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장 정률성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가 발전장대되여 남장촌으로 이주한 력사적 선로를 따라 우리 탐방팀일행은 남장촌으로 향발하였다.
남장촌은 4000여명의 인구가 살고있는 비교적 큰 마을이였는데 마을입구에는 커다란 공터가 있고 거기에는 로천무대가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무대를 《희대(戱臺)》라고 불렀다. 무대 맨우에는 모주석초상이 걸려있고 그 량옆에 《남장》(南庄)이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중조한우의기념대》라는 글발이 새겨져있었는데 지금은 남장촌문화중심으로 사용되고있었다. 이 지방에서도 문화관광차원으로 력사문화자원을 발굴하여 보존하면서 활용하고있었던것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무대는 1943년 조선혁명군사학교설립을 위해 지은 무대라고 한다. 이 무대우에서 조선의용군전사들은 항일선전사업을 벌리고 당지군중들에게 항일내용의 공연을 펼쳤다고 한다. 그 무대뒤에는 조선독립동맹본부가 자리잡고있었고 공터에서는 의용군전사들이 군사훈련을 진행하였으며 동쪽에 위치한 현재 유치원으로 사용하고있는 옛 절간자리는 조선혁명군사학교로 사용되였다고 한다.
《조선의용군주둔옛터》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그 옛 절터에는 1943년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혁명간부와 핵심인물들을 그곳에서 양성하였다는 내용을 새긴 기념비가 서있었는데 정률성이 교육장으로 사업했다고 분명히 새겨져있었다.
이 남장촌의 옛 절터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정률성의 체취라도 느낄것처럼 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 수건중으로 아무것도 없이 텅 비워놓은 공칸에서 깊숙이 심호흡을 하였다. 항일의 전장에 나선 조선혁명가들의 발자취가 중국의 어디엔들 찍히지 않았을가? 그 옛터를 마주하고 우리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와 《조선인민군군가》를 모두 작곡한 정률성이 혹시 또 이 자리에서 《조선의용군행진곡》을 창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자리에 한동안 못박힌듯 서있었다.
정률성은 1933년 15세 어린나이에 혁명투쟁의 길에 나선 형제들의 뒤를 따라 중국 남경에 도착하였다. 워낙 민족절개가 강한 그의 부친 정해당은 극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식들을 일제와 싸우는 항쟁의 길로 하나하나 떠나보냈던것이다. 정률성의 맏형과 둘째형은 조선의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에 들어와 항일혁명활동을 계속하였다. 맏형 정남근은 비밀리에 조선에 들어가 혁명운동을 하다가 일본놈들에게 체포되여 옥살이를 하였고 끝내 병사하였다.
둘째형 정인제는 운남강무당에서 군사를 배웠고 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주덕동지와 동창생이였는데 대혁명시기에 국민혁명군 제24군 중좌참모로 있으면서 무한 등지에서 싸우다가 희생되였다. 셋째형 정의은은 조선공산당 당원이였으며 중국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학생들을 모집하는 사업을 담당하고있었다. 그때 정률성은 셋째형을 따라 조선의 열혈청년들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왔던것이다.
정률성은 남경에서 의렬단이 꾸리는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 3민주의, 조선력사, 맑스-레닌주의를 배웠으며 졸업후 항일운동에 투신하면서 자신이 열애하던 음악공부에 정진하게 된다. 친구의 소개로 상해에서 국립음악전과학교에서 쏘련의 유명한 가수 끄릴노와교수한테서 성악공부를 하면서 천재적 음악재능을 인정받아 《동방의 카루소》라 찬양받는다. 1936년 봄 그는 남경문예계청년들의 항일구국조직인 《5월문예사》에 가입하며 또 《7.7》사변후 라청을 통해 《인민음악가》 선성해를 만나게 된다. 다시 상해에서 조선혁명가 김규광의 안해이며 상해부녀구국회 지도자인 두군혜를 통하여 연안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다.
1937년 10월 19세나는 정률성은 적들의 첩첩한 봉쇄망을 뚫고 오매에도 그리던 혁명의 성지 연안에 도착하였다. 가렬처절한 전쟁년대였지만 연안은 그에게 배움의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는 섬북공학 제1기 7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가창활동을 적극 벌렸는바 늘 수천명되는 군중들 앞에서 노래지휘를 하군 하였다. 1938년 5월 로신예술학원이 창립되자 그는 음악학부에 들어가 불타는 구지욕으로 부지런히 배우면서 음악창작을 하였다.
당시 연안은 비록 움집에서 생활하면서 몹시 간고하였지만 가는 곳마다 생기가 넘치고 명랑한 노래소리가 울려퍼졌다. 정률성은 동무들과 함께 연안북문밖의 산비탈에 올라가 생기있고 장엄한 연안성을 굽어보며 막야와 함께 벅찬 감격으로 《연안송가》를 창작하였다. 연안강당에서 있은 한차례 야회에서 정률성은 손수 만돌린을 타면서 한 녀가수와 함께 이 노래를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이 야회에는 모택동주석께서도 참가하시여 만족스럽게 웃으시면서 군중들과 함께 박수를 쳐주시였다.
어느 하루 모주석께서는 왕진동지를 불러 물으셨다. 《로신예술학원에는 정률성이라는 나젊은 재간둥이 작곡가가 있는데 그 동무를 압니까?》《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이름은 알고있습니다.》
왕진동지가 대답하자 모주석께서는 건의삼마 귀띔하였다. 《그럼 그를 한번 찾아보고 그더러 새로 온 조선동무들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조직하는것이 어떻습니까?》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왕진동지는 정률성을 찾아 담화하고 그를 쏘련으로부터 연안에 와 359려에 배치받은 조선동지들과 대면시키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였으며 주덕총사령의 집에 함께 가서 식사를 하기도 하였다. 왕진동지는 정률성의 음악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솔직하고 성실하며 의지가 강한 정률성을 무척 좋아하고 사랑해주면서 그의 음악창작활동에 지극한 관심과 배려를 돌려주었다.
정률성의 연안송가는 연하강반으로부터 재빨리 섬감녕변구로, 가렬처절한 전선과 국민당통지구, 먼 후방까지 전해져 억만 인민들의 마음속에 연안에 대한 경모의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전국인민들의 항일의 열정을 격발시켰다. 혁명의 뜻을 품은 수많은 청년들이 《연안송가》를 부르며 험난을 무릅쓰고 연안으로 모여들었고 전사들은 이 노래에서 용기와 힘을 얻고 원쑤들과 용감히 싸웠다.
1939년 1월 10일, 그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로신예술학원에서 학습하고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 배치받아 사업하면서 피타는 노력을 경주하여 또 공목동지와 함께 《팔로군대합창》을 완성하였다. 인민자제병들의 영웅적형상과 전투적기백을 생동하게 반영한 이 노래는 근거지와 유격구, 가렬처절한 전투마당에서 전사들과 청년학생들에게 널리 불리우게 되였다.
《팔로군대합창》의 1, 2 장절(팔로군의미에 따라 총 8장절로 되여있음)로 되여있는 《팔로군군가》와 《팔로군행진곡》은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의 초연탄우속에서 일본침략자와 국민당반동파를 타도하는 승리의 한길로 우리 전사들을 고무한 진군의 나팔소리로 되였다. 해방전쟁시기《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명칭이 바뀌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하는 장엄한 력사적의의를 띤 개국대전에서 여러차례 연주되면서 전파를 타고 세계각국에 널리 울려퍼졌다. 그후 이 노래는 정식으로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명명된다. 정률성이 이 노래를 창작할 때는 겨우 21세였다.
1942년 5월 정률성은 모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을 듣고 신심과 용기를 가졌다. 그해 8월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였지만 전방에 나가 싸우겠다며 무정동지를 따라 태항산으로 떠났다. 무정동지는 조선의용군 사령원 겸 화북조선청년혁명군사학교 교장을 담임하고 정률성은 교무주임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원들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국민당군대에 대한 무장선전활동을 진행하고 때로는 무공대원들을 거느리고 특무망을 타진하는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1943년봄부터 태항산에서는 《자력갱생 풍의족식》 대생산운동을 벌렸다. 정률성은 연안에서의 대생산운동경험을 전사들에게 소개해주고 직접 괭이를 메고 황무지를 일구는 일에 앞장서 나섰다. 한편 그는 생산현장에서 자신이 창작한 노래를 전사들에게 가르쳐주는외에 가사를 지어 옛곡에 붙이는 《군중창작운동》을 적극 창도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충청도 지방의 어느 민요에 맞춰 승리의 새봄을 그리는 조선의용군의 심정을 반영한 노래가 널리 애창되기도 하였다. 특히 녀전사들이 《도라지곡》에다 가사를 창작하여 지은 《미나리타령》은 산나물을 캐고 황무지를 일구는 《전투》에 대한 내부의 정서를 가시고 생산열조를 일으키는 면에서 큰 영향을 일으켰다.
정률성은 탄우가 비발치는 나날에도 악곡구상과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태항산에서 쓴 《조선의용군행진곡》(리득산 작사) 등 가요는 화북과 동북의 조선의용군들속에서 널리 애창되였다. 전사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군사훈련을 하였고 이 노래를 부르며 적진에 돌진하였다. 전투적 기백과 격정이 넘치는 이 노래는 《팔로군행진곡》과 더불어 조선인 항일전사들을 투쟁과 승리에로 나아가도록 고무해주었다. 무정장군도 이 노래를 가장 즐겨 불렀다고 한다.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
발 맞춰 나가자 다 앞으로
지리한 어둔 밤 지나가고
빛나는 새날이 닥쳐오네
우렁찬 혁명의 함성속에
의용군기발이 휘날린다
나가자 피 끓는 동무야
뚫어라 원쑤의 철조망
양자강 황하를 뛰여넘어
피 묻은 만주벌 결전에
원쑤를 동해로 내여몰자
전진 전진 광명한 저 앞길로
/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