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년대🍁 | |
✿612년 을지문덕 살수대첩(고구려 구양왕22)
을지문덕 장군 살수(청천강)대첩
612년,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살수에서 수나라 대군을 크게 무찌른다. 30만 5,000명의 수나라 병사 가운데 압록강을 넘어 요동 지역까지 살아서 돌아간 이는 2,700명에 불과했다.
세계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대승리였다. 이것이 살수대첩이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치려던 수나라의 계획이 살수대첩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 그 후유증으로 수나라는 결국 내분과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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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0년~1800년대🍁 | |
✿1689년 송시열, 서거
우암 송시열 조선 숙종 때의 문신(1607~1689).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이다. 17세기 중기 이후 붕당 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 노론의 영수로 활동했다.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후에 사사되었다. 저서에 《우암집(尤庵集)》, 《송자대전(宋子大全)》 등이 있다. | |
✿1802년 프랑스 작가 앙리 뒤마 출생
앙리 뒤마의 초상화.
프랑스 귀족인 아버지와 아이티 출신의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던 뒤마는 1828년 ‘앙리 3세와 그의 궁정’으로 인기작가의 대열에 들어선다. 그리고 7월 혁명(1830년) 후, 왕의 편이 되어 정치운동에 참가하고 스위스, 라인, 이탈리아, 에스파냐, 러시아, 알제리, 튀니스(Tunis: Tunisia) 등을 여행, 그 기행을 남겼다. | |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너럴 셔먼호의 모습 대동강변 순교장면(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프랑스 신부 9명과 수천명의 가톨릭 신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병인박해(1866년) 후 프랑스 함대가 보복할지 모른다는 소문으로 조정에는 긴장감이 돌았고 민심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정체불명의 이양선 한 척이 대동강 어귀에 나타났다. 중국 톈진을 출발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였다. 무역선이라지만 대포가 2문이나 장착돼 있었고 24명의 선원도 중무장한 80t급의 증기선이었다. 접근불가를 거듭 경고했지만 셔먼호는 막무가내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까지 진입했다.
사태를 관망하던 평양군민이 격분한 것은 이들의 접근을 막으려는 조선 관리 3명을 셔먼호가 감금하면서였다. 흥분한 평양군민들은 소총과 활을 쏘아댔고, 셔먼호 역시 포격으로 맞섰다.
탄약이 떨어져 하류로 후퇴한 셔먼호가 줄어든 대동강의 수위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자 평안 관찰사 박규수는 기발한 생각을 한다. 땔감 운반선 3∼4척을 연결한 뒤 인화물질을 가득싣고 불을 붙여 셔먼호 쪽으로 떠내려 보낸 것이다. 셔먼호는 불타버렸고 선원 역시 전멸됐다. 7월24일이었다. 대원군은 이사건에 고무돼 빗장을 더욱 걸어잠궜으나 5년뒤 신미양요를 겪어야했다. | |
| 🌹1900년대🌹 | |
🌲07년 제3차 한일협약(정미7조약) 조인
왕궁 중앙창문으로 보이는 고종(왼쪽)과 순종(오른쪽). 그라고 영친왕.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단계적 수순으로 제3차 한일협약이 1907년 7월 24일 체결됐다. ‘정미7조약’ 혹은 ‘한일신협약’이라고 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우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 설치로 내정을 일삼아 온 일본은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삼아 한층 강력한 침략행위를 강구했다.
강제퇴위되었던 고종, 그리고 순종
우선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키는 한편 순종을 즉위시켰다. 즉위 4일 만인 이날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협약 초안을 제시했고 이완용은 즉각 각의를 열어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 순종의 재가를 얻은 후 이완용이 전권위원이 되어 이날 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사택에서 7개 조항의 협약을 체결-조인했다.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이외에도 한국 군대해산, 사법권 위임, 일본인 차관 채용, 경찰권 위임 등을 골자로 한 협약 관련 비밀조치서가 작성되었다. 이 조약 체결로 통감의 권한이 을사조약 때보다 강력해졌으며, 일본인 관리 등을 통해 한국의 내정에 관한 모든 국권이 일본에 넘겨졌다. | |
🌲07년 광무 신문지법 제정
1907년 5월 23일 대한매일신보 한글판 창간호. 1908년 개정된 광무 신문지법에 의해 이 신문 역시 단속대상에 포함되고 말았다.
한말 일제가 우리나라의 신문을 탄압-통제하기 위한 신문지법이 1907년 7월 24일 제정됐다. 이완용 내각이 법률 제1호로 공포한 일명 `광무 신문지법`은 1908년 4월 29일 일부가 개정되었고 1952년 4월 4일 법률 제237호 의해 폐지됐다. 모두 41조로 구성된 신문지법은 형식상 일본의 신문지법을 모방한 것이나 내용은 그보다 훨씬 가혹했다.
신문창간시 사전에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점과 신문을 발행하기에 앞서 관할 관청에 2부를 납부케 해 사전검열을 제도화한 점이 그것이다. 이 법은 처음에는 국내 발행의 민간신문만을 대상으로 했으나 1908년 개정법률에는 미국과 러시아의 한국인교포들이 발행하는 신문과 배설 명의의 `대한매일신보`도 단속대상에 포함시켰다.
결국 해외에서 들어오는 민족지의 유입을 막고, 국내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를 탄압할 목적으로 제정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출판법과 함께 우리나라 언론을 탄압하는 주요무기로 악용돼 조선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한 수많은 신문들이 삭제-압수 및 발매금지-배포금지-정간-폐간되고 언론인이 구속됐다. | |
🌲27년 일본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자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羅生門 (라쇼몽)
그는 정교하고 치밀한 단편소설로 역사소설의 원형을 만들었다. "단지 막연한 불안... 나는 근 2년동안 죽은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왔다". 일본 최고의 신인문학상으로 자리매김돼 있는 아쿠타가와상의 장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이같은 유서를 남기고 1927년 7월 24일 도쿄 다바타(田端) 자택에서 음독 자살했다. 향년 35세였다. | |
🌲44년 일본, 조선총독에 아베 임명(8월18일 착임) 🌲45년 부민관사건: 강윤국등, 친일단체 대의당이 주최한 아세아 민족분격 대회 장소인 부민관에 대한 애국 청년 단원이 폭파 | |
🌲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취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이승만 박사. 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됐다. 5월 10일 남한 지역만의 총선거 실시, 5월 31일 초대 국회 개원,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 및 정부조직법 공포에 이어 7월 20일 신익희의 사회로 열린 초대 국회 제33차 본회의에서 무기명투표로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개표결과 180표로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며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이 1표를 얻었다. 부통령에는 이시영이 선출됨에 따라 이날 국회 주최로 정-부통령 취임식이 열리게 됐다. 7월 27일 국회에 출석한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에 이윤영을 지명했으나 인준이 부결됐고 2차 지명을 받은 이범석이 8월 1일 인준을 받았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1948년 7월 24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됐다.
취임사를 하고 있는 이시영 부통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