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전령사
지나간 날을 되돌아보면 올해 날씨는 참 별나기도 했다. 초봄에는 비가 너무 잦은가 했는데 여름에는 가뭄이 극성이었다. 태양이 이글거리던 한여름의 고비를 넘기니 이번에는 큰 태풍이 서너 번씩이나 지나갔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수은주 기둥이 뚝 떨어지더니 하늘도 바람도 참 맑고 시원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정처 없는 여행을 떠난다. 가을바람이 살랑이더니 몸을 간질이고 달아난다.
휴일 아침, 날씨도 좋고 덩달아 버섯이나 채취해 볼 요량으로 산을 향했다. 짧지 않은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도시에서 몰랐던 가을의 정취가 또다시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개울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들판은 금빛으로 춤을 춘다. 빨갛고 노랗게 익어가는 과수원을 바라보면, 농부들이 흘린 땀과 계절이 주는 혜택으로 난 힘들이지 않고도 부자가 되었다.
산문山門에 도착했다. 천년을 한결같이 서있는 미륵불 뒤로 아침햇살에 부채살처럼 뻗어 내려온다. 찬란한 햇살에 눈이 부시다. 사람들의 흔적은 없는데 산사의 염불소리가 고요한 하늘재의 아침을 깨운다. 밤새 이슬이 내려앉은 숲속에는 방울방울 보석이 매달렸다. 산기슭에서 알밤을 줍고, 숲 속에서 이름 모를 버섯들을 만나니 이곳도 들판처럼 풍성하다.
버섯에 대한 욕심이 동하여 편안한 등산길을 외면하고 숲속을 헤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갔는지 먹을 수 있는 버섯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다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류類의 버섯이 더 많으니 아쉽기만 하였다. 세상 어디에 필요해서 저 많은 버섯은 올라왔을까. 징그러운 뱀도 없었으면 좋겠지만, 야생 들쥐의 개체수를 조절해 주는 중요한 생태자원으로 이해하고부터 혐오스럽다는 생각은 버렸는데, 수많은 독버섯 또한 내가 알지 못하는 고마운 자원이고 동반자가 아닌가 싶다.
버섯 채취는 포기했다. 대신 가을 산을 한 바퀴 돌면서 나도 가을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길도 없는 숲을 빠져나와 널찍한 등산길로 길을 바꾸었다. 버섯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대신 나 홀로 마음껏 시간의 여유를 부리자고 마음을 바꾸니 몸이 한결 자유로워진다. 숲 속의 오솔길로 오르막을 얼마나 올랐을까? 드디어 산 능선에 올랐다. 사방이 탁 트이는 바윗길을 걸으니 막힘없는 시원시원함이 있어 더없이 좋다. 널찍한 바위의 한 틈에서 수백 년을 자란 아름드리로 소나무 기둥에 기대어 앉아 가을을 바라본다.
나에게는 가을 전령사가 셋이 있다. 구절초와 쑥부쟁이 그리고 며느리밥풀꽃. 삶이 버거워 계절의 변화조차 미쳐 깨닫지 못하는 때, 난 이들을 보고서야 비로소 가을이 시작되었음을 알게된다. 볼 때마다 꽃의 소박한 아름다움도 좋지만 누가 이름도 이렇게 재미있게 붙였을까? 라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내가 나에게 낸 해묵은 숙제였다.
구절초는 아홉 번 꺾이는 풀이라는 뜻도 있고, 9월 9일에 꺾는 풀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아름다운 꽃은 꺾이기 위해 핀다고 했는가? 아니면 여인네들에게 약성이 좋다는 소문으로 손을 많이 타서일까? 꺾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사람들에게 필요하기도 하고 가지고 싶은 욕심 동한 결과이리라. 그도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꺾이고 싶은 여인처럼, 꽃에도 치명적인 유혹의 본능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유년을 함께 보냈던 보라색 쑥부쟁이 꽃도 만발이다. 병든 어머니와 동생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불쟁이네 딸이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쑥을 뜯다가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를 구해주고, 함정에 빠진 포수砲手도 구해주게 되었단다. 불쟁이네 딸은 포수와 사랑에 빠지고, 내년 가을을 기약한 채 포수는 떠나가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포수를 기다고 기다리던 어느 날, 노루에게 소원 이루어주는 구슬 세 개를 받았다. 하나는 어머니를 치료하는데 쓰고, 또 하나는 포수를 재회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포수는 야속하게도 다른 여인과 혼인한 유부남이 되었더란다. 상심한 처녀는 나머지 하나의 구슬로 포수를 가족에게 돌려보내고 자신은 죽고 말았는데,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이 쑥부쟁이 꽃이라고 한다.
붉은 입술에 밥풀을 물고 있는듯한 슬픔의 꽃, 며느리밥풀꽃. 가난한 집안에서 홀시어머니의 구박과 오해로 죽음에 이른 며느리가 꽃으로 피어났다는 전설 또한 애잔하게 만든다. 비록 구전으로 전하는 이야기지만 미움 받는 며느리의 사연을 간직한 꽃들이 유독 많다. 예전에는 왜 고부간의 갈등이 더 심했을까. 슬픔이 깃든 전설로 가을 전령사를 만나면 외롭고 애처로운 생각이 든다. 가을은 풍요롭고 아름답지만 고독하고 슬프다. 그래서 서러운 계절이기도 하다.
크고 웅장한 산위에 누워 가을 전령사들과 잠시 동침을 해 본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한 척의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먼먼 여행길을 향기 품고 떠나간다. 나도 가을이 되고 싶다. 가을 전령사의 애잔함처럼 슬퍼도 좋을 아름다운 사랑을 하다가 이 가을에 꽃으로 피고 싶다. 손바닥만큼 작은 미륵절터에 개미같은 사람들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인다. 이 가을에 사랑해야 할 사람들의 풍경이다.
첫댓글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가을 산을 상상해봅니다.
버섯에 대한 미련을 버리니 여유로움이 온다는 묘사도 좋고
전령사에 대한 세세한 표현으로 가을을 담뿍 느끼고 갑니다.
추석 명절 잘 지내시고 건필하시기 바랍니다.
'며느리 밥풀꽃'의 슬픈 전설 처럼 여성이 어려웠던 시절에서 지금은 여성우위의 시대까지 발전했습니다.
덕성여대 설립자 차미리사 선생님은 덕성학원 교훈을 <살되,자신을 위해 살라>고 정하고 여성계몽운동을 했다지요.
지금은 여성 대통령후보도 나왔는데....... 잘 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