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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5.05.03)]
/ 시험에 들지 않도록(이장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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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15.05.03)]
/ 열왕기상 11:1-13 무엇을 사랑하는가?
마태복음 6:11~13 시험에 들지 않도록 2015. 5. 3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2)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2)헬, 빚진 자를 탕감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의 말씀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기를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시험이라는 말을 한글로 검색을 하면 106회가 나옵니다. 이 시험이라는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도 있고(창 22:1, 출 16:4, 신 8:2,16)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시험하는 것도 있습니다(출 17:2,7. 신 6:16. 시 78:18). 그리고 마귀의 시험도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통하여 사람을 미혹합니다. 이러한 마귀의 시험을 다른 말로 꾄다는 말이나 유혹이나 미혹의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꾀고 미혹하게 하여 망하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험은 심판과 구원 두 가지로 봐야 합니다.
역대하 18:19~23절입니다. “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0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23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아합 왕을 심판하시는 장면입니다. 아합 왕을 심판하시는데 누가 아합 왕을 꾀어서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이때 한 영이 여호와 앞에서 자신이 꾀어서 죽게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데 이 영이 ‘루아흐’입니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례가 하나님의 영, 성령, 기운 바람 생명 등으로 사용됩니다만 같은 단어인데 헛된 것에 사용되기도 하고(사 26:18, 41:29, 미 2:11) 헛된 말(욥 16:3)이나 헛된 지식(욥 15:2)으로도 사용됩니다. 그 영이 임하여 사백 명의 선지자가 다 아합이 이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미가야는 그들이 거짓말하는 영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자 뺨을 맞습니다. 선지자 사백 명이 말하는 것과 한명이 말하는 것 중에 누구 말을 믿겠습니까? 아합은 사백 명의 말을 듣고 전쟁에 나가서 죽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악한 자를 따라 능력이나 표적이나 거짓 기적을 따르는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이렇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셔서 거짓 것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고 표적과 기적들이 좋아 보이는 것은 미혹을 받아 심판을 받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한곳의 말씀을 더 봅니다. 야고보서 1:12~15절입니다.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 시험을 시련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시험이 구약의 용례와 같이 사용됩니다. 같은 단어인데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연단하시는 말씀도 되고 어떤 곳에서는 사단이 유혹하는 것도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한 단어를 해석하려고 하면 그 문맥을 통하여 보아야 하는 것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이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 성경이 무엇을 증거 하려고 하는지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이 기도의 내용을 통하여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증거 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시험이라는 말이 신약에서 사용될 때에 유혹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하나님께서 연단하신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그래서 12절 안에서 ‘시험’이라는 단어와 함께 연결되는 단어가 ‘시련’입니다. 시련은 성도가 연단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다 시련을 받습니다. 이 시련을 시험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시련을 주시지만 미혹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미혹이나 유혹은 하나님의 백성 아닌 자를 심판하실 때에 사용하는 것임을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는 시험에 들어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미혹과 시험을 허락하신 것으로 표현되지만 사실 그 사람의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시험하시는 것은 유혹이나 미혹이 아니라 연단입니다. 영어로 하면 ‘test’나 ‘trial’입니다. ‘temptation’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미혹을 사용하시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혹을 당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잉태하여 이렇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의 근원을 하나님께 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야고보서 1장의 이어지는 16~18절 말씀을 봅니다.
“1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르게 알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혹을 하여 죄를 짓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죄를 낳은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빛들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빛의 자녀들에게는 모든 좋은 은사를 주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해야 빛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그 영을 우리에게 넘겨주셔야 합니다(요19:30). 그 영이 곧 말씀입니다(요 6:63).
이제 사람이 최초의 시험에 빠진 창세기 3:5절을 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사탄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하나님처럼 될 줄 알고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싶은 그 욕심이 으로 아담과 함께 따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최초의 유혹이 하나님처럼 되는 유혹입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은 다 이 유혹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시험 안에서 하나님이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자기 좋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자기 좋은 대로 행하시면 그것이 선입니다. 그런데 유혹에 넘어간 우리가 자기 좋은 대로 행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선이라고 해도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죄인이기에 악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선과 악이라는 구조 속에 빠져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가장 선한 것이라는 것을 다 모아서 누가 보아도 희생적이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면서 사는 이것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시험에 빠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누가 탈출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이 세상에서 더욱더 시험에 빠져 들기를 원합니다. 그 시험에 빠져 드는 것을 세상은 성공이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이런 시험받은 세상에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일은 오직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 결과로만 나오게 됩니다.
마태복음 4:1-11절입니다. “봉독” 마태복음 4장에서 이 본문을 볼 때에 예수님이 받은 시험과 사람이 받는 시험으로 두 번에 걸쳐서 보았습니다. 그때에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은 요한복음 6장과 연결하여 썩는 양식과 썩지 아니할 양식을 대비하여 썩는 양식만 있다면 만족하겠다는 것이 시험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돌들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합니다.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것을 단지 길가에 많은 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기록된 두 돌 판을 말합니다.
신약의 헬라어를 구약의 히브리어로 번역한 책이 있습니다. 헬라어의 돌들이 ‘리도스’인데 이 돌도 일반적인 돌도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도 사용합니다(마 21:42, 벧전 2:4,5). 그런데 이 돌 ‘리도스’가 히브리어로 ‘에벤’입니다. 에벤에셀 할 때에 그 에벤입니다. 신약처럼 이 돌이 일반적인 돌로도 사용되지만 모세의 두 돌 판이 역시 이 단어로 사용됩니다(출 24:12). 그러므로 마귀의 시험이란 율법의 조문을 생명의 떡으로 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떡 곧 율법의 조문으로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자신의 십자가로 완성하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면서 물리칩니다. 그러므로 돌 판에 기록된 율법으로 사는 것이 시험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된 생명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시험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3:1~6절입니다. “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돌 판에 기록된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고 하는 것은 돌 판에 기록된 율법 조문으로 살면 된다는 것이 시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돌 판에 기록된 그 말씀을 생명인줄 알고 먹으면 그것이 사망에 이른다는 말씀을 지금 바울사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바울사도는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며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할 때에 이 영이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6:63절에서 내 말이 곧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살과 피를 주신 것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보든지 신약을 보든지 이 말씀들이 율법의 조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조차 율법의 조문으로 만들어 보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율법의 조문에 묶는 것이며 이것이 선악과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선악과의 유혹은 인간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면서 살겠다는 율법의 조문을 따라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율법의 조문이나 신약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켜내어야 할 새로운 율법조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신학적으로 신율주의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모세의 수건이 가려져서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3:7~18절입니다.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 우리가 이 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마귀의 유혹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어 법을 지켜내는 나는 선한 사람이며 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악한 자로 규정하는 것이 마귀의 유혹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이 마귀의 시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한다는 것은 십자가로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저의 설교를 들으시면 맨날 예수님 이야기 그것도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 받게 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그 예수님 이야기만 하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고 예수 믿는 내가 다니는 교회가 멋있어야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마귀의 시험에 든 것입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예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기에 자꾸만 다른 것에 기웃기웃 거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외게 다른 것에 마음이 간다면 시험에 들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시험은 마귀가 시편 91:11-12절을 인용하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마귀도 말씀을 사용하여 유혹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약속 되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약속이 있기에 이 약속을 믿고 구하면 그대로 된다고 합니다. 그 약속이 누구를 위한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도 안하고 그저 내 욕망에 끼워 맞추어 성경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신명기 6:16절 말씀을 가지고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처음 유혹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을 들고 나오거나 성경에서 자기 유리한 구절을 끌고 와서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것을 하나님을 시험한다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었을 때에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라고 합니다.
민수기 14:22-23절입니다. “22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영광과 출애굽과 광야의 이적을 보고서도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유혹을 예수님은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을 조건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성경을 인용하여 유혹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런데 마귀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끊임없이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마귀의 시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에서도 데살로니가 후서 2장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표적과 기적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들이 이런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을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삼일동안 계시다가 부활하시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보여주실 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표적을 구하는 것 자체가 유혹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천하만국의 영광입니다. 마귀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세상의 영광과 부귀를 가진 것을 보십시오! 재벌 회장들이 예수님을 믿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한국 최고의 재벌들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준다고 말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자들의 말을 듣고 따라가는 자들이 또한 얼마나 많은지 우리 주변을 보면 다 드러납니다. 사람들에게 마귀에게 절하여야 그런 것이 주어진다고 하면 기겁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보고 그렇게 말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혹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유혹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계속하여 오는 유혹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하여 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귀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자고 하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유혹은 예수님의 십자가에까지 따라 붙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마귀가 유혹한 그 유혹을 그대로 따라 합니다. 마태복음 27:39-43절을 보시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른 하나님의 아들 됨의 표적과 증거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짖음에도 하나님은 외면하십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저주 받아 죽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시면서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합니다. 이것이 유혹자를 이긴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험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끊임없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경에 있는 이런 말씀들이 이루어지게 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약속은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시고 그 결과로 자기 백성에게 선물을 주신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기에 시험받는 자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18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시험을 당하셨기에 시험 받은 자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시험을 받고 이기시기 위하여 우리가 같은 혈과 육을 지니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4: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나 모든 시험을 십자가로 이기셨고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셔서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 안에, 그 십자가 안에 사는 것이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오후설교(15.05.03)]
/ 열왕기상 11:1-13 무엇을 사랑하는가?
열왕기상 11:1-13 무엇을 사랑하는가? 2015. 5. 3
자유게시판에 곽 집사님이 소개한 그레고리 비일의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라는 책 소게 읽어보셨나요? 그 중 한 단락을 인용합니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성경에 나오는 우상숭배자는 그 우상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는 그 대상이 된다’입니다.” 우상숭배는 그 우상을 닮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우상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오래 살면 닮는다는 말을 합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닮아 가는데 사랑하면 얼마나 많이 닮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솔로몬이 무엇을 사랑했는지를 봅시다.
11:1~5. “1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2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3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4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5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방의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국가를 위하여 정략적인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의 부귀가 최고의 정점이었을 때에 정략적인 결혼을 하지 않아도 작은 나라들이 수교(修交)를 요청해 올 것입니다. 고대의 가장 중요한 국가 간 수교는 혼인으로 묶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방 여인들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왜 이랬을까요? 무엇이 부족합니까?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권력과 지혜까지 갖추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계속하여 새로운 재미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솔로몬은 자기를 즐겁게 하려고 모든 것을 다 해본 것입니다. 전도서에 이미 잘 나옵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즐겁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해아래 새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솔로몬이 헛되며 의미 없다고 하는 것들을 해 보고 싶어 합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는 증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가나안 원주민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통혼하면 그들의 너희의 마음을 들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할 것이라고 율법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출34:15~16). 그리고 솔로몬에게도 하나님께서 친히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3:5, 왕상 9:2). 그런데 솔로몬은 여호와의 말씀보다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후궁이 칠백 명이며 첩이 삼백 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좀 과장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 근거는 아가서 6:8절에서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숫자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입니다. 이들을 사랑하였기에 그들을 닮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하는 여인들이 섬기는 신들을 따라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고 누구를 사랑합니까?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조금만 이야기를 해 보면 다 드러납니다. 영적인 유익이 없는 공허한 대화만 오고가는데도 그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자기 속에도 그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사람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적인 유익이 없다면 일어서야 합니다. 솔로몬의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방의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국가를 위하여 정략적인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의 부귀가 최고의 정점이었을 때에 정략적인 결혼을 하지 않아도 작은 나라들이 수교(修交)를 요청해 올 것입니다. 고대의 가장 중요한 국가 간 수교는 혼인으로 묶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방 여인들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왜 이랬을까요? 무엇이 부족합니까? 이미 앞에서 보았습니다만 솔로몬의 부귀영화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권력과 지혜까지 갖추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계속하여 새로운 재미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돈과 권력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을 솔로몬은 자기를 즐겁게 하려고 모든 것을 다 해본 것입니다. 전도서에 이미 잘 나옵니다만 세상 사람들이 즐겁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해아래 새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6~8. “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7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8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한 것이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이방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습니다. 이방의 신전을 예루살렘 앞산에 세웠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앞에 산당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4절에서 그 아버지의 마음과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도 많은 아내가 있었지만 간음하고 살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절대적인 평가로 보면 솔로몬이나 다윗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마음이란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서 회개한 것입니다. 그 회개란 상한마음입니다.
시편 51:16~19절입니다. “16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한 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서 나온 찬송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제사와 번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않으시는 것을 다윗이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아달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주의 은택만이 성도의 소망임을 안 것입니다. 그런데 19절에서 그러면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고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린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이 임하면 자기의 죄와 비참함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번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1~10절입니다.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지금까지 드린 말씀의 확정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배를 마치 제사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어도 새벽 제단을 쌓는다고 합니다. 예배당에 가는 것을 주의 제단에 간다고 합니다. 참으로 큰일 날 소리들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드리신 것을 무효화 하는 말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전통에 따른 말들 하나하나도 복음으로 다시 점검하여 사용하셔야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봅니다.
히브리서 10:11~18절입니다.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 내용을 다윗은 자신의 범죄와 용서를 통하여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주의 영으로 인하여 알게 되었기에(벧전 1:11) 주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한 심령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과 같지 않으면 아무리 성전을 화려하게 짓고 그 앞에서 헤아릴 수도 없는 제물을 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의 교회의 현실은 다윗의 마음을 원하는 것이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여인을 사랑하는 간음이라는 말씀입니다.
9~13. “9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10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11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솔로몬에게 경고하셨지만 그가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빼앗아 네 신하에게 줄 것이라고 합니다.
12~13. “12 그러나 네 아버지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13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내 종 다윗과 내가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
당장이라도 왕위를 빼앗고 나라를 망하게 하여도 할 말이 없는 솔로몬이지만 다윗과 여호와께서 택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나라가 솔로몬 사후에 나누어집니다. 솔로몬의 최고의 부귀영화의 자리에서 그 마음이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원하는 세상의 것들로 부족함이 없게 되는 그 상태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탐심이라는 우상숭배입니다. 이런 모습을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선지자를 통하여 보겠습니다.
이사야 2:5~9절입니다. “5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6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 7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8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경배하여 9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2)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야곱 족속을 버리신 이유는 이방의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과 언약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7절을 보시면 솔로몬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솔로몬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이지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구하는 바가 솔로몬의 그 시대와 동일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오늘 이 시대와도 동일합니다. 그렇게 부국강병을 세상의 것들로 추구한 결과 그 땅에 우상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우상을 경배하며 천한다고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기 그들을 용서하지 말아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엘리야도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우상숭배의 땅에 비가 오는 것은 언약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이기에 여호와께 기도하여 비가 오지 않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 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기도하시겠습니까? 어떤 분은 남편이 예수님을 알기 위하여 남편의 사업이 망하더라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했는데 정말 사업이 어려워지니 겁이 나더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이 있습니다.
이사야 2:10~22절입니다. “10 너희는 바위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11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날이 모든 교만한 자와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리니 그들이 낮아지리라 13 또 레바논의 높고 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14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 오른 작은 언덕과 15 모든 높은 망대와 모든 견고한 성벽과 16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조각물에 임하리니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0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21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분명한 말씀이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상을 따라 가시겠습니까? 그 결국이 어떻게 되는지 말씀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6:9~17절입니다.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16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어린 양의 진노의 날이 이르기 전에 성도는 이 세상에서 목 베임을 당합니다. 목 베임을 당한다는 것은 내가 주인 되어 살면서 나를 사랑하면서 살았던 것들이 날아가고 예수님이 나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어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 일이 성도에게 일어남으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부수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담기는 것이 성도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롬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