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년 복보다 말년 복 / 최종호
며칠 전, 가까이 사는 가족을 초청해서 집들이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집으로 와서 다과상만 차려 낼까?’라는 생각도 했으나 아내가 큰맘 먹고 집에서 준비한 음식으로 행사를 치렀다. 여러 얘기가 오가는 중에 자연스럽게 부동산으로 화제가 옮겨 갔다. 앞에 앉아 있던 매제가 “요즘 건설 회사에서 아파트를 경쟁적으로 비싸게 내놓는데 미분양이 많아요.”라고 한다. 경기가 좋지 않아서 팔려고 해도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단다. 올해 내 운이 좋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 같았다. 집이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다니다 보면 새로 짓는 아파트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도시의 외곽 지역, 기존의 단독 주택지를 가리지 않는다. 회사가 살아남으려는 자구책일 것이지만 그 많은 집에 들어갈 세대가 있을지 우려스럽다. 모자라서 짓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집이 남아돈다고 한다. 분양가도 높아서 서민들은 갈아타기가 쉽지 않다. 새집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으면 당연히 헌 집을 파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전세로 내놓는다 해도 수요에 한계가 있기에 빈집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가 이사한 것을 아는 지인은 며칠 전 술자리에서 자신이었으면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공기가 맑고 산책로가 있어 은퇴자들에게는 인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시세가 오르지는 않을 것이란다. 도시 끝자락이고, 아직은 생활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른바 숲세권인데다 분양가가 낮아 관심을 둘 만했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는지 모델 하우스를 보고 나서 결정했을 때는 낮은 층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입주 시기가 다가오자 서로 단체 카톡방을 활용해서 아파트 조경과 실내 공사 진행 상황을 알려 주기에 바빴다. 그러면서 예정대로 이사할 수 있을지 염려하는 글도 자주 올라왔다. 궁금해서 나도 현장을 몇 번 둘러보러 왔다. 마무리가 덜 되었는데도 시공사에서 세대별 점검 날짜를 통보하자 너무 서두른다며 성토가 쏟아졌다. 임예협(임시 입주 예정자 협의회) 회장이 입주자를 대신해서 항의한 것 같았으나 결국 회사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급기야 누군가 이 소식을 방송사에 제보하여 뉴스거리가 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시공사에서 입주 시기를 10일 늦춘다는 통보가 왔다. 올여름에 비가 자주 와서 공사 기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과문도 들어 있었다. 공지문을 받고 나서 줄눈을 치고, 입주 청소 날짜를 잡았다. 이사 전에 가구와 전자 제품도 새로 들이고 커튼도 달았다. 집을 미리 비우느라고 몇 달씩 작은아들 집에서 더부살이하는 불편을 겪었지만 원하는 날에 이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사한 지 40여 일 지났다. 이제 하자 보수도 거의 끝나서 큰 불만은 없다. 더 높은 층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으나 만족하며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저층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무려 25년 만에 집을 옮기고 보니 아파트에도 유행이 있다는 말을 실감한다. 공간 구성은 물론, 주차나 문 개폐, 조경, 편의 시설 등에서 기존의 아파트와 많이 다르다. 편리하고, 세련되게 지어진 것 같다.
입주 지정 기간이 지났지만 아직 이사를 오지 못한 세대도 많다. 크고 작은 하자 때문에 속 끓이는 집도 한두 집이 아닌 듯싶다. 이들에 비하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일이 쉽게 쉽게 풀린 것 같아서다. 퇴직했는데 목돈을 들여 집을 옮기는 게 잘한 일인가 고민도 많았다.
어쩌면 사주팔자에 들어 있다는 말년 복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교원 연수차 충청도 서산을 갔는데, 여유 시간에 관광지를 둘러보게 되었다. 임시 상점이 죽 늘어선 거리를 걷던 중 아주 싸게 봐 준다는 역술인의 말에 혹하고 말았다. “말년에 복 받을 팔자입니다. 하관이 좋아요.” 웃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맞는 듯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초년 복보다는 말년 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