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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2
요한복음 풀이 2. 信天함석헌
요새 거 뭐지?『코스모스』란 책, 그 책이 우리 말로도 나왔습니까?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텔레비전에도 나왔다던데, 난 텔레비전 없으니까 못 봤지만. 거기서 우주 되어간 얘기 하면서 우주 시작된 날을 ‘빅 뱅’ (Big Bang)이라 그래요. 우리 말로 한다면 맨 처음 ‘꽝’ 하는 소리라고할 거요. 우주가 맨 첨에 언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거요? 시작이 없는데 그 시작을 얘기하려니까 어느 시점에서 ‘빅 뱅’ ‘꽝’ 한다든지, ‘뻥’ 한다든지, 무슨 그런 소리가 있는 그게 우주의 시작이라 그 말이에요. 좋게 ‘빅 뱅’ 이라고 말을 했는데, 콘덕터 음악이 이 속에 꽉 들어 차 있지만 그 터지는 순간이 오기 전에 하면 맥이 없어요. 내가 이거 해 야지 해서 하는 게 아니라, 안하곤 못 배겨서 터져나와야 돼요. 신이 안 나고는 그럴 수가 없어요. 그럴 거 아니오?
이 사람이, 이거 첨 쓰는 분이 “첨에 말씀이 계셨다.”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해요? 말씀이 뭐지요? 어떻게 말씀이 ‘있다’ ‘없다’ 그런 말을 해요? 그러니까 그런 거는 그 처음을, 그걸 맛을 보려고 그러면, 내가 어느 정도까지는 그걸 맛을 보면서 해야 그래도 어느 정도는 느낌이 돼요. 그게 이제 우리가 명상으로 가만히……. 어쨌거나 내가 말한다는 사람이니까 내가 말한다는 의식이 있지, 없었겠어요? 있겠지만 의식이 있겠지만, 내가 말한다는 생각이 있긴 있겠지만서도 그건 “내가 말하는 거 아니지. 이거 참, 말이 나가는군” 하는, 말 자체가 나가는 그때까지를 기다려보시는 거.
그렇게 되면 명상이란 뭔지 어떻게 하는 건지 그걸 좀 짐작을 하시겠는데, 이게 이「요한복음」처음을 보면 그런 거 같다 그 말이에요. 이 놀라운 말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이건 아주 이때까지의 침묵을 깨뜨리고 나오는 말이에요. 아주 큰 말이오. 그런데 그 큰 말을 ‘하나님’ 이라 안 그러고 “말씀이 계셨다” 그랬어요. 하나님이라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계신 줄 하나님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은 계시다 안 계시다 그럴 수도 없는 분이에요. 이런 말을 하면 한이 없는 소리지만, 그래도 어떤 분들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이런 것은 조금 생각해보셔야 돼요. 어디 가 우리가 하나님을 다 본 것처럼 말할 수 있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보기는 언제 봐요. 보지도 못하고 괜히 그러는 거예요. 남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외는 거지. 사람들이란 어디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으면, 와서는 신이 나서 이야기하잖아요? “너 봤지? 봤지?” 그러면 “봤다, 봤다” 그러다가도 아주 “정말 봤느냐?” 그러면 “그런 거는 아니야. 사실 나도 들었어.” 그러기 때문에 그게 확신이 없는 소리예요. 그런데 여기 있는 이런 얘기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얘기예요. 하나님이라 하면 우리가 다 계신 줄 알고 있는 듯이 말하지만 대개는 확신 없이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선 안돼요. 확신이 서기까지는 기다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나게 돼요.
사실 말이지 “바울이 그랬으니까 나도 그렇게 한다” 이렇게 돼가지고 되겠어요? 안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뜻에서 조지 폭스가 한 말 그건 아마 그 사람도 젊어서 그랬는데 거 놀라운 말이에요.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요한은 이렇게 말했지마는 너는 뭐냐? 너는 뭐라고 말 하느냐?” 그 사람은 또 왜 그랬는지 하도 이런 게 문제가 되니까 이런 얘기 하나 합시다.
그가 열아홉 살 나서 구두 고치고 있던 그런 청년이에요. 공부도 한게 없었던 사람이지요—하루는 일하러 나가다가 길거리에서 자기 사촌을 만났어요. 사촌은 교회에서 아주 모범 청년이란 말이오. 모범 신앙청년이란 평을 듣던 사람인데 조지 폭스에게 “야 우리 맥주나 한잔 먹자” 그랬어요. 그래 이 사람은 성질이 내성적인 사람이니까, 형이 하자니까 안하기도 뭣하고 그래서, 그 사람의 동무 하나하고 셋이 들어갔어요. 맥주를 먹기 시작했는데, 첨에는 한 잔씩만 해서 제각기 돈을 내어 마시게 되었는데, 웬걸 맥주를 마시기 시작을 하더니 태도가 달라진단 말이에요. 나중엔 모범 청년이란 어느 구석에도 없어요.
또 얘기가 딴 얘기가 됩니다만, 언젠가 내가 강연을 하면서, 지금은 감옥에 들어가서 고생을 하고 있는 고은 씨보고 일부러 말했어요. 고은 씨 좋은 점이 있지요. 물론 있지만, 이 사람 술만 먹으면 딴사람 된단 말이오. 세상에 술 먹고 딴사람 안되는 사람 없어요. 그래 고은이 참 좋긴 좋은데, 그래 좋기 때문에 그 기회에 한마디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다른 말 하다가 “여기 고은 씨가 와 앉았지만, 고은 씨가 미치는 걸” 그걸 미친다고 그랬어요 “미치는 걸 좋아하지만 그러나 술로 미쳐서는 채 못 미친다. 그것 가지고야……. 진리에 미쳐야 참 미치는 게 되지” 했어요.
아닌게아니라 우리가 미치는 지경까지 가야, 소위 말하는 미치는 지경까지 가야만 그게 정말 참 해방이 되는 지경이 되는데, 술을 먹는 것도 그러고 싶어서 먹는 거요. 그 술 먹는 심정을 알지요. 나는 술 안 먹지만 그 심정을 알지, 모른 건 아니오. 왜 그런고 하니, 술 먹은 뒤에 제일 좋은 건, 세상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하늘이 돈닢만해진다고 그러잖아요? 세상만사 다 걱정이 없어, 그 자리가 아주 좋아, 그 자리가 좋아서 그러는데, 그걸로는 얼마 못 간다 그 말이오.
한 번 먹어보고 두 번 먹어보고 그 담에는 괜히 맥없어지고, 그걸로는 정말 자리까지 갈 수 없어요. 하늘 땅이 돈닢만한 게 아니라 왼통 안 보이게끔, 그런 자리까지 가게끔 돼야 하는 거요. 도연명이 술 좋아했다 하고 이태백이 술 좋아했다는 거 좋긴 좋아요. 그 망아(忘我)의 주(酒), 나를 다 잊어버리고, 이 엉뚱한 소소한 일 때문에 걸리는 것들 다 잊어버리고, 그것들 때문에 큰 것에 도달하는 데 걸리적거리는 거 잊어버리자는 것은 좋아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면서 싸움하고 싶을 때 술 먹고 가야 싸움하게 되잖아요? 평상시의 마음가지고는 싸움 못한다고 그러잖아요?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해선 안돼요. 술이 아니고 딴 것을 가지고 나를 잊어버리고 하도록 해야지, 그래 술이 좋은 점이 있으면서도 그것 가지고는 안된다는 거요.
하여간 그건 그렇게, 그럼 이것, 이「요한복음」의 이런 말은 어느 지경에서 나왔을까? 그걸 맛보시는 것이 좋아요. 될수록은 이 사람이 말하자는 걸 봐서 그 로고스란 게 뭐냐 하는 걸 맛을 보려고 해야 돼요. 번역하는 사람들 말로는 그걸 지혜 하나님의 지혜라 하는 때는 하나님의 창조력, 우주 창조를 했다는 그 면을 인격화했을 때 비유해서 나온 말이란 설명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걸 참작을 하면서도 곧바로 눌러서 “아, 그렇군” 쉽게만 받아들이려 말고, 나는 나로서의 이것저것 맛을 보면서, 과연 그 말이 합당한가 안한가 맛을 보셔야 하지요. 그렇게 하는 가운데 내 속의 깊이도 깊어지고 넓이도 넓어지고 하는 겁니다.
그래 이 사람이 “말씀이 계셨다” 하고는 그저 있지 못하고 뒤미처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 한 것은 이 사람이 그 맛을 보려고 무한히 애쓴 것들이 깃들어 있잖아요?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 그러지만, 그분은 뭣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그이인데, 자기가 한 삼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선생님이라 그러고, 주님이라면서 지내 봤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거 봤고, 부활하는 거 보고, 그런걸 다 보고 그분이 누구냐 그러면, 말하자면 “그분은 천지창조하기 전부터 계시는 분이다”에까지 도달해서 여기 이 말 나온 거 아니오?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바로 그 면이에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이게 뭐 겉으로 나타나 있는 누구의 몇 대 손이다, 그 문제만이 아니라, “이 우주의 맨 처음부터 있는 하나님이 있는 그 맨 처음부터 있는 분이다” 그 말인 거요.
그럼 이렇게 말하면 맨 처음이 하나님 말고 또 있단 말이냐 하겠지만 그 말은 물론 아니지요.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건 또 물론 하나님과 따로 있단 말이냐 하면, 그 말은 아니지요. 그러니 곧바로 잇달아서 “하나님이 곧 그이다” ‘하나님’이란 명사가 먼저 나가요. 처음에는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 그러곤 담에는 “하나님이다” (There is Him)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때는 하나님이 설명어가 되는 셈이지요. 하나님하고 같이 계셨다고 하지만 같이 계셨다 해서 둘이 되는 지경이 아니라, 이게 곧 하나님이오. 우리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는 말하기가 그렇게 어려워요. 어려워서 이렇게도 해보고 이렇게도 해보고.
이게 시라고 하는데, 본래 원문이 시로 봤을 거라고 해요. 우린 그 맛을 모르니까 그렇지만, 이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본래 옛날부터 있던 시에 이 사람이 더러 말을 집어넣어서, 여기 이렇게 첫머리에 썼을 거라고 그럽니다. 우리는 원문을 모르니까 그 맛을 잘 모르지요.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 그래 놓고는, 그 말씀이 뭔고 하니 바로 우리 그이다란 거예요.
이거는 우리가 홑으로 부모에게서 나오는 그 사람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이 다 창조가 되는, 우주 만물이 다 그거 아니고는 있을 수가 없는 그 근본 원리라 할까 그 근본 힘이라 할까 그러한 것이란 말이오. 그래서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러고는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은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더라” 이거는 어떤 사람은 요렇게 띄지 않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더라” 그렇게 띄고, 그 다음에 “그 안에 생명이 있다” 하는 것은 “만물이 그 안에 있어서 생명이더라” 요렇게 붙여서 해석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는가본데, 대 체로는 이 편이 낫습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그가 없이 하나도 된 것이 없더라.”(「요한복음」, 1장1절)
요 1절에서 몇 절까지는 이 대우주를 상대로 해서 총 요약을 해서 하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1절에서 18절까지의 서론 속에 다 들어 있는 거예요. 뭐「요한복음」만이 아니라, 종교라면 종교가 다 이 속에 들어 있다 할 수가 있어요. 적어도 이치로 말한다면.
그 다음에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요한복음」,1장4절) ‘생명’이란 말 나오고 ‘빛’이란 말 나오고, 이게 다 독특한 말이에요. 그저 생명이다 빛이다 해서 보통으로 말하는 목숨이 있다 없다 하는 그런 말이 아니고, 또 햇빛 달빛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원래 창세기에도 해와 달이 있기 전에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그러잖아요? 이런 빛은 여기서 오는 전기라든지 번개라든지 하는 무슨 그런 빛이 아니고, 이건 종교상에서 하는 종교적으로 말하는 빛이에요.
이건 또 딴 얘기가 됩니다만, 그리고 어떤 분에게는 혹 방해가 될는지 몰라요. 하지만 또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소리 들으시는 것이 이걸 풀어가는 데 참고가 될 거예요. 그러니 조금 얘기하렵니다.
「창세기」라든지, 이런 성경 보려면 볼 때부터 내 태도가 아주 결정이 돼야 돼요. 이걸 다른 책을 보는 모양으로 봐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거는 어느 특별히 말하자는 것, 물론 다른 책도 다 그렇지만. 과학책이란 것도 이것저것의 원리를 다 설명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겠지만 그러나 이거는 여기 우리에게 보이는 이 물질세계, 현상세계라 합니다만, 이 현상세계를 이게 어떻게 돼 있으며 어떻게 변화돼간다 하는 것을 말 하자는 게 아니에요. 말은 이 현상세계의 말을 쓸 수밖에 없으니까 같은 말을 쓰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에 관한 거예요. 그러니 그건 이미 차원이 달라요. 그럼 이 물질적으로 보이는 이 세계, 이걸 따로 내 놓고 정신적인 우주가 어디 따로 있느냐? 그건 우리가 몰라요. 있어도 우리가 알 수 없고. 우리가 정신세계라 하는 걸 생각을 해도 우리가 이 현상계에 있으면서 알지 이거 없이는 안돼요.
이런 토론은 종래에도 있었어요. 옛날에는, 물론 인도의 힌두교에서도 불교에서도 그리고 우리 유교에서도 육체는 다 허망한 세계라 하는 사상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이제 성경의 사상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는 안해요.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린 이 몸뚱아리를 하나의 꿈같은 세계로만 알게 돼요. 물론 신앙을 표시해서 말할 때는 하나의 꿈같은 세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꿈같이 그렇게 허망하게 생각을 하진 않아요. 이 세상을 꿈처럼 생각하는 거 그거는 제법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그건 일종의 잘못이 들어가는 생각이에요. 그래 기독교에서 정통적인 것에서 보면 그걸 이단이라고 그래요.
물론 이 물질이라고 하는 거는 본래부터가 나쁜 것이다, 이것은 악한 것이다 하는 사상이, 기독교와는 별개로 옛날부터 이런 사상이 있어요. 그런 사상이 기독교에도 들어와서 섞여 있는데 그걸 설명하려는 점도 있어요. 주지주의라는 거, 그노시스주의(gnosis 主義)가 그런 생각인데, 그것도 어찌 생각하면 그렇잖아요? 본래부터 악이란 것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런 말하는 건데, 그것도 제법 그럴 듯한 것 같기도 한데, 성경의 정통적인 생각으로 보면 “이 세상의 물질은 악하다” 그러지는 않습니다. 물질은 물질대로 지은 것이지, 그 근본이 악한 것은 아니오. 이제 악이 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한테서, 이 세상의 사람 들이 어떻게 돼나 하는 것에서 나온 것이오.
아무튼 이런 말이 나오게 되면, 물질은 악하다는 생각 때문에 어떤 이는 어떻게 말하는고 하니 예수님은 사람으로 나신 게 아니고 뭐랄까 영(靈), 뭐 이런 분으로 나신 걸로 말해요. 비록 육체로 계셨지만 사람으로 났다고 그러지는 않아요. 그러나 기독교의 정통적인 생각으로 한다면 예수님은 완전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고, 사람으로 났으면서도 그가 우리와 또 똑같다는 것은 아니에요. 이것은 뭐 차차 얘기합시다마는 하여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거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에요. 그걸 갈라서 하려면 어려운 말인데 그러나 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 있어요. 그러니까 이런 문제는 세상에 뭐 논리적으로 한다는 그런 입장으로만은 알 수가 없고, 우리는 어쩔 수없이 차원이 아주 다른 두 세계를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야 돼요.
아무리 훌륭히 믿는 이라도, 비록 예수님이라 하더라도 여기 이땅에 계실 때는 여기 이땅의 차원을 사셨지, 여기 이「요한복음」은 다른 복음도 마찬가지지만 여긴 일부러 그런 듯이 그걸 말을 해줘요. 길을 가시니까 피곤해서 땀을 줄줄 흘리시고 티끌을 뒤집어쓰고 피곤해 서 우물가에 가서 앉았다는 걸 일부러 말해줘요. 만일 그때 다른 종교에서는 그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가령 노자 같은 이는 어머니 뱃속에서 80년 동안 있었다 그런 말도 있고, 불교를 내가 잘은 모르지만 부처님도 다른 사람들보다 잘생긴 점이 서른두 가지가 있다거나 칠십 몇 가지 있다고 그랬어요. 물론 이런 것들은 말 그대로 들을 거는 아닙니다. 그런 말 하는 것은 뭣을 말하는 거냐 그걸 들을 줄 알아야 돼요. 그래 그때 예수님은 여느 사람과는 다르다고 썼더라면 오늘 우리가 예수를 바로 알 수가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쓰진 않았어요.
예수님도 사람인 점에선 다 마찬가지인 거요. 그래서 그 사마리아 여인도 형편없는 여인인데 예수님을 존경한 거 아무것도 없잖아요? 예수님도 물을 달라 그랬어요. 그때 그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 왜 나에게 물을 달라고 그러시오?” 그랬어요. 만일 그때 예수님한테 이렇게 환한 후광이 있었다고 합시다 후광이란 어느 때 있을 수 있지요. 있을 수 있는 거 나도 확실히 믿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후광이 오지요. 또 후광이란 어떤 사람이나 다 보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있기는 있어요. 반드시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여간 그때 만일 예수님에게 후광이 이렇게 번찍번찍 했다면 그 여자가 감히 그렇게 했겠어요? 그저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었다면 그도 그저 마찬가지의 사람이었겠지요. 왜? 한나절 길 가다가 그저 땀을 후줄그레 흘리고 와서 “나 물좀 주시오” 그러는데 다른 뭐가 있을 게 있어요? 그런데 그런 거는 그를 멸시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육(肉)은 어느 누구나 다 마찬가지니까 그런 거예요.
그럼 동정녀에게서 났다는 거는 뭡니까 그럴는지 모르지만, 동정녀에게서 예수 났다는 것도 이제 역사적인 기록이라고 해서 그걸 사실로 해서 증명을 하려는 그런 생각은 안해도 돼요. 그것은 이제 맘에 어느 시간에 가면 “그렇지!” 그러는 그게 있을 거요. 그게 무슨 의미지 하고 아는 때가 있을 거요.
그런데 종교의 책을 처음 보시는 분이나 혹은 많이 봤던 분들도 그걸 보시려면 문제가 되는 분이 있을까 싶어서 하는 얘깁니다만, 성경이면 성경, 불경이면 불경 이걸 맨 처음부터 읽어서 첫 번부터 이걸 내가 다 이해할 수 있겠거니 하고 생각지 마시오. 천만에, 절대 그런 생각을 마시오. 첨에 볼 때는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가다가 보면 또 내게 쑥쑥 알려지는 말이 많이 있어요. 그러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걸 거짓말이라 그러지 말고, 그건 아직은 제쳐놓고 내가 그걸 볼 힘이 아직은 없으니까 보류해두고 내가 알 수 있는 것만을 찬찬히 여러 번 읽어보시오. 그러노라면 그 담에 가서 이제 몇 번을 성경을 읽으려면 우선 참을성 있어야 돼요. 되지도 못하게 내 지식이 얼마나 된다고 “내 지식에 비춰서 미신같이 보인다. 이건 난 아니다” 그러는 이건 이 시대가 잘못 돼서 그렇지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모르는 건 보류해두고, ‘있다’ ‘없다’ '잘못이다’ '뭐다’ 결정을 하지 말고 해나가노라면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어요. 천지만물이 다 그렇잖아요?
날 때, 애기 때는 젖만 먹게 생겼지요. 젖만 먹는 아이는 젖만 먹으면 살아가고, 또 생선을 주면 이빨이 채 나기 전에는 살만 먹었지 뼈다귀는 아직 먹을 수 없잖아요? 먹으려면 다 먹고 그렇잖으면 다 내놓고 하는 그런 법이 없어요. 내가 알 수 있는 것을 이해를 해가노라면 그 다음에는 굳은 뼈다귀같이 어렵던 것도 이해를 하게 되는 그런 자리엘 가게 되는 것이니까, 내가 지내보고 내가 고민을 하던 거니까 그래서 이거야말로 참고가 되지 않을까 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젊어 잘못되기 쉬운 거 있어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 나쁘지는 않아요. 학교 가서 배우니까. 비는 뭘 그래? 수증기가 올라가서 식어서 구름이 돼서 비가 내려온다고 그러는데, 하나님이 주기는 뭘 주어? 얻어들은 것이 있어서 집에 가서 할아버지·할머니에게 말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 그것도 배웠으면 그만 것이라도 있어야지 그것조차 없어선 되겠어요? 그러나 그건 그것밖에 못 배워서 그런 것이지, 이 담에 가면 수증기가 올라가서 비가 되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이 비를 줬다는 뜻을 알게 되지요. 그런데 젊은이들이 자칫 잘못되기가 쉬운 거는, 이 지식을, 변변치도 못하게 얻어들은 자기 지식을 과신해서 그것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것까지 판단해버리려는 거예요. 그래 옛날에는 사람들이 정말 무식해서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열고 비를 그냥 주룩주룩 내려준다고 했던 것보다 비라는 거는 수증기가 올라가서 식어서 폭풍우가 되는 거다 그걸 알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거다” 그러면, 거 무식해서 그러던 것보다 높은 자리인 거예요. 그렇게 되면 훨씬 높은 우주 훨씬 넓은 우주를 알게 돼요.
종교의 글이 다 그런 거니까 이걸 첫 번부터 알고 또는 다 알겠다 그러지 마시고, 첫 번부터 이거는 틀렸다 비판을 하려고 그러지도 마시고, 그렇게 너무 업신여기고 경솔하게 그러지 마시고, 그 동안 수천 년의 생명을 가지고온 이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겸손하게 생각해볼 줄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 동안 학자도 많이 있었고, 지식인도 많이 있었고, 이것을 없애보려고 노력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한데도 불구하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살아오는데 과연 이것이 뭐냐, 이것이 무슨 단단한 까닭이 있잖느냐 합니다.
그 까닭이 어디 있겠어요? 다른 데 없어요. 땅속에 뿌리박은 거 아니에요. 사람의 가슴 속에, 인간성 속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그런 거예요. 나기도 거기서 났고 자라기도 거기서 자란 것이고.
인간이 있을 때, 그 인간을 다 부정하고 그러면 학문이 어디 있을 새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간대로 봐간다면 종교 부정할 수 없어요. 하나님 있다는 거를 부정할 수 없고, 그걸 헛말이라 그럴 수 없는 그때에 가면 “마리아가 잉태해서 낳았다”는 게 무슨 뜻이란 것을 알 수 있을 거예요. 어린애들까지 어서 빨리 가르쳐주시려 너무 급해하지 마시오.
그런데 “그 안에 생명이” 이게 말씀이에요. 내려가면 이이가 예수님으로 나시는 이예요. 그는 홑으로 한 개인이란 것이 아니고, 이 우주 만물이 왼통 그가 아니고는 그러니까 그가 이 우주 만물을 손으로 만들고 그랬다는 것 아니오. “띠 아(芽)”, 영어로 드루(through). 그러니까 이 우주 만물이 되는 근본 원리라면 원리라도 좋고 그 창조력이라면 창조력이라도 좋고 지혜라면 지혜라 해도 좋고, 어차피 우리 말로는 부족하니까 그렇게 여러 가지로 말할 수밖에 없지만 하여간 그가 아니고는 아무것도 될 수가 없는 그가 곧 그이인데, 그 안에 생명이 있어요.
이 ‘생명’이란 말은 독특한 말이오. 그저 이렇게 ‘목숨이 있다’는 의미의 그것만이 아니고, 그거보다는 정신적인 의미에서예요. “생명이 있으니 생명은 사람에게서 빛이더라.”(「요한복음」,1장 4절)
그 빛이 뭡니까? 빛이 뭡니까는 더 이상 풀어서 설명할 수가 없고, 이걸 이 담에 또 읽고 또 읽고 해서「요한복음」에서 「요한복음」에서만 아니라 성경에서 빛이라 그럴 때는 그건 뭣을 뜻하는 거다 알게 돼요. 그걸 당장 쉽게 설명을 하려고 그러면「요한1서」에 내려가서 보시오. 하나님은 빛이라 그랬고,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아직도 빛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어둠 속에 있다고 거기서 말 한 것을 보면 이건 뭘 말하는 건지 짐작이 가요.
그러니까 아예 한 번 두 번 보고 곧 알려고 그러지 말고 익숙히 익숙히 해서 무르익어서 될 수만 있다면,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신·구약이, 또 신·구약만이 아니고, 다른 모든 본 것이, 그 지식이 내 속에 무르익어진 담이 아니고는 여기 이것의 올바른 이해가 어렵다는 것을 맘에 두셔야 할 겁니다.
그다음 “빛이 어둠에 비추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한복음」, 1장 5절) 이 말이 또 좀 문제돼요. 빛은 물론 로고스를 말하는 건데, 어둠이란 무엇인가? 어둠이란 이 물질계의 내 육신 이것인데 “어둠 속에 비췄는데 깨닫지 못하더라” 그랬는데, 이걸 어떤 사람들은 “이기지 못 하더라” 그렇게 번역한 사람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더라” 그렇게 번역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그건 본래 말이 그런가봐요. 그래도 학자들의 말로 제일 무난한 것은 “깨닫지 못하더라” 하는 그 해석이 많은가봅니다. 깨닫지 못하더라 혹은 받아들이지 못하더라 고거는 요기까지가 이제 우주 전체의, 지금까지 있는 우주 전체를 요약해서 설명한 것이고, 그 담에 중가운데 딴 말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거하려 왔으니 모든 사람이 자기로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려 온 사람이라. (「요한복음」, 1장 6~18절)
왜 이런 말씀을 했나, 그건 알고 넘어가시는 게 좋을 건데, 다 공관 복음에 예수 전기를 말하려 할 때는 반드시 세례 요한의 얘기가 나와요. 세례 요한이 나와서 세례를 줬다 그러잖아요? 또「마태」「누가」에도 다 예수님이 나가서 세례 받으셨다는 그런 것이 있잖아요? 그건 다 아는 건데, 그 요한인데, 여기 이「요한복음」도 그 요한 얘기를 해요.
1981년 8월 2일 연곡에서 퀘이커 모임 수련회에서 하신 말씀.
친우회보 1981 겨울호
저작집30; 21- 171
전집20; 19-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