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신약 성경을 읽은 때 하나님 앞에서의 의를 얻는 데 두 거대한 신학자 바울과 야고보의 견해차를 확인하고 혼란스러워하게 된다. 바울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야고보를 따라야 하는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야고보를 버리거나 혹은 바울이 성경의 사상을 자기 마음대로 변질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울은 (롬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라고 말했고 반면 야고보는 이런 바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듯하다. 그는 두 사람 아브라함과 라합의 경우를 증거로 제시하면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약 2: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5) 또 이와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도대체 조화를 이루어야 할 성경이 이렇게 충돌되는가? 과연 누가 더 맞는가? 그렇다 보니 어떤 사람의 주장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완전히 구원파 논리로 흐르고 어떤 사람들은 극단적인 율법주의로 빠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사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은 의(의롭게 됨)라는 같은 산을 바라보는데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같은 산이라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 모습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바울은 올라가는 길을 보고 있다면 야고보는 내려오는 길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의를 얻는 조건을 말하고 야고보는 의로운 삶의 열매 곧 결과를 말하고 있다. 그러니 두 사람의 말은 같은 주장 다른 표현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설교는 야고보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바울이 복음과 의를 설명하는데 여지를 주지 않고 그렇게 싫어한 행위 주의, 율법주의의 핵심이 행함이라면 모세나 야고보는 믿음의 다른 면인 순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으로 표현한다면 믿음의 반대면은 행함이(야고보도 행함이라고 묘사하지만) 아니라 순종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실천해야 할 삶의 방식과 태도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신 6:24)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를 오늘과 같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신 6:25) 우리가 그 명령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비유에서 포도원에 간 형제 이야기를 했다.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한 아들은 안 간다고 대답하고 마음을 바꿔서 들어가 일했고 다른 아들은 간다고 대답하고는 오히려 가지 않았는데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했는지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결국은 포도원에 간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요한도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한 것이다.
믿음이냐 행함이냐를 두고 고민하지 말고 사랑한다면 어떻게 할까 라고 묻는다면 의외로 답은 간단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주님의 명령과 계명을 즐겨 순종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게 하소서. 주님을 기쁘게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는 하루를 살게 하시고 바른길 바른 뜻을 따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