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지, 파란 하늘은 오랜만이었다. 수십 일어나 비를 쏟아부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아졌다. 야속한 하늘 같으니라고. 햇볕이 건네는 따스한 손길도, 등 뒤를 톡톡 두드려주는 바람도 반가웠다. 비와 구름 사이에 가려진 채 계절의 흐름을 놓치고 있었던 게 문득 떠올랐다. 늦여름. 가을을 앞둔 전형적인 날씨였다. 아직 덥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마저 누리고 싶은 건 순전히 그 지긋지긋했던 비구름 때문이었다. 참으로 길고도 긴 장마였다.
세종호수공원 입구
햇볕을 가릴 수 있는 '양심양산'이 비치되어 있다.
양심양산 사용 전후로 손 소독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세종호수공원을 찾았다. 날씨가 좋았고, 왠지 모르게 공원이 한적해 보였으며, 반나절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었으니까. 해가 머리 꼭대기를 지나 서쪽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자연스럽게 세종호수공원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비치된 세정제로 손을 닦아냈다. 마스크가 조금은 답답했지만, 충분히 감내할 만했다. 이런 날씨는 오랜만인지라.
세종호수공원의 인공호수,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입구에서도 호수가 보였다. 호숫가를 따라 한 바퀴를 빙 도는 길을 찾아 거닐어 보기로 했다. 혹은 마음에 드는 의자에 앉아 쉬거나 해도 좋을 터였다. 자그마하게 조성된 숲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흙을 밟아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조금 덥다는 것 말고는 날씨를 걱정할 일도 없었기에, 마음껏 걸을 수 있다는 점이 그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사무실과 집에 갇혀 한껏 찌뿌둥해진 몸과 관절을 풀어줄 기회였다.
호수공원에 살고 있는 물고기를 한 번에 만날 수 있는 연못
물가에서 노닐고 있는 물고기들
세종호수공원은 세종특별자치시 내 행정도시 한가운데에 조성된 인공호수공원이다. 담수 면적으로 보면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호수공원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일산호수공원보다도 더 큰 큐모라는 뜻이다. 세종호수공원 내 호수는 금강에서 물을 끌어와서 만든 것으로, 인근 하천과 유사한 생태계를 관찰할 수 있다. 금강에서 살가는 각종 물고기도, 작은 개울가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개구리 등 양서류들도, 습지에서 흔히 자라는 부들 등 수생식물도 한데 어우러져 살아간다.
세종호수공원 A코스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늘 호수가 곁에 있다.
세종호수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걷기 여행길이 조성되어 있다. 세종호수공원 A코스는 수상무대섬을 기준으로 남측호수를 따라 걷는 길이고, 세종호수공원 B코스는 북측의 나머지 구간을 걷는 길이다. 이 두개 코스를 아우르는 길이 C코스다. A코스를 걷기로 했다. 충분히 다 걸을 수도 있었지만,중간에 마음에 두고 있는 쉼터가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신선놀음을 즐길 요량이었다.
이곳에서 태양광 에너지로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다.
무선 충전도 가능하다.
세종호수공원에는 신기한 것이 많았다. 호수 내에 둥둥 떠 있는 인공섬, 밤에 사람이 지날 때마다 자동으로 밝아진다는 인공지능 조명, 그리고 태양광 에너지로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는 스탠드까지. 곳곳에 분수대가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특히 다리로 연결된 호수 중앙부에 있는 수상무대섬에서는 종종 공연이 열린다고도 한다. 물론, 요즘 같은 때라면 조용할 뿐이겠다만.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세종호수공원
호수변을 따라 거닐었다. 인공호수라고 보기에는 자연스러운 면이 많았다. 흥미로웠다. 마치 실제 강가를 걷는 듯했다. 물은 맑아 바닥까지도 훤히 들여다보였다. 물고기 떼가 이리저리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당연했다. 퐁퐁거리며 왔다 갔다 하는 수서공충들의 모습도 왠지 귀여웠다.
목조 데크가 설치되어 있는 구간 '연꽃데크'
매년 여름에는 이곳에서 연꽃이 피어난다.
길은 걷기 혹은 달리기를 하는 이들을 위한 트랙을 따라가나 싶더니, 수면 위로 설치한 목조 데크로 이어졌다. 호수와 더 가까이 걸을 수 있는 이 찰나의 순간이 아쉬워서 그만 발걸음을 다독이고야 말았다. 천천히 가자고. 호수 변 옆에 솟은 언덕 쪽으로는 잠시 쉬어갈 누각, 장남정이 자리했다. 장남정은 세종호수공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잇는 조망을 자랑하는 2층 높이의 정자다. 이 일대의 옛 지명인 장남평야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수변전통공원 옆으로는 흙이 깔린 숲길도 있다.
몇 덩이의 구름이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점점 노란빛으로 물들어갔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서는 다시 걸었다. 일부러 숲길을 따라 빙 돌아서 공원 산책로로 내려섰다. 아직 촉촉한 흙이 보드랍게 발끝을 간질였다.
물꽃섬 목조데크 구간
수초가 목조데크를 감싸는 모습이 꽤 감성적이다.
도시와 어우러지는 세종호수공원
물가에서 자라나는 식물을 모아둔 물꽃섬을 지났다. 호수의 반대편 길을 따라 걷고 있으니, 변환점을 돈 셈이었다. 물꽃섬은 계절만 잘 맞는다면 창포 등 수생식물의 꽃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꽃이 없어도 괜찮았다. 물꽃섬 목조 데크 위에 서서 바라보는 세종호수공원이, 그 너머로 쭉 이어지는 하늘의 청명한 색깔은 충분히 설렐 만했다.
장마에도 피어나고 있는 늦여름의 꽃들
길가에 피어난 몇 송이의 들꽃이 늦여름의 정취를 더했다. 다행이었다. 수십 일간 쏟아진 비에도 오롯이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 주고 있으니 말이다. 수풀 사이에서 고개를 배꼼내밀고 하늘거리는 꽃 한 송이에게 눈빛으로나마 인사를 건냈다. 부디, 이여름이 지날 때까지 당신도 안온하기를. 부디 그러하기를.
조금은 유치하지만, 이런 포토존도 있다.
물놀이섬 마로니에비치, 모래사장과 선베드가 있다.
다리를 건너 섬에 올라선 순간, 갑자기 주변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마로니에비치에 도착한 것이다. 도심, 그것도 내륙 한가운데인 세종시에서 모래사장과 파라솔, 선베드를 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선베드에 잠시 누워 잠시 망중한을 즐기기로 했다. 시간이야 많았으니까. 다음엔 책이라도 한 권 가져와서 읽어볼까 싶을 정도로 낭만적이었다.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다.
그렇게 세종호수공원의 절반을 다 돌았을 무렵, 평화의 소녀상을 만났다. 지난 2015년에 세종시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 건립한 동상이다. 소녀상 앞에는 작품의 의미를 설명해 둔 글귀가 있었다. 한복을 입고 있는 이유부터 동상 뒤로 표현된 할머니 그림자, 그림자 속에 그려진 나비, 뜯긴 머리카락, 맨발에다가 뒤꿈치를 들고 있는 점, 빈 의자, 평화비의 글씨, 새까지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끝까지 읽었을 땐 마음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근처에는 평화의 소녀상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우체통이 마련되어 있기도 했다.
세종호수공원 산책로
세호교(세종호수교)
수상무대, 금강의 조약돌을 형상화한 모습이란다.
세호교에서 호수공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세종호수공원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상무대섬이 있는 호수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세호교를 건넜다. 독특한 외관의 수상무대섬은 오랜 세월 금강의 물결에 의해 다듬어진 조약돌을 형상화한 것이란다. 문득, 시골집 앞에 흐르던 금강에서 물수제비 뜨기 놀이를 즐겼던 추억이 떠올랐다. 난간에 기댄 채, 잔잔한 수면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수면 위로 추억과 여운이 뒤섞이고 있었다.
걷기 여행 TIP
TIP: 세종호수공원 관리센터 앞에 손 세정제와 햇볕 가리개용 우산을 비치하고 있다. 우산은 방문객 누구나 대여해 이용할 수 있다. 햇볕이 강한 날에는 우산을 꼭 챙기고 산책을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