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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폭정과 죽음, 과부 청, 음탕한 어머니 조태후와 정부 노애 이야기
‘어메이징스토리’ 144회에서는 중국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에 관한 알려지지 않았던 숨겨진 이야기가 공개되어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중국의 전국시대를 청산하고 중국땅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제는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군주로 존경받는 군주인데, 그는 만리장성, 아방궁등 초호화시설을 만들었으며,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을 호위할 6천여점의 병마용들을 만들어 배치하는 등 놀랍고도 엽기적인 토목사업을 벌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기원전 3세기경 전국시대에 조나라, 한나라, 위나라, 초나라, 제나라, 연나라등 주변의 강력한 나라들과 전쟁을 벌여서 모두 함락시키고는, 중국 최초의 하나의 중국을 만들었던 위대한 황제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 바로 진시황제이다.
중국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중국전역의 미인들을 모집해서 화려한 아방궁을 만들고 그곳에서 미인들과의 향락생활을 즐겼는데, 어느날 진시황제는 서서히 노화되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한탄하고는, 불로장생을 할 수 있는 불로초를 구해올 수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기에 이른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갖고있는 최고의 권력, 부귀영화와 최고의 미인들과의 향략을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불로장생을 갈망하게 되었는데, 이를 잘 알고 있던 서복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전설속의 봉래산을 찾아가서, 불로초를 반드시 구해오겠다는 말로 진시황제를 미혹했다고 한다.
이에 크게 고무된 진시황제는 서복의 거짓말에 속아서 그에게 수많은 금은보화를 내리고, 어린시녀 3,000명까지 하사해서, 그로 하여금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조치했는데, 서복은 금은보화와 미녀들만 챙겨서 아주 먼 지역으로 달아나 버렸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서복이 진시황제의 하사품 금은보화를 받고 도주했던 지역이 제주도 서귀포시라는 소문이 있다. 서귀포가 서복이라는 말의 음가가 변해서 된 말이라고 한다.
아방궁 상상도
즉, 교활하기 짝이 없는 서복은 허황된 탐욕에 빠진 진시황제에게 적당히 사기를 쳐서 엄청난 보물을 손에 넣고는, 바다를 건너 제주도땅으로 건너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감히 평민인 주제에 진시황제에게 사기를 쳐서 엄청난 재물을 취득하다니, 서복이라는 사람은 정말 간땡이가 부어도 엄청나게 부은 사람 같다. 그만큼 진시황제가 불로장생의 욕망에 눈이 멀어서, 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후에도 진시황제의 불로장생의 탐욕에 편승해서, 또다른 사람들이 진시황제를 찾아와서, 불로초를 구해오겠다고 약속하면서 진시황제로부터 엄청난 재물을 뜯어가는 일들이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이에 크게 분노한 진시황은 선불제에서 후불제로 바꾸고, 효험을 보지못한 약재를 구해온 사람들을 가차없이 목을 베어버렸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군주로서 추앙을 받기도 하지만,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거나 의심스러운 수많은 유학자들과 대신들을 학살했고,
만리장성과 운하건설 등 대규모 토목사업을 많이 벌여서 많은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시켰고, 만리장성 등의 축조과정에서 수십만명의 백성들이 과로와 사고로 목숨을 잃게 만든 장본인이다.
정치적 숙청작업, 초대형 토목사업 등으로 인해서, 수많은 백성들과 대신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진시황제는 폭군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진시황은 학자들이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의심하며, 460명의 학자들을 잡아들였고, 갱도를 파서 그안에 학자들을 모두 생매장시켜서 죽인 분서갱유가 유명한데, 진시황제의 포악한 면이 잘 나타나있는 부분이다.
당시 조정안에 수상한 학자가 있다는 투고 한 장 때문에, 무고한 그들을 모두 잡아들였고, 460명이나 되는 학자들을 전부 갱도에 빠뜨려서 생매장했던 사건으로 진시황제에 대해 폭군이라는 닉네임을 붙게 만들었던 사건이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진시황제에게도 한가지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진시황의 친어머니 조태후가 음탕한 생활을 즐겼기 때문인데. 그로인해 진시황제에게도 한번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진시황의 아버지는 진나라의 30대왕인 광양왕이었고, 어머니는 조희라는 기생출신으로, 원래 조희는 승상 여불위의 첩실이었으며 춤추는 무희였다고 한다.
여불위가 천하의 미색인 자신의 첩실 조희를 광양왕에게 헌납했다고 하는데, 조희가 광양왕의 비가 된 후에 진시황이 태어났지만, 진시황의 진짜아버지는 광양왕이 아니라 여불위라고 한다.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임신하고 있었던 조희(조태후)가 다시 진시황의 아버지 광양왕에게 시집을 갔던 것이다. 그리고 진시황이 태어났던 것인데, 진시황제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콤플렉스를 갖고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광양왕이 재위 3년 만에 돌연 사망하고 난 후에, 독수공방해오던 어머니 조태후는 자신의 뜨거운 욕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가짜 환관인 노애를 자신의 정부로 삼아서, 뜨거운 정사를 벌였다고 한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기록에도 ‘시황제가 장성한 후에도 어머니 조태후는 음탕함을 그치지 않았으며, 몰래 음경이 큰 노애를 자신의 정부로 삼아서 상간을 일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시황은 어머니 조태후와 노애의 내연관계를 알고서도 처음에는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불거지게 되는데, 어머니 조태후와 노애가 궁궐밖에 사가를 짖고 그곳에서 노골적으로 정분관계를 계속 이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 새로운 아들 두명이 태어나게 되었고, 권력의 맛을 크게 맛보았던 조태후는 환관 노애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황제로 등극시키기 위해서,
진시황을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친어머니가 또다른 어린 아들을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서 자신의 황제아들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하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조태후는 후대의 측전무후, 서태후등와 잔인함에 있어서 거의 동급이라고 보여진다.
이같은 어머니 조태후와 노애의 음모가 발각이 나게 되었고, 진시황은 배다른 두동생은 자루에 넣어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고, 노애는 사지를 절단해서 처형했을 뿐만아니라 그의 삼족을 멸했으며, 자신을 제거하려했던 어머니 조태후는 태후자리에서 페위해서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포악하기 그지없는 진시황제라고 하더라도, 신하들의 간곡한 간언도 있었고, 친어머니와의 천륜을 저버릴 순 없었던 진시황제는 다시 어머니 조씨를 태후에 복귀시켜 주었다고 한다.
아뭏튼 진시황제는 간음을 일삼았던 어머니애 대한 심한 콤플렉스를 갖게되었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콤플렉스가 너무 심한 나머지, 진시황은 황후를 두지않았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황후를 평생 두지 않았으며, 대신 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의 후궁을 두어서 아방궁에서 자유로운 향략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진시황제는 아방궁에서 1만명이나 되는 미녀들을 두고 쾌락생활을 즐겼는데, 간혹 비어진 황후자리를 차지하려고 시도하는 후궁들은 가차없이 처단해버렸다고 한다.
진시황은 아무리 예쁜 미녀라고 하더라도 결코 황후에 앉히지 않았으며, 황후자리를 욕심내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그 후궁은 내치거나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황후자리를 영원히 결석으로 나눴던 이유는, 바로 음탕했던 어머니 조태후에 대한 콤플랙스가 워낙 심했기 때문이다.
1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의 미녀들과 아방궁에서 호사스러운 방탕생활을 즐겼던 진시황이 이치럼 어머니컴플렉스에 상처를 받아서 황후를 두지않았다고 하니, 정말 별일이라고 느껴진다.
음탕한 어머니의 행실을 보고 자라났던 진시황제는 황후라는 말을 들으면 치를 떨었다고 하며, 그래서 평생 황후를 두지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포악했던 진시황제를 순정남으로 변하게 했던 여인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이다. 폭군인 진시황제마저도 극진히 대접해주면서 존중해주었던 여인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 여인은 과부 청씨라고 한다.
과부 청씨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자식들을 낳고 살다가 젊은나이에 남편이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과부가 된 청씨는 죽은 남편의 어머니와 시가의 가족들을 극진히 섬겼으며, 남겨진 자식들도 훌륭하게 교육시키는 등 자신의 가문을 소중히 가꾸었고 평생 절개를 지켜왔던 효부로 소문난 여인이라고 한다.
과부 청씨에 대한 소문을 듣은 진시황제는 그녀를 친히 궁궐로 불러들여, 궁궐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차를 끓여 손수 건넸다고 하며, 그녀를 극진히 대우해주었다고 한다.
진시황제는 크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마음이 우울해지면 종종 과부 청씨를 궁궐로 불러들여서, 그녀와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켰다고 한다.
자신은 방탕한 생활을 즐겨왔던 진시황제가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수절하면서 절개를 지켜왔던 과부 청씨만큼은 크게 존중해주었다고 하며, 그녀를 매우 부드럽고 순종적인 마음으로 대해주었다고 한다.
과부 청씨의 굳은 절개와 지조의 행실이 흉포하기 그지없었던 진시황제의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었던 것이다.
진시황제는 자신의 어머니의 방탕한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터라, 어머니와 전혀 상반된 성품과 곧은 행실을 보여준 과부 청씨에게서 아마도 마음의 큰 위안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진시황제를 감동시켰던 과부 청씨는 전혀 미인이 아니고 못생긴 외모를 갖고있었다고 하는데, 호색한이었던 진시황제가 정말로 그녀를 존경했었던가 보다.
‘진시황본기’에도 청은 과부의 몸으로 가업을 잘 지키고, 타인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았다고 진시황이 칭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포악하고 음탕한 생활을 즐겼다는 폭군 진시황제도 이렇게 순정적인 마음을 갖고있었다고 하니,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가 없다.
거대한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천하를 호령했던 진시황제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심한 콤플렉스 때문에, 황후를 두지 않았으며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받았다고 한다.
천하를 다 손아귀에 넣었던 진시황제였지만, 자신의 진정한 배우자를 곁에 두지못했던 진시황제는 아마도 중국에서 가장 외로운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진시황제는 황하강에서 남쪽 양자강을 이어주는 대운하를 건설하는 공사를 벌였으며, 북방의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등 나름대로 큰업적을 세웠던 군주였다.
그렇지만 의심이 매우 심해서 죄없는 학자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대규모 토목사업에 동원되었던 수많은 백성들이 열악한 공사과정에서 사망함으로써, 그의 위대한 업적들이 희석되고 저평가되기도 했다.
거대한 병마용갱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속에 6천명이나 되는 병마용을 세워서 자신의 유골과 보물을 지키도록 했던 것도, 그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사후에도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정적들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시황의 말로는 매우 비참했다고 전해진다. 진시황제는 자신이 통일한 중국천하를 5번에 걸쳐서 순행했다고 한다. 진시황제가 비록 군사적으로 중국을 통일했다고 하지만, 당시 중국대륙은 진시황제의 식민통치에 반발하던 지방호족세력들이 꽤 많이 있었던 상황으로, 진시황제가 천하를 순행할 때마다 수많은 암살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대륙 곳곳에서 암살자객들이 많이 출몰했기 때문에, 진시황제는 순행을 할 때에는 다섯 개의 수레를 만들어서 군사들이 호위하도록 했다고 한다. 자신이 탄 수레가 어느 것인지 위장하기 위해서, 다섯 개의 수래행렬을 거느리고 순행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진시황제는 중국 남쪽 지방 순행과정에서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병석에 눕게되었고, 마차안에서 50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평생 불로장생을 그토록 원했던 진시황제는 천하를 다 자기손아귀에 넣고 자기뜻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지만, 불로장생하겠다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차가운 순행길에서 외롭게 병사하고 만 것이다.
진시황제 사후에 간신배들의 음모로 원래의 황태자 부소는 황위를 빼앗겨버리고, 진시황제의 26번째 왕자 호해가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앉게된다.
진시황제의 신하들은 음모를 꾸며서, 진시황제의 유언을 가짜로 만들어서, 황태자인 부소를 제거해버리고, 대신 나이 어리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26번째 왕자 호해를 황위에 앉혀서 자신들이 권력유지를 추구하는데, 어리석은 이세황제의 무능한 정치 때문에 국정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전국도처에서 민란이 발생하게 된다.
환관 초고의 유언장 바뀌치기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어리석은 이세황제는 음탕한 향락생활에 빠져서 국고를 탕진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자,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황제에 오른지 3년만인 기원전 207년도에 진나라는 멸망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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