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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1편 8절-11절: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8절: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사람마다 즐겁고 기쁜 소식을 듣고 싶지 누가 슬픈 소식을 듣기 원할까? 그렇다면 현재 자기에게 무엇이 제일 즐겁고 기쁜 소리인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물질축복의 소리인가, 아니면 ‘너의 뼈가 부려졌다’ 하는 선언이냐? ‘너의 꺾어진 뼈가 붙었다’ 하는 소리가 듣기 좋고 기분이 좋지 ‘너의 뼈가 꺾어졌다’ 하는 소리가 무엇이 듣기 좋을까?
‘뼈’란 무엇이냐? 그 사람을 세우고 있는 골각이다. 뼈가 그 사람을 세우고 있다. 뼈가 없으면 문어처럼 되어버린다. 뼈는 그 사람의 중심의 힘이요, 이 뼈가 꺾이면 그 사람은 아무 힘을 못 쓴다. 갈비뼈 하나만 부러져도 힘을 못 쓴다. 새끼발가락 하나가 없으면 사람이 서는데 그만큼 힘이 든다. 발가락을 다치면 쉽게 잘 넘어진다. 하나님께서 어찌 그리 잘 만들어 놨는지? 뼈는 사람의 살 속에 묻혀서 그 사람을 지탱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정신적으로 말하면 사람을 지탱해 주고 있는 정신이 그 사람이 뼈다. 즉 뼈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육신의 뼈요, 하나는 정신적인 뼈다.
하나님의 징계로 자기 육신의 뼈가 꺾였는데도 교만한 성질이 도무지 꺾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자기의 뼈가 꺾이듯이 교만한 성질이 꺾여서 겸손한 사람이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중에 어떤 뼈가 꺾이는 것이 기쁘고 즐겁게 들리느냐? 옛사람의 성질과 고집이 꺾이는 소리다. 그런데 대부분 안 꺾이려고 한다. 예수 믿는 것은 내버릴지언정 그것은 안 꺾이려고 한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서 다윗의 죄를 지적해줄 때 다윗은 자기의 주관성, 죄를 짓는 교만성이 뼈가 꺾이듯이 꺾여버렸다. 회개의 기도를 했다. 이처럼 죄를 짓는 자기의 성질이 꺾인 것을 보고 기뻐한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고상한 사람이다. 복 받을 사람이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자기의 육신의 뼈가 부러지고 꺾여도 자기 고집이 안 꺾인다. 강하다. 뼈처럼 단단히 세우고 있는 교만한 자기, 내 속 들어있는 못된 나를 세우고 있는 이것을 꺾어달라는 기도는 정말 금대접에 담기는 기도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기도다.
사람마다 다 고집이 있다. 그런데 그 고집이 좋은 고집인지 나쁜 고집인지 분별을 하느냐? 나쁜 고집이 현재 자기를 지탱하고 있고, 누가 이 고집을 지적을 하면 그만 얼굴색이 달라지느냐? 속에서 뭔가가 이상하게 올라오는 게 있느냐? 이걸 느낄 수 있느냐? 이게 참 자기냐? 이 자기를 좋아할 사람이 있느냐?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자기가 내 자기다’ 하며 붙들고 산다. 지금 이 말이 ‘인격적으로 나에게 하는 소리로구나’ 하고 느껴지느냐?
그런가 하면 또 한 편 자기가 깎이는 소리를 들으면 그 당장에는 기분이 나쁘지만 참고 돌아서서 생각을 하면 ‘아, 정말 옳구나’ 하는 것이 자기 양심 속에 있기도 하다. 이러면 기분 나쁘게 생각한 것이 좀 미안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잘 해 주기도 한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다른 사람에게 잘 해 주는 그 자가 누구며, 자기가 안 깎이려고 하는 그 자는 누구냐? 그 놈이 그 놈이냐? 이런 걸 보면 이중인격자가 따로 없다. 이게 노골화로 드러나지 않으니까 나나 다른 사람이 심각하게 생각을 안 하는 것뿐이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이중적인 나로구나.
내 육신의 뼈가 꺾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교만한 나를 겸손한 사람으로 고쳐주심이 되었다면 내 신체의 꺾어진 뼈를 보고 즐거워할 수 있을까? 자기 신체의 꺾어진 뼈를 보고 회개를 해서 고쳐져 있다면 꺾어진 뼈를 보고도 기뻐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 뼈 자체가 꺾어진 것이 기쁘다는 말이냐, 자기가 고쳐진 것을 생각하니 기쁘다는 말이냐? 고쳐진 것을 보고 기뻐한다는 거다. 이것도 고상한 사람이다.
전쟁에 나갔다 온 사람이 자기 몸에 탄환이 박혔던 자리라든지, 몸 한 부분이 없어졌다든지 할 때 그것을 보여주며 치열한 전장의 상황을 얘기할 때 자기가 자랑스러워서 즐겁게 말을 하겠느냐, 슬퍼서 펄펄 울면서 말을 하겠느냐? 영웅처럼 느낄 거다. 그러니까 그 흉터는 자기의 면류관이 되는 거다. 이런 것처럼 내가 무엇을 보고 기뻐하느냐? 기뻐하는 질도 있고, 기쁨으로 느끼는 양도 다른 거다.
악한 성질이 들어있는 사람에게 돈을 주면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기뻐할까? 돈 때문에 기뻐한다. 그런가 하면 자기의 성질이 다른 사람이 볼 때도 빗나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 성질에 비위를 맞춰주면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그 다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또 술 한 잔 얻어먹었다고 해서 기뻐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담배 한 개비 얻어 피웠다고 해서 기뻐하는 사람도 있다. 그 다음은 자기의 성질과 마음이 고쳐진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 진리를 한 이치 깨달았다고 해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기뻐하는 그 질을 생각해 봐라. 기뻐하는 기쁨의 질도 다 다르고, 기쁨의 급수도 다르더라. 그러니 우리 모두는 자기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어떤 때 제일 기쁜지 생각해 봐라. 자기의 기쁨의 질을 자기가 느끼면서 어느 정도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거다. 자기가 어느 정도 고상한지, 저질인지를 알 수 있다.
9절: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지은 죄를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어리석기도 하고, 낮 뜨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다. 때로는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하고 싶을 정도의 죄도 있다. 이런 내 죄를 보지 마시고 안 보신 것처럼, 모르신 것처럼 해 달라는 기도다. 그러면 내 모든 죄를 도말해 달라는 것이 내가 지은 죄를 알고도 모른 척 해 달라는 말이냐, 내 모든 죄악을 없이 해 달라는 말이냐? 내가 지은 죄를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알고 내가 안다. 그래서 죄를 지은 내가 주님과 서로 쳐다본다면 나도 괴롭고 주님도 괴로운 거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고 내 죄악을 도말해 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거다.
내 죄가 도말되는 길은 기본구원은 물론이고 이룰구원 차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밖에는 없다. 성경에 번제도 있고, 화목제도 있고, 소제도 있고 한데 이게 다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질을 말하는 거다. 그러면 죄를 사해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구속이라는 말 속에는 신령천국에서 내가 주님과 얼굴을 맞댈 때 민망하거나 부끄러움이 없도록 해 준다는 의미도 들어있다. 예수를 믿는 것에는 우리의 과거의 잘못된 것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거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저질러 놓으면 잘못은 하나님께 했는데 어째서 교인들을 보기에 민망할까? 또는 주일예배를 한 번 구워먹으면 교인들 얼굴을 보기가 미안하다. 그래서 다음 주에 교인을 만났을 때 나에게 묻지를 않는데도 ‘내가 지난주에 뭣 때문에 못 나왔다’ 라고 말을 한다. 왜 그럴까? 신앙양심이 그런 거다.
교회에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비록 잘못했어도 회개를 하고 남보다 먼저 달리면 과거의 것은 생각이 안 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죄를 짓고 이미 회개를 하고 바로 살고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계속 이 사람의 죄를 마음 속에 품고 생각을 하면서 ‘네가 옛날에 그랬지?’ 그런다면 이런 사람은 사귀지 말아라. 이런 사람은 사람 가운데 살기가 힘들다. 이런 사람은 부부끼리도 사는 게 힘든 거다. 사람이 시원시원하지 못하고 스스로 병을 만들고 불행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죄를 짓고 회개하고 바로 나가면 잘못된 과거를 덮어주는 분이다.
우리가 사도바울을 생각할 때 머릿속에 척 떠오르는 것이 스데반을 죽인 사울을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충성되고 신실한 종으로서 구라파를 점령한 사도바울을 생각하느냐? 유구라파를 복음으로 점령한 사도바울이 생각이 난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기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이 되고 있을까? 좋은 의미로 기억이 될까, 나쁜 의미로 기억이 될까? 어떤 나로 기억을 심어줬을까?
우리 모두는 자기의 언행심사가 은연중에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입력이 돼 들어간다. 인격자의 세계는 그런 거다. 왜냐? 인간은 눈이 있어서 보고, 귀가 있어서 듣고, 감정이 있어서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언행심사에 얼마나 주의를 해야 되겠느냐? 삼가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일을 시시콜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의 생활이 보편적으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느낀다. 저 사람이 밤에 일을 나가는지, 낮에 일을 나가는지, 아니면 새벽에 나가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생활패턴이 어떻게 돌아간다는 것을 대강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의 생활 형편상 자기만 부지런하고 조금만 신경을 쓰면 예배에 충분히 나올 수 있을 텐데도 자기의 생활 때문에 못 나온다고 하며 게으름을 피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이러면 우리 주님의 눈에도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인격자의 세계에는 이런 게 있는 거다.
10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인간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인간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신앙을 하는 것은 인간이 주격이 된 것이니, 옛사람이 주격이니, 옛사람이 주격이 된 신앙은 항상 자기 생활에 대한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신앙은 영과는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자기의 영이 잘 되라는 거다. 영인성장이 잘 되라는 거다. 그런데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신앙을 항상 자기의 생활에 붙인다. 이런 사람은 신앙이 자라지 못한다. 생활 면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주님을 불러서 자기를 자꾸 도와달라고 한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어떻게 보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고약하다. 안 믿는 사람이 ‘주여’ 하고 주님을 불러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느냐?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머리를 써서 살아간다. ‘어디가 돈을 더 많이 주느냐?’ 하며 돈을 더 많이 주는 곳을 찾아가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번다. 그런데 인본주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기가 노력은 안 하면서 하나님에게 세상물질을 많이 달라고 한다. 그러니 이런 날강도가 어디 있느냐?
우리 성도들이 집이 가난하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자기의 현실이 교회를 못 나오고 돈을 벌어야 할 처지라면 기도를 안 하겠느냐? 기도를 해야 하는데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해야 한다. 지혜 속에는 자기의 생활처신이 다 들어있다.
이것보다 조금 더 순교적인 신앙은 굶어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 거다. 그런다고 해서 굶어죽느냐? 아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남보다 조금 더 못 살지언정 굶어죽지는 않는다. 이러면서 그 고통을 한 번 이기고 두 번 이기고 세 번 이기다 보면 점점 실력이 커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지혜가 나오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길을 열어주신다. 세상만사의 이치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면 그만큼 시련과 연단을 거쳐야 한다. 이게 인간세상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인본주의 세상살이의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신의 성품을 입지 못한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되는 일이다. 선악과 따먹은 정신을 가지고 아무리 각오하고 결심을 해도 그것은 창조된 새 마음이 아니다. 창조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손길이 들어갔구나. 하나님의 역사가 들어갔다. 물질세계도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이 들어갔고, 신앙의 세계도 하나님의 손길이 들어간 창조가 있다. 깨달아진다든지, 사람이 바꿔진다든지 하는 이건 그 사람에게 성령님의 손길이 임한 거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생명 길 좁은 길로 가는 거다. 이것이 정직한 영의 길이다. 자기의 인격의 주체성을 이렇게 만들어 달라는 거다. 이렇게 되려면 늘 새롭게 되는 진리생명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우리가 기본구원을 받아서 영이 중생이 되었어도 진리신앙 정신 사상을 받지 못하면 자기의 생각은 세상 쪽으로 치우쳐 있는 거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을 구하며 이방우상과 같은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이 많다. 이처럼 세상을 구하는 것은 정한 마음이 아니다. 진리에서 이탈되어 세상 쪽으로 가고 있는 거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예배당에만 앉아있으면 바른 길로 가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거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로 사람이 새롭게 고쳐지는 것인데,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음과 생각이, 소원이나 목적이나 취미가 하나님 앞에 깨끗지 못한 옛사람의 상태로 있는 자들이 많다. 그러면서도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오고, 삼일저녁에도 교회에 나오고 하니까 자기의 신앙이 세상으로 치우쳐 있는 줄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알아야 한다. 모르고 있다면 자기는 정한 길이 아닌 부정한 길로 가고 있는 거다.
11절: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성신’이란 성령님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기본구원을 얻은 자에게는 중생된 영과 함께 성령 혹은 성신이 결합적으로 내재해 계신다. 하나님의 신이 같이 계신다. 중생된 영은 거룩한 영인데, 거룩한 이 영은 성령님이 내재해 계시는 거다. 신의 성품에 참예가 되어있기 때문에 성령님이 내재해 계신다. 그래서 이 중생된 영은 사단 마귀나 죽음이 건드리지 못하고 접근도 못한다. 마귀가 잡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엊그제 기독교 tv를 듣다보니까 어느 목사님이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 그 옆에서 교인들이 찬송을 열심히 부르면 그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식으로 말을 하던데, 이런 말은 이단적인 말이다. 말이 안 되는 거다. 이런 말은 하나님의 구속이니, 주권이니, 예정 등이 깡그리 무너진 말이다. 그 목사가 신학교도 졸업하고 목사안수도 받았겠지만 이단소리를 하고 있다. 이방 신관적인 사고방식으로 성경을 보고 그렇게 말을 하는 거다. 그런 식이라면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 교인들이 그 집에 미쳐 도착을 하지 못해서 옆에서 찬송을 불러주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돼버린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닦아놓은 기본구원을 기초로 하고 그 위에 집을 짓듯이 영능이 실력이 성장을 하는 것인데, 이 신앙성장은 하나님의 진리본질과 진리이치의 깨달음이라야 되는 거다. 이렇게 해서 된 질이 신본주의다. 이 신본주의는 진리이치로서 이룰구원으로 들어가고 깨달음을 주는 이치다. 이래야 성장이 된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그 질이 세상 인간의 것이다. 인간기준, 세상기준이다.
영적 깨달음의 성장이 충만해질수록 이 사람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사역적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학생이 학교에 다니면서 많이 알면 정답을 알게 되고, 정답을 알면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거다. 즉 사역 활동이 나오는 거다. 모르면 안 나온다. 이런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교인들이 깨달음의 성장이 충만하고 많으면 그 깨달음에서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거다. 이게 전도다.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의 깨달음의 충만성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사역적으로 쓰지 않으신다. 알지를 못하는데 어떻게 쓰시겠느냐?
이단을 논하려면 자기가 ‘이단이 뭐다’ 하는 것을 논리정연하게 밝혀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논리가 정확한 것만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이룰구원 면에서 신앙이 정확해야 한다. 이렇게 되어서 이단을 논한다면 주님이 알아주는 바가 된다. 그런데 흔히 보듯이 자기는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그리고 이룰구원이 뭔지도 모르면서 ‘누가 이단입네’ 하고 논한다면 이건 주님 앞에 심판받을 자요, 다른 사람에게 뺨 맞을 자다.
이단을 논하려면 자기가 목숨을 내놓고 명확하게 이룰구원의 길로 걸어가면서 논하라. 이치적으로 생각해 봐라. 자기 눈에 티가 큰 게 들어있으면 티가 들어간 눈만 아니라 티가 들어가지 않은 다른 쪽 눈도 뜰 수 있느냐? 두 눈을 다 뜰 수 없다. 아파서 두 눈을 감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사람의 눈의 티를 뽑는다고 하다가는 그 사람의 눈썹을 다 뽑아놓게 될 거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거룩성과 중생된 영이 있는 한 이 사람에게서 성령 또는 성신을 거둬가지 않는다. 떠나지 않는다. 만일 떠나간다면 이 영은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중생된 영의 질은 하나님의 질과 같고, 성령님의 질과 같고, 주님의 질과 같다. 그래서 마음과 몸이 죄를 짓고 있다고 해도 마귀가 그 영을 붙들고 지옥에 못 보낸다. 다만 중생된 영은 죽지는 않지만 마음과 몸이 죄를 짓게 되면 활동적인 것이 못 나온다.
성도가 죄를 지으면 성령을 거둬간다고 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건 성령의 감화성이 없어지는 것을 말하는 거고, 이런 사람은 말씀의 깨달음도 없고, 신앙정신도 없고, 믿음도 자라지 못하고, 세상 것을 사랑하고 있는 거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생명권에서, 하나님의 애정권에서, 하나님의 치리권에서 자기 스스로가 나가게 된다. 말하자면 성 밖에 쫓겨난 것과 같아서 이방세상이라고 하는 정신에게 자기의 시간성, 노력성, 투자성이 다 먹히는 거다. 자기가 하나님 밖으로 나가 살 때 짓밟히는 것이 느껴진다면 하루 빨리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나님을 찾고 진리신앙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만이 성화구원이 이뤄져 나가게 되는 거다. 짓밟히는 상태를 깨닫지 못하면 그대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예수 믿으면서 세상 복을 달라는 신앙이라든지, 자기의 속화된 종교적 가견적 목표를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은 질적으로 하나님의 생명권 밖으로 쫓겨난 신앙이다. 쫓겨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지 않고 자꾸 세상을 구하는 거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자기가 뭘 구하느냐?’ 하는 간구성에 따라 자기가 하나님 안인지, 밖인지 알 수 있는 거다.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이루어 가는 신앙은 사람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상태인고로 하나님의 생명권 애정권 안에 있는 신앙이다. 그러니 주님이 이 사람을 쫓아낼 이유가 없는 거다.
우리 모두는 자기가 가진 신앙의 질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본질에 비추어서 자기 신앙의 질을 알아라. 하나님의 진리권 애정권 생명권 안에 머물고 있는 신앙인지, 아니면 밖에 머물고 있는 신앙인지? 그리고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하나님의 본질로 가고 있는 신앙인지, 아닌지 빨리 알아야 한다. 매우 중요하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