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모델의 워킹이 당당하다. 은발의 커트 머리를 멋스럽게 빗어 넘기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가 긴 다리를 움직여 폼나게 걷는다. 80이라는 연식이 무색하도록 자태와 걸음새가 남다르고 경쾌하다. 인생길 몇 굽이를 돌아온 몸으로 젊은 모델들과 하는 공동 작업이 어찌 힘겹지 않으랴만, 지친 모습은 몸 어디에서도 엿볼 수 없다. 오리려 늦깎이 모델로서 식지 않는 에너지를 뿜는다.
거뜬히 신체 균형을 유지할 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한 그녀, 지하철 안에서도 ‘노인석’에 앉는 대신 손잡이를 잡은 채 곧게 서 있는 깡이 빛난다. 그녀를 보면 마음과 육체는 단, 한순간도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것 같다. 몸 근육은 물론 마음 근육도 함께 단련시켜 왔으리라. 순간순간 깨어 있으면서 ‘최대치의 나’로 넓려 가도록, 생의 저물녘에도 시간에 함몰되지 않도록…. 우연히 마주친 TV 화면 속 그녀에게 곱다시 마음이 사로잡혔다.
어는 틈에 저녁이 내 몸속을 기웃거린다. 짧은 낮을 경유해 가장 긴 밤에 닿는 것이 생의 시계임을 넌지시 일러 준다. 이제 곧 자기 세상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건가. 겨울 오후의 해가 한 뼘쯤 남아 있는 골목처럼 몸이 자꾸 어둑해진다. 꿉꿉해진다. 남은 볕으로 무엇을, 어디를, 말려야 하나.
느닷없이 무릎이 아팠다. 여태 고분고분 잘 걸어 주고 뛰어 주던 다리가 굽히고 펴는 동작에서 극심한 통증을 호소했다. 몸 주인이랍시고 평생 당연한 듯 부려 먹기만 했으니 무슨 염치가 있겠는지. 내 나름 조치를, 취한다. 동네 작은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사진 찍고 주사 맞고 약 먹고 가까스로 진정시켜 놓았건만 다리 한쪽에선 또 웬일? 찌릿찌릿 부정적인 기류가 흐른다. 저리고 삐걱대는 관절 따라 마음도 덩달아 절뚝거린다. 기력이 빠지고 의욕이 사라진다.
유엔에서 연령 분류 표준의 새로운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전 세계인의 체질과 평균수명에 대해 측정했는데 17세까지는 미성년자. 65세까지는 청년, 79세까지는 중년, 99세까지는 노년, 100세 이후부터는 장수 노인으로 분류했던 것. 사람은 수학적 연령과 상관없이 생물학적으로 젊게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자연의 봄은 계절을 따르지만, 인생의 봄은 만들기에 달렸다는 뜻일까. 자신이 뿌리는 긍정적 에너지는 반드시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말을 새삼 곱씹어 본다.
실제로 봄을 닮은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 아니, 봄을 만드는 사람이겠다. 부단한 자기 관리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실버 모델, 꾸준히 산길을 오른 경력으로 높은 산 정상에서 산악 대원들로부터 팔순 생일상을 받은 할머니 등산가를 보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보면, 정치인이자 작가였던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도 90세까지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끈 철인으로 유명하다. “성공은 영원하지 않고, 실패는 끝이 아니다.”라는 등의 어록을 남긴 그는 우리에게 긍정의 기운을 퍼드려 놓고 갔다.
작가는 어떤 사람인가. 누가 글을 쓰는가. 글쟁이는 글을 쓰는 공간이 어디든 스스로 만든 감옥으로 즐겨 걸어 들어간다. 자신만의 감옥을 사랑하는 동시에 자기 내면의 무수한 벽과 어둠을 깨고 깨어서 그 너머로 가고자 한다. 남루해지는 자신을 거부하고 다른 세계로 확장해 가는 긴장과 떨림을 사랑하는 사람. 그런 고통마저 기껍게 여기는 사람들일 테다. 내가 아는 선배 시인은 팔순 고개를 코앞에 두고 수시로 덜컥거리는 몸 달래기에만도 여념이 없었다. 안과, 치과, 정형외과, 한의원을 번갈아 드나들었고 몸 몇 군데엔 수술까지 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곧이어 날아온 2년 만의 시조집 출간 소식은 어쩔 수 없이 글쟁이임을 확인시킨다. 밤낮을 지우고 어둠을 잘라 시를 썼나 보다. 작가란 쉼 없이 불태우는 마음의 소유자. 버거운 현실과 부대끼는 상황일수록 봄을 부르고 만드는 ‘봄 사람’인지도 모른다..
지인이 카톡으로 복수초 사진을 보내왔다. 겨울을 뚫고 나온 노랑 꽃잎들이 여린 듯 강한 봄빛 에너지를 발한다. 잠자던 세포들이 스멀스멀 기지개를 켜는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다. 먼 곳으로부터 찾아든 긍정적인 기운을 조심스레 붙들어 컴퓨터 앞으로 다가간다.
한동안 손에서 멀리했던 자판을 두드리며 글 문을 연다.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성큼, 글 길에 오른다. 스스로도 모르게 내가 상대에게 준 어떤 에너지도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며 숨을 토한다. 점점 글 속도가 따라붙으면서 흉곽을 흔든다. 이대로 쭉 가면 마음 물결 청청하게 간직한 봄 사람 하나 만나질까.
봄의 순간은 일생 속에도, 하루 중에도, 매시간에도 존재한다는 걸 잊고 있던 여자가 방금 봄 속으로 몸을 쑥 내밀었다.
첫댓글 세월이 나이만큼 속도를 내어 달린다더니 벌써 봄이 기웃대고 있습니다. 염선생님의 맛갈스런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올 해에는 또 어떤 소재의 수필을 쓰 나가실지 무척 궁금해 집니다. 부디 건강 잃지 마시고 좋은 작품 많이 쓰 주시길 빌어마지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