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것은 이제 그만"…속도맹종 탈피하려는 새 조류 확산 느린 도시-저성장운동에 패스트푸드 거부…느린경영연구 활발 현대문명에 거대한 '느림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 속도를 중요한 특징으로 삼는 현대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속도에 끌려만 다니지 말자'는 움직임이 다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속도가 가치를 창조한다'는 21세기 디지털시대에 '속도 맹종'에서 탈피하려는 노력들이 시대의 한 조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투스카니와 움브리아 지방의 그레베시 등 32개 소도시는 작년 7월 ‘느린 도시’(Slow City) 운동을 선언했다. 현대의 바쁜 속도에서 벗어나 좀더 느릿느릿하고 조용하며 여유있는 삶을 추구하자는 게 이 운동의 취지. 이들은 먼저 자동차 추방 운동을 벌이기로 합의, 보행자 구역을 확대하고 자전거 이용을 권장하며 공해 없이 조용히 움직이는 전기버스를 늘리기로 했다. 또 특정지역에서 자동차 운행이 불가피할 경우 경음기 사용을 일절 금지시키기로 했다. 네온사인 간판이나 포스터 등 시각을 어지럽히는 구조물도 줄여나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이 운동이 문명이나 첨단기술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레베시의 파올로 사투르니니 시장은 “우리는 19세기로 되돌아가 과거에 묻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첨탑안테나를 지하케이블로 대체하는 등 우리가 사는 곳을 더욱 편안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미국 일부 도시들에서는 ‘저성장(Slow Growth)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빠르게 진행되는 도시 개발에 대해 그 속도를 통제하자는 것이다. 고속 성장이 교통난, 범죄 등 각종 도시ㆍ환경문제를 야기할 뿐 아니라 쾌적한 주거환경을 해친다는 것이 이 운동의 출발점이다. 저성장 운동가들이 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 저성장 운동을 현실화하는 도시들도 생겨나고 있다. 한 예로 오리건주 벤드(Bend)시 의회는 작년 12월 14년간 이 도시의 고속 성장을 주도해 온 시정담당관을 해고토록 했다. 그리고 무분별한 성장보다는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들에게 편리한 도시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이 도시는 1980년 인구 1만7300명의 임업 도시에서 1999년 인구 5만명의 바쁜 사업 도시로 바뀌었다. 대형 가게들이 들어섰고 매일 교통체증이 발생하며 학교에는 학생들이 넘쳐나는 현상을 겪었다. 이로 인해 지난 5년간 도로, 교량 등의 굵직한 건설공사들이 주민 반대에 부딪혀 저성장 운동이 크게 확산됐다. ■매주 금요일은 '컴퓨터 없는 날' 캘리포니아주 일부 도시들은 큰 면적을 차지하는 공장이나 기업의 입주에 대해 주민투표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또 주민들이 단체를 결성, 개발업자들에 맞서는 여러가지 집단행동을 취하고 있다. 저성장 운동가들은 아파트의 확산이 주거환경을 파괴하고 범죄를 유발시킨다는 점 등을 들어 아파트의 건설 제한을 주장한다. 일본 서부 히라타 시청은 작년 매주 금요일을 ‘컴퓨터 없는 날’로 정했다. 컴퓨터가 인간적인 접촉을 방해하고 조급증을 부추긴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루라도 컴퓨터를 켜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현대인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조치였다. 이 때문에 젊은층에서는 ‘업무처리가 늦어진다’는 불만이 일고 있다고 한다. ▲ 음속의 7~10배로 나는 비행기가 개발 중이지만 소달구지는 여전히 농부들의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학자들은 느림을 정체성 회복의 한 측면으로 파악한다. 현대 ‘속도문화’의 한 형태인 패스트 푸드(fast food)를 거부하는 ‘슬로 푸드’(Slow Food) 운동도 한창이다. 북부 이탈리아 브라(Bra)에 본부를 둔 ‘슬로 푸드’ 운동은 45개국 이상에 400여개의 지부를 두고 있으며 전세계적으로 6만5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주로 맥도날드형 패스트 푸드(fast food)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생한 이 운동은 생활의 속도를 좀더 느리게 하면서 음식의 맛과 향기, 다양성을 즐기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서구화된 사회에 퍼져 있는 전자제품을 이용한 조리,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 식생활 등을 배격한다. 이들은 1차적으로 대량 생산, 규격화, 기계화된 음식 대신 전통음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 널리 보급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www.slowfood.com)와 책자를 통해 이같은 정보를 일반에 알리고 있으며 작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세계 최초로 슬로 푸드 선발대회를 개최했다. 국내서는 경남대 사회학과 김종덕 교수가 이 대회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는 등 이 운동의 국내 보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 교수는 “현재 이 운동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사업 내용을 설계하고 있다”며 “준비가 끝나는 대로 곧 단체를 발족할 것”이라고 말했다. ‘속도문화’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과학기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느림’ 현상은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기기의 개발로 나타나고 있다. 작년 소니사는 손으로 태엽을 돌려 에너지를 충전해 들을 수 있는 라디오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한시간을 돌려야 겨우 30분을 들을 수 있는 휴대용 라디오이다. 인터넷으로 전세계에 있는 데이터들을 순식간에 찾아내는 요즘 세상에 손으로 한시간을 돌려야 30분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를 세계적 기업, 소니에서 개발했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느림의 발명은 이 한건만이 아니다. 나이지리아인 모하메드 바흐 압바(36)는 작년 10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냉장고를 개발, 스위스 시계 메이커 롤렉스사가 제정한 상의 과학ㆍ의학부문상을 받았다. 압바가 발명한 냉장고는 흙으로 만든 두 그릇 사이에 모래를 넣은 것으로 모래에 물을 뿌리면 열을 빼앗아 그릇 안 음식물에 대한 냉장효과를 거둔다는 것이다. 국내서는 지난 99년 창조산업이 전기를 쓰지 않는 냉난방 공조기를 개발해 화제를 모았다. 또 작년 8월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시의 사우스 플로리다 대학의 스튜어트 윌틴슨 박사팀은 설탕을 먹고 움직이는 ‘가스트로봇’를 개발했다. 설탕을 분해해 얻는 전자로 배터리를 충전,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이다. 발명칼럼니스트 이태훈(㈜패턴트인포 조사분석실 부장)씨는 “빠른 것만을 추구하는 삶 속에서 느림도 충분히 창조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과학기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문화 영역에서는 작년 이후 느림에 대한 성찰을 담은 신간이 수십여종 쏟아지고 있다. 작년 국내서도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 지음)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경향은 시간예술인 음악에서 더 뚜렷하다. 음반시장의 경우 2~3년 전부터 지휘자 카라얀, 정명훈 등이 녹음한 음악의 편집앨범 ‘아다지오’ 류가 폭넓은 반향을 얻었다. ■광우병 출현은 속도 맹신의 대가 아날로그 문화에 대한 향수도 이런 현상들과 연관된다. CD와 MP3 등 디지털 음반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서 90년 이후 생산이 중단된 LP가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의 한 상인은 “LP는 이전에는 몇몇 매니아들에게 팔렸으나 요즘엔 일반사람들도 많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작년 이후 각 문화 장르에서 불고 있는 복고풍도 ‘느림 현상’의 한 단면으로 이해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와인 붐도 느림을 추구하는 사회현상의 일단으로 파악된다고 한다. 와인 한병이 만들어지는 데는 숙성에만 최소한 1년 이상이 소요된다. 중요한 것은 마시는 것도 다른 술보다 훨씬 느리다는 점이다. 색깔을 보고 향기를 맡고 맛을 느끼면서 마시는 와인은 마신다기보다는 음미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정도이다. 더구나 빨리빨리 알코올을 들이붓기에 급급한 한국인들은 이같은 음미를 통해 느긋함과 여유를 찾는다는 것이다. 기업경영도 이같은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변화경영 전문가 구본형씨는 “21세기 경영에는 혁명적 사고가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휴식이 필수적이다. 경영에서 느림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정보통신(IT) 분야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새 경제 엘리트들은 이 점을 충분히 인식, 휴식이나 취미ㆍ문화 향유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한창수 수석연구원은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그는 “경영에서 느림은 원칙과 기본을 준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것들을 무시한 채 외형적으로 급성장한 재벌들이 잇따라 무너지는 우리 현실에서 기업들이 느림의 철학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류는 이미 ‘속도 맹신’의 대가를 치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광우병이 그 단적이 예. 초식과 되새김질을 기본 속성으로 하는 소를 빨리 키우기 위해 동물 사료를 먹인 결과가 광우병이라는 인류의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느림과 빠름의 양면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일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때가 됐다. ------------ '느림'의 의미 ------------ 자기 정체성 회복…인체의 긴장 해소 느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소한 것을 털어 버리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자”고 말한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머물 수 있는 여백을 찾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여유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 자기의 모습에 대한 파악이라고 설명한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저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이에 대해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빠름과 느림의 적절한 균형, 빠른 세상 속에서 느린 삶을 살 수 있고 이 느린 것이 빠른 세상과 어긋나지 않는 삶이 되게 하는 원리를 바로 자신이 찾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느림’을 쓴 체코 출신 작가 밀란 쿤데라는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라며 ‘느림이란 감속의 기법을 다룰 줄 아는 지혜’라고 했다. ‘시간’을 쓴 가이슬러는 ‘느림이야말로 바로 창조의 전제이고, 느림이 신뢰와 사랑 그리고 결속을 만들어 준다’고 적었다. 하지만 느림이 단순히 이 세상에서 후퇴하는 수구적인 의미는 결코 아니라는 게 학자들의 지적이다. 즉 느림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신의학자들은 느림은 빠른 현대 생활에서 조성된 자율신경계의 긴장을 이완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파악한다. 경희대 병원 신경정신과 장환일 교수는 “사람은 긴장과 이완이 적절히 반복되어야 하는데 빠름의 연속은 긴장만을 강요한다. 이런 경우 인체는 흥분, 초조, 불안 등의 상태가 지속되며 혈압상승, 소화불량, 어지러움증, 우울증 등의 건강이상을 유발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여기서 느림이란 명상, 참선, 운동, 취미생활 등을 통해 자율신경계의 긴장을 해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