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힘, ‘상징’의 힘
-언불진의言不盡意, 입상진의立象盡意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비평가)
I. 로그인
- 몇 가지 물음
1. 상징에는 어떠한 힘이 있을까?
2.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로부터 장미꽃 한 다발을 선물 받았다면?
3. 상징의 어원은?
4. 문학적 물음이란?
5. 문학은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가?
6. 사람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으로부터 나올까?
7. 문학작품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8. 문학 창작의 무한한 에너지원은 무엇일까?
9. 문학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II. 상징의 힘
바다와 나비/ 김기림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멋진 문학작품은 곧 아름다운 상징으로 가득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 미로처럼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사춘기 시절, 문학을 즐기는 법은 곧 수수께끼 같은 상징의 바다를 헤엄치는 모험처럼 느껴졌다. 그 끝을 누구도 알 수 없는 모험이기에 더욱 흥미진진한, 어떤 ‘포상’도 걸려있지 않기에 오히려 구미가 당기는 내면의 모험. 그것이 바로 문학이 지닌 은밀한 매력 중 하나였다. 작품을 해석의 미로로 만들어내는, 풍요로운 상징의 춤을 발견할 수 없는 작품은 마치 아무런 비밀 없는 연애처럼 따분하게 느껴졌다. 상징은 수학이나 과학처럼 논리적인 학문에서는 찾기 어려운 감성적 쾌락을 선물해주었다. 하나의 해석으로 만족할 수 없는 상징, 해석하면 해석할수록 신비해지는 상징들은 문학이 가진 은밀한 특권처럼 다가왔다. 상징의 날개를 단 아름다운 시편들은 문학왕국으로 날아가는 편도승차권이었고, 의미심장한 상징을 제목으로 단 소설들은 ‘현실이라는 육지’와 문학이라는 섬’을 이어주는 기나긴 징검다리 같았다.
■ 상징은 무엇보다도 상투적이고 일상적인 어법과는 ‘조금 다르게 말하는’ 문학의 비밀병기였다. 예를 들어,
문학에서 ‘방앗간’은 왜 걸핏하면 남녀 사이의 은밀한 사랑의 공간으로 나타날까.
‘물’은 왜 그토록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었을까.
‘불’은 왜 그토록 많은 작품의 피날레를 장식했을까.
‘용’은 왜 그토록 많은 동서양의 신화에서 단골손님으로 나타날까.
설화나 전설 속에서는 지혜롭고 꾀 많은 동물로 나타나는 ‘쥐’가 왜 현대문학에서는 전염병의 메신저이거나 대재난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것일까.
‘달’은 왜 아름답고 낭만적인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고 주체할 수 없는 여인의 광기의 상징이기도 한 것일까.
이런 질문들을 하다보면 문학에는 너무 많은 상징의 비밀통로가 있어 평생 그 비밀통로만 찾아 헤매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 느낌에 저절로 아득해지곤 했다.
■ 동서고금의 독자들을 오랫동안 사로잡는 상징들의 특징은 주로 어떤 현상의 ‘원형’이 될 만한 신화적 요소를 품어 안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가는 상징들은 하나같이 그 상징과 해석이지닌 고유의 역사를 머금고 있다. 예를 들어 ‘물’은 기독교의 홍수 신화를 비롯해 전세계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종족 보존의 서사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물을 이해하고 물에 대처하고 물과 함께 살아가는 것, 즉 치수(治水)야말로 동서고금 문명의 핵심적 화두였기 때문이다. 불이 작품의 피날레를 장식하곤 하는 이유도 상징의 ‘원형’과 상징의 ‘역사’를 돌아보면 금세 이해가 된다. 물이 창조한 세계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세계의 생생한 육체를 흔적 없이 태워버리는 ‘불’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파괴와 창조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기에, ‘불’은 모든 것이 타고 남은 잿더미 위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인간의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 동물의 상징은 전세계 어디서나 나타나는, 각종 문학작품의 단골 상징이다. 예를 들어 동서고금을 통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상상의 동물 ‘용’은 영웅의 혹독한 통과의례의 마지막 관문을 지키고 있는 존재다. 용과 싸워 이기는 것은 곧 내 안의 두려움(내가 과연 내게 주어진 미션을 잘 해낼 수 있을까)을 극복하는 길이며, 용과 싸워 이기는 자에게는 ‘영웅’의 칭호가 자연스럽게 내려진다. 용은 반드시 외부의 적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이 숨어 있는 ‘내 안의 어두운 분신’이기도 하다. 내가 정말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난 아무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이야말로 우리 안에 숨은 ‘용’의 연약한 내면일지도 모른다.
■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안돼,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라든지 “나는 아무개가 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거야”, 이런다면 이게 바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용입니다. (……)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더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옮김,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7, 272~273쪽.
어린 게의 죽음/ 김광규
어미를 따라 잡힌
어린 게 한 마리
큰 게들이 새끼줄에 묶여
거품을 뿜으며 헛발질 할 때
게장수의 구럭을 빠져나와
옆으로 옆으로 아스팔트를 기어간다
개펄에서 숨바꼭질하던 시절
바다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눈을 세워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달려오는 군용트럭에 깔려
길바닥에 터져 죽는다
먼지 속에 썩어가는 어린 게의 시체
아무도 보지 않는 찬란한 빛
■ 고교시절 문학수업이 가장 재미없어질 때는 ‘수능대비형’ 문제풀이를 시작할 때였다. 문학 선생님의 나지막한 시낭송을 들으며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도, ‘5지선다형’의 지문에서 한 개 혹은 두 개를 골라내야 하는 엄청난 딜레마에 빠지는 순간, 문학을 향한 애틋한 동경이 확 사라졌다. 각종 수능 대비 문제집을 꽉 채운 5지선다형 문제들을 접하는 순간, 문학에 대한 내 짝사랑은 여지없이 와르르 무너지곤 했다. 아직 ‘문학’ 자체와 ‘문학을 유통하는 사회’를 구분하지 못하던 때였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문학을 유통하는 사회’의 답답한 교육 방식에 질려 ‘문학 자체’에서 멀어지곤 한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 단어 A의 상징적 의미가 아닌 것은?’ 같은 문제와 마주하면, 사람들은 이 문제풀이가 너무 싫은 나머지 ‘상징’이라는 문학적 코드 자체를 혐오하게 될 수 있다. 우리가 ‘상징’과 친밀해지기 위해서는 5지선다형 문제풀이가 아니라, 아주 일상적인 물건이나 신호 하나도 천천히 그 언어적 향기를 곱씹어보는 ‘삶의 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 한용운의 ‘님’이 오직 ‘조국’을 상징하기만 한다면, 그 ‘님’은 얼마나 편협한 ‘님’인가. 그의 아름다운 시들이 지닌 무한한 상징의 가능성은 ‘식민지 조국’이라는 좁다란 해석에 갇혀 질식당하지 않겠는가. ‘A는 B를 상징하는 거야’라고 ‘단정’짓는 것이야말로 상징을 취급하는 가장 위험한 방법이다. ‘이 중에서 A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 것을 골라봐’라고 요구하는 것 또한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부정’하고 ‘배제’하는 행위다. 이런 식의 훈련은 독자를 ‘가장 문학에서 멀어지도록 부채질하는’ 문학수업이 아닐까. 상징에 대한 탐구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시의 이 단어가 가리키는 상징에 대해 자유롭게 수다를 떨어보라고. 혹은 일기처럼 편안하게 이 시어의 ‘상징’이 의미하는 것들을 주저리주저리 적어보라고. 그것도 어렵다면, 이 시의 상징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때까지, 이 시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소리내어’ 음미해 보라고.
■ 상징은 ‘자로 잰 듯 명확한 답’이 없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문학을 문학답게 만드는 신비로운 에너지가 아닐까. 상징은 ‘너의 해석’과 ‘나의 해석’이 충돌하고 모순되는 과정 속에서 더욱 다채로운 의미의 향연을 연출한다. 우리가 쉽게 ‘A는 B를 상징하는 거야’라고 말하지 않고, 단칼에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상징의 의미를 캐내기 위해 사유의 모험을 시작한다면. 결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징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저마다 애쓰다보면 우리는 조금씩 상징의 묘미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제한된 언어로 ‘언어 이상’의 세계를 노래하고, 아주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현상에 대한 관찰만으로도 생의 신비를 노래할 수 있는 마법, 그것이 바로 상징의 힘이니.
■ <몽상의 시학>에서 바슐라르는 ‘상징’이 ‘마법’으로 변하는 순간을 이렇게 표현한다. 꽃이나 과일 같은 친숙하고도 단순한 대상이 갑자기 자기 생각을 해달라고, 자기 곁에서 꿈꾸어 달라고, 인간의 동반자 대열에 발돋움하는 걸 도와달라고, 시인에게 다가와서 부추기는 순간이 있다고. 물론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이 손쉽게 시적 몽상에 쓰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이 대상을 한 번 선택하면 대상 자체가 존재를 변화시키며, 그렇게 시인에게 선택된 대상은 ‘시적인 것’으로 승진한다고 말이다.
■ 상징은 그 ‘모호성’을 대가로 수많은 해석의 자유를 선물해주는 문학의 보물창고다. 상징에는 지극히 일상적인 사물이나 사건들조차 수천 겹의 비밀로 반짝이게 하는 힘이 있다. 햇살에 눈부시게 부서지는 분수의 물방울이 수천수만 개의 스펙트럼으로 갈라지듯이 상징은 아주 압축적인 단어나 이미지를 통해 수많은 의미들이 숨어있을 수 있는 해방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상징 없는 세상은 온통 검은색이나 흰색으로만 색칠된 스케치북처럼 단조롭고 지루하지 않을까.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에서 그저 눈에 보이는 축자적 의미만을 추출하고 만족한다면, 아무런 함축된 의미도 없이 건조한 ‘팩트(fact)’만이 창궐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권태롭고 지루할까.
III. 상징에 관한 몇 가지 문제
1. 붉은 악마라는 말 속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을까? 축구 심판이 사용하는 ‘레드카드’는 무슨 힘이 있을까?
2. 꽃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3. 옷의 상징성에 대해 말하라.
4. 욕은 어떤 문학성이 있을까?
5. 문학에서의 음란성문제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6. 문학공부를 wrestling with a fine woman 라고 한다. 왜 그럴까?
IV. 로그아웃
- 문학의 힘
문학의 힘은 언어의 힘이다. 바로 상징의 힘이다. 문학의 힘은 언어로부터 나오지만 단순히 개인을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나 김수영의 여러 편의 시들은 민중들로 하여금 독재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려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또 스토우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은 미국을 움직여 노예해방 전쟁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분단의 문제를 풀어가는 데 민중의 정서적 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민중의 정서를 움직일 수 있는 힘도 바로 문학의 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신호나 기호는 약속이나 관례에 의하여 제정되기 때문에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특성을 가지는 데 반하여, 상징은 그것이 가리키는 사진이나 사물인 문화에 ‘참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술이나 문화라는 것은 상징을 활용하거나 확장시켜나가거나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의 힘은 단순히 언어적 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독자의 정서에 울림을 주는 파도와도 같은 것이다. 단순한 언어의 힘이 순간적이라면 문학의 힘은 오래 오래 지속되는 정서적인 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