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적 교회에서 동화처럼 들었던 창세기중 가장 흥미진진했던 것은 흙으로 지음받은 아담과 하와 , 뱀으로 위장하여
하와를 꾀어 선악과를 따먹게한 사단, 그로인한 결과가 죄를 입어 죽었다는 이야기등등 입니다.
선악과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아담과 하와를 죽게 만들었을까요?
어느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강사님이 선악과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인데 사과와 비슷하다고 하시더군요 . 에이 그렇다고 사과에 비유하시다니~^^
그러니 비유풀이로 성경을 가르치는 신천지같은 이단들이 판을 치고 기성 교인들이 빠져들어갈수 밖에요.
참으로 유치하게도 신천지에서는 통일교 이전부터 전해온 것을 자기들의 교리에 편입하여 선악과 따먹은것을 하와의 성적인 간음으로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비이성적으로 성경을 임의로 풀이하여 비진리가 되게 가르치고 배우는 자들을 "짐승" 이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2장12절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유다서1장10절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이렇게 선악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선악과란 무엇을 말함인지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어느카페에 정리된 글을 올려드립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을 만드시고 그곳에 사람을 두시고 유일한 금칙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사람이 선, 악을 분별하려면 반드시 어느 것이 선인지 어느 것이 악인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법이 있어야 합니다. 선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좋은 상태가 되는 것이고, 악이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아 좋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 악이 왜 “나쁜 것”인지, 선이 왜 “좋은 것”인지 몰랐습니다. 악을 행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의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인형이 아닌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을 분별할 줄 아는 상태에서“위법”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리곤 그 대가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아담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피조되었습니다. 그리곤 자기의 “선택”만 있다면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조건은 부여받은 상태였습니다.
단지 아담은 “선”이 왜 좋은 것인지, 악이 왜 “안 좋은”것인지를 몰랐을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법을 알기 전에는 우리도 동일한 상태였습니다.
아담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죽음은 감각 없는 이론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떨까요?
여러분은 죽음이 두렵습니까?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죽지 않은 상태에서 죽었다고 생각을 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라도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있어서 죽음은 그저 아담의 상태와 동일하게 이론에 불과합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오늘, 그리고 지금도 인생들이 낳아지고 죽는 것을 보고 확인하고 있으므로 간접 경험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간접 경험이 특별한 효과를 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죽을 것을 알고는 있지만 당장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내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매일 하면서 산다면 그 사람은 공포에 질려 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죽음 후의 무엇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 존재가“무 존재”로 사라지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자존심”이나 “자긍심”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존재하고 싶은 그 마음은“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과 질이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 안에서 “스스로 구원하라”는 가르침을 따라 길을 가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아담에게도 법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안 좋은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아담에게 불공평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의 우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따먹지 말아야 하는 선악과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우선 선악과가 있는 상태가 되려면 당신은 이미 에덴에 있어야 합니다. 에덴이란 “살았다” 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생명나무라는 수단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에덴 안에서의 인생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않고는 영생을 할 수 없는 불완전체였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 왔고, 에덴 안에는 먹고 마시면서 삶을 유지하고 또 영이 살 수 있게 하는 가르침인 생명나무도 있습니다. 지혜는 생명나무라 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생명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란 무엇일까요?
생명나무 열매는 나무에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이 생명나무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으로 믿고 행함으로 실천하여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매를 먹는 것이 곧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나무에서 처음 익은 열매, 곧 당신을 아버지께서 “처음 익은 것은 다 내 것이라” 하시면서 아버지의 소유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그 다음엔 그 말씀을 이해하고,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육신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가르침을 따라서 그 안내대로 왔더니 도착한 곳이 생명나무 열매가 있는 에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산은 자기가 일터로 삼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이 심어 주시는 나무의 열매를 임의로 따먹을 권한을 부여받아 그 열매를 먹으면서, 즉 자기 기업을 받아 일을 하면서 여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다다라 다시 나감이 없는 안식에 들어 그 결국에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뵙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따먹지 말아야 하는 선악과가 있게 됩니다.
선악과는 에덴 안에서 유일하게 “먹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먹으면 안 된다는 말 속에는“소유할 수 없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나머지 열매를 “먹을 수 있게, 좋다고 느끼고 누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따먹는 열매가 아니라 안 따먹어야 하는 열매입니다. 안 따먹을 때에만 그 열매는 가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 그 가치만 발생하도록 “남의 것” 즉,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고 그 열매는 그저 거기에 있도록 놓아둘 때 그 가치가 발생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란 자기에게 부여된 기업의 일을 하면서 발생되는 말씀에의 이해와 깨달음을 통한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 결과는 곧 “평안” 혹은 “쉼”, 혹은 “안식”입니다.
이미 우리는 자기 부인의 길을 가면서 소유할 수 없는 것, 소유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혹은 비우며 등 뒤의 일로 삼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훈련이 끝난 사람은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하여도 마음을 두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자기의 기업을 받았습니다. 자기의 기업을 받아 일을 하면서 생긴 모든 결과, 혹은 훈련의 과정 중에서 다시 형성된 하나님이 모으신 백성들과의 만남에서 생긴 또 다른 허상들이 있게 됩니다. 말씀인 오른쪽의 일과 말씀을 따라가는 길에서 발생된 왼쪽 일에 대한 결과가 그것입니다.
전도서에 한손에만 가득하고 평안한 것이 두 손에 가득하고 번민하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오른손에 받아 가진 말씀, 지혜의 양은 자기의 소유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른손과 왼손에 가지고 있는 그 결과 중에서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것도 아버지의 소유이고, 그 말씀을 가지고 일을 한 결과인 모든 허상도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일꾼이 되어 그 아들이 되는 결과를 대가로 얻어 영생하기 위하여 길을 가는 것이고 그렇게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과정에서 발생되는 오른손과 왼손에 쥐게 되는 모든 결과는 모두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아버지의 소유를 나의 소유로 삼는 것, 혹은 삼으려는 마음이 곧 선악과를 향한 탐심이며 그것을 자기 배에, 인생의 마음에 족하게 채워 버리면 그것이 곧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정녕 죽으리라”하셨으므로 살아 있는 듯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엔 이미 죽은 자로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한번 따져 보겠습니다.
우리는 에덴에서 쫓겨나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오늘 우리는 육신을 위하여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으며, 잘 곳이 있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오늘”, 아직 오지 않았으며 알 수도 없는, 인생이 인지하기 어려운 “영원”이라는 개념 안에 들어 있는 “내일"이라는 날, “삶”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과일 말고 다른 많은“누릴 거리”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맛보게 할 가능성을 가진 많은 것들도“겁 없이”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추락할 수 있는 비행기도 타고, 자동차도 타며 삽니다. 내일을 모르는 인생들은 매일 그렇게 사선을 넘나들면서 매일 죽음의 두려움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 그 안에서 행복이라는 것을 찾으며 살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오늘을 살 수 있는 상태이고, 영적으로도 에덴 안에는 먹을 것이 넘칩니다. 누구도 그것을 완전히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식료품이 넘치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식료품이 넘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하시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하셨습니다. 이 이상의 약속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상을 바라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십시오. 실은 살필 것도 없이 당연하게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영적으로 모든 것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는데 이때에 여러분의 마음에 이것 말고 가지고 있는 “바램”, 혹은 “원함”이 있을 것입니다. 바램이나 원함이 있다는 말은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게 하셨는데 사람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에덴 밖의 것을 원한다는 말이 됩니다. 에덴의 밖은 죽음의 땅입니다. 그곳에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 곧 선악과 열매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 원함을 채우고 만족, 배부름을 느끼게 되면 결국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것이 되어 그 결국에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자문하십시오.
나는 처음 익은 열매가 되었는가?
처음 익은 열매라면 하나님의 소유일 것이고, 하나님의 소유라면 하나님의 물건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물건이라면 하루 종일 자기를 위하여 일하거나 말씀을 보거나 먹거나 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거나 먹거나 씻을 것입니다.
나는 에덴의 열매들을 따먹고 있는가?
당신에게 기업이 주어졌다면 그 안에서 일을 하면서 이미 그 열매들로 인하여 영적 배부름을 느낄 것입니다. 직장에 나가서 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고, 집에 와서 보내는 시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면 그 일들에는 반드시 영적 만족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하지?”하고 물으면 답이 나오고 그 답대로 행하면서 영적인 만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선악과란 무엇인지 점검하십시오.
당신의 마음 안에 있는, 아직도 채워지지 않는 세상에 속한 것, 혹은 인생으로서의 현재 자기 환경 안에서 무엇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원함이 여전히 있는 상태라면 당신은 지금 선악과를 바라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중입니다. 자식이, 아내가, 남편이, 형제가, 돈만 조금 더, 이것만 하면, 저것만 되면...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어서 벗어나야 합니다. 현재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당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바라다 보고 있거나, 혹은 열매를 향하여 손이 뻗쳐져 있는 상태입니다.
이에 더하여 유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모르는 자기의 마음입니다.
말씀 안에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은 한결같이 “자기”가 매우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없다고, 자기는 그런 것을 원할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자신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로 자기의 원함을 강하게 누르고 있으면서 자기에게는 그 마음이 없다고 여겨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선악과를 향한 마음, 허상을 향한 마음에게 스스로 말하십시오.
“내가 오늘이라는 매일, 육과 영으로 먹고 입고 자는 것에 부족함이 없다면 난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 원함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비로소 당신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살아 있음의 상태라면 그리고 내일이 오기 전까지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영원을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꾼의 여정 중에서 당신은 아버지를 닮아 그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아버지 앞입니다. 그것이 내 마음의 소망, 원함의 전부이어야 합니다.
첫댓글 사람들은 선악과에 관심들은 많은데 잘 모르죠. 어떻게 아느냐에 따라 성경전체를 아느냐 모르냐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선악과를 먹은것을 깨닫지 못해서 열심히 알려고 해도 실상은 선악과를 먹은 한계에 부딪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