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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벗님께
사십년 세월을 넘어 옛 기억을 더듬으며 편지를 쓰려니 새삼스럽고 겸연쩍습니다. 호칭을 무엇으로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 옛날 학과 우편함에서 내 손길을 기다리던 편지나 엽서는 항시 ‘친구여’ 또는 ‘벗님에게’로 시작했기에 나 역시 벗님으로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정과 연정의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기에 벗님이란 칭호가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대전이 워낙 좁아서 설령 우편으로 보내지 않을지라도 읽을 수도 있겠다싶어 두렵기도 하지만 마음 한구석 읽어주었으면 하는 쑥스러운 바람도 없지는 않습니다. 3년 전인가, 벗님과의 옛 이야기를 수필로 써서 몇몇 사람에게 읽어주니 벗님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벗님이 여고 및 대학 1년 후배라며 벗님의 온유하고 덕스런 성품을 이만저만 칭찬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벗님으로 인해 나까지 달리 볼 정도였습니까요. 어엿한 귀부인의 풍모를 갖춘 벗님을 간혹 경조사 모임에서 본다고도 했습니다. 귀부인이라는 말이 얼마나 낯설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70년대 말 5월, 축제 파트너로 소개팅 했으니 40년이 넘었네요. 지금은 꽤 유명한 정치인 S의 주선으로 처음 만났을 때 머리카락 끝을 살짝 웨이브 한 짧은 단발머리에 맑은 웃음을 기억하는 나로서 귀부인으로 변모한 벗님을 상상으로조차 그려보기 어렵습니다.
첫 날, 도청 앞, 클래식이 흐르는 다방 예원에서 벗님은 S옆에 앉아 시종 나와 대화를 나누었고, 두 번째 역시 예원에서 셋이 만났습니다. 벗님은 S와 나란히 옆에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와 맞은편에 앉자마자 당연하듯이 내 곁으로 옮겨 앉았습니다. 그 뜻밖의 행동이 예원의 출입구 앞에 4인용 흰색 테이블, 좁고 딱딱한 그리고 직각의 등받이 의자와 더불어 어제처럼 눈에 선합니다. 그날 이 후 벗님은 내 편이 되어주었습니다. 니체를 신봉하는 사람일랑 사귀지 말라고,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악마이니 목회자의 딸인 만큼 헤어지라고 내 기독교 친구가 나서서 벗님에게 권고했어도 벗님은 나를 한결같이 대해주었습니다. 벗님이 어느 날 뜬금없이 누가 무어라 해도 나를 착하게 본다고 했을 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었습니다. 훗날 내 친구 자신이 벗님을 찾아가서 그렇게 충고했었노라고 고백했기에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좋게 봐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이미 헤어진 후였기에 뒤늦게나마 이번 편지를 통해 전합니다.
한 인간의 천성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기회, 한마디로 영혼의 만남은 일생에 걸쳐 아예 없거나 기껏해야 한번이라는 것을 평생을 살아 본 후, 그러니까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그 점이 우리네 삶이 숙명처럼 치러야 할 아름다운 슬픔이 아닌가 싶습니다.
벗님에게 이리 편지를 쓰게 된 것은 남편 분에게 감사의 문자를 보내고나서 은근히 밀려오는 적적한 마음을 달랠까 해서입니다. 내 아버지가 벗님 남편의 도움으로 남편의 대학병원으로 옮기게 될 뿐더러 남편 분을 담당의사로 하여 돌아가신 내력을 알고 있는지요?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남편 분은 연휴를 맞이하여 가족과 함께 휴가 중이라 하였습니다. 당연히 벗님도 동행 했겠지요. 아버지는 그날 밤 위독하였고 응급실 의사가 남편 분에게 긴급히 상황 보고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로 인해 벗님 역시 휴가는커녕 잠을 제대로 못 잣을 것으로 생각 했지요. 다음 날 아침, 중환자실 담당의사는 임종을 최대한 배려하라는 남편 분의 지시를 받았다면서 갖가지 성의를 베풀어 주었었습니다. 당시 코로나로 인한 엄중한 상황임을 감안하면 파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간호사까지도 벗님 남편인 A교수님과 우리가 도대체 어떤 관계냐고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나는 머뭇머뭇 답을 못한 채, 혹 남편분이 나랑 벗님 간에 우정을 쌓았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임종의 순간, 병원 측이 간호사를 전담 배정해 아버지를 돌보아줄뿐더러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 나는 아버지께 예수님을 믿으라고 그래서 영생을 얻으시라고 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말을 받아들인 아버지는 예수님 은혜 안에서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나의 큰누나 기억하는지요? 벗님이 첼로니 피아노니 연주자들을 보내주어 결혼식을 치룬 그 누나 말입니다. 누나는 일의 시말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신앙이 한층 성숙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남편 분이 배려해 준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환청과 환각에 시달린다며 병원을 옮기고 싶어 했을 뿐더러 나 또한 그대로 있다가는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그러나 중환자실에서 다른 병원의 중환자실로 옮기는 게 그리도 어려운지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도중에 사고가 나면 책임 문제가 발생하기에 양측이 다 동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인맥을 통해 시도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아버지는 암 투병 10년, 90세, 회복 가능성이 없기에 그랬고, 더욱이 남편분의 대학병원은 코로나 전담 병원이라 폐렴 증상을 보이는 아버지 인수를 꺼려하였습니다. 그렇게 좌절하는 중 벗님을 꿈에서 만났습니다. 참 이상도 하지요. 40년 만에 벗님의 꿈을 꾸다니요. 처음 만났던 해 여름 방학, 내 고향 양촌의 냇가로 함께 놀러간 일 기억하는지요? 이번에도 벗님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냇가로 놀러가는 꿈이었습니다. 풍경은 고향의 냇가였지만 물만은 수정처럼 맑아서 세상의 물 같지 않고 신비한 세계로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물론 벗님도 얼마나 웃고 기뻐했는지 꿈이 깨고 나서도 그 여운이 한참이나 지속되었습니다. 아버지 병세가 날로 나빠지던 슬픔의 때였던 만큼 그 기쁨은 특별했습니다. 문득 벗님의 남편이 그 병원의 유명한 의사로서 영향력이 크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에 그꿈을 벗님의 남편과 접촉하라는 뜻으로 해몽했습니다. 즉시 남편 분에게 줄을 댈 수 있는 의사 동창 친구를 수소문하여 사정을 말하고 부탁했습니다. 꿈이 좋아서일까요, 가운데 들어선 친구의 노력 덕분일까요, 두 번의 코로나 검사를 조건으로 남편 분으로부터 승낙을 받았습니다. 구급차를 타기 직전, 중환자실에 자리가 없다고 하여 내가 직접 남편 분에게 ‘비록 일면식도 없지만 동창이란 인연으로 체면 불구하고 부탁합니다.’는 문자를 보내 우여곡절 끝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정오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장례식 하관 예배 시에 찬송 마지막 구절이 ‘나 길이 살겠네,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길이 살겠네.’로 끝났습니다. 꿈에서 본 시냇가를 또 다시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남편 분에게 시내 식당에서 식사 대접으로 고마움 전하고 싶다고 문자를 보내자 코로나 상황이라며 정중히 사양하였습니다. 다시 1년을 기다려 봄을 맞이한 오늘 이번에는 실내가 아닌 내 농장에서 대접하고 싶다는 문자를 보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내 농장은 벗님과 냇가에 놀러간 김에 외가에 들렸을 때, 같이 거닐었던 계곡을 따라 산언덕에 있습니다. 갓 난 조카애를 번갈아 안으며 그 오솔길을 걸었는데 그 애의 나이가 40을 넘겼으니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모래가 쌓인 도랑가에 앉아 손으로 뭔가를 쓰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자리는 국방대에 수용되어 지금은 자취를 찾기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가 한여름의 낮을 보냈던 냇가, 둑, 그리고 저수지만은 지금도 농장 언덕에서 아스라이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벗님의 남편은 사람들이 말하길 고등학교 때는 오직 교회만 다닌 고지식한 예수쟁이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트여 리더쉽도 있다고 하더군요. 한때 해당 전문분야 전국의사협회장을 맡은 것을 말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또 어느 친구로부터는 지역 잡지에 기고도 하는 등단한 시인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나에게 보여준 배려를 고려하면 벗님이 참 결혼을 잘 했구나, 생각도 들지만 벗님을 잘 아는 나로서 벗님 남편의 안목을 더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벗님은 음악선생님이 베토벤의 Ich liebe dich를 불러 주는 남자와 결혼하라고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남편 분이 그 노래를 불러주나요? 벗님은 사람 목소리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는 없다고 했었습니다. 마태수난곡을 좋아하는 합창단원으로서 당연한 말이었습니다. 여름날, 대학생 전국 합창 경연대회가 열렸을 때 행사장인 서울 이화여고 유관순 기념관 계단에 검은 스커트에 순백의 상의를 입고 앉아 나를 기다리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얼마 전, 시민대학 합창단에 등록하려다가 인원이 100여명이 훨씬 넘는다고 하여 그만 포기하였습니다. 벗님이 합창을 좋아했기에 혹 만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수줍음은 40년이 지나도 여전한 듯합니다.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 한번 놀러 오라는 벗님의 말이 기억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B읍 벗님 집에 전화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반가이 응대하면서 지금 벗님이 어린이 여름성경학교 찬양 프로그램을 진행하니 30분 후에 다시 걸라고 했었지만 까닭 없는 두려움에 그냥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전화를 기다릴 벗님을 생각하면서도 끝내 걸지 못했습니다. 벗님의 자취집을 지날 때 피아노 소리가 나면 플라타너스 가로수에 기대어 듣다가 반주가 끝나면 서둘러 자리를 피하곤 했습니다. 혹 창문을 열고 내다보거나 대문을 열고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보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나를 벗님은 최외각전자라고 부르곤 했지요.
지금도 시민대학에 갈 때마다 시간이 남으면 가로공원을 걸어 벗님의 옛 자취집 자리를 둘러보곤 합니다. 4남매가 살던 방 두 칸의 허름한 기와집은 부르메(Blume)라는 아담한 찻집으로 바뀌었더군요. 초가을 포도밭에 갔다 오던 저녁, 벗님의 집 대문 앞에서 들고 온 포도 상자를 건네자 벗님은 굳이 나누자고 강권하여 집안으로 들어갔지요. 그때 나를 응대하는 한편, 방안에 펼쳐진 너절한 동생들의 옷들을 ‘애들도 ...’하며 내가 볼세라 슬쩍 슬쩍 치우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벗님은 마루에 걸터앉아 부모님에게 주라며 성한 포도송이를 일일이 고르고 다듬던, 백열전구에 빛나던 하얀 손을 기억합니다. 시골 외갓집에 들렸을 때 외할머니는 귀한 손님이 왔다고 송편을 빚던 일 생각나나요? 할머니는 벗님이 송편을 예쁘게 빚을뿐더러 손등이 아담하고 도톰해서 시집가면 잘 살 것이라고 살짝 건넨 귓속말이 생각나 무심히 볼 수 없었습니다. 요즘 찻집 부르메에 들리면 커피 마시는 테이블 자리는 피아노가 있던 윗방이고, 카운터 자리는 옷장이 있던 아랫방이었던 기억을 더듬어 이 방 저 방 마음껏 드나들고 있습니다.
벗님의 아버지, 어머니는 주안에서 평안하신지요? 벗님은 도서관에서 내가 온줄도 모른 채 편지를 읽다가 아버지의 편지라며 보여준 적이 있지요. 내가 여러 번 반복하여 읽자 갖고 싶냐고 묻고는 아예 건네주었지요. 벗님의 시력이 나날이 나뻐져서 걱정이라며 멀리 밤하늘 별을 바라보는 습관을 가지라는 충고의 말, 그리고 새벽기도에는 딸 벗님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는 구절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벗님의 해맑은 웃음이 아버지 기도와 사랑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미국 유학 시에 불교와 염세 철학을 버리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데에는 기독교인 특유의, 만날 때마다 보여준 벗님의 그 웃음에 기인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남편 분을 초청한 4월 말은 내 농장의 모란이 무더기로 피는 즈음입니다. 옛날, 벗님을 만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가곡 ‘또 한 송이 나의 모란’을 새로 구입한 인켈 전축으로 듣곤 했었습니다. 추억은 아름답다는, 밉도록 아름답다는 구절이 절절했으니 그때 이미 헤어지는 아픔을 먼훗날 추억으로 완결할 것을 각오했었나 봅니다. 벗님은 졸업반, 나는 3학년에 군대문제, 직장문제 등 미래는 막연했고 무엇보다도 염세 철학에 절어 있어 혼자 몸도 헤쳐 나가기 벅차다고 느꼈으니까요. 벗님이 앞으로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내가 뒤로 물러서야겠다는, 그것이 내 딴엔 사랑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두려움도 사랑의 다른 모양이라고 하면 억지일까요? 벗님께 연락하고 싶을 때마다 모질어야한다고 마음을 여러 번 다지기도 했지요. 늦가을 밤에 유성의 신신농장을 나와 길을 걸으면서 택시 값이 있는지 확인 차 벗님의 손이 내 바바리코트 호주머니로 들어왔을 때 잡아주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고, 줄곧 후회했다고 ‘가슴앓이’라는 수필에서 쓴 바 있어 이를 읽은 선배로부터 대충은 들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회가 닿으면 농장에 조그만 음악 감상실을 꾸미고 싶습니다. 그때를 위하여 벗님이 명반이라며 선물로 준, 태평양을 건넜다는 LP판, 카라얀 지휘, 베토벤의 Triple Concerto를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냇가와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2악장 Largo를 들을 것입니다. 물결치듯 떨며 흐르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선율에 내 마음은 냇가로 걸어 내려갈 것이고 뒤이어 피아노, 바이올린이 서로 엉키면 마침내 눈을 감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수십 년 젊어져 대학시절의 여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1년 전 남편 분에게, “도와 준 덕분에 아버지를 영생의 시냇물인 예수님으로 인도할 수 있었고, 그로써 주님의 오묘한 뜻을 알게 되었다.”고 메일로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 ‘오묘한 뜻’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합니다. 지금도 확신컨대 만일 병원을 옮기지 않았다면, 벗님의 남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결코 아름다운 임종의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벗님도 함께 초대하여 모란꽃 밭에 함께 서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귀부인으로 변모한 벗님을 감내할 자신이 없습니다. 얼마 전 꿈에서 본 벗님은 40년 전의 젊은 모습이었듯이 옛 기억 속 그대로 남겨 두고 싶습니다.
편지를 맺으면서 가장 아름답다는 청춘의 시기에 밉도록 아름다운 추억을 갖게 됨으로써 내 생은 의미를 지니었다는 고백을 벗님께 전합니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딸기밭에서 지체하는 바람에 축제의 장에 도착했을 때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었지요. 5월의 밤하늘에 불꽃이 펑펑 터질 때마다 이어지던 탄성도 마침내 잠잠해지고 하늘을 올려보던 사람들은 고개를 내리고 뿔뿔히 흩어져 돌아가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무수한 별들의 빛은 비록 불꽃만큼 화려하지 않지만 먼 발치에서 우리들을 변함없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그런 영원한 별빛을 선물로 안겨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니체, 니체 하던 내가 많이도 변했다고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까르르 웃을 벗님이 눈에 보일 듯, 귀에 들릴 듯합니다.
주님이 마련한 영생의 세계에서, 생명의 시냇가에서 만나 뵐 수 있기를 고대한다는 말로 다시 한번 그리움을 전합니다.
주안에서 벗님과 벗님 가족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2022년 3월 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