은 자신이 겪었던 큰 환난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자가 과거와 미래 시제의 동사를 사용해서 계속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앞부분에서 저자는 과도하게 닥치는 대로 자신들이 겪고 있는 슬픔을 부르짖는 많은 사람들처럼 허공에다 어리석게 부르짖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태에 있을 때에만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동사와 연결된 접속사 ‘그리고’(칼빈; 한글개역에는 없음)는 ‘시간’을 가리킨 부사로 보고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로 풀이해야 합니다.
저자는 또 자기가 되풀이해서 부르짖는 일이 억압받는 경우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편 77 편
저자가 바로 이어서 말한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라는 말씀은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접속사 ‘그리고’ (ו:와우)는 이유를 나타내는 부사(for) 대신 사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은총과 자비를 보여주심이 하나님의 보통 사용하시는 방법이었음을 생각함으로서 자기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용기를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2. 본문 2절은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입니다.
저자는 이 구절에서 당시 교회가 당하던 슬픔과 모진 압제를 보다 자세히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 말씀 속에는 약간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손”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יד(야드)는 때때로 ‘상처’를 비유하기도 합니다.
주석가들은 ‘밤에는 내 상처가 찌르고 그치지를 아니하였으며’ 를 끌어냅니다.
우리 상처가 곪은 상태에서 깨끗이 낫듯이 찌르는 것이 그치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의 일상적인 의미인 ‘손’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저자가 사용한 동사 נגרה(니게라)가 쓰라린 상처가 쑤시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손을 뻗치는 것, 또는 넓히는 것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자기가 자신의 환난 날에 주님을 찾았고, 하나님께 자기 손을 뻗쳤다고 확언하는 것은 자기가 계속해서 기도드렸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저자는 기도에 매우 진지하고 지칠줄 몰랐고 따라서 기도를 단념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반절에는 부사적인 관사 ‘........ 할지라도’ 라는 말이 보충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말씀의 의미는 시편 기자가 자기의 쓰라린 슬픔에 대한 위로와 탕감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자기 손을 뻗었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슬픔이 비록 해결될 가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당하는 슬픔이 우리의 입을 막지 못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절망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3. 3절은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입니다.
시인은 여기서 다양한 표현으로 자기 환난의 격렬하고 막중함을 말합니다.
시인은 자기의 슬픔을 가라앉혀 주는 유일할 해결책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사실 진실한 신자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인하여 근심하게 된다는 것은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시편 77 편
그러나 영감을 받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단순히 자기가 하나님을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재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성도들의 고뇌와 근심을 더욱 가증시키는 일이 종종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진노하고 계심을 생각하는 경우와 같은 때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억을 불러일으키실 때마다 자기의 마음이 새로운 근심과 불안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단지 하나님께로부터 자기에게 안식을 줄만한 위로가 임하지 않은 것을 탄식했을 뿐입니다.
이것은 매우 견디기 어려운 시험입니다.
악인들이 무서운 정신적인 고통당함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와 수고는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기에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배반한 이유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재난을 완화시키려는 위로를 얻기 원할 때에 하나님을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아무런 안식이나 평안함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장난하고 계신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많은 불안과 슬픔과 근심을 겪는다 할지라도 이 모든 시련 속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배울 수 있습니다.
4. 본문 4절은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은 앞 절과 똑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구원을 허락하시지 않았기에 밤새도록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보통 여러 파수꾼들이 나뉘어 밤을 지켰기에 저자는 자기가 계속되는 괴로움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는 것을 파수꾼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로 표현합니다.
저자가 조금 전 자기가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말해 놓고 이 구절에서는 말을 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문제는 이미 시편 32편 3절 해석에서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진정한 신자들일지라도 괴로움에 압도당하고 있을 때 확고부동한 불변의 상태에 계속 머무르지 못하고 이따금 한숨과 탄식을 터뜨리는가 하면, 한편으로 어떤 때는 저희 입이 닫혀진 것처럼 잠잠한 것을 보았습니다.
시편 77 편
그러므로 저자 자신이 괴로움에 압도당하여 마치 질식 할 것처럼 그 입으로 단 한마디도 말할 수 없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을 본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 없습니다.
5. 본문 5절은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입니다.
저자가 전에 있었던 즐거운 일을 생각해 자기 괴로움을 달래려 애쓴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구원이 쉽고 빠르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저자는 “옛날” 그리고 “이전 해”라는 말로 자신의 짤막한 생의 과정만을 말함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포괄해서 말하고 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환난을 당할 때에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체험했던 하나님의 복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 위에 베풀어 주신 모든 복들을 분명하게 자기들의 눈앞에 두고 그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자기 마음에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신 은총들을 헤아려 보는 것을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사실을 문맥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6. 본문 6절은 “밤에 한 나의 노래를 기억하여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 입니다.
1) 시인은 “나의 노래” 라는 말로 자기가 형통했을 동안에 행했던 감사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괴로움을 치료하는 데에는 이것보다 더 좋은 치료약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종종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보다 더 깊은 상처를 입히고자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지난날에 겪었던 기쁨과 지금 당하는 환난을 비교해 볼 때에 쓰라린 고통을 느꼈으리라고 보는 것은 매우 타당성이 있습니다.
“밤에”라고 강조해 말한 이유는 우리가 사회나 사람들 앞을 떠나 혼자 남아 있을 때는 낮에 겪었던 것보다 더 주의깊고 진지한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곧 이어서 “마음에 묵상하며”라고 한 말씀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독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속을 철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며 어떠한 피조물도 자기 앞을 가로막지 않을 때는 자신을 적나라하고 매우 진지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2) “심령이 궁구하기를” 이라는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궁구하기를” 이라는 뜻의 חפש(하파스)는 ‘부지런히 탐구한다’는 뜻으로 남성입니다.
그렇지만 “심령” 이란 뜻을 가진 רוה(루아흐)란 말은 때때로 여성 형태를 취합니다.
시편 77 편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이 말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고 간주하고 그 의미를 마치 이 저자가 ‘오 주여! 내 마음에는 주께서 알게 해주신 것이 아니면 감추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령을 찾아 게으름과 무감각에서 깨우시고 또한 심한 고통으로 시험하신다고 묘사되는 것은 아주 타당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감추인 곳들과 명확하지 않았던 피난처가 드러나고 알지 못했던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명사의 성(性)이 모호하기에 다른 사람들은 보다 자유롭게 ‘내 심령이 궁구하기를’ 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번역은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영감을 받은 저자는 이 말씀 속에서 자기가 그토록 지독한 환난을 당하는 이유와 이 환난이 궁극적으로 무슨 목적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찾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매우 유익한 일이요, 또 우리가 어떤 재난에 압도당하고 있을 때 이 생각을 통해 우리를 깨워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의 채찍을 맞을 때 마음이 굳어 버린 사람의 어리석음보다 더 완악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슬픔에 빠져 버리지 않게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히 조사해 그 결과 심판의 심오한 깊이가 우리를 뒤덮어버리지 않게 우리는 마땅히 정도를 넘어서는 안됩니다
저자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가 위로를 얻기 위해서 온갖 것을 다 쫓아보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쓰라린 슬픔을 달래줄 만한 것은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77 편
시77:7-10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본문의 서론은 박윤선의 강요입니다.
1. 시인은 환난 날에 깊은 고통에 빠져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지 않습니다(1-4).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않았다”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시인의 고통은 자기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문제로 인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자격자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은 사욕(私慾)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익을 위해 삽니다.
2. 시인이 당한 종교적 불경기(宗敎的不景氣) 시대는 기막힌 암흑시대였습니다(5-10). 성도들에게는 종종 이와 같은 시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께서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 것 같은 적막한 때가 옵니다.
성경말씀을 기록하는 높은 수준의 신앙가들도 이런 쓴 경험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때에도 낙심치 않았습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인식에 있습니다.
1. 본문 7-8절은 “(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 그 인자하심이 길이 다하였는가,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 입니다.
1) 이 말씀은 시인이 마음 속에 궁구하는 문제들 중의 일부분인 것이 확실합니다.
시인은 자기가 오랫동안 계속되는 재난으로 말미암아 압도당할 뻔했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소망을 거의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견뎌 온 후에 비로소 이와 같은 말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계속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듯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품어 주신다고 할 때에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원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하나님께 불평을 털어놓거나 하나님의 잘못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자기에게 합리적인 결론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시편 77 편
즉 하나님께서 한때 자신을 아버지로 보여주신 자기 백성들에게 값없는 은총을 계속해서 베풀어 주시지 않음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받은 모든 복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만을 좇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저자는 잠시 후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자신과 그의 성품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같이 보살피시는 사랑의 손길을 깨뜨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이 하나님께서 인자하시다는 사실에서 여러 가지 논증을 이끌어 냄으로서 어떻게 시험의 공격들을 물리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2) “그 허락을 영구히 폐하셨는가”(그의 말씀이 폐하여졌는가 - 칼빈)란 말씀은 자기의 믿음을 붙들어 주고 힘 있게 해주는 약속이 없음을 알고 난 이후로 모든 위로가 다 끊어졌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과 구원이 포함되어 있는 그의 언약을 우리에게서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실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누가 당시에도 율법의 약속들이 있었고 이 약속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고 반론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계시되지 않았던 이전 시대의 불완전으로 인해서 특별한 약속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답변합니다.
그러기에 시편 74편 9절에 성도들이 자기들에게 더 이상 승리의 표적들이 보이지 않고 자기들에게 시대를 깨닫게 해 줄 선지자도 없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 시를 기록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가 의심스럽고 번민스런 문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하나님은 그에게 대답해 주시기 좋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재난을 당했을 때, 이러한 위로의 근원을 빼앗겼다면 그는 자기의 믿음을 유지해 주고 힘 있게 해줄 만한 말씀을 찾을 수 없다고 탄식할 만한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이 시가 다른 영감 받은 선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면 이런 탄식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때로부터 그리스도가 오신 때까지의 시대에 잘 어울립니다.
이 시대에는 예언의 줄이 단절된 상태여서 넘어진 자들의 마음을 일으키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줄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자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우리가 스스로 가장 적은 위로조차 받지 못할 만큼 깊은 고통에 빠지게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 번째 해석, 즉 교회가 전에 받았던 것과 같은 특별한 예언이 전파되는 은혜가 지금은 없어지고 다만 하나님의 섭리의 그림자의 빛에만 항상 의존하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다는 해석을 받아들입니다.
시편 77 편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유익한 교훈을 생각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그의 말씀을 거두어 가실 때라 할지라도 심히 불안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단련시킬 때 그들이 성경 말씀 전체가 그 고유 목적에서 떠난 것으로 생각할 만큼 기이한 방법으로 단련시키신다는 점과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갈망한다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독특한 경우에 적용시킬 정도는 못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괴롭고도 고통스러운 일이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가 기도드리는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2. 본문 9절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심을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하였나이다” 입니다.
저자는 여전히 똑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숙고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바라는 것은 자기 믿음을 뒤엎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오히려 저자의 바램은 자기 믿음을 일으키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물음은 회의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잊으셨는가? 아니면 자기 성품을 변케 만드셨는가?’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의 성격에서 자비를 베푸시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저자가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처럼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는 솔직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강력히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은 자기의 본성과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었기에 자비를 베푸시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신뢰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심이 우리의 마음을 근심케 만들고 괴로움으로 짓누를 때마다 다음의 질문에 대한 만족한 해답에 도달하기 위해서 항상 노력해야 함을 배우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본성을 돌이켜 더 이상 긍휼을 베푸시지 않으시는가?
하반절의 “노하심으로 그 긍휼을 막으셨는가” 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거룩한 족장들은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쉽게 용서해 주시고 쉽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말씀을 일반적으로 그리고 존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그의 노래에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라고 한 것은 족장들에게서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의 결론은 그가 받았던 징벌이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늘 주시던 복을 주시지 못하도록 못하리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다만 잠시뿐인 점을 들고 있습니다.
시편 77 편
하나님의 진노가 버림받은 자들에게 계속해서 임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들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다른 진실된 신자들을 가리켜 계속되는 진노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일시적인 하나님의 불쾌하심이 자신의 인자와 긍휼의 길을 무너뜨리실 수 없는 것으로 확실하게 말합니다.
3. 본문 10절은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또 내 가 말하기를 이는 내 죽음이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오른손의 해로다 하였도다 - 칼 빈)” 입니다.
이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약함”을 나타내는 말 חלותי (할로티)가 ‘죽이다’ 란 뜻이 있는 חלה(할라)란 말에서 온 것으로 보고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누적된 환난에 짓눌려서 자기는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망시키려고 내버리신 것으로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선지자가 하는 말은 자기가 절망에 바진 것을 고백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을 ‘병들다’ ‘연약해지다’ , ‘겁을 내다’ 로 번역하는데 이 번역이 더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그 의미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다릅니다.
어떤 주석가들에 의하면 선지자는 자기 마음의 연약함과 보다 남자답게 시험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을 비난하며 꾸짖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통 시험의 충격을 받으면 잠시동안 요동을 거친 후 용기를 내게 되는 것이 상례이므로 이 해석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의미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시적 괴로움인데 시인은 이것을 죽음에다 직접적으로 비유합니다.
시편 118편 17절은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라고 했고, 18절은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확신하기로는 그가 지금은 비록 낙심하지만 그것은 다만 일시적인 것이요, 따라서 이 질병 혹은 괴로움을 참고 견딤으로서 자기가 죽지 않을 것을 분명히 알고 스스로에게서 짐을 풀어 내리는 것입니다.
뒷부분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도 주석가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앞 절과 연결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시편 기자가 처음에는 그런 실망 상태에 떨어져 자신이 완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으나 나중에는 어떠한 때에도 심지어는 계속해서 물이 뒤덮이는 난파선 속에 던져질지라도 자기 머리를 쳐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시편 77 편
그러면서 이들은 이 말을 누군가가 시편 기자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기 위해서 한 말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신 일을 체험했던 때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보다 적절한 해석은, 곧 ‘너는 네가 이제 죽게 되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네가 불치의 질병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요, 또한 하나님의 손은 그 손이 치신 자들로 쉽게 다시 온전케 하시기 때문이다’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שנות (슈노트) 를 ‘변절’ 로 번역한 사람들의 견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동사 שנה(샤나) 는 ‘변하다’ 또는 ‘어떤 일을 되풀이해서 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사람들은 이 말에서 ‘해’(年)를 가리킬 때 사용한 שנות (슈노트)란 말을 취하여 동일한 궤도를 빙글빙글 돌아가는 순환적인 성격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확실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시편기자가 자신이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상태로 변해질 것을 확신함으로서 자기를 죽을 운명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약간 다르게 해석하여 또 다른 의미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치 선지자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너는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소중히 기르셨던 때에 그의 지엄하심을 참을성 있게 인내하지 않았느냐?’
욥도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보다 타당성이 있는 해석은 저자가 앞날을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총을 다시 베풀어 주신다는 명확하고도 논란할 여지가 없는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지존자의 오른손의 날 또는 그의 변혁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시편 77 편
시77:11-14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할 듯이 느껴지는 캄캄한 시절에도 진리대로 바로 생각하므로 신앙을 유지할 뿐 아니라 힘을 얻습니다(11-20).
시인은 캄캄한 시절에 비관하는 것은 인간의 잘못이고, 객관면(客觀面)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할 때 비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본문 10절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 라고 한 것은 바로 자기 비관의 태도를 자책(自責)하는 신앙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비관치 않고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생각하므로 신앙을 지속시킵니다.
하나님이 옛날에 그 백성을 위해 행하신 구원 행적은 장래에도 계속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약1:17, 히13:8).
1. 본문 11-12절은 “(11) 곧 여호와의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 이다
(12) 또 주의 모든 일을 묵상하며 주의 행사를 깊이 생각하리이다” 입니다.
시인은 이제 새로운 힘에 감동되어 자기의 믿음을 거의 넘어뜨릴 정도로 다가왔던 시험들을 강력하게 물리칩니다.
여기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기억은 시인이 앞서 말했던 기억과 다른 것입니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탄식했습니다.
시인이 이제는 그 탄식이 자기 슬픔을 달래 주거나 덜어주기에 적합치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총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말합니다.
이것을 보다 진지하게 표현하기 위해 시인은 같은 문장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여기서 כי(키; 곧)는 단순히 보다 더 확실하게 과장해서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얻은 승리는 하나님이 시초부터 그에게 보여주셨던 것과 똑같이 계속해서 나타날 것으로 확실하게 믿었던 하나님의 기사들을 기억함으로 얻은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종들을 지키기 위해 행사했던 권능을 크게 찬미합니다.
“옛적 기사를 기억하여 그 행하신 일을 진술하리이다” 에서 저자는 ‘주의 기사’ 또는 ‘주의 놀라우신 행적’ 이란 말을 단수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복수로 고쳐 그 뜻을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시편 77 편
우리는 선지자가 곧이어 단수를 사용해 여러 이적 등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을 지키시고 구원하기 위해 항상 베풀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이 우리들을 모든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통해 때로는 하나님의 기사(記事)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들이 바라고 우리의 처지가 요구하는 만큼의 위로를 가져다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괴로움이 가져다 주는 어떤 것에 이기지 못해서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웁시다.
이 점은 우리가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괴로움에 처하게 되면 항상 그 괴로움을 덜어 줄 어떤 치료약을 찾아헤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길은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께로 집중시키는 것 뿐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수록 외부적인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만큼 더 괴로움을 가중시켜 주는 것으로 나타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방법을 통해서 유익을 얻지 못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고 그 말씀을 듣게 되면 자기들의 괴로움이 감소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가중되며 더 나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괴로움을 더하게 하고 부채질하시는 분으로 알아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고자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묻어 버리고 세상 일에만 몰두해 버립니다.
이러한 것은 시편 기자가 말하는 것과 매우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려는 은총을 즉시 체험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이나 본성을 변절시키는 분이 아니며 따라서 조만간 자기 종들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믿음을 크게 유지해 나아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기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도 배웁시다.
우리의 눈이 점점 멀어져 가고 또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우리들의 개념이 왜곡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의 탁월하심이 우리들의 생각에서 점점 사라져갑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찬사를 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12절에도 반복해서 이러한 행사를 생각하되 그 적당한 시기, 곧 이러한 생각이 가져다 주는 모든 유익을 받게 될 때까지 계속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수없이 많은 실예들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하고 또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해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들을 묵상의 대상으로 삼은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어떤 것으로 곧 그 대상을 바꾸어 버림으로서 바로 그때부터 우리의 마음이 그 실예들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시편 77 편
2. 본문 13절은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성소에 있사오니 - 칼빈)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하시오니” 라고 번역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도가 성소에 있사오니” 라고 말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고 빈약한 표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법이 이런 번역을 용납하지 않기에 우리는 원어 בקדש(바코데쉬)라는 말에 적합한 의미를 나타내는 ‘성소’라는 말 속에서 시인이 말하려는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돌하게도 ‘하나님이여 주는 성소에 계시나이다! 주의 도여!’ 라고 감탄사로 보지만 우리는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해석은 이 시편에서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연결된 하나의 문장입니다.
‘성소’ 는 하늘 또는 성전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성소’ 라는 말이 하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데 그 뜻은 하나님의 도가 세상을 초월한 높은 곳에 있기에 우리가 진실로 그 도를 알고자 한다면 하늘 위로 올라가야 할 것을 말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행사가 부분적으로나마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우리들의 모든 지식은 우리가 측량할 수조차 없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부터 옵니다.
그 뿐이 아니라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행사를 조금이나마 맛보는 기쁨을 누릴 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숨겨진 지혜와 능력을 찬양과 존경의 마음으로 응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의 행사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전지전능은 우리 총명의 제한된 능력의 범위를 훨씬 초월해 있습니다.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하나님의 도를 하늘에 국한시킨다는 것이 잘못이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라도 하나님이 그의 능력과 행사를 나타내시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신비로운 성격은 사람들의 눈을 초월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소’를 성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거의 같은 말씀을 다른 구절에서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73:16,17)고 말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던 성전은 땅에 있는 하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령으로 감동을 받은 선지자가 말하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시편 77 편
시인은 처음에 괴로움을 탄식했던 것처럼 이제는 마음에 평안과 안정을 얻어 하나님의 높으신 도를 경외함으로 찬송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아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한계 내에 자신을 평안하고도 겸손하게 굴복시켜 하나님의 거룩하신 판단을 자기의 육체적인 판단의 명령을 따라 판단하거나 말하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곧이어 “우리의 하나님과 같이 큰 신이 누구오니이까” 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말씀은 많은 신들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그토록 뛰어난 영광을 소유하시는 참 하나님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위해 여러 신을 구하는 세상 사람들의 심히 흐트러진 생각을 간접적으로 비난합니다.
사람이 순전한 눈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본다면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3. 본문 14절은 “주는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입니다.
선지자인 시인은 하나님의 행하신 신비한 성격을 근거로 하나님이 위대하신 사실을 증명함으로서 앞서 말한 것을 확증합니다.
시인은 여기서 하늘과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은밀하고 신비로운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방대하여 우리들의 제한된 이해력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인자하심과 의로우심에 대해 말합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주는 한 가지 기사를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이지만 여기서 단수는 앞에서 본 것처럼 복수를 가리킨 사실이 분명합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고, 또 하나님은 자신을 매우 공개적이고도 분명하게 계시하시기에 우리는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은 실로 놀라우신 방법으로 역사하시기에 이방 민족들일지라도 자기들이 보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란 말씀은 이러한 이유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 교회의 구원을 가리키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열방들 중에서도 분명하고 능력 있게 나타내셨던 하나님의 영광이 멸시 당할 때는 그 행위가 심각한 불경건의 죄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시편 77 편
시77:15-20 주의 팔로
시인은 하나님이 옛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과거 행적을 생각해 힘을 얻습니다.
성경 말씀에서 밝히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이 행하신 과거는 미래를 알게 하는 등불과 같습니다.
과거에 은혜주신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미래에도 역시 하나님께서 동일하신 은혜 주실 것을 아는 자는 현재의 역경으로 인한 답답함이 큰 문제될 것 없습니다.
1. 15절은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구속하셨나이다”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모든 기사들 중에 가장 뛰어난 택한 백성의 구속을 노래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참된 신자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구속을 주의해 살펴야 할 것을 성경 말씀 어느 곳에서나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당시 이방민족들에게도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단의 계교로 역사적 진리가 많은 겁쟁이들에게서 타락되고 거짓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기사들을 보기만 할 뿐 참 지식을 가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가리고 자기 존재의 진리를 위장하려는 사람들의 사악함 속에도 들어 있습니다.
모세를 나도 알 수 없는 일종의 마술사나 요술쟁이로 만들고 또한 요세푸스가 아피온(Apion)을 반대해서 쓴 글 속에 모아놓은 수많은 이상스럽고 기괴한 이야기들을 만들어 낸 자들이 근본적으로 바라는 원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 속에 묻으려 함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죄를 범하는 이방 민족들을 정죄하려고 하는데 있다기보다 자기 자신과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소망을 갖도록 해 주는데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말씀하던 그 당시에 하나님은 자기 택한 백성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증거를 장차 올 모든 세대의 복을 위해서 공개적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팔”은 특별한 성격을 지닌 능력을 비유한 것으로 기억해 둘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옛 백성들을 은밀하게나 보통 방법으로 구원하시지 않고 공개적으로 자기 팔을 뻗쳐 구원하셨습니다.
선지자가 택함을 받은 민족을 “야곱과 요셉의 자손”으로 부른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신 이유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77 편
요셉의 두 아들에게서 나온 두 지파는 다른 지파들과 같이 야곱에게 근원을 둡니다.
그러나 요셉의 이름을 존귀하게 나타낸 것은 그를 통해서 모든 아브라함의 족속들이 안전하게 보호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6절은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그의 권능으로 행하셨던 이적 중 몇 가지가 간략하게 언급됩니다.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는 말씀은 비유적인 말씀으로 물들이 움직인 것, 곧 택한 백성들이 통과하도록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서 그 바닥을 드러낸 사실을 의미합니다.
바다도 요단강도 자기들의 본래 모습을 스스로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말씀이 임하니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권능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물들이 뒤로 물러간 것은 그 물과 물의 입자들이 스스로 어떤 판단력이나 이해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뒤로 물러섬으로서 무생물까지라도 하나님께 복종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 뿐 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손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어리석음을 물들이라 할지라도 볼 수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책망하고자 하는 간접적인 대조가 있습니다.
“깊음”에 관한 말씀은 물들의 표면이 하나님 앞에서 뛰놀았다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그 가장 깊은 밑창에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3. 본문 17-18절은 “(17)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발하며 주의 살도 날아 나갔 나이다 (18) 회리 바람 중에 주의 우레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입니다.
מים(마임)이란 명사는 연계형으로 취해 쓰일 수 없기에 우리는 이 구절의 동사가 타동사적인 용법으로 쓰였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 견해를 따르든, 아니면 מים(마임)인 연계형으로 쓰였고 동사가 수동형인 것처럼 해석하든, 즉 “구름이 물을 쏟고”라고 풀이하든, “구름의 물이 쏟아졌고”라고 보든, 의미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바다와 요단강 뿐 만이 아니라 구름 속에 떠있는 물까지도 천둥의 격동에 의해 허공을 뚫고 풍요로운 비를 쏟아 내림으로서 마땅히 받으시기에 족한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시편 77 편
이 말씀은 아마 출애굽기 9장 25절에 기록된 사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해일이 애굽 사람들에게 내렸던 무서운 형벌 중에 하나였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주의 살도 날아 나갔나이다” 는 번개를 비유한 것으로 “회리 바람 중에 주의 우레의 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취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와 연결됩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떠나던 당시에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풍부한 증거가 사람들의 눈과 귀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 온 이스라엘이 천둥 소리를 하늘 사면에서 들을 수 있었고 온 하늘이 번갯불로 빛나게 되자 그 순간 땅은 두려워 떨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4. 본문 19-20절은 “(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20) 주의 백성을 무리 양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입니다.
홍해를 마르게 했던 이적이 여기서 다른 문체로 다시 한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를 받아 홍해 가운데로 마른 땅으로 지나갈 수 있었던 사실을 말씀합니다.
앞에서는 매우 진기하고 신기한 방법으로 길이 열렸던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바다란 사람의 기술로 마르게 할 수 없는 것이요, 요단강도 사람의 기술로는 그 흐르는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 가운데로 걸어갔습니다.
그 길은 다름 아닌 바로와 그 군대가 삼키움을 당했던 바로 그곳입니다.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란 말씀은 바로 이 이유를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길을 건너자마자 다시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던 목적이 20절에서 언급됩니다.
그 목적은 교회의 구원이었습니다.
“주의 백성을 무리양 같이 모세와 아론으로 인도하셨나이다” 가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출애굽의 구원을 모든 성도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고 보호해 주심에 대한 소망을 불러일으켜 주는 최고의 능력을 제공해 주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을 “양”에 비유한 것은 그들이 전적으로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들이 부족했던 불쌍한 무리들을 하나님께서는 크신 인자와 자비로서 인도하는 자가 되어 바다와 광야와 다른 모든 장애물을 지나서 약속한 기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었다는 사실을 무언 중에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77 편
이러한 진술은 모세와 아론이 백성을 이끄는 일을 담당하기 위해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더욱 더 확실해집니다.
분명히 이 두 사람의 공헌은 너무도 뚜렷한 것이고 길이 기억될만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이 미미하고도 멸시 당하던 두 인간을 택하셔서 역사상의 왕들 중에서도 가장 도도한 왕이 내뿜는 격렬한 진노와 그 크고 강한 군대를 대적케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 크신 권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저 무시무시한 폭군과 전쟁을 즐기는 민족을 대적하여 버림받고 도망 다니던 사람의 지팡이와 불쌍한 한 노예의 음성이 그들만의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 자신이 택하신 지상의 그릇들 안에서 역사하실 때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그토록 영광스러운 소임을 맡겨 주셨던 이들,곧 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찬양을 돌리려 의도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물론 최종적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전제하에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