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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영생과 구원과 생명의 길-주님의 교훈[요한복음]구원2020.2구원(죄, 지옥, 마귀, 사망, 심판에서 구원)구원과 생명, 천국과 영생의 길-주님의 교훈[요한복음]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인간은 작은 생명체라도 결코 만들지 못한다.
창작은 가능하나 창조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새 생명의 창조의 일을 주님은 지금도 하신다.
1;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2 영접하는 자. 원문상으로는 역접 접속사 ‘데’,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세상의 반응과 성도의 반응을 극명하게 대립시킨다(5, 10, 11절). 주지하다시피 11절의 ‘영접지 아니하였으나’가 집단적 공동체적 거부를 의미한다면, 본문에서 ‘람바노’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형인 ‘엘라본’은 개인적인 영접을 시사한다. 즉 구원이 하나님과 개인과의 단독적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저자 요한은 보여준다. 그리고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서, 한 개인이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 권세를 주셨으니. 이 문장은 자체 내에 파격(破格)구문을 가지고 있다. 즉 ‘아우토이스’(’자들에게는’)가 선행 관계적을 서술하는 여격으로 쓰여져 있다. 이는 헬라어 문장에 아람어적 관용 어법이 침투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저자가 아람어 문화권과 헬라어 문화권의 양대 지류에 속한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주(본서에서 27회) 발생하는 파격 구문인 것이다. 또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서 그리스도를 ‘이름’으로 칭한 것도 히브리 전통에 입각한 아람어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을 믿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믿는다’(피스튜오)의 현재 능동태 분사 여격인 ‘피스튜우시’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는 강력한 신앙’을 나나낸다. 따라서 ‘그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그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영원성, 인격성, 신성을 믿는다는 단순한 사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를 ‘개인마다’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테크나 데우 게네스다이)이란 표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영접한 자의 신분 규정이다. 즉 ‘어두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의 놀라운 변화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음을 본문은 명시한다. 또한 여기서 ‘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네스다이’은 ‘기노마이’의 부정 과거 중간태로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생겨나서 영원히 계속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역사적 시점에서의 신분의 변화가 초역사적 지평에까지 열려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녀’에 해당하는 원문은 출생과 직결되는 용어인 ‘테크논’ -이와 유사한 의미로서 사용되는 ‘휘오스’은 ‘상속자’라는 뜻을 내포한다(갈 4:5, 6)-인바, 이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받을 성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본질적인 변화를 통해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중생으로만 가능하다(3:3-9, 벧전 1:3, 23). 한편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곧 ‘권세’를 부여 받음이다. 여기에서 ‘권세’란 헬라어로 ‘여수시아’이다. ‘여수시아’는 성경에서 주로(1)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눅 12:5, 골 1:13),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해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17:2, 마 28:18, 막 2:10, 3:15, 눅 4:36)을 나타낸다. 성도는 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는다(고후 10:8, 계 22:14). 따라서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받았다는 것은 죄와 어둠의 세상에서부터 자유롭게 됨을 의미하며, 이 자유로운 권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에 사용되어야만 한다(고전 9:12, 18).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앞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이 묘사되었다면, 본 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의 출생(중생)의 근원이 나타나있다. 먼저 본문에서 저자는 부정사 ‘우크’, ‘우데’을 사용하여 중생에 이를 수 없는 부정적인(negative) 세 가지 요인 ((1)혈통, (2) 육정, (3) 사람의 뜻)을 나열한다. 첫째로, 혈통(하이마톤)은 ‘피’나 ‘혈연’을 의미하는 ‘하이마’의 복수 소유격으로서, 육체적인 혈연 관계를 의미한다. 혈연 관계가 구원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침례 요한과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했던 유대인들을 규탄할 때 잘 드러난 바이다(8:39-44, 마3:7-9). 둘째로, 육정(델레마토스 사르코스)이란 ‘육체적인 욕망’(fleshly desire, NEB)이란 뜻으로 1차적으로는 성욕을 비롯한 인간의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엡 2:3). 더 나아가 2차적으로는 성령의뜻에 거슬리는 모든 육체적 욕구나 세상적 정욕을 통칭한다(고후 11:18, 갈 5:16). 저자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어두움으로 정의했듯이,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 처한 인간의육체적 욕구와 이로 인한 가치 체계(사회적 명망, 권력, 부)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셋째로, 사람의 뜻(델레마토스 안드로스)이란 절대자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적(理性的) 노력이나 숫양, 율법 준수 등을 통칭한다. 이러한 태도는 앞의 두 가지 요인보다 더 고상할지 모르지만 이도역시 구원에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롬 3:19, 20, 고전 1:20, 21). 따라서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무관한 것이다(고전 1:22-25).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세상에서 비롯된 인본주의적 구원의 욕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세상에서 육체를 따라 의롭다 여김을 받을 자는 하나도 없다(롬 3:20). 결국 저자는 이 세계의 절망(어두움)을 묘사하며, 인간 스스로의 구원의 길이 근본적으로 막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악된 인간이 인간을 인도한다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부조리이며(마 15:14), 그 인도자는 도둑이며, 삯꾼 목자에 지나지 않는다(10:10-13).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원문에서 이 문장은 강한 반전(反轉)을 의미하는 접속사 ‘알라’이 먼저 나타난다. 이 접속사는 8절에서 침례 요한(증거자)과 그리스도(빛)에 대한 본질적인 차이를 묘사하는 데 쓰였으며, 본문에서는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구원 수단과 신본주의적(神本主義的) 구원 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어둠 속에 빛이 비추듯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초자연적, 초역사적 성격을 보여줌으로써, 구원받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겸손하게 주의 뜻을 따르는 성도의 자세를 견지(堅持)케한다. 이러한 영적 출생의 비결에 대해서는 3:1-15절 주석을 참조하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성령으로 난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다. 물은 말씀이다[3:3-8].
1 니고데모. 헬라식 이름의 뜻은 ‘백성의 정복자’로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본서에서는 세 번에 걸쳐 나타난다(7:50, 19:39).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멸되던 당시 나퀴드몬(Naqidmon)이라고 하는 부유하고 관대한 사람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는데 그가 혹시 40년 전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일지 모른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Moutefiore, Loewe). 요한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1) 예수의 시체에 바르도록 ‘몰약과 침향을 섞은 백 근’(19:39) 정도를 선뜻 내놓는 부유한 사람이었다.(2) 엄격한 유대교를 신봉(信奉)하는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백성되는 자격이 아브라함을 통해 계승되는 자연적, 육적 출생에 있음을 강조한데 반해, 예수는 영적 중생을 강조하셨다. (3)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다. 관원의 뜻은 ‘아르콘’은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을 가리키는데, 산헤드린은 그 당시 유대인의 최고 종교 회의 기관으로 그 구성원의 수는 71인으로 알려졌으며 고위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다른 말로 하면 백성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니고데모가 그러한 사회적 고위층에 속해 있으면서도 친히 예수를 방문한 사실은, 매사에 편견(偏見)이 없고 사리가 깊었음을 보여준다. (4) 그는 조상들의 율법에 정통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는 율법 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다. 율법 학자가 된 사람은 종교법과 의식(儀式)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임 판결을 내릴 수 있었으며(Sanh), 형사 소송 때에는 재판관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으며, 민사 소송 때에는 여러 재판관들과 함께 판결을 내리거나 아니면 단독 재판으로서 판결을 내릴 수 있었고 또한 랍비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다(Jeremias).
2 밤에 예수께 와서. 니고데모가 굳이 밤에 예수를 방문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1)타인의 이목이 두려워서 (2)분주한 낮시간을 피해 예수와 예수와 친밀한 대화를 오래도록 나누기 위해 혹은 (3)밤늦게까지 연구하고 논쟁하였던 당시 랍비들의 관례에 따라서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이는 니고데모의 신중성을 보여줌과 아울러 예수께서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요한은 19:39에서 다시 한번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온 사실을 언급한다. 요한의 사상(思想)에서 ‘밤’은 악과 거짓과 무지의 실재(reality)로서 상징되고 있다(11:10). 그리고 13:30에서 유다는 ‘밤’에 예수를 떠남으로써 빛이신 예수에게로 나아온 셈이다(the Anchor Bible).
랍비여. 니고데모는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나다나엘과 마찬가지로(1:38, 49) 예수를 ‘랍비’라 부름으로써 대화를 시작하고 있다. 서품(敍品)을 받아 율법학자단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수 년 동안의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마쳐야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전승 자료와 할라카의 해석 방법을 통달하게 되고, 비로소 종교법과 형법(刑法)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가 되려면 40세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와 같이 ‘랍비’가 되기 위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은 서품을 받은 율법학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Jeremias). 한편 니고데모가 사용한 이 ‘랍비’라는 말이 예수에 의해서 부정되거나, 제자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일로 여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그의 제자들이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불리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니고데모가 예수를 ‘랍비’라고 부른 것은 유대의 상층 계급에 속한 사람으로는 처음 있었던 일이요 따라서 예수가 이미 그러한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우리. 본 절에서 말하는 ‘우리’는 뒤따르고 있는 말들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수가 행한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 곧 2:23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을 언급한다고 봄이 무난하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니고데모는 이 말을 강조하는 위치에 첨가함으로써, 예수를 선생 이상의 존재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모세, 예레미야, 침례 요한 등과 같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표현은 예수의 산적 본성을 나타내고 있다고까지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이 예수가 과연 대망의 메시아인가 하는 의문을 담고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니고데모의 방문의 주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니고데모가 예수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표적을 통해서이다(2:23). 공관복음서 기자들보다 요한이 즐겨 사용한 이 ‘표적’이라는 헬라어 ‘세메이온’은 신적 권위와 위엄의 증거를 보여주는 이적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적은 그것을 목격한 자의 주의(注意)를 그 행위 자체 보다는 그 일을 행하신 이에게로 이끄는 것이 그 특징이다. 표적 자체로서는 참된 구원의 신앙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표적들을 통해 당신의 교훈들을 확증하셨다. 본문에서 니고데모가 예수의 표적들을 통해 예수의 탁월하신 교훈 능력을 인정하였던 것은 중요한 통찰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예수의 교훈보다는 표적 자체에 더 큰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3 거듭나지 아니하면. ‘거듭’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노덴’은 (1) ‘처음부터’, ‘완전히’, ‘철저히’의 뜻과 (2) ‘다시’, ‘두 번째’의 뜻 그리고 (3) ‘위에서부터’ 곧 ‘하나님께로부터’의 뜻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이 기도, 제사, 침례로써 유대교에 개종하면 그를 중생한 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선택받은 백성인 유대인들조차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혜서, 어느 한 부분만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본성이 새롭게 되는 사건(Calvin)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적 생명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살리는(고후 5:17) 성령의 역사로서(엡 2:5), 성령 혹은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은 육에 속한 자연인의 지(知), 의(意), 정(情)을 항상, 계발(啓發)하는 것이라기보다 근본적이며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병든 자가 회복(回復)하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인 변화이다.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이돈’은 단순히 어떤 물체나 형상을 바라본다고 하는 ‘블레포’과는 달리, ‘경험하다’(experience) ‘참여 하다’(participate) 또는 ‘인식하다’(perceive)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는 것을 뜻한다(눅 9:27).
4 사람이 … 날 수 있삽나이까. 이러한 니고데모의 대답은 일견 매우 아둔해 보인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예수의 말씀에 반대 주장을 제기하거나 반항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으리라 추측된다. 다만 그는 예수의 말씀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의 난점을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답은 니고데모가 둔감해서가 아니라 깊은 생각 끝에 나온 것이라 할수 있다. 아울러 이 질문 속에는 ‘사람이 다시 모친(母親)의 배 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인간 본질의 재창조라고 하는 고차적 이적 또한 어찌 가능 하겠는가’라고 하는 강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을 법하다. 어쨌든 니고데모는 중생에 관한 예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깊은 의문에 휩싸였던 것이다.
5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여기서 ‘성령’에 대해서는 해석상에 별 어려움이 없으나 ‘물’ 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로 나뉜다.
(1) 아기가 엄마의 양수(물)에서 태어나는 것과 같이 물로 태어난다는 말은 인간의 육적인 출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적인 출생과 함께 성령의 거듭남을 경험해야 한다.
(2) 물은 침례자 요한의 침례를 말한다. 따라서 본문은 침례자 요한의 예비적인 물의 침례와 그리스도의 성령의 침례를 받아야 한다.
(3) 물은 그리스도인의 물의 침례를 말하는 것이다.
(4) 물이란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한 것이다.
위의 어느 설명이 본문의 의도를 가장 잘 설명하는가? 물과 성령에 대하여 요한이 언급한 것을 찾아보는 것은 본문의 뜻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할 것이다. 요일 5:6에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물과 피는 그리스도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두 사건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피는 십자가를, 물은 침례를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물을 의미하는 헬라어 ‘휘도르’가 20회 쓰였는데, 5회는 침례와 관계되어 쓰였고, 10회는 단순히 마실 물로 쓰였다. 그리고 5회는 생수의 의미로 쓰였다. 본 절의 물을 마실 물이나 생수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므로 본 절의 물을 침례로 보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물의 침례와 성령의 침례를 구분하셨는가? 성령 은사 운동(charismatic movement)에서는 이 절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중 침례(double baptism)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여기서 ‘물과 성령으로’라는 말씀은 물의 침례와 성령의 침례를 구분한 말씀이라고 볼 수 없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고전 12:3) 없기 때문에 물의 침례와 성령의 침례는 하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하지만 물에 대한 견해가 어떻든지 본 구절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26, 31, 마 3:11, 막 1:8, 눅 3:16에서는 물과 성령이 침례와 관련해서 나란히 언급되고 있다.
물은 깨끗하게 하는 상징으로 유대인들의 희생 제사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였다. 특별히 제사장은 몸을 씻지 않고서는 언약의 피를 갖고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엣세네파(Essenes)에서도 개종자를 받아들일 경우 물 침례를 행하던 관습이 있었다. 또한 침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촉구하였고 이러한 촉구를 받아들여 죄를 회개한 자에게는 물로 침례를 주었다. 한편 고넬료와 그의 친구들은 물 침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의 선물을 받았으며(행 10:47-48)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행 8:26-39). 따라서 본 절에서 물과 성령의 의미를 하나로 보는 것은 합리적이다.
6 육으로 … 영이니. 사도 바울은 ‘육’에 해당하는 ‘사르크스’ 라는 헬라어를 타락한 인생의 죄악되고 부패한 본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했다(롬 8:3-9). 그러나 여기서는 이 땅에 속한 존재 곧 연약하고 사라져 갈 인생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기서 육(flesh, NIV)과 영(spirit, NIV)은 인간 본성의 보다 높은 차원(영적)과 보다 낮은 차원(신체적)을 구분한 것으로 이해된다.
7 기이히 여기지 말라. ‘기이히 여기지’로 번역된 헬라어 ‘다우마조’은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결여된 놀라움’을 의미 한다. 니고데모가 놀란 것은 중생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예수는 어떤 민족적. 신분적 구분도 없이 모든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3절). 따라서 이 원칙은 율법의 준수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에게도 물론 적용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당혹하였을 것이며 또 향편으로는 이 중생의 방법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의혹(疑惑)에 잠겼을 것으로 보인다.
8 바람이 임의(任意)로 불매. ‘성령’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루아호’과 이에 대한 헬라어 ‘프뉴마’은 둘 다 ‘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신약성경에서만 370회 정도 사용된 이 ‘프뉴마’는 대부분 영(靈) 또는 성령의 뜻으로 사용되고 ‘바람’이라는 의미로는 구약성경(시 104:4)의 인용 구절인 히 1:7에서 한 번 사용되었다. 이 ‘프뉴마’가 본문에서는 ‘바람’의 뜻으로 ‘성령의 역사’를 적절하게 비유하는 것으로서 사용되었다. (1)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해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실재성(reality))을 보여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존재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해 인식되어질 수 있다. 폘돈(Fenton)에 의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원(起源)과 운명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두고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되며 갈 5:22, 23에 기록된 바와 같은 소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2) 현대의 과학을 총동원 해도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 따름이다.
이는 주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신다[3:15-18].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의 목적을 설명하는 본 절은 구원론(救援論)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 본 절에 나오는 ‘영생’은 본서 전체에 걸쳐 요한이 중점적으로 부각시키는 주제이며, 이 영생에 이르기 위한 기본 전제로서 예수께 대한 믿음이 지적 되고 있는 것이다. ‘저를 믿는 자’란 예수의 대속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를 뜻한다. 특히 ‘믿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 분사형으로서 신앙의 행위가 계속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영생. 요한의 애용어(愛用語)로서 문자적으로는 ‘영원의 생명’ 또는 ‘올 세대의 생명’의 의미이다. 요한이 사용한 영생은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요소와 하나님의 현재적인 선물이라고 하는 두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한편 요한은 ‘생명’과 ‘영생’이라는 말을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외 복음서에서 생명은 19번, 영생은 17번 나온다. 17:3에 의하면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 곧 인간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14:6에 의하면 영생은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참 길이요, 살아있는 길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이러한 앎과 교제는 현재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그 완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처소에서 이루어진다(14:3).
16 본 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요절인 본 절은 복음의 진수(眞髓)로써,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天命)한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온 인류를 가리킨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이는 곧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개방되어 있지만 그 은혜틀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 절에는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된 것임이 밝혀져 있다. 특별히 ‘사랑’의 헬라어 ‘아가페’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들 중의 하나로써, 하나님 편에서 선수권(先手權)과 주도권(主導權)을 가지고 인생의 연약함과 죄성을 끝없이 감싸 안으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이라 하겠으며(요일 4:8)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랑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應分)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이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의 ‘독생자’(獨生子)와 제임스왕역(KJV)의 ‘only begotten Son’은 마치 하나님이 예수를 낳았으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분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작이 있으며 하나님보다 열등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성육신하신 기간만을 생각할 때는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났고, 예수께서 하늘 아버지께 기도하고 의지한 것을 보면 독생자라는 표현도 어느 정도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성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독생자였던 분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독생자란 말은 무슨 뜻인가? 독생자는 헬라어로 ‘모노게네스’라고 한다. 모노게네스는 ‘모노스’(홀로, 혼자서)와 ‘게노스’(자식, 자손)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모노게네스’를 태어났다는 의미의 ‘독생’(獨生)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확한 의미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최근의 많은 영어 성경들은 ‘only begotten Son’ 대신에 ‘only Son’(유일한 아들)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70인역(LXX)은 히브리어 ‘야히드’를 헬라어 ‘모노게네스’로 번역하였다. ‘야히드’는 구약에서 12번 쓰이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다. ‘가장 사랑하는’(darling) 2회, ‘고독한’(desolate) 1회, ‘유일한’(only) 6회, ‘유일한 아이’(only child) 1회, ‘외로운, 혼자의’(solitary) 1회. 예를 들면 시편은 ‘모노게네스’를 하나 밖에 없는 유일하고 귀한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다(시 22:20, 35:17). 따라서 여기서는 출생의 의미가 거의 없고 유일하게 귀중한 것,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약에는 요한의 글을 제외하고는 ‘모노게네스’라는 말이 4회(눅 7:12, 8:43, 9:38, 히 11:7) 나오는데 모두가 부모의 ‘유일한 자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누가복음의 귀중한 세 자녀의 경우에 주의깊이 읽어보면 강조점이 그들의 출생에 있지 않고 그들이 부모들에게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는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 뜻이 더욱 분명하다. 아브라함은 그의 ‘모노게네스’를 제단에 바쳤는데, 사실상 이삭은 그의 단 하나의 아들은 아니었다. 이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삭이 ‘모노게네스’가 된 것 이유는, 이삭이 유일하게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신약의 다른 책에서는 ‘모노게네스’가 주로 사람의 유일하고 귀중한 자녀를 말하는데 쓰였지만, 요한의 글에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인 그리스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요한복음 1장은 말씀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그러므로 요 1:14의 “아버지의 ‘모노게네스’(독생자)의 영광”이신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보다 열등하거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거나, 혹은 시작이 있었던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장 귀중하고 유일하고 친밀하고 독특한 분이며, 그분과 동등한 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빌 2:6).
즉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독생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노게네스’은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 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표한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들’의 뜻인 ‘휘오스’를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3:16, 36, 5:20, 23, 8:36 등).
한편 ‘주셨으니’의 헬라어 ‘디도미’은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본 절에서도 이 말은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웨스트콧(Westcott)은 이 낱말이 제물을 바치는 일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15절에 이어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멸망’과 ‘영생’ 사이에 어떠한 중립적인 선택은 없으며 그것은 절대적인 양자 택일의 문제이다. ‘멸망하다’의 뜻인 ‘아폴뤼미’ 또한 요한이 자주 사용한(10번 정도) 단어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다. (1) ‘잃다’, ‘상실하다’(to be lost)의 뜻, (2) ‘없어지다’, ‘파괴되다’(to perish, be destroyed)의 뜻이 그것이다. 또한 이 동사는 구원과 반대되는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생명과 반대되는 ‘죽음’을 나타낼 때(막 3:6), 존속되는 것과 반대되는 ‘멸망’을 나타낼 때(고전 1:19), 그리고 무엇을 얻거나 받는 것과는 반대되는 ‘상실’을 나타낼 때 등의 경우에도(요이 8절) 사용되었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 살아가는 자들은 필경 절망과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그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허망하며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곧 죽음과 멸망을 뜻한다.
17 심판하려 하심이 … 구원을 받게 하려. 목적을 나타내는 접속사인 ‘하나’에 의해 이끌리는 두 문장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not … , but … 식의 영어 문장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5:30, 8:16)에 관해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12:48)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5:22) 증거 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지막 날 재림하실 때에는 분명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이다(딤후 4:1, 8). 그러나 적어도 예수의 초림 목적을 말할진대는 심판보다는 구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이 확실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로되,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롤 원하시며(딤전 2:4)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시게까지 하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천재 지변(天災地變)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다. ‘심판하다’의 뜻인 ‘크리노’은 ‘선과 악을 분별하다’(discriminate), ‘분리하다’(separate)의 의미와 ‘정죄하다’(condemn)의 의미가 있는데 본 절에서는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받게’란 말은 본 절에서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의 뜻인 ‘소테리아’란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여기서 본 구절의 의미는 죄악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죄사함과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한다.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만 심판을 받고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가? 그렇다면 다음의 말씀들과 상치되지 않는가?
“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본 절에서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의 뜻은 심판대 앞에 서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죄를 받아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condemn’(정죄하다, 유죄판결을 내리다)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KJV, NIV, ESV, NRSV).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롬 8:1)는 것이다.
심판을 받은 것. 헬라어 ‘케크리타이’는 완료시제이므로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었고,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을 나타낸다. 불신자들은 장차 있을 종말론적인 대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삶, 즉 정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4:14].
14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본 구절에 대해 테일러(H. Tayler)는 ‘문자 그대로 아무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본 구절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적 배경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종종 하나님을 바라는 것을 영혼의 갈증으로 이해해 왔다(시 42:1, 사 55:1). 이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여호와를 만나는 길 외에 없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 갈증의 해소는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본 구절의 헬라어를 직역하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솟아나는 물의 샘’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물이 솟아나는 ‘기간’에 대한 암시가 없고 다만 솟아난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Godet). (1) ‘솟아나는’으로 번역된 ‘할로메누’는 물이 솟는 모양을 나타내는데 신약성경 중 본 절에서만 사용되었다. 그 외에는 펄쩍펄쩍 뛰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행 3:8, 14:10).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물의 생명력을 암시하며 동시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모양도 의미한다. (2) 물이 솟아난 목적은 영생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해석이 필요하다. 예수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었다고 선포하셨는데(5:24), 그 영생을 위해 솟아나는 ‘물의 샘’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바로 계속적인 성령의 도우심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생이 믿음의 결과로 주어졌으며 그 과정에 솟아나는 생수의 역사가 있어 영생이 확보됨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으로 확정된 영생을 성령께서 끝까지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구원은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4:22].
22 너희는 … 우리는. 혹자는 ‘너희’가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을,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자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그러나 본 절 하반절은 ‘너희’가 사마리아인을, ‘우리’가 예수 및 유대인을 지칭함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Godet, Bernard, Lenski, Barrett, Meyer, Lindars, Morris, Magregor, Pink). 그런데 학자에 따라 예수께서 ‘너희’와 ‘우리’를 엄격하게 제한하여 구분한 이유에 대해서는 각기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1) 예배 장소의 차이: 예루살렘은 정통적인 예배의 중심지이지만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은 비정통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본 절을 여인의 질문에 대한 것으로 해석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본 절 하반절과 비교해 볼 때 타당하지 않다. (2) 계시 지식의 차이: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므로 유대인에 비해 불충분한 계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사마리아인은 불완전한 예배를 드리며 추상적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이 견해는 하반절과 잘 조화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는 여호와 신앙과 우상 숭배의 여러 요소들이 혼합된 것이었으며, 또한 그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서, 성문서, 역사서 등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알지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매우 제한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하다(행 17:23 참조). 이에 대해 웨스트콧(Westcott)은 ‘그들은 예배할 대상을 알지만 실제로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는 알지 못한다’고 설명하였다. 한편 다드(Dodd)는 사마리아가 불완전한 계시를 소유하고 있었기에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영지주의 종파들의 본원지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영지주의를 ‘기독교의 과격한 헬라어 사상’으로 정의한 폰 하르낙(Von Harnack)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영지주의가 헬라 사상의 영향으로 광범위하게 그리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따라서 그것의 발생지를 어느 특정 지역으로 결코 한정 지을 수 없다.
아는 것을 예배. 시 76:1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알린 바 되었다고 진술되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선택된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충만한 계시를 받았다는 의미이다(시 147:19-20, 롬 9:3-5). 그러나 그러한 유대인들 조차도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참 메시아임을 알지 못했다.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종교적 혼합주의에, 유대인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 준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알지 못하는 것을 섬기는 사마리아인의 예배나 아는 것을 예배하는 유대인의 예배는 모두 참된 영적 예배가 아니라 불완전한 예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유대인을 ‘아는 것을 예배하는 자’로 지칭한 것은 당시 그들이 참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보다 완전한 계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 이 말씀은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제도 보다는 오히려 유대인들의 예배 제도가 우위(優位)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스라엘은 모든 나라와 민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고 가르치는 학교’라고 하였다. 사실상 유대인들은 제사장 나라로서 여호와 종교를 이방에 전할 의무가 있었다(출 19:6).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이방에 전파되어야 하는 내용이 유대인의 예배 제도나 구약성경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형식 속에 감추어진 복음의 비밀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복음의 비밀은 바로 예수였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헬라어 ‘헤 소테리아’는 정관사(헤)를 가지고 있으므로 유대인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바로 그 구원 즉 메시아를 가리킨다. 그 구원의 메시아가 유대인 중에서 나올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유일하고도 특별한 계시자로서의 메시아로서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고된(시 147:19-20, 사 2:3, 미 4:1-2) 바대로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에서 나왔다. 따라서 본 구절은 유대인인 예수 자신을 통해 구원이 완성될 것을 가리킨다.
주님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5:21].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헬라 원문에는 이 구절 초두에 “왜 그런고 하면”이란 말이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앞절의 “더 큰 일”이란 말을 설명하는 것임이 확실하다. “일으키심”이란 말은 영적, 또는 육체적 부활을 겸하여 가리킨다(Grosheide). “같이”란 말의 헬라 원어이 여기서는 일체 동행(一體同行)의 뜻을 가졌고, 시간을 서로 달리하는 중복된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일을 가리킨다.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원하시는 대로 살릴 자를 살리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그의 심판 권위에 대하여 말씀한 것인데, 다음 구절들(22,23)이 이사실을 자세히 해설한다. 즈안(Zahn)은, 이 구절 말씀이 단지 대종말에 나타날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죽은 자”란 말, “일으켜”란 말, “살리심”이란 말들이 현재 영적 관계로 사용될 수도 있다. 그 뿐 아니라, 여기 “일으켜란 동사(動詞)와, “살리심” 이란 동사이 모두 현재사니 만큼, 이 구절 말씀을 대종말에 나타날 부활에 국한하여 생각할 수 없다. 스밀데(E.Smilde)는 말하기를, “21절의 말씀은 살리는 운동의 일반적 관설이고, 24-25절은, 현재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내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영적 생명을 가리키고, 26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생명이 있음을 말하는 신학적 진술이고, 29절은, 그리스도 재림 때에 신자들이 받을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37).
하나님과 주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 죽은 영혼이 살아난다[5: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내 말을 듣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순종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단지 귀로만 듣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 “내 말을 듣고 … 영생을 얻는다”는 어귀는, 말씀이 생명력(生命力)을 마술적으로 전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부셋트(Boussett)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작용을 마술적인 것으로 간취하고, 그것을 헬라의 비지적 오묘(秘智的奧妙)란 것 (Geheimnisvolles mysterien wort)과 동일하게 보았으니(Kyrios Christos, 1926, S.170) 잘못이다. 여기 “듣는다”함은, 헬라 신비주의의 범신론 사상(汎神論思想)이 가르친 마술적인 생명 전달이 아니다. 그 들음은, “나 보내신 이”를 믿는데 이르게 하는 지석 요소를 가진 동시에, 신자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결과로 가져온다. 이것은, 지식성과 인격성이 제외된 마술적 작용과는 청양지차로 다르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곧, 신자가 현세에서부터 벌써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상은, 성경 다른 부분에서도 가르친다(눅 17:21, 고후 5:17, 골 3:3, 벧전 1:23). 스밀데(E.Smilde)는, 이 점에 있어서 요한의 사상이 바울의 칭의론(稱義論)과 원리상으로 같다고 하였다. 곧, 신자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벌써 옳다 함이 되도록 현세에서부터 심판 보장의 칭의를 받았다는 의미이다(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44).
2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불트만(Bultmann)은, 본 절의 사상이 노시스 신화인 만데안(Mandean) 문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194).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오데베르크(Odeberg)가 수집한 만데안 문집에서 몇 개의 문구들을 보여 준다. (1) “생명의 음성이 부르짖는다. 깨어 있는 귀는 듣는다. 어떤 자들은 듣고 살아나고 어떤 자들은 계속하여 잔다”. (2) “생명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믿고 그것의 교훈을 받아 죽음을 미워하고 생명을 얻는다”. (3) “혈육으로 된 자들의 영들이 생명의 소리를 듣고 믿으면 생명의 집에서 존전에 거하게 되리라”.
그러나 여기 소개된 바 만데안 문헌의 내용은, 사도 요한의 사상과 아주 다르다. (1) 만데안 문헌에서는, 사람의 영혼에게 외치는 자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가상적인 우주적 실존이라고 한 반면에, 사도 요한은, 인간성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강조한다.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역사적 인물이다(1:14, 2:1,12, 4:6, 5:27, 7:1, 8:59). (2) 만데안 문헌에서는 성령을 가리켜 흑암의 신(神)이라 하였고, 예수님을 가리켜 거짓 메시아라고 하였으니(C.H. Dodd, The Fourth Gospel 1953, P.119. 이런 괴이한 문헌 중에 어떤 부분이 그리스도 이전 것으로 생각되나, 거기 포함된 사상은 파사의 이원론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사상은 성경을 위반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런 사상을 취하지 않았을 것은 명백하다. (4) 만데안 문헌이 말하는 구원론은 영혼이 세상을 떠남이라고 하나, 사도 요한의 구원론은 신자들의 부활을 구원의 완성으로 본다.
따라서 본 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1) “죽은 자들”을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은 현세에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될 것을 가리킨다. 그래야 “지금이 그때”라는 말과 상통한다. 성경에서 흔히 “죽은 자들”이란 말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가리켰다(엡 2:1, 5, 5:14). 바로 전 절(5:24)에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하므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살아날 것임을 천명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2) 즈안(Zahn)은 이 말씀이 주님의 재림 때에 신자들의 육체가 부활할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본 절 이후의 부활에 대한 언급이 모두 세상 끝날에 관한 것인 점이 그 증거가 된다(5:28-29, 6:39-40, 44, 54). 5:28-29는 마치 5:25을 확대 해석하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세상 끝날에는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세상 끝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혹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것을 예수의 부활시 승리의 첫 열매로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마 27:52)난 특별한 부활의 사건을 말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근거가 빈약하다. 어쨌든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이미 부활은 시작되었고 그렇게 될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요한의 말에는 틀림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마 4:3의 주석을 참고하라.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온다[5:29].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선한 일”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으므로 나타낸 선한 열매를 가리키고, 일반 도의적 선을 말함이 아니다(3:19-21). 여기 “선한 일을 행한”이란 말의 “행한”이란 자는 헬라 원어로 포이에-산테스니, 반드시 상습적으로 완전히 행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일을 행한”이란 어귀에 있어서 “행한”의 헬라어 원형은 프라쏘이니, 상습적으로 행한것, 혹은 일생의 행습(行習)을 말함이다. 악을 행하기는 이렇게 쉽고 상습적이다. 이 구절이 말한 두 가지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부활에 대하여 성경은 종종 말하였다(행24:15, 고후5:10, 계20:12, 13, 단12:2). 이 말씀은, 명백하게도 세계 종말에 있을 대심판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트만(Bultmann)은, 이 부분 말씀을 본래의 원본으로 생각지 않고 후대인의 삽입구라고 한다(Johannes Evangelium, pp. 196-197). 그러나 불트만(Bultmann)의 이같은 주장은 억측에 불과하다. (1) 이 구절들에 대하여 사본상 일치하지 않는 것은 전연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사본들이 다 함께 같은 내용을 가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저작자의 기록 그대로인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신약 학자들은, 이 부분(5:28-29)말씀이 문맥상으로도 본래의 원본인 사실을 알려준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부분 말씀보다 앞서 벌써 27절이 미래의 심판을 말한다고 하며, 이 부분 말씀은 그것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그 뿐 아니라, 슐라델(Schlatter)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5:19이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살리시는 역사롸 심판하시는 일이 현세에 벌써 실행된다고 강조하는데, 그와 같은 역사(役事)의 권세는, 곧바로 28-29절에 기록된 그의 장차 행하실 심판 권세와 같은 것이라는 의미로 말하였다(Der Evangelist Johannes, p. 152). (2)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예수님이 5:28-29에서 두 가지 사상의 병립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한다. 곧, 영생(또는 심판)의 현재적 실시와 및 세상 끝날의 실시를 병립시키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병립 사상은, 특별히 요한 복음 저자의 사고 방식이다. 6:40에도 이와 같은 취급이 나타나 있다. 거기 말하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여기 나타난 사상은, 신자들이 현세에서 벌써 영생을 소유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들이 대종말에도 부활의 형태로 영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련하여 6:44, 54에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시면서 그의 수평선적(水平線的)인 종말관(終末觀)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는, 12:48에서도 “마지막 날”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다. 그기서도 그는, 현재적 심판과 미래의 심판을 병립시켜 말씀하셨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하신 말씀이 미래의 심판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그 현재에도 그 말씀이 심판과 같은 종말관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은 종말관적 성격 있는 최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의 심판 성격은 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에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다. 성경에서는 주님을 증언하고 있는데 영생을 얻기 위하여 주님께 나아가기를 증언한다[5:39-40].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은, 윗 구절들(37-38)의 정당성을 증거한다. 곧, 구약 성경은 영생을 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는데, 유대인들이 그 성경을 상고하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은 성경을 바로 앎이 아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과 같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라신 주님이 이 양식은 주신다[6:27].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자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력(靈力)을 가리킨다. “인자”는 인성(人性)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바 그가 살과 피를 희생하셔서 속죄하여 주시므로 영적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게 된다. “인 치셨다”는 뜻은, 예수님을 구주로 세우시고 인정하시고 신임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구주를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높다는 참람한 죄악이요,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이로 여기는 죄악이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6:32-33].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을 쓰실 때에 만나를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신령한 떡,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내린 떡이란 말로써 옛날의 물질적인 떡 곧, 만나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그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진정한 의미의 하늘 떡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저 유대인들은, 만나보다 더욱 위대하신 떡(”참 떡” 곧,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음에 대하여 불신앙했으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여기 “하나님의”란 어귀가 강세(强勢)를 띤 말이라고 한다(Goebel). 그렇다면, 이 어귀가 그 “떡”을 가리켜 그 영성(靈性)과 그 영원성과 생명성과 및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고조한다. “하늘에서 내려”란 말씀이, 이 부분 예수님의 교훈에 일곱 번 나온다(33, 38, 41, 42, 50, 51, 58).그 만큼 이 말씀은 역설체(力說體)로서 그 떡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준다. 곧, (1)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인 만큼 광범위한 세계에 분배된다. (2)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 불멸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만나는 영양을 줄 수 있었으나 하늘 떡은 생명을 주는 것이다. (3) 만나는 보이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나, 생명의 떡은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온다(Calvin). (4)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란 말의 헬라 원어는, 현재 분사로서 계속적으로 내려오는 활동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양식은 사실상 모든 시대를 통하여 끊임 없이 내려온다.
주님은 생명의 떡이다. 주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6:35].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 마르지 아니하리라. (1)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 먹는 행위와 같이 실제적이어야 할 것을 암시하심이다. 믿음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실제이다. 먹음으로 우리의 주린 것을 멈추는 것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영적 기갈이 멎어진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는 것처럼 믿어 그를 내 분깃으로 섭취해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이론만 알고 그를 내게 섭취시키지 않으면, 그것은 큰 곡창(穀倉) 문 앞에서 굶어 죽는 것과 같은 가석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음식 먹기를 계속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일을 계속해야된다. 작년 이 때 먹은 것이 오늘의 주림을 멈추어 주지 못한다. 신앙 생활을 먹고 마시는 행동에 비유한 것은, 성경에 많이 있다. 사 55:1에도 말하기를, “너희 목 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였다. 계 3:20, 22:17 참조. (2) “내가 곧 생명의 떡”이란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신 동시에 생명을 주시는 이시란 뜻이다. 그는 주시는 자시며, 또 주시는 선물 자체도 되신다(Zahn). 그 자신이 대제사장인 동시에, 자신이 제물도 되신다. 그를 믿는 자는, 그의 속죄제의 효과를 받아 누리며 따라서 그와 일체(一體)되도록 밀접히 연합하게 된다. 그가 자기를 떡에 비유하신 이유는, 음식물은 그 먹는 자와 밀접하게 연합하여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자”란 말과 “나를 믿는 자”란 말은, 서로 병행하여 동일한 뜻을 가리킨다. 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지향한 영적 동태(靈的動態)를 말함이고, 믿는다 함은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합해 있음을 가리킨다(Grosheide, Het Heilige Evangelie Volgens Johannes, Kommentaar I,P.439).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다[6:39-40].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주님은 생명의 떡이다. 주님이 주시는 떡은 세상의 생명을 위한 주님의 살이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신다[6:47-55].
47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믿는 자”란 말은 예수님을 믿는 자란 뜻이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문구의 짧은 것을 가리켜 사상의 표현을 강력하게 하려는 문체라고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간단 명료한 진리 표현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이 문구에 대하여는 35절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48 없음.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예수님도 인간 편으로는 유대인이고, 그들의 조상이 예수님의 조상도 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할 때에, 그들과 그들의 조상은 불신앙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는, 물질적인 만나와 달라서 영적인 하늘떡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는 자들은 영생한다.
50 이 구절들은, 33, 35절에 있는 말씀을 거듭한 셈이다. 중언체(重言體)는 역설체(力說體)이다. “내 살”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임이 되시므로 그를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
51 없음.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유대인들이 서로 다툰 원인은, 그들의 의견이 서로 다른데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자들은 예수님의 속죄 교훈을 믿었으나, 어떤 자들은 믿지 않았다. 믿지 않은 자들은 예수님의 살이 세상 사람의 생명이 된다는 말씀(51절 끝)에 걸렸다. 그들은, 메시아가 죽어서 속죄하시는 진리를 왜 믿지 못했던가? 그 진리는 이사야서 53장에 명백히 예언되지 않았는가?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세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여기서는, “인자의 살”이란 말에 “인자의 피”란 말을 더하여 말씀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었인가? (1) 그것은, 살과 피는 인간성을 모두 가리키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인간성 전체가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셨으니, 그것은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신 것이다. (2) 피를 첨부하여 말씀하신 또 한가지 이유는, 피는 특별히 생명을 의미하는데 (창 9:4, 레 17:11,14), 그것을 흘리셔서 속죄제물을 성립시키기 때문이다(출 12:7,8, 레1:5, 히9:12,20).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말씀은 문자적 의미보다 비유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것은, 곧, 그의 살과 피를 먹으며 마시는 행위와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여 나 자신의 분깃으로 만드는 실제적 행위이다. 신앙은 이론 뿐이 아니다. 이 말씀에 근거한 기독교 성찬 교리에 대하여, 불트만(Bultmann)은, 그것이 헬라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Theology of the New Testamant I, p.148). 그러나 헬라 신비 종교에서 그 의식에 참여한 자들이 신(神)을 먹는다고 한것(그들의 신으로 표상된 소위 고기 같은 것을 먹는 것)은, 범신론 사상과 마술적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 먹음에 참여하는 자가 신(神)이 된다는 그릇된 주장도 거기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찬은 그와 정반대로서 유신론적인 속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찬은, 구약에 있는 유월절 잔치의 후신(後身)이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실 때에 바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면서 그것을 성찬으로 변전시키신 것 뿐이다(눅 22:7-23). 요 6장에서 신자들이 그의 살을 먹으며 그의 피를 마실 필요성에 대하여, 그가 강조하신 때도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다(4절). 그 뿐 아니라, 유월절 잔치의 영적 의미가 성찬의 그것과 같다. (1) 유월절 잔치를 먹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구속을 준 것처럼(출 12:13), 성찬을 먹는 것이 기독 신자에게 그런 의미를 가지며, (2) 유월절의 만찬이 애굽을 떠나 먼 길을 가는 이스라엘에게 양식이 된 것처럼, 성찬은 기독자에게 영적 양식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보면, 성찬과 헬라의 신비 종교와는 전연 관계가 없다. 헬라의 신비 종교들 중 다요니시스(Dionysys)란 신을 예배하는 제사에서는, 거기 참여하는 자들이 그들의 신을 상징하는 소의 고기를 생으로 먹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므로 그들 자신이 신화(神化)한다고 믿었던 것이다(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 pp. 281-282). 이런 사상은 범신론(汎神論)으로서, 유신론(有神論)인 기독교와 반대된다.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예수의 말씀을 들은 후 제자 중 여럿이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고 하였다. 살과 피를 먹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것이었으며(레 17:10-14),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요 6:66)였다. 본 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살에 대하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며 예수께서 주시는 떡이 바로 세상의 생명을 위한 예수의 살(6:51)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곧 생명의 떡(6:35)이고 그 떡은 또한 예수의 살이기 때문에 살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의 떡 즉 예수 자신을 먹는다는 것이 된다는 말씀이다.
(2) 피를 마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5)고 하셨다. 새 언약은 피로 맺어진 언약이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였다. 새 언약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친히 비준 받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을 마신 것은 양의 피가 흘려지는 유월절 전날 밤이었다. 이제 후로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어떤 피도 흘릴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는 유월절을 폐하시고 직접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새로운 제도를 설립하셨다.
(3) 히브리어 숙어에서 “살과 피”는 사람 전체(the whole man)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받아들여 살아 있는 관계를 맺으라는 뜻이다. 특히 “먹고 마신다”는 말은 성경에서 완전한 연합을 의미한다(계 3:20). 어떻게 살을 먹고 피를 마실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깊은 교제와 친밀함를 갖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늘과의 교제를 유지하고 참 생명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분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말씀하신다.
(4) 이 말씀은 성만찬 예식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은 성만찬에 대하여 따로 기록하지 않으므로 본문의 진리는 성만찬 예식이 전하는 것과 똑같은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성만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성만찬의 떡은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져 신자들이 먹는다. 그러나 모든 조각이 한 떡에서 나왔듯이 성찬에 참여하여 떡을 먹는 모든 사람은 몸이 나누어진(부숴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애굽 때 각 집에 사는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원했듯이 신자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을 마심으로써 죄에서의 출애굽과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여기 “참된”이란 말이 사용된 목적은 이렇다. 곧, 만나와 같은 물질적 양식에 비교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속죄의 은혜)는 참되다는 것을 표시하려는 것이다. 곧, 물질적 양식은 그림자와 같고 물완전하나,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는 실물이요 영원히 살리는 효과를 가진 것이다.
주님께 와서 마시면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주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7:37-38].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초막절은 한 주간이지만, 거기 하루를 더하여 8일 동안 지켰다(레 23:36, 민 29:35). 유대인들은, 이 초막절 기간에 매일 실로암못에서 물을 길어 가지고 행렬을 가지고 행렬을 지어 성전 문에 돌아와서 물을 붓는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조들이 광야에 있을 때 바위에서 이적으로 솟아나온 물을 기념하는 뜻이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초막절 행사와 관련하여 영적 생수에 관한 설교를 하셨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말씀이다. 이것은, 메시아로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권위는 마 11:28 말씀과 같다. 사 55:1 참조.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만이 인류의 갈증을 멈추어 주실 수 있음이 확실하다. 인간은 작은 자이지만, 그의 소망과 요구는 무한한 것으로야 채울 수 있다(전 3:11). 이 무한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인류의 갈증을 참으로 만족시키신다는 사실은, 약 2,000년 동안의 진실한 기독 신자들의 경험이 증거한다.
38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여기서 생수의 강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 다음 절에서 생수란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39절)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는 자의 배에서 성령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성경에 이름과 같이”라고 하였지만 성경에서 본문과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고 단지 구약에서 성령을 부어준다는 구절들과 물에 관한 구절들을 연상하면서 말했다고 생각될 뿐이다(사 55:1, 58:11, 슥 14:3, 출 17:6, 민 20:11 참고).
이 말씀은 명절 끝날, 즉 초막절의 끝날에 한 말이다. 초막절 7일 동안에는 매일 아침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서 금 항아리에 물을 길어와 성전 제단에 붓는 일을 행하였다. 백성들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라고 노래하였다. 이런 의식들을 보면서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적합한 실물교훈을 주셨다. 장막절이 끝나는 명절의 끝날은 축제의 절정이다. 이날은 제단 주위를 일곱 번 돌면서 “호산나”를 외친다. 예수께서도 고조된 축제의 분위기에 맞게 서서 큰소리로 외쳤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예수께로 오면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이유는 그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생수의 강이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이라면, 배에서 성령이 흘러나온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구약에서 “배”란 흔히 사람의 심층부 즉 생각이나 양심이나 인격을 잉태하는 가장 깊은 곳을 말하고 있다(욥 15:35, 잠 18:8). 따라서 배는 인간 존재 자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배에서 성령이 흘러나온다는 말은 그의 존재의 깊은 곳에서 성령이 흘러나온다는 말로, 자신의 존재는 비어지고 성령이 충만하여 흘러넘치도록 역사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그의 삶 속에서 강물 같은 영적 능력이 흘러나올 것이다.
생수의 강이 사람 속에서부터 흘러나온다는 사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본 절 처음에 있는 “나를 믿는 자”란 말을, 앞 절 끝의 “마시라”는 말의 주격으로 올려붙인다. 그것이 문법상으로 가능한데,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그 뜻은, “나를 믿는 자로 마시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기 “그 배에서”란 말을 “그리스도의 배에서”란 뜻으로 간주한다(Lagrange, Bultmann, Wikenhauser). 옛날 교회에서는 히폴리트(Hippoliyt)가 그렇게 해석하였다. 즉 “그 속”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속을 말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람에게서 생수가 나올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생수 즉 성령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이 구절을, 믿는 자의 배(속)에서 생수가 흘러나온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또한 이런 비유가 성령님의 인격성을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은 성령님의 인격성(人格性)을 밝히 말하고 있다(1:33, 3:34, 6:63).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꼴을 얻는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신다[10:9-11].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누구든지”란 말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족이나 국가의 차별 없이 관계한다는 보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란 말씀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고 그의 중보 역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에게 들어감을 의미한다. 이렇게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생명의 부요를 얻기 위하여 영의 양식을 자유롭게 받는다. 이 사실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는 말씀으로 알려진다. “들어가며 나오며”란 것은 자유로운 활동을 의미한다(신28:6, 시121:8, 렘37:4). 그리스도 신자는, 그의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신령한 양식을 섭취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주시는 양식은 영원한 만족을 준다. 땅에 속한 모든 것은 인간이 가져 볼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다. 그것들로써는 인간의 갈증을 멈출 수 없다. 그것으로 만족하려는 자는 소금 물을 마셔서 갈증을 없애려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더 심하여질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꼴은, 먹는자마다 영원한 만족을 얻어서 모든 다른 것들을 진토와 같이 여기게 된다. 이 아래 10절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 말씀이 그 뜻이다.
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말씀은, 기독교회에 거짓 스승들이 종종 들어올 것을 미리 경고한것이라고 생각된다. 교회에 나타나는 도적은 거짓 교훈을 가진 자들이다(골2:8, 렘23:2, 겔34:2). 이런 자들은 양을 귀히 여기지 않고 저희의 사리 사복을 위주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목자로서 양들의 진정한 유익을 구하신다. 곧, 그는 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시며, 또한 그 생명을 장성케 하신다(시23편, 히13:20-21).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선한 목자”에 대하여는, 구약에도 많이 예언하였으니, 대상11:2, 시23편, 사40:11, 겔34:23, 슥11장 등이다. 이 구절들을 보면, 여호와 자신이 바로 하나님 백성의 선한 목자라고 했으니,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때 그 예언들은 성취되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헹스텐벌키(Hengstenberg)는, 그말이 그 양을 위하여 목숨을 대속물(代贖物)로 주실 것을 가리켰다고 한다(막10:45, 마20:28).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사53:10을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고데이(F.Godet)도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란 말씀이, 다른 이의 요구에 응하여 생명을 내어 놓음, 혹은 바침, 또 혹은 희생함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양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아버지와 주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10:27-29].
27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양(택한 백성)의 성질이 어떠함을 밝혀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음성(하나님 말씀)을 알아 듣고 따른다(닮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음성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그들의 편애(偏愛)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먼저 택하신 사실에서 일어난 반응이다. 그것은, “나는 저희를 알며”란 말씀이 밝혀 준다.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테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양 된 자의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그 행복은 그들이 영생을 받음이다. 아무도 그들의 받은 영생을 빼앗지 못한다. 그 이유는,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의 양 된 자들, 곧, 참된 신자들로 하여금 그 받는 구원의 불변성을 알고 안전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그의 양 된 자들은 힘있는 원수들에게 둘러 싸였고, 그들 자체는 심히 연약하다. 그러나 그들의 의뢰한 자가 그들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능히 지키실 줄을 그들은 확신한다(딤후 1:21). 하나님의 양 떼인 교회는, 악한 것들이 가득한 세상에 놓여 있어도 근심할 것 없다. 악한 것들도 하나님의 주권에 복속하지 않을 수 없다. 28절 상반 말씀은, 7-10절의 사상과 연락하고 나온다. 곧,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는 사상을 재음미한다. “주노니”라는 말(* )은 현재 동사로서, 현대시 곧, 신약 시대에 세계적으로 신자들에게 영생 주시는 운동이 시작됨을 염두에 둔 말이다.(E.Smilde, Leven in de Johanneische Geschriften, p.111). 그리고 28절 하반(29절도 참조)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한 말씀은, 11-18절의 사상을 재음미한다. 그리스독게서 그 양들을 위하여 원수들(도적, 갇도 같은 자들)과 싸워 이기시므로, 양들은 영원토록 안전하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란 문구에 대하여, 우리 한역과 같이 번역된 것을 찬성하는 학자들도 있다. (Godet, B. Weiss, Bernard). 그런 경우에는, 이 문구의 의미가 양들(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신 하나님이 만유보다 위대하시다는 뜻이겠다. 그러나 스밀데(Smilde)는 이 문구를 우리 한역의 각주(脚註)와 같이 번역하여,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만물보다 크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주신 것”이란 말이 신자들을 총칭한 것이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신자들은 시간 세계에서나 영원한 세계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의 대상이고 그리스도의 소유니만큼, 만물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원칙에 있어서는 벌써 세상을 이긴 자들이다. 그들 중 하나라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라고 하였다(Leven in de Johanneische Goschriften, p. 112).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니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11:25-26].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중대하고 비범하신 메시아 권위에 대하여 알려 주시는 자아 주장이다. 곧, 이것은 “나는 그 이”라는 장엄한 선포이다. 주경 신학자들이 이런 문투로 나온 말씀을 가리켜 예수님의 “자아 주장” 언사라고 한다. 하이트뮬러(Heitmuller)는 이 구절에 대하여 말하기를, “여기 요 11:25의 말씀은, 요한 복음의 특징으로 나타난 자아 주장의 말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Es ist das groste und erhabenste “Ich bin” in der Reihe der wirkungsvollen, “Ich bin”, die den Jesus unseres Evangeliums Kenzeichen). 여기 “부활”이란 말과 “생명”이란 말에 각각 관사가 있어서, “그 부활이요 그 생명”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라는 관사는, 여기서 예수님 자신께서만 독일 무이(獨一無二)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신 사실을 밝혀 준다. 볼트만(R. Bultmann)은, 여기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존재 형태를 말함이 아니고, 신자들에게 선물 주시는 그의 의의(Bedeutsamkeit)를 가리킨다고 하였다(Johannes Evangelium, p. 307). 그렇다면, 볼토만(Bultmann)의 이 말은, 부활과 생명이 예수님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 다른 사상이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과 예수님 자신만이 인간에게 영생이 된다고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그 자신이 바로 인생의 구원이 되신다고 한다(사 12:2). 인간은 영원을 사모하나니(전 3:11), 하나님 외에는 아무 다른 것도 그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 신자의 영생 얻는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물과 그리스도 자신을 분리시킨 볼트만(Bultmann)의 사상은 그릇된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여기서 예수님은, 사람의 영생 얻는 방편이 믿음 밖에 없음을 강조하신다. 그가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영생이 하나님의 계약 체제(혹은 약속 체제)에 속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계약자는 그 상대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법이다. 롬 4:16 참조. 은혜 계약은, 그것을 받은 첫 사람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인간 편의 믿음을 요구하였다.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에게 통해지도록 하는 심리적 통로로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것이 신인 계약(神人契約)을 성립시키는 구성요소로서 필요한 것이다. 기독자들은 믿음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약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가 되어진다(고전 15:23). “죽어도”란 말의 헬라 원어 칸 아포다네는, “그가 죽은 후에”란 뜻이 아니고, “그가 죽을지라도”(though he dies)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죽어도 살겠고”란 문구는, “그가 죽을지라도 계속하여 살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자의 받은 영생이 그 육신의 죽음 때문에 중단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구는, 신자의 육신이 죽은 후에도 그에게 계속되는 역적 생명을 가리킨다(Feine, Hier wird also von einem Leben gesprochen, das der Glaubige schon unmittelbar nach dem physischen Tode leben wird.-Theol., S. 440).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여기 이른바, “살아서 … 믿는 자”란 말에 있어서 “살아서”란 말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킨 것(B. Weiss)이 아니고, 영적 생명 곧, 구원론적 생명을 의미한다. 그 이유로서는, (1) 요한 복음에 있어서 산다는 말이 일률적으로 구원론적이며(5:19 이하 참조), 특별히 11:25-26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 (2) “살아서”란 말과 “믿는 자”란 말이, 함께 하나의 관사으로 결속되었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다시 산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란 말씀은, 성령으로 거듭 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위의 25-26절에 기록된 두 가지 말씀은, 각각 다른 것을 설명하지 않고 같은 말을 두 번 거듭하는 것 뿐이다. 25 절의 것(”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음이 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26절의 것(”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은, 좀 더 상세한 말로써 위의 것을 재확인 한 것 뿐이다. 곧, 살아서(거듭나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요 8:51의 주석을 참고하라.
하나님의 명령이 영생이다[12;50].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가야바의 이 말 뜻은 악한 것이었다. 곧,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 운동 때문에 로마 군대가 유대를 멸할 위험이 있으니, 예수 한 사람만 희생시키면 유대국은 안전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야바의 이 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용되어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예언한 것이 되었다. 유대의 마지막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님의 속죄 고난에 대하여 공직자(公職者)의 처지에서 예언한 것은 중대하다(49-52).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의 원수(가야바)까지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예언한 사실은, 참으로 그 속죄의 고난의 중대함과 믿을 만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것이 마치,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고(민 24:17), 다윗의 원수 사울이 다윗의 일에 대하여 예언한 것과도 같다(삼상 26:25)
주님이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13;20].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의 목적한 바는 이렇다. 곧, 비록 유다와 같은 배신자가 있다 할지라도 다른 사도들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보낸자”. 곧,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들을 영접하는 자는 결국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 그 만큼 사도들의 권위는 높은 것이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므로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14;6].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기 “길”, “진리”, “생명”이란 말이, 헬라 원문에는 모두다 “그”라는 관사을 가지고 있어서, “그길”, “그 진리”, “그 생명”을 의미한다. “그 길”은 유일한 길이요(행 4:12), “그 진리”도 유일한 진리요, “그 생명”도 유일한 생명 근원을 가리킨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다른 종교 사상과 타협하시지 않은 사실이다. 그 당시에는 영혼이 자기 힘으로 하늘에 간다는 영지파(노시스)의 사상과 기타 사상이 유행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타협하는 혼합주의(Syncretism)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그는, 그 자신이 독일 무이(獨逸無二)하신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그는 메시아적인 자아 주장을 세우신다. 선지자들은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길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길” 자체요, 더욱이 그 길의 목적인 “그 진리”, “그 생명”자체이시기도 하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이르도록 하시는 중보자이시지만, 그 자신이 하나님 자신이시기도 하다. 이 사실은 그가 절대적인 구주이심을 성립시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당 가는 길을 알려는 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천당 가는 길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천당이 하나님 중심한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 외에 별도로 천당을 생각하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으로 흐른다. 그것은 잘못된 사상이다.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선(善)이나 진리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17; 3 영생은 … 아는 것이니이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고 했다. ‘안다’(헬, 기노스코)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 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됨을 증거한다(Lenski). 체험적인 지식의 본질은 그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그분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 “계명의 준수는 하나님을 알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표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단지 이론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진다”(Ekkehardt Mueller, The Letters of John [Nampa, Idaho: Pacific Press, 2009], p. 39). 또한 이것은 사랑과 연결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15, 2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 행 3:15).
한편 기도 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아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 2:22, 4:3, 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3 영생은 … 아는 것이니이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다(Bernard).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고 했다. ‘안다’(헬, 기노스코)는 것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며 본 절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에 수식하는 말로 사용됨으로 예수와 하나님의 인격적 하나됨을 증거한다(Lenski). 체험적인 지식의 본질은 그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그분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 “계명의 준수는 하나님을 알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는 표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단지 이론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진다”(Ekkehardt Mueller, The Letters of John [Nampa, Idaho: Pacific Press, 2009], p. 39). 또한 이것은 사랑과 연결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요 14:15, 21).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하나님의 대한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인생들에게 가장 쉽게 그리고 충분하게 계시해 주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主體)가 되신다(11:35, 행 3:15).
한편 기도 중에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저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Lenski) 그렇게 해석하면 헬라어 원문에 무리가 따르게 된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을 확고히 하시기 위해 자신의 메시아 되심을 이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이 견해는 무난하게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표현은 메시아의 자기 증거인 셈이다(Godet). (3)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표현이라고 하는 주장이다(Westcott, Hegnstenberg). 예수께 대한 요한의 고백은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복 기록되었다(요일 1:3, 2:22, 4:3, 5:20 등). 그러나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면서 그날밤의 기억들을 잊어버렸다고 구태여 가정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