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ᄉᆡᄫᆞᆯ
<ᄉᆡᄫᆞᆯ ᄇᆞᆯ긔 ᄃᆞ래 밤드리 노니다가>
옛 서울 서라벌(舍衛城)에 사시는 분들도 옛 길(古道)을 알지 못하고
현재 서울에 계시는 분들은 북새(法席)통이다.
舍衛城은 구글에서 흔적만을 본 것 같고 서라벌에 간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서울에는 살지도 않은 자가 옛 길이라고 하는
正思惟와, 正念(4念處)와 正定에 속하는 초선의 尋伺에 대한 생각을 주절 되뇌어 본다.
먼저 우리말 '생각'은
< 1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 올바른 생각.
2 어떤 사람이나 일 따위에 대한 기억. - 고향 생각이 난다.
3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관심을 가짐. 또는 그런 일.
- 우리 수영장 갈 건데 너도 생각이 있으면 같이 가자. >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생각'을 이상과 같이 정의한다.
대략 論理(量), 記憶, 意向(意圖)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
[takko vitakko saṅkappo appanā byappanā cetaso abhiniropanā vacīsaṅkhāro
사색, 생각, 사유, 전념, [마음의] 고정, 마음의 지향, 말의 작용[口行]]
경에서 동의어로 나열된 위 단어들의 정확한 어감을 알지 못하나
√tark (생각하다, 추론하다)와 연관된 단어(takko vitakko)
saṃ- (함께) + √kḷp (적절하게 배열하거나 정리하다)
appanā: ā- (향하여) + √pad (가다, 도달하다)와 연관된 단어(appanā byappanā)
cetas (마음) abhiniropanā: abhi- (향하여) + ni- (아래로) + √rup (나무 등을 심다, 고정하다)
vacī (말) + saṅkhāra (형성)
이상과 같이 어감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 우리말 '생각'과 비슷하고
전체적으로는 口行이라고 한다.
우리말 '기억'은
1.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2. 사물이나 사상(事象)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3. 계산에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시간만큼 수용하여 두는 기능.
cattāro satipaṭṭhānā(4念處)에서 4를 제외하고 분석하면
sati - paṭṭhānā에서
sati(念)는 (入藏出하는) 기억이라는 의미로만 쓰이지 다른 의미가 없다.
paṭṭhānā(處라는 한자는 우리말로 시공간 혹은 지위/신분이라는 의미이지만)
빠알리로는 '딛고 설 자리/대상/수행주제라는 의미이지만 확립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cattāro satipaṭṭhānā는 1. 기억에 의해서 (집중의) 대상으로 삼을 네 가지 토대들.
2. 대상으로 삼을 네 가지 토대들에 대한 기억(집중).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면 [cattāro satipaṭṭhānā samādhinimittā]에서는
기억의 대상인 신수심법이라는 네 가지 수행대상들이 삼매의 표상일 수는 없기 때문에
대상들에 대해 기억이 (확립되어 있을 때의 心 전체적인 상태가) 三昧相이라는 의미이다.
尋伺(vitakketi vicāreti)에서 한문 尋伺는 覺觀으로도 한역되는데
<대상(對象)의 뜻과 이치(理致)를 찾기 위하여 세밀(細密)하게 관찰(觀察)하는 정신(精神) 작용(作用)>
사전적 정의와 그 각각의 단어들에서는 그 의미를 알수 없고
vitakka-vicāra(尋伺)를 용례에서 찾아보면
욕계에서는 66법의 흐름에 이은 마지막 법수로 나타나고 색계에서는 초선에서만 나타난다.
그래서 초선의 尋伺와 관련된 경문에서 찾아보면
경문의 출입은 있지만 4처-념에 이어서 나타나는 초선에 위치할 만한 내용에서
身(수심법)과 관련된 尋을 尋하지마라.[mā kāy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라는 말씀에 이어
제2선에 해당하는 無尋無伺(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vitakkaṃ avicāraṃ)가 나타난다.
이것은 4처-념에서는 하고 있든 尋을 '이제는 더 이상 하지 말고 제2선에 들어라.'는 말씀이지
4처-념이나 초선에서 尋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고 오히려 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초선에서의 尋伺란 4처에 대한 念이고 언어적, 절차적, 논리적, 언어적 尋伺이다.
그래서 4처-념에서 anuvitakketi 해서 念覺知(satisambojjhaṅgo 7각지의 첫 항목)로 이어진다.
또한 4처-념 수행 중에 장애가 생기면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itabbaṃ.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vitakketi ca vicāreti] 尋伺하는 것이
(편안하게 하는, 가라앉았을 때의 어떤) 相에 대해 마음을 향하는 것을 말한다.
향하지 않는 것은 [avitakkomhi avicāro, ajjhattaṃ satimā sukhamasmī’ti]이다.
여기서는 尋伺가 언어적 기억이지만 언어적이지 않은 기억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종합하면 욕계의 尋伺가 아닌 욕계를 벗어남과 관련된 尋伺,
즉 4처-념이나 색계 초선에서의 尋伺는
신수심법과 연관된(이거나 혹은 관련된 心相/삼매상에 대한) 尋伺을 말하고
절차적, 순서적, 논리적, 언어적 기억(念, sati)의 한 종류이다.
이하 참고 문헌이다.
[cattāro satipaṭṭhānā samādhinimittā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 삼매의 표상입니다. …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이다.
yā kho, bhikkhave, imehi sattahaṅgehi cittassekaggatā parikkhatā ,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o sammāsamādhi saupaniso itipi saparikkhāro itipī”ti.
비구들이여, 마음의 일념[心一境性]이 이러한 일곱 가지 구성요소들로 치장될 때
이것을 일러 성스러운 바른 삼매가 기반을 가졌다고 하고 필수품을 가졌다고 한다.
// 이런 일곱 가지 구성요소들로 마음이 하나가 되면[心一境性]
이것을 일러 성스러운 바른 삼매는 기반을 가졌다고 하고 필수품을 가졌다고 합니다.]
[ … 그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면
kāyārammaṇo vā uppajjati kāyasmiṃ pariḷāho, cetaso vā līnattaṃ, bahiddhā vā cittaṃ vikkhipati.
몸을 대상으로 하여 몸에 열기가 생기거나 정신적으로 태만해지거나 밖으로 마음이 흩어진다.
tenānanda , bhikkhunā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itabbaṃ.
그러면 그는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해야 한다.
tassa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ato pāmojjaṃ jāyati.
pamuditassa pīti jāyati. pītimanassa kāyo passambhati. passaddhakāyo sukhaṃ vedayati .
sukhino cittaṃ samādhiyati.
그가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면 환희가 생긴다. 환희가 생기면 희열이 생긴다.
마음에 희열이 있는 자의 몸은 고요하다. 몸이 고요한 자는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so iti paṭisañcikkhati — ‘yassa khvāhaṃ atthāya cittaṃ paṇidahiṃ, so me attho abhinipphanno.
handa, dāni paṭisaṃharāmī’ti.
그는 이렇게 숙고한다.
'내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마음을 향하게 한 그 목적이 이제 성취되었다.
이제 나는 거두어들이리라.'라고,
so paṭisaṃharati ceva na ca vitakketi na ca vicāreti.
그래서 그는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고찰을 하지 않는다.
‘avitakkomhi avicāro,
ajjhattaṃ satimā sukhamasmī’ti pajānāti”.
그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고찰을 하지 않고
안으로 마음챙기면서 나는 행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evaṃ kho, ānanda, paṇidhāya bhāvanā hoti.
아난다여, 이와 같이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수행이 있다."]
[evameva kho, aggivessana, ariyasāvakassa ime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etaso upanibandhanā honti
gehasitānañceva sīlānaṃ abhinimmadanāya gehasitānañceva sarasaṅkappānaṃ abhinimmadanāya
gehasitānañceva darathakilamathapariḷāhānaṃ abhinimmadan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그와 같이 이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은
재가의 생활 습관을 길들이고 재가에 얽힌 생각을 길들이고
재가 생활에 따른 근심과 피로와 열병을 길들여서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 성스러운 제자의 마음을 묶는다.
“tamenaṃ tathāgato uttariṃ vineti —
‘ehi tvaṃ,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
vedanāsu... citte...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ī’”ti.
그러면 여래는 더 나아가 그를 다음과 같이 훈련시킨다.
'오라, 비구여. 그대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몸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느낌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마음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고 법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307)
307) '몸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는 Ee의 mā kāy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를 옮긴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느낌과 관련된 생각'은 vedanūpasaṃhitaṃ을, '마음과 관련된 생각'은 cittūpasaṃhitaṃ을,
'법과 관련된 생각'은 dhammūpasaṃhitaṃ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Be에는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 vedanāsu … citte …
dhammesu dhammānupassi viharāhi, mā ca kāmūpasaṃhitaṃ vitakkaṃ vitakkesi'로 나타난다.
이것을 옮기면 “오라, 비구여. 그대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머물고 감각적 욕망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물고 감각적 욕망과 관련된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가 된다. Se도 Be와 같다.
즉 Be와 Se에는 '몸과 관련된 생각' … '법과 관련된 생각' 대신에 모두 '감각적 요망과 관련된 생각(kāmūpasaṃhitaṃ)'으로 통일 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보경 §§7~8에서 보듯이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남을 기본 주제로 하는 본경의 입장과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역자는 Ee를 따라서 옮겼다.
“so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 pe ... tatiyaṃ jhāna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그는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3선을 …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308)
308) 여기서는 초선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으로 봤을 때 바로 앞 §§22~24에서 언급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 초선을 대신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주석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t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ṃ dhammaṃ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āraddho hoti;
satisambojjhaṅgaṃ tasmiṃ samaye bhikkhu bhāv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bhāvanāpāripūriṃ gacchati.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멀리 떠남을 갖추어 머물면서
그 <*헤어지는 방>법을 계속해서 생각<*기억/念>하고 계속해서 고찰<*생각/尋/思惟>하면
비구에게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꾸준히] 닦는다.
그러면 비구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이러한 닦음을 통해서 성취된다.]
그래서 anuvitakketi라는 표현이 satisambojjhaṅgo와 같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목 마른 넘이 샘은 팠으나 바로 했는지 엉터리로 했는지는
서울에 계신 분이 알려 주십시요.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