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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金山)
경렴서원(景濂書院) 무자년에 세웠다. : 김종직(金宗直)ㆍ최선문(崔善門) 공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문혜공(文惠公), 청백리(淸白吏)이다. ㆍ이약동(李約東)ㆍ조위(曺偉)ㆍ김시창(金始昌) 앞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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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黃澗)
모현서원(慕賢書院) 임오년에 세웠다. : 조위(曺偉) 무오당적조에 들었다. ㆍ박영(朴英) 중종조의 명신 ㆍ김시창(金始昌) 호는 남정(嵐亭)이며, 효절(孝節)로써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 ㆍ박응훈(朴應勳) 호는 오촌(梧村)이다. ㆍ송시열(宋時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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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렴서원(景濂書院) (1648)
조선 인조(仁祖) 때 경상도 금산(金山)의 감천면(甘川面)에 건립된 서원. 김종직(金宗直)․최선문(崔善門)․이약동(李約東)․조위(曺偉)․김시창(金始昌) 등을 배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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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 慶尙道 / 金山郡
學校
鄕校。在郡南一里。
景濂書院。在郡南十五里。本朝金宗直嘗居郡池,名其堂曰景濂。後人建書院於此,祠祀宗直,因以景濂名之。又以李約東、曺偉從享。
宮室
客館。
棲霞樓。在客館東。郡守金世鈞建,姜渾名之。
景濂堂。金宗直舊居在郡西百川里。堂前鑿池種蓮,名曰景濂。
鄕射堂。在鳶譁池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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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卷四下 / 慶尙道 / 金山郡
壇廟
社稷壇。 在郡西三里。
文廟。 在鄕校。
城隍祠。 在郡東鎭山。
厲壇。 在郡北五里。
〔新增〕 景濂書院。 在郡南七里, 紫山之陽。 享佔畢齋金宗直、文惠公崔善門、平靖公李約東、文莊公曺偉、孝節金始昌。 未賜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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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실록 > 순조 1년 신유 > 8월 9일 > 최종정보
순조 1년 신유(1801) 8월 9일(계축)
01-08-09[01] 비국에서 호서ㆍ영남에서 보내온 관문에 대해 아뢰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난번 지평 심보영(沈普永)의 상소로 인하여 윤염(尹琰)을 서원(書院)에 멋대로 제향(祭享)한 일이 있는지 없는지를 호서(湖西)ㆍ영남(嶺南) 두 도(道)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문의하였더니, 사보(査報)가 지금 비로소 일제히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호서에는 전 도신(道臣) 이태영(李泰永)이 있을 때에 온양군(溫陽郡)의 금곡 서원(金谷書院) 충효당(忠孝堂)에 멋대로 제향하였고 지금의 도신 윤광안(尹光顔) 때에 석성현(石城縣)의 봉호 서원(蓬湖書院)에 멋대로 제향하였으며,
영남에는 지금의 도신 김이영(金履永) 때에 금산군(金山郡)의 경렴 서원(景濂書院)에 멋대로 제향하였습니다.
대개 이 세 고을 유생(儒生)의 무리들이 권간(權奸)에게 아첨하여 빌붙어서 사사로이 제멋대로 제향하였는데도 처음부터 관유(關由)하지 않았고 영문(營門)에서 비록 알았다 하더라도 이상한 일이 있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이미 자기가 맡은 도내(道內)에 있었다면 살피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우니, 해당 양도(兩道)의 전후 도신을 아울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세 고을의 수창(首倡)한 유생 등은 청컨대 도신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여 엄중하게 감죄(勘罪)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대언(臺言)으로 인하여 그때의 수령(守令)을 잡아다가 감죄하였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강명관 (역)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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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梅山集) 홍직필(洪直弼)생년1776년(영조 52)몰년1852년(철종 3)자백응(伯應)호매산(梅山)본관남양(南陽)초명긍필(兢弼)초자백림(伯臨)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박윤원(朴胤源)의 문인. 오희상(吳熙常), 이봉수(李鳳秀), 임로(任魯) 등과 교유
梅山先生文集卷之三十四 / 碑 / 金山老村李先生遺墟碑
維嶺金山郡南十五里賀老之村。卽老村李先生攸芋之遺墟也。先生生於斯卒於斯。又俎豆於斯。是爲死徙不離鄕之義。而韓文公所云鄕先生歿而祭於社者也。先生諱約東字春甫。正統辛酉進士。景泰辛未擢增廣文科。歷敭淸顯。五宰郡邑。三典營梱。又以千秋使朝天。終以吏曹參判。陞知中樞府事致仕。弘治癸丑六月十三日乘化。享年七十八。先生早悟績學。博通經籍。立朝盡忠讜之言。匡濟之策。自耽羅歸。只持一鞭。旣而曰此亦島物。懸諸官樓。歲久鞭落。邑人畫其跡以寓慕。船行遇颶風幾危。搜幕賓潛賷一甲投海。波定利涉。州人名其所曰投甲淵。立生祠祀之。是盖先生細行。而亦可驗素養也。天資寬厚。而秉執堅確。不治產業。不喜浮華。人不敢雌黃。莅官剛正淸愼。關節不通。引年乞骸。優遊桑梓。以終其出處。故名實純粹。爲幷世羣賢所尊慕而贊述焉。曰玉壺淸冰。曰玉樹淸芬。曰心如水月。節若松筠。佔畢齋金公至許以文武才德。詩禮戎律。而歸廊廟調元之責。則先生之於懿望何如哉。今去先生之日餘三百年。流風遺韻。與世寢邈。誦先生之廉貞則擬諸欝林之載石。稱先生之恬退則譬以鑑湖之抽簪而已。能諦聲名事功。振耀隆洽。蔚然爲國朝藎臣。皆本之學問者尠矣。先生服事金江湖先生。與金佔畢,曺梅溪相契。以道義德業。鑽圃冶遺緖。行治文章。爲儒林領袖。辭受行藏之各適其正者。在先生爲大德中川流也。凡稱人之善。必本其父兄師友。厚之至也。先生之造道成德。卓越乃爾。則淵源所漸。不亦盛哉。先生卒而爲聖主所悼衋。遣官致侑。賜謚平靖。被淸白選。後昆世蒙收錄。且一鄕譽髦。妥靈于
景濂書院。
上下崇報之典。亦備矣。先生內外子孫。蕃衍昌熾。指不勝摟。而名碩輩出。爲左海名閥。天之報施。其在斯歟。古語云逢時積德。身受福慶。又云有德者必享其榮。以及其子孫。信矣哉。公雲仍散居畿嶺。或懼先生舊址。久而迷所。樹碑以表之。尸其事者。明峻琮和也。昔程伯子顔樂亭銘曰。水不忍廢。地不忍荒。嗚呼正學。其何可忘。直弼於先生亦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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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로서원賀老書院
경렴서원(景濂書院)
조선후기 |
1648년(인조 26) |
서원 |
유적 |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830, 경상북도 김천시 하리안길 19-6 (양천동) |
교육/교육 |
요약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에 있는 서원.
목차접기
개설
1648년(인조 26)에 군수 조송년(趙松年)의 주도 하에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최선문(崔善門, ?∼1455), 이약동(李約東, 1416∼1493), 조위(曺偉, 1454∼1503), 김시창(金始昌, 1472∼1558) 등 5현을 제향한 경렴서원(景濂書院)에 기원을 두고 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뒤, 1984년 벽진이씨 문중에서 복원하여 마을 이름을 따서 ‘하로서원(賀老書院)’으로 개칭하였다.
본래 경렴서원을 복원하기 위해 타 문중과 숙의를 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아 벽진이씨가 중심이 되어 복원하고 이약동만 제향하였다. 현재 매년 봄, 가을로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춘향은 음력 3월 상정일(上丁日)에 지내며, 추향은 시제를 대신하여 서원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내용
이약동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이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 1451년(문종 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뒤 제주목사, 경상좌도수군절도사, 경주부윤, 전라도관찰사,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470년(성종 1) 제주목사 재임시에는 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하여 근절시키고 공물의 수량을 감해 백성의 부담을 더는 등 선정을 베풀어 칭송을 받았다. 성종 때 청백리로 뽑히고 기영록(耆英錄)에 올랐다. 저서로 『노촌선생실기(老村先生實紀)』가 있으며,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서원으로 올라가는 양촌동 마을 어귀에는 이약동신도비, 산천단유적비, 벽진이씨서거지허비, 이약동 아버지의 유허비가 서 있다. 서원 경내의 건물로는 외삼문인 영사문(永思門), 사당인 청백사(淸白祠), 제향공간의 외문인 여재문(如在門)과 내문인 숙경문(肅敬門), 강당인 노촌당(老村堂), 동서재에 해당하는 염수당과 필유당, 그 외에 비각 등이 있다. 노촌당은 1977년에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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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전서 제47권 / 부록(附錄) / 문인록(門人錄)
조송년(趙松年)
한양인(漢陽人)으로 정암(靜菴) 선생의 현손이다. 젊어서부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군수(郡守)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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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송년(趙松年) : 1607~1649.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현손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沙溪全書 卷47 門人錄》 1639년(인조17) 회덕 현감에 임명되었다. 《承政院日記 仁祖 17年 4月 4日》
ⓒ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김문갑 이규춘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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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원의 생애와 《동국여지지》의 편찬
고종형인 조송년(趙松年)이 1648년 김산 현감(金山縣監)으로 재직 시 유형원은 그를 찾아가 영남 일대의 산천을 둘러보았으며, 경상도 일대의 읍지를 수집하였는데, 특히 정구(鄭逑)가 편찬한 《함주지(咸州志)》, 《복주지(福州志)》, 《창산지(昌山志)》, 《임영지(臨瀛志)》, 《통천지(通川志)》 등을 참고하였다. 또 허목(許穆)과는 그의 《척주지(陟州志)》와 《함안지제요(咸安志提要)》 등을 참고하고 노년까지 교유를 이어 왔으며, 박자진과는 앞서 편지에 기자, 고구려, 남원, 삼한 등의 지리 연혁에 대해 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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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29권 하편 / 서화(書畫) / 조 문정공(趙文正公)의 난죽시화첩(蘭竹詩畫帖) 발문
병술년(1646, 인조24) 겨울, 나는 영남(嶺南)에 갔다가 삼년성(三年城) 아래에 사는 조군(趙君)을 방문하였다. 조군이 묵화(墨畫)로 된 난(蘭)과 죽(竹) 그림 7첩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윗부분에 모두 5언시가 있었다.
지난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 연호) 연간에 규정(葵亭) 내한(內翰) 강은(姜㶏)이 윤언직(尹彦直)에게서 난과 죽 그림 8첩을 얻고, 조 문정공(趙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이 첩마다 그 위에 시를 썼다. 얼마 안 되어 사화(士禍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지금까지도 유림(儒林)들이 애통해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아, 세상이 변하고 인사가 바뀌어도 묵적(墨跡)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강직한 말씀과 고결한 기개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탄에 잠겨 목이 메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강씨(姜氏)가 이것을 대대로 전하여 귀중하게 보관해 오고 있었는데, 만력(萬曆) 연간의 병란(兵亂 임진왜란)에 그만 잃어버렸다. 마침 평택 군수(平澤郡守) 조수륜(趙守倫)이 젊었을 때에 한 번 읽고 그 시구를 음미하며 좋아하였는데 늙어서도 여전히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한 첩을 잊어버린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문정공의 증손부(曾孫婦) 유씨(柳氏)가 이 사실을 듣고 흰 비단을 손수 짜서 당대의 명장(名匠)이라 할 수 있는 이징(李澂)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하고, 또 첩마다 그 위에 시를 써서 한결같이 옛날의 그림처럼 만들었으니,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현인의 후손 중에 참으로 현부인이 있어 고사를 이처럼 사라지지 않도록 하였다.
조군은 문정공의 현손(玄孫)이며 유 부인(柳夫人)의 아들로, 지금 종묘서 영(宗廟署令)으로 있는 조송년(趙松年)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내일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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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29권 원집 하편 / 서화(書畫) / 조 문정공(趙文正公)의 난죽시화첩(蘭竹詩畫帖) 발(跋)
병술년(1646, 인조24) 겨울, 나는 영남(嶺南)에 갔다가 삼년성(三年城) 아래에 사는 조군(趙君)을 방문하였다. 조군이 묵화(墨畫)로 된 난(蘭)과 대[竹] 그림 7첩을 보여 주는데, 그 윗부분에 모두 오언(五言) 시가 쓰여 있었다.
지난 정덕(正德) 당시에 규정(葵亭) 강 내한 은(姜內翰㶏)이 윤언직(尹彥直)의 난초와 대 그림 8첩을 얻었다. 조 문정공이 첩마다 그 윗부분에 시를 썼는데, 얼마 안 되어 사화(士禍)가 일어나 지금까지 유림(儒林)의 슬픔이 되었으니 그 애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간 세월은 흘러가고 사물은 바뀌었어도 필적만은 남아 있으니, 내용이 간절하고 의미가 고결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달픈 감회를 자아내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게 한다. 이를 강씨 집안에서 여러 대 동안 가보로 전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
마침 평택 군수(平澤郡守)로 있던 조수륜(趙守倫)이 젊었을 때, 그것을 한 번 읽고서 늘 음미하여 늘그막까지도 암송하여 왔는데, 그중에서 한 첩(帖)을 잊었으니, 매우 한스럽다.
문정공의 증손부(曾孫婦)인 유씨(柳氏)가 그 사실을 듣고 손수 비단을 짜 가지고, 당대에 화가로 이름난 이징(李澂)을 초빙하여 전과 같은 그림을 그리게 하고, 또 첩마다 그 윗부분에 시를 써서 하나같이 옛것과 다름이 없게 하였으니, 참으로 장한 일이다. 훌륭한 이의 후대에 과연 훌륭한 아낙이 있어 옛일을 이렇게 없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조군은 문정공의 현손(玄孫)이며 유 부인(柳夫人)의 아들인데, 지금 종묘령(宗廟令)으로 있는 조송년(趙松年)이다.
[주-D001] 조 문정공(趙文正公) : 조광조(趙光祖)를 말한다. 중종(中宗) 때 사람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정암(靜庵)인데, 성리학자(性理學者)로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靜庵集 行狀》[주-D002] 사화(士禍) :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기묘사화를 말한다. 이때 도덕을 바탕으로 한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제창하던 조광조ㆍ김식(金湜) 등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훈구파인 남곤(南袞)ㆍ심정(沈貞) 등의 무고를 당하여 사사(賜死)되었다. 《靜庵集 年譜》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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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창(金始昌) (1472~1558)
조선 중종(中宗)~명종(明宗) 때 유학ㆍ효자(孝子). 본관은 금산(金山).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현량과(賢良科)에 피천(被薦)되었으나 나가지 않음.
남지언(南知言) (1507~?)
조선 명종(明宗) 때의 문신ㆍ효자. 본관은 고성(固城). 남인(南寅)의 아들이며, 남정(嵐亭) 김시창(金始昌)의 사위이자 문인. 김천도 찰방(金泉道察訪)을 지냈으며, 말년에 황간(黃澗)에 삼괴당(三槐堂)을 짓고 후학 교육에 전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