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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母音)
아르튀르 랭보
검은 A 흰 E 붉은 초록의 U 청색의 O, 모음들이
여
나는 언젠가 너희들의 내밀한 탄생을 말하리라
A, 잔인한 악취 주위를 윙윙거리는
화려한 파리떼들의 털투성이의 검은 코르셋,
어둠의 물굽이, E, 물거품과 천막의 순진함,
자랑스러운 빙하의 창, 흰 왕, 산형화의 흔들거림,
I, 적색, 내뿜는 피, 화났을 때나
도취하여 회개할 때의 아름다운 입술의 웃음
U, 원형, 녹색 바다의 신선한 전율,
동물들로 씨 뿌려진 방목장의 평화, 연금술이
집념 강한 커다란 이마에 찍어놓은 주름살의 평화
O, 이상한 날카로운 소리로 가득찬 지고의 나팔,
세계와 천사가 가로지르고 있는 고요함,
ㅡ0, 오메가, 신의 눈의 보랏빛 광선.
ㆍ키보드의 ㄹ 옆에는 ㅎ이 있다. 나는 자꾸만 ‘랭
보’를 ‘행보’라 오타하곤 한다. 보들레르가 '파리의
산책자'라면 랭보는 유럽의 보행자다. 1870년 8
월 성적우수상으로 받은 책들을 팔아 전란에 휩싸
였던 파리를 향했던 열여섯 살의 첫 가출에서부터
1891년 사망하기까지 랭보는 '걷는 자’였다. 실제
로 차비가 없어서 걸어야 할 때도 많았지만 그는
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걸었다. 1871년 9월 시
인 폴 베를렌과의 첫 만남 이후 2년 동안 프랑스,
런던, 벨기에 등지를 오갔던, 시 쓰기와 사랑의 도
피로서 여행 중에도 그들은 걷고 걸었다. 그리고
1873년 10월 베를렌이 쏜 총에 왼쪽 손바닥을 맞
고 그와 결별한 이후부터 오른쪽 다리를 절단할 때
까지 여행가, 탐험가, 무역중개인으로 유럽 각국
과 아시아, 지중해, 아프리카를 떠돌며 방랑의 삶
을 살 때도 그는 걸었다.
찢어진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은 채 “나의 여
관은 북두칠성좌”라며 별을 보며 노숙하고, 아침
이면 다시 “터진 구두끈을 리라 타듯 잡아당기
며”(‘나의 방랑’) 바람을 따라 걸었던 랭보. 그런 그
를, 시와 사랑의 동반자였던 베를렌은 '미지와 영
원을 만끽한 시인’,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라 불
렀다.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
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감
각’)라 노래했던 그는 잠꼬대조차도 "allons (가
자), allons, allons…………”이라고 했다 한다. 그에
게 ‘걷는다’는 것은 감각한다는 것이었고, 그 감각
은 미지(未知)의 찬란한 착란을 향한 걸음걸음이
었다. 그 끝은 바다 건너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 그
리고 그곳에 충만한 자유와 사랑이었다. 자신의
시와 삶을 지탱하는 삼위일체이기도 했던 이 ‘태
양’과 ‘자유’와 ‘사랑'을 향해 랭보는 후퇴하는 법 없
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랭보의 행보는
태양 가까이까지 날아갔던 탓에 녹아 버렸던 이카
로스의 밀랍으로 된 날개를 생각나게 한다.
‘모음’은 1871년 8월쯤 랭보가, 열 살 위였던 신혼의 베를렌에게 편지와 함께 보냈던 8편의 시들
중 하나다. 그러니까 같은 해 5월에 스승 폴 드므
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력했던 ‘견자(voyant)의
시학’이 확립되던 즈음에 쓰였다.
<견자시론>
시란 “하나의 언어를 찾기” 위한 실험이자 연구인바 “이 언어는 색깔, 소리, 향기 등 모든 것을 개괄하면서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달되며, 사고가 사고를 잡아끌어 붙잡게 된다.”라는 랭보의 시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결과적으로 이 시는 랭보의 시학적 실험을 넘어서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보들레르에
서 말라르메, 베를렌, 랭보로 이어지는 프랑스 상징주의를 상징하는 시가 되었다.
A, E, I, O, U! 이 다섯 개의 모음은 언어의 기둥이
자 세상 모든 말씀들의 기둥이다. 랭보는 이 모음
들의 '은밀한 탄생'을 말하고 있다. 마치 태초의 말
씀처럼! 다른 시에서도 “나는 모음들의 색깔을 발
명했다! A는 검고, E는 하얗고, I는 붉고, O는 푸
르고, U는 초록이다. 나는 각 자음의 형태와 운동
을 조절했고, 본능적인 리듬으로, 언젠가는 온갖
감각에 다 다다를 수 있는 시 언어를 창조하리라
자부했다”(‘착란(Délires)2-언어의 연금술)라고
노래했다. 그는 이 다섯 개의 모음에 감각과 영혼
과 정신은 물론 시공간을 지닌 세계의 의미까지를
부여해 감각의 착란, 의미의 마술, 언어의 연금술
을 꾀하였다. 즉 모음 하나하나에 풍부한 상징성
을 부여함으로써 시 감상과 해석의 열쇠를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두고 있다.
‘O’와 ‘U’의 순서를 바꾼 것은 ‘A’와 ‘O’를 각각 시
작과 끝, 그러니까 알파(A, a)와 오메가(요, w)로
맞추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굳이 “나는 알파와 오
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요한계
시록’ 22장)라는 그리스도의 말을 환기하지 않더
라도, ‘A’의 검은 어둠과 'O'의 푸르스름한 보랏빛
은 영성과 영감으로 가득하다. A, E, I, U, O를 표
현한 시의 구절들을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각각 죽
음과 탄생, 정화와 순결, 사랑과 정열, 자연과 평
화, 재생과 부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우주의
원리를 음양오행설로 풀어낸 검정(黑/北/冬), 하
양(白/西/秋), 빨강(赤/南/夏), 노랑(黃/中心), 파
랑(靑/東/春)의 우리 오방색을 떠올리게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A를 머리(카락), E를 허리, I를
혀, U를 가슴, O를 성기로 읽는다면 이 시 전체는
여성적 관능성이 출렁이는 에로틱한 상징시로도
읽힌다.
‘바람의 구두를 싣고' 걷고 걸었던 일생의 행보로
얻은 병 때문에 랭보는 오른쪽 다리를 잘라 냈다.
딱 4년 동안 시를 쓰고 절필했던 열아홉 살에 그
는 이미 스스로의 삶과 시를 이렇게 일갈했었다.
“나는 모든 축제를, 모든 승리를, 모든 드라마를 만
들어 냈다. 새로운 꽃을, 새로운 별을, 새로운 육체
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데 공을 들였다”(‘안녕
(Adieu))라고. 미지와 무한과 심연을 보기 위해
온몸을 던진, 자신에게조차도 늘 타자이고자 했
던 미지의 시인이자 견자의 시인이 바로 아르튀르
랭보였다. 사망하기 한 달 전쯤인 1891년 10월 4
일 일요일, 그를 돌봤던 누이동생의 일기는 이랬
다. “잠에서 깨어나면, 그는 창문을 통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여전히 빛나는 태양을 바라본
다. 그리고 다시는 바깥에 나가 해를 보지 못할 것
이라고 울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적의와 갑갑
함으로 나른한 이 봄 한가운데서 랭보의 시를 덮으
며 나는 이렇게 되읊어 본다. “오 계절이여, 오 성
(城)이여!/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착란
2 -굶주림’). “모든 감각의 오랜 착란”이여, “나는
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