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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이 싸움을 걸다
삼상 13:1-7
1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2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3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4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그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
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삼상 13:1-7 / [블레셋 족속에 대한 항거] 사울은 ㄱ) 40세에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2년 동안 다스렸다. (ㄱ. 원문 판독에 따라 21세나 30세일 수도 있다) 2) 사울은 자기에게 모여든 이스라엘의 군인들 가운데서 3천 명만을 골라 놓고 나머지는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3천 명 가운데서 2천 명은 믹마스와 벧엘의 산지에 주둔하면서 직접 사울의 지휘를 받았고, 1천 명은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 언덕에 주둔하면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의 지휘를 받았다. 3-4) 요나단은 블레셋 족속들이 게바에 세워 놓은 전승비를 때려 부수고, 그것을 지키던 수비대들도 쳐죽였다. 이 소식이 블레셋 족속에게 전해지자 사울은 온 나라에 비상 나팔을 불고 이렇게 널리 알렸다. `블레셋 족속이 세워 두었던 전승비는 나 사울이 직접 때려부수었다. 이제는 블레셋 족속이 원수 갚으러 올 것이니 이에 맞서 싸우자' 이스라엘 백성은 이 소식을 듣자 모두 길갈로 와서 사울과 함께 싸울 준비를 하였다. 5) 블레셋 족속도 이미 싸울 태세를 갖추고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다. 그들은 3천 대의 전차를 6천 명의 기마병들이 몰고 올라왔으며, 그 뒤를 따르는 보병들의 숫자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벧아웬의 동쪽 믹마스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과 대치하였다. 6) 이를 본 이스라엘 군인들은 엄청난 병력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자기들이 꼼짝없이 궁지에 빠진 것으로 알고 전의를 상실해 제각기 굴속이나 숲속이나 바위틈이나 무덤 속이나 우물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었다. 7) 그리고 주력부대들은 대부분 요단강의 얕은 여울을 건너서 갓 지역과 길르앗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13장부터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한 사울의 초기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1-4) 보통 사울 왕을 실패한 왕으로 생각합니다. 처음에 가졌던 마음가짐을 계속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왕위에 오르고 이 년이 지났을 무렵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합니다. 11장에서 암몬 족속과의 전쟁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11장의 사울은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고(11:6), 군사를 소집한 결과 삼십만의 군사들이 모였습니다(11:8). 하지만 본문에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군사를 모집합니다. 사울 왕은 자신의 통치를 군사적인 기반 위에 시작하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기반 하지 않고 군사력에 기반을 둔 왕정통치입니다. 사울은 군사 삼천 명중 이천 명을 이끌고 믹마스에 진을 치고 요나단은 천 명을 이끌고 기브아에 진을 치게 합니다(2). 기브아가 사울의 고향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전쟁은 요나단이 공격으로 시작되었지만 사울이 지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단은 기브아에서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블레셋 수비대가 진을 치고 있는 게바를 공격합니다. 이 소식은 블레셋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고(3), 또 사울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쟁의 소식을 알립니다(3). 그러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전쟁을 하기 위해 길갈에 모입니다.
그를 따르던 모든 백성은 떨더라(5-7) 본 단락은 블레셋의 강한 군사력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여줍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의해서 실질적 지배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블레셋에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병거는 말이 끄는 전차를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병거가 없었지만 블레셋은 병거를 삼만 대나 가지고 있었습니다(5). 사사시대에 가나안 왕 야빈 병거 구백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십 년 동안 압제했던 것을 생각하면(삿 4:3), 병거 삼만은 엄청난 군사력입니다. 게다가 말을 타는 마병이 육천 명입니다. 또한 백성은 보병을 말하는데 이들의 숫자는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다고 말합니다. 블레셋인들이 이 엄청난 군대를 이끌고 믹마스에 진을 친 것입니다(5). 이스라엘의 모습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보여준 용맹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적 용 : 한 사람의 지도자가 백성들을 고난으로 이끌어 갑니다. 여러분은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어떤 지도자 입니까?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모인 블레셋 사람의 숫자는 어마어마했습니다. 병거가 삼만이요, 기마대는 육천이며, 보병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부터 기가 질려 버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굴과 수풀, 바위틈이나 은밀한 곳으로 숨어버렸고, 어떤 사람들은 요단 강을 건너 도망갔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도 두려움에 떨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에 의해 시작한 전쟁이 아닌, 사울이 시작한 전쟁이었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확신할만한 어떠한 제사도 드려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다스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두려운 현실만이 보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근거하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호크마 주석
=====13:1
구약 성경 중 특히 사무엘서는 본문 전승 과정상의 문제로 인하여 숫자상의난제가 많이 발견된다. 본절도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데, 비록 본서 저자가 일반적인 열왕기의 기술법에 따라(삼하2:10; 5:4; 왕상14:21; 22:42) 왕의 즉위 년도 및 통치 기간 등을 밝히고자 의도적으로 시도했을지라도, 여러 사본상의 차이로 인하여 그 해석에 있어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 벤 솨나 솨울 베말르크) - 이 말을 직역하면 '사울이 왕이 될 때에 한 살(일년)이었다'(It was one year since Saul became king)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많은 문제점이 따르게 되므로, 여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었다. (1) 이말을 의역하여, '사울이왕이 될 때에 한 살 난 어린이와 같았다'라는 해석이 있다(Targum, the Chaldee). 이것은 사울이 그만큼 순진했거나 또는 유치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너무 지나친 의역(意譯)으로서 그 타당성은 없다. (2) 원문의 '살'(year)앞에 나이를 표시하는 알파벱 또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되었다고 보고, 추측하여 '사울이 왕이 될 때에 30세이었더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Origen의 hexapla). 그러나 당시 사울에게는 병력을 통솔하고(3절) 적군을 무찌를 만큼(14:4) 성숙한 아들 요나단이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 해석 역시 적당치 않다. (3) 70인역 (LXX)은 이것을 원문에 없는 말로 보고, 아예 여기서 이 문구를 빼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 본문을 너무 가볍게 취급한 것이다. (4) 이 말을 약간 의역하여, '사울이 일년을 다스렸다'(saul regned one year)라는 해석이 있다.(KJV). 그러나 이것은이어 나오는 '다스린 지'(* , 말라크)라는 말과 중복된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은 듯하다. (5) 이 말을 본문 그대로 충실히 번역하여 '사울이 왕이 된 지 일년이었더라'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the Vulgate, Grotius). 그런데 우리는 이 다섯번째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다섯번째의 해석은 첫재, 성경은 우선 문자적 해석을 해야 한다는 해석 원리에 부합되며 둘째, 본절의 다음 문구인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울이 실제적으로만 일 년 간 이스라엘의 왕 노릇을 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 - 이 말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왕의 통치 기간 계산 방법
=====13:2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여 - 히브리 원문에는 '택하여' 앞에 '자신을 위하여'(* , 로)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의 이같은 행위는 암몬과의 싸움을 위하여 사울이 온 백성을 군대로 소집한 것과는 성격상전혀 다르다(11:7,8). 즉 사울이 택한 삼천 명은, 열방과 같은 왕르로서의 자신의 직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잘 훈련된 정예군이었을 것이다(Fay, Smith). 따라서 이것은 성전(聖戰)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병력이라기 보다는 사울이 자신으 가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 중 차출한 근위병적 성격이 강한 군대임이 분명하다(Klein; 14:52). 이천은...믹마스와 벧엘 산에 - 여기서 '믹마스'(Michmash)는 예루살렘 북쪽 약 15km, 기브아에서 북동쪽으로 약 7km 떨어졌으며, 해발 약 660m 정도의 고지에 위치하였다(Driver). 그러나 이같은 정도의 높이는 그 지역에서는 저지(低地)에 속한 편이었다(사10:28,29). 그런데 이곳 믹마스의 남족은 '와디수웨이닛'(Wadi Suweinit)이라는 협곡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남동쪽으로는 가파른 고개들이 있어 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이곳은 보리의 산출이 많은 곳인데, 오늘날의 위치는 '묵마스'(Mukhmas)이다(Robinson). 한편 '벧엘 산'(Mt.Bethel)은 본서의 다른 곳에서는 그냥 '벧엘'로 나온다. 이곳은 믹마스 북서쪽 약 7km 지점의 해발 약 960m의 고지에 위치했었다. 바로 이같은 이 지역의 표고(標高)때문에, 여기서는 '벧엘 산'으로 지칭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사울의 이같은 군사 행동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오잴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Leon Wood).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 사울의 장자 '요나단'(Jonathan)은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주셨다'이다. 한편 '베냐민 기브아'(Gibeah of Benjamin)는 사울의 고향 기브아를 가리키며, 또한 이곳은 이스라엘에 대한 사울의 통치 거점이였다<10:26>. 남은 백성은...장막으로 보내니라 - 이것은 사울이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소집했다가 다시 돌려보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그때 소집되지 않았음을 강조할 뿐이다. 사울이 이같이 한 이유는, 그는 (1) 훈련 안된 일반 백성들은 블레셋의 강한 군대를 이길 수 없다고 보았으며, (2) 또한 은밀한 가운데 블레셋 군대를 기습 공격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카일(Keil)은, 당시
=====13:3
게바에 있는 블레셋...수비대 - 여기서 '게바'(Geba)는 '기브아'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곳으로, 기브아 북동쪽 약 5km 지점에 위치한 지역이다. 오늘날의 우치는 '예바'(Jeba)로 판명된다. 그리고 '수비대'는 '기지' 혹은 '요새'란 뜻으로서, 아미도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통치 기간 중(삿13:1) 이스라엘의 주요 거점에 설치한 불레셋의'군사 초소' 또는 '파견 진지'를 가리키는 것 같다. 10:5 주석 참조. 한편 이처럼 이스라엘 영토 깊숙한 곳에 블레셋의 수비대가 잇었다는 사실은그당시 이스라엘이 불레셋에 의해 많은 압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9:16>. 치매(* , 나카) - 원래 '상하게 하다', '때리다', '죽이다'란 의미로서, 상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군사적인 공격 행위를 가리킨다(삼하13:28; 왕하10:25; 13:19; 대상18:9). 따라서 여기에 이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요나단의 군대에 의해 블레셋의 수비대가 거의 전멸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사울 휘하의 이천 군사가 포진한 믹마스와 벧엘 산은 블레셋 수비대가 있던 게바 북쪽에, 그리고 요나단이 이끈 이천 군사가 포진한 베냐민 기브아는 게바 남쪽에 가각 위치하고 있었다(2절). 따라서 그 포진 상태로 보아 사울과 요나단은 협공 기습 작전으로 게바의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하려했던 것 같다. 즉, 요나단의 군대가 정면 공격을 감행한 것 같고, 사울은 후방에서 공격을시도한 것 같다(R.Payne Smith).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 여기서 '블레셋 사람'(the Philistines)은 블레셋의 본토 주민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때 요나단에 의해 패배를 당한 '수비대'의 패잔병은 약 40km 정도 떨어진 자신들의 블레셋 영토까지 패주하여 자신들이 당했던 사실은 보고했던 것이다.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 여기의 '나팔'(* , 쇼파르)은 '양의 뿔'(the ram's horn)을 가리킨다. 한편 성경에서 '나팔'을 부는 행위는 '위험'을경고하며, '성전'(聖戰, the Holy War)을 선포할 때 주로 언급된다(수6:4; 삿6:34; 렘4:19;겔33:3). 따라서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블레셋 수비대를 격파한 승리의 소식을 알림과 동시에, 블레셋과의 대규모 전쟁을 준비키 위해 백성들을 소집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 '히브리 사람'(the Hebrews)이라는 명칭은이스라엘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서 자신들 상호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명칭은 타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의 저항과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려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70인역(LXX)은 '종들은 항거할지어다'(* , 에쎄테카신 호이 둘로이)라고 번역했으나, 그것은너무 지나친 의역이다. 그리고 '들으라'(* , 솨마)는 명령법으로 사용될 경우 상대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이다(신6:3,4; 삼하20:16; 대하13:4). 따라서 여기서 그 구체적인 내용은 4절을 참조할 때, 아마도 사울과 요나단이 불레셋 수비대를 격파함으로 인해 격분한 블레셋이 대규모 반격을 시도하려고 한다는 내용일 것이다(F.R.Fay).
=====13:4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 - 10:5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으로 나타나 있다. 10:5 주석 참조.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 이 단어(* , 니브아쉬)는 원래 '악취가 나다'란 의미이지만, 여기서처럼 수동형으로 사용될겨우 '증오(혐오)의대상이 되다'란 뜻이 된다(27:12; 출8:14; 삼하10:6). 한편, 블레셋이 이토록 격분한 이유는 물론 직접적으로는 사울과 요나단이자신들의 수비대를 공격 격파한 사실이지만, 그 전에 먼저 이스라엘이 그들의 왕을 세우고, 그 왕을 중심으로 군사력을 확보하여 암몬 군대를 물리치는 등 전면적으로 블레셋에 항거하는 일련의 행동을 취하였기 때문이다(R. Payne smith). 길갈 - '길갈'(Gilgal)은 요단 서편 약 6km 지점에 위치한 지역이다<7:16; 11:14>. 한편 사울이 이 지역을 백성들의 집결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요단 강 평야에 속한 들판이어서 병력집결이 요이하였고, (2) 자신이 백성들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곳이었으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며, (3) 당시 정치적 수도라 할 수 잇는 사울의 고향기브아는그 지리적 위치상 블레셋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여...좇으니라(* , 차아크) -이 단어는 원래 '소리치다', '부르짓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수동형으로 사용될 경우 '군사적 목저의 대규모 집결 행위'를 가리킨다(삿7:23,24; 10:17; 12:1; 왕하3:21).
====13:5
저자는 본절에서 블레셋 수비대에 대한 이스라엘의 습격에 대해 블레셋의 분노가 얼마나 컸고, 따라서 그 박격이 얼마나 거세었는지를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병거가 삼만...마병이 육천 - 여기의 이 숙자들은 서로 잘 조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증근동 지방에 있었던 고대의 전쟁에서 '병거'(chariot)의 숫자가 '마병'(horseman)의 숫자보다 많은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삼하10:18; 왕상10:26; 대하12:3). 이에 대해 혹자(Wordsworth)은 블레셋이 다른 동맥국들로부터 병거를 삯내어 빌려온 것이라고 주장하나, 당시 블레셋이 군사력이나 군사 장비에 있어 전혀 이스라엘에 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추측은 무리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병거'의 숫자 '삼만'은 필사자의 실수에 따라 과대하게 표기됐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러한 실수가 야기된 동기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원본은 1,000이었을 것이나, 필사자가 필사 중 1,000앞에 나오는 * (이스라엘)의 끝자 * ('라멧'-히브리 알파벱 수치상 '30'을 나타내는 단어)을 중복 기록함으로써 30,000이란 숫자로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Thenius, De Rossi, Bunsen), (2) 원본은 3,000이었을 것이나, 필사자가 필사(筆寫)중 3,000을 나타내는 숫자 '쉘로쉐느 엘레프'(* )중 '쉰'(* -히브리 알파벱 수치상 '300을 나타내는 단어)에 점을 두개 찍음으로써 30,000이란 숫자로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the Syriac, the arabic, Bo9chart, Houbigant, Schulz)등이다(Pulpit Commentary, Keil & Delitzsch, Lange). 한편, 여기의 '병거'(* , 레케브)는 보통 6개의 살이 달린 바퀴 두개가 달려으며, 두 필의 말이 끄는 전투용 수레였다. 이 수레의 대부분은 나무 및 가죽으로 이루어졌으나, 중요 부분은 청동이나 처로 장갑(裝甲)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병거의 뒷편은 열려있으나 앞면은 전사(戰士)의 보호를 위하여 어느 정도 높이까지 가리워져 있었다. 대개의 경우 이병거에는 두 사람 정도가 탔다. 그리고 '마병'(** , 파라쉼)은 B.C.1200년 경에 처음 조직된 듯하며, 그 목적은 적군에게 내달리어 좌충 우돌하며 그들의 대오를 흐트리고, 그리하여 적군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기 위함이었다. 백성은..모래 같이 많더라 - 블레셋 군대의 일반 '보명'(步兵)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모래 같이'란 표현은 숫자의 많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독특한 성경적 표현이다(창13:16; 수11:4; 삿7:12; 삼하17:11). 벧아웬 동편 믹
적으로 '장막을 세우다'란 뜻이다.
=====13:6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 여기서 '위급함'(* , 차르)은 '포위공격하다', '고통당하다'에서 온 말로서, 물리적인 압박에 의하여 극도의심적(心的) 고통을 느끼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28:15; 민 33:55; 삿11:7; 시31:9; 애1:20). 그리고 '절박하다'(* , 나가스)란 말 역시 '몰다', '내리누르다', '괴롭게 하다'란 의미로서, 곧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상태를 가리킨다. 결국 이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울의 뜻에 응하여 모였으나, 블레셋의 막강한 군사력의 위용에 기가 질려 전의(戰意)를 상실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굴과 수풀과 바위틈 - '굴'(cave)은 팔레스틴 지방에서 흔히 발견되는석회암으로이루어진 천연 동굴을 가리킨다. 후일 다윗도 사울으로부터 추격을 받을 때, 이러한 국 속에 피신한 적이 종종 있었다(24:3). 그리고 '수풀'(* , 호아흐)은 가시나무가 울창한 곳을 가리킨다(왕하14:9; 대하25:18; 아2:2). 또한 '바위틈'(crags)은 커다란 바위들 사이를 뜻한다(민24:21; 삿15:8; 사2:21).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 여기서 '은밀한 곳'(* , 체리아흐)은 (1) 아랍어에서 온 단어로 보고,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무덤 속의 한 공간을 가리킨다는 해석(Klein), (2) 팔레스틴의 지형적 조건을 염두에 두고, 지하에 형성된 자연적인 공동(空洞)을 가리킨다는 해석(Driver), (3) 성경에 나타나는 이 단어의 다른 용례를 중시하여, 건물의 한 방을 가리킨다는 해석(삿9:46,49)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들 중, 여기의 전투 장소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산악(山岳)지역이라는점을감안한다면 두번째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웅덩이'(cistern, NIV; pit, KJV)는 말라버린 우물의 구덩이, 또는 물을 저장할 목적으로 파놓은 구덩이 등 모두를 뜻한다(R.Payne smith).
=====13:7
어떤 히브리 사람들 - 원문은 '그리고 히브리 사람들'이란 뜻이며, '어떤(some)이란 말은 없다. 아마도 번역자가 문맥상 삽입한 것 같다. 한편 '히브리 사람'(* , 이브림-the Hebrews)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이방 민족들이 경멸조로 사용한 말인데<3절>, 여기서는 이스라엘 사람인 저자에의해서 그 말이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저자가 여기서 일부 이스라엘 사람을 이같이 표현한 이유는 (1) 이들이 민족의 긴박한 상황을 무시한 채 요단 너머로 도피했다는 사실(Smith), (2) 또는, 추측컨데 이들이 전에 블레셋 족속의 용병으로 봉사했었다는 사실(gottwald) 중 하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문맥상 첫번째의 견해가 타당한 것 같다. 요단 - 수4:19-24 강해, '요단강'을 참조하라.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 '갓'(god)은 갓 지파가 여호수아로부터 기업으로 분배받았던 땅을 가리킨다. 당시 갓 지파의 기업은 요단 동편,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지파의 기업 가운데 위치했었다(민32:1-7, 34-36; 수13:24-28). 그리고 '길르앗 땅'은 (1) 넓게는 요단 동편 지역 전체를(수22:9; 삿5:17). (2) 일반적으로는 요단 강 동쪽의 땅 중 갈릴리 호수 남단에서 아르논 강까지를 가리킨다. 한편 이 지역은 서쪽으로는, 해면보다 약 230m나 낮은 요단 계곡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해발 약 1,100m 이상의 산등성이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지역은 물이 많아 수목이 울창하며 목초지로도 훌륭하였다.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 당시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위하여 백성들을 소집하면서 틀림업이 사무엘의 후원을 받았을 것이며, 따라서 이제 그는 블레섯과의 전투에 소집된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사무엘의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였다. 이에 다라 그는 사무엘을 기다리기 위하여 백성들이 소집될 장소로 지정된 길갈(Gilgal)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분명 사울은 그때 블레셋을 격파한 미스바전투(7:7-11)를 생각하면서, 이번 전쟁에서도 사무엘의 도움이 자신에게는 절대적으로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 설 교 >
사무엘상 제13장 강해
사울의 망령된 제사
사울이 왕위에 등극한 뒤에 그의 통치에 대한 내용이 없고, 본 장에서는 그의 불순종이 시작이 되면서 왕에서 폐위 될 것으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절박한 상황이라도 직접 제사를 드리는 망령된 행위는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으로써 폐위의 통보를 받게 됩니다. 사울의 단순히 제사를 드린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 그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나타내는 행동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이 뜻을 스스로 정한 뒤에 그 뜻을 이루려는 요식 행위로서 제사가 드려진 것입니다. 즉 인본주의적인 사울의 신앙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 사울이 왕이 된 2년에 군사력 강화를 시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이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은 자신의 임무가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내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조직한 상비군으로 게바에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하고, 이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전쟁을 위해 군사를 소집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소집 명령에 응하여 길갈로 모였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 비해 수와 장비에 있어서 월등한 블레셋 군대를 마주하자 이스라엘 군사들은 불과 육백여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숨기에 바빴고 그 남은 자들도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상 중대한 국면을 이룬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때 사울은 처음 왕 되었을 때와는 달리 인본주의적이며 불순종적인 자세를 띠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그 모험적 군사 행위를 실행하는 데 있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은 채 자기 중심적인 판단에 의해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선민 이스라엘의 신본적 왕의 자세를 잃고 만 것입니다. 이는 사울의 중대한 실정입니다. 이렇게 되어 불순종의 죄를 낳아 그의 왕권이 폐지되고 신본적 왕인 새 왕 다윗이 예비 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이 두려움에 떠는 것을 보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신의 힘보다 큰 시련과 대적을 만나면 두려움과 공포에 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하게 의뢰하는 자는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시 3:6;23:4;27:3).
1: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이 말은 히브리 원문을 지역하게 되면 ‘사울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한 살이었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사울이 준수한 소년으로서(삼상 9:2)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된 사실과 맞지 않습니다(삼상 10:1, 17-24). 따라서 ‘사울이 왕이 된지 일년이었다.’는 견해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 되는 때에’라고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이 년’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왕들의 쟁위 기간을 계산하는 독특한 계산 방식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종교력 제1월(니산월 혹은 아빕월)을 기산으로 할 경우 다음해 니산월까지가 1년이 됩니다. 그래서 재위 기간이 만 1년이 되지 못하였을지라도 그 중간에 니산월을 당하면 그때는 재위 제2년으로 계산을 합니다.
2: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벤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박으로 보내니라.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여’ 문자적으로는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 사람 3천을 택하여’라는 뜻입니다. 이는 민족적 위기 상화에 사울이 이스라엘 온 백성을 소집한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삼상 11:6-8). 사울이 점차 행정 체제와 군사 조직을 갖추어 나가기 위하여 이번에는 자신의 근위병을 선발한 것입니다(삼상 8:11). 이들은 정예화 된 병사들로서 사울 왕조를 뒷받침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활약하였습니다(삼상 14:52). ‘막마스’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 예루살렘 북동쪽 약 12km 지점에 위치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와디 수웨이닛’이라는 계곡과 험준한 고개들로 연결되어 있어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벧엘’은 믹마스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사무엘 순회 통치하던 성읍입니다(삼상 7:16). 여기서 특별히 ‘벧엘 산’으로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곳이 해발 약 950m의 고지대였기 때문입니다.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 대한 신앙심이 매우 돈독하였습니다(삼상 14:1-140. 그가 다윗과 더불어 진실한 우정을 나눈 것은 본서 기자가 강조하고 있습니다(삼하 1:26).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으로 사울 통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사울은 이방 침략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며, 블레셋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군사 행동의 일환으로 이와 같은 군사를 주요 요충지에 배치시켰을 것입니다.
3: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게바는 예루살렘 북쪽 10km 그리고 기브아 북동쪽 5km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원래 베냐민 지파의 기업이나 레위인의 성읍으로 구별된 곳입니다(수 18:24;21:17). ‘수비대’는 블레셋이 이스라엘 통치를 위해 주둔시킨 군사 기지이거나 초소일 것입니다(삼상 10:5).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는 곧 급박한 위기 상황을 알리는 행위입니다. 즉 요나단의 블레셋 수비대 공격으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이 군사적인 행동을 취할 것에 대비하여 사울은 온 백성들에게 전쟁 준비의 소식을 전하고 군사를 소집하려 한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 ‘히브리(이브리: עברי)’란 말은 ‘이스라엘인’, ‘유대인’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는 대개 다른 민족이 이스라엘을 멸시하여 부를 때 주로 쓰였고 스스로는 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삼상 4:6;14:11).
4: 온 이스라엘이 사울의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함을 듣고 길갈로 모여 사울을 좇으니라.
‘사울의 ~ 친 것과’ 이는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쳤다는 말과 상충되는 것으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요나단이 정면에서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칠 때에 사울은 요나단을 도와 후면 공격을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이는 극도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미움을 산 이유는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고 상비군을 두는 등의 행동으로 신경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 이유는 블레셋의 수비대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모여~ 좇으니라’ 이는 소리치다, 함성을 지르다는 말입니다. 군사적 행동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사울의 전쟁 준비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길갈로 속속 모여든 것입니다.
5: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여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서 베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치매
‘병거(레케브: רכב)’는 대개 두 필의 말이 끄는 전투용 수레를 가리킵니다. ‘마병(파라쉼: פרשׁים)’은 말을 타고 적군을 향해 돌진하여 적의 대오를 흩트리는 임무를 띤 병사들을 가리킵니다. 전쟁 수행 시 동원되는 병거는 마병보다 수가 적은 것이 일반적입니다. 본 절에서는 마병에 비해 병거의 수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필사의 오기로 보고, 그 수를 1,000 또는 3,000으로 봅니다. ‘백성은~ 모래 같이 많더라.’ 여기서 백성은 마병과 병거군을 제외한 나머지 블레셋 군을 가리킵니다. ‘모래같이’ 또는 ‘하늘의 별같이’라는 말은 숫자의 셀 수 없이 많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창 13:16; 15:5; 출 32:13; 신 28:62). 블레셋의 증오심과 이스라엘의 왕정 체제를 처음부터 궤멸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시사해 줍니다. ‘벧아웬’은 ‘우상의 집’ 또는 ‘악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위급함(차르: צר)’과 ‘절박함(나가스: נגשׁ)’은 동의적 의미로 물리적 또는 심리적 압박감을 못 이겨 고통스러워하거나 당황스러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블레셋의 군사 앞에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모르는 이스라엘 병사들의 심정 상태를 잘 나타내 줍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위기 소식을 접하고 구국 충정으로 전쟁터에 나왔으나 블레셋의 엄청난 전력에 그만 기가 질린 것입니다. 그들은 ‘굴과 ’은밀한 곳‘ 즉 석회질 토양으로 이루어져 있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연 동굴이나 그에 상응하는 지형물에 숨은 것입니다. 숨을 수 있는 곳은 전부 찾아가서 숨은 것입니다.
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떨더라.
‘갓과 길르앗 땅’ 갓, 르우벤,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차지한 땅을 가리킵니다. 그곳은 곧 남으로 아르논 강에서, 북으로 갈릴리 바다와 길르앗 길목을 잇는 지경까지입니다.(민 32:33-41).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8절로 보아 사울은 이곳에서 사무엘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과거 사무엘이 블레셋을 이긴 미스바 전투(삼상 7:7-14)를 기억한 사울은 사무엘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사무엘은 이레 안에 사울에게 나아가겠다고 응답하였을 것입니다.
8-14절: 사울은 블레셋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국지전을 벌였으나 오히려 블레셋의 총공세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정해진 약속 기한이 다하도록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자 스스로 번제와 화목제를 집전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성급한 행동의 표면적 이유는 블레셋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도망에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본주의적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적인 근본 자세를 반영한 것이었기 때문에 결국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그에 대한 책망과 함께 그의 왕위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야 말았습니다. 사울이 제사를 직접 드린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것이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사울의 근본 믿음이나 사고 방식 자체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보여 준 사건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대로 하는 행동은 결국 신앙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을 통하여 신정통치를 이어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8: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 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로부터 도움 요청은 받은 사무엘은 정한 기간 내에 도착할 테니 기다리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이레가 되어도 사무엘이 오지 않자 사울과 백성들이 동요하여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웠지만 그 왕이 자신들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할 수 없음을 보고 절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무엘이 실제로 정한 기간 내에 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는 끝까지 참지 못한 사울의 경거망동이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9: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 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사울은 백성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급해 져서 스스로 제사를 드리고 말았습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 사무엘에게 도움을 청한 만큼,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제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사무엘이 친히 집전해야 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다리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무엘의 말은 곧 사울의 순종 여부를 시험한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순종하여 통과하였다면 왕위가 견고히 서고 불순종하여 실패하면 왕위가 폐하여 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선악과 시험에서 실패했듯이 불행히 사울도 역시 시험에서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과 충성을 상징하는 제사며, 화목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교제를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10: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울의 행위가 너무나 조금한 행위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울은 약정한 엿새 동안 잘 참았으면서도 마지막 하루를 온전히 참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실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확신하고 겸손히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한 인간적 방도를 강구하려한 데 더 마음이 쏠려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입니다.
11: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사무엘의 말은 사울의 불순종에 대한 질책입니다. 이에 대한 사울의 변명은 ⓵ 백성의 흩어짐 ⓶ 사무엘이 약속 시간 내에 오지 않음 ⓷ 블레셋 군사들이 믹마스에 모여든 급박한 상황입니다. 이는 실상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오히려 사무엘과 백성과 위급한 상황 등에 돌리려고 하는 책임회피성 발언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범죄를 타인에게 전가시키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의 지적에 겸허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죄를 낳고 결국에는 멸망을 가져오듯이 그러지 아니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 한 탓에 사울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선고되고 만 것입니다.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이 말은 ‘여호와의 얼굴을 뵙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즉 전쟁하기 전에 하나님께 출전 여부를 묻고 또한 승리를 기원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삼상 7:9) 이는 물론 성전(聖戰: Holy War)의 기본 개념입니다. 여기서 사울이 오해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제사를 드리는 것만으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제사의 참된 의미를 간과한 채 제사 자체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망령되다(사칼: סכל)의 기본 뜻은 ‘어리석게 굴다’ ‘교만스럽게 행동하다’는 뜻입니다. 사울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죄악 된 행동이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간구하였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대적을 물리쳐주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영광을 거두시는 장면을 목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처음의 모습과 달리 순종하는 겸손과 인내도 없었습니다. 이는 요나단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블레셋을 물리친 것과는(삼상 14:6-15) 너무나 대조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가 누렸을 복이 어떠한 것이었을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도 사울의 왕조가 길게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고 예비하신 다윗 왕국(창 49:10;삼상 16:1,13)은 형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사울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강조한 결과론적인 구절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하였을 경우에는 형통한 삶을 살다가 자신의 왕권을 자손에게 물려주고 죽었을 것은 또한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사울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의 형벌을 가져왔듯이 사울의 범죄는 그에게 왕위의 상실을 가져왔습니다.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심판을 듣고 그 즉시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남은여생만은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더 강퍅하여 계속 범죄하였으므로 이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재확인하였습니다(삼상 15:17-29). ‘그 마음에 맞는 사람’ 끝까지 신본주의적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인본주의적 자세를 보인 사울과는 달리 비록 중간 중간 죄를 짓기는 하지만 끝까지 신본주의적 자세를 견지한 다윗을 새로운 왕으로 세울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5-23절: 블레셋과 전쟁하기 위해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매우 열세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이스라엘의 군사는 겨우 육백여 명에 불과했으며 게다가 전쟁에 필요한 무기조차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이런 전력은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의 강성함(삼상 8:12-17)과는 비교가 될지 않을 정도로 약화가 된 것입니다. 아마 사무엘 통치 기간 중 있었던 신앙개혁에 따른 영적, 물적 풍성함이(삼상 7:1-4)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영적 타락과 더불어 약화되었기 때문이며, 점차 인본주의적 통치를 행하는 사울의 치세 속에서 그 도가 더욱 심화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전력적 약세가 아니라 모든 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전과 평화는 요원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5: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한 백성을 계수하니 육백 명 가량이라.
백성의 동요를 막기 위한 사울의 인본주의적 발상에 의한 제사가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줍니다. 처음에 사울과 함께 한 자들은 이천 명이었는데 그 중 반 이상은 흩어지고 겨우 육백 명만 남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도 사울은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16: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과 그들과 함께한 백성은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진쳤더니
‘베냐민 게바’ 이곳은 믹마스와는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17: 노략군들이 삼 대로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나와서 한 대는 오브라 길로 말미암아 수알 땅에 이르렀고
‘노략군들(마쉐히트: משׁחית)’ 본래는 불법을 자행하며 타인의 물건을 약탈하고 훼손시키는 자들입니다. 여기에서는 적진에 돌격하여 대오를 흐트러놓는 임무를 지닌 선발대를 의미합니다. 블레셋이 많은 수의 병력을 이용하여 협공 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는 적은 수로 함께 모여 대오를 정비하던 이스라엘과 비교되어 위기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각각 북쪽, 서쪽, 동쪽으로 진격하여 이스라엘은 순식간에 초토화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브라 길로 말미암아 수알 땅에’ 오브라는 벧엘 북지파의 기업입니다. 후대에는 에브라임 지파의 성읍으로 취급이 되었는데 한 때 가나안 족에게 빼앗겼던 것을 에브라임 지파가 되찾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수알’은 아직까지 그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브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곳은 많은 군사들이 집결할 수 있는 비교적 넓은 지대였을 것입니다.
18: 한 대는 벧호론 길로 향하였고 한 대는 광야를 향한 스보임 골자기가 내려다보이는 지경 길로 향하였더라.
‘벧호론 길’ 벧호론은 예루살렘 북방 18km 지점이며 믹마스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이는 2개의 성읍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각기 ‘위 벧호론’과 ‘아래 벧호론’으로 불렸습니다(수 10:10). ‘스보임 골짜기’ 믹마스 남동쪽의 베냐민 지경 내에 있던 골자기입니다.
19: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침공이 없어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철기 문명은 B. C. 2000년 경 힛타이트족에게 의해 크게 발전되었습니다. 철을 제련하여 가공하는 기술이 팔레스틴에 전래된 것은 B. C. 1200년경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윗 시대 전까지 철을 다루는 기술이 크게 뒤져 있었습니다. 이는 팔레스틴에서 철광석의 산출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블레셋 족이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동안 철기 산업을 철저히 통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고대에 승전국이 패전국에게 흔히 행하던 정략적 조치였습니다. 그들은 패전국의 반란을 막기 위해 무기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조처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철공들은 블레셋에 포로로 잡혀갔을 것이라고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20, 21: 온 이스라엘 사람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버리려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내려갔었는데 곧 그들이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 채찍이 무딜 때에 그리하였으므로
당시 이스라엘에 철공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블레셋의 대장간을 이용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실은 군사적으로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버리려면’ 날이 무디어진 연장을 연마하여 다시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22: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으니라.
이스라엘이 군사력 측면에서는 도저히 블레셋을 상대할 수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무기가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기구로 무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은 병거와 마병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이번 전쟁은 이미 승패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장에서 볼 수 있듯이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승리를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23: 블레셋 사람의 부대가 나와서 믹마스 어귀에 이르렀더라.
이들은 앞서 파견된 선발대와는 다른 블레셋 군의 본대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전진 배치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이스라엘은 더욱 두려움에 떨게 했을 것입니다.
위기를 극복하는 신앙
박상일목사(평온교회) / 삼상 13:1-7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의 대속죄일에 이집트와 시리아를 주축으로 한 아랍연합군이 일시에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이 전쟁이 바로 제 4차 중동전쟁이고, 대속죄일에 전쟁이 났다고 해서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모든 일을 멈추고 기도하는 대속죄일에 갑자기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초기에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이었던 모세 다얀(Moshe Dayan)은 긴급 성명을 통해 “우리에게는 숨겨놓은 비밀 신무기가 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랍국가들은 그 신무기가 핵무기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잠시 주춤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해서 재 반격에 나선 이스라엘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비밀 신무기가 뭐냐? 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모세 다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무기는 시편 121편 말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기자들과 아랍국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다얀에게 지혜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세 다얀의 말이 맞는 말입니다. 지금 어느 때 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주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이 처한 위기상황 앞에서 통회자복하며 기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지금의 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에 큰 위기상황에 빠지게 된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지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 때 사울 왕에게는 군사 3000명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더 많았지만 3천 명만 남겨두고 다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3천 명 가운데 2천 명은 자신이 직접 거느리고 있고, 나머지 천 명은 왕자인 요나단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군사를 이끌고 블레셋 영토인 게바로 진격해 들어가서 게바에 있던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했습니다. 물론 요나단이 이끄는 이스라엘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게바의 수비대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블레셋이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땅으로 쳐들어왔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시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서 쳐들어온 블레셋 군대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병거가 3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병거(兵車)는 두 마리의 말이 이끄는 전투용 마차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병거 한 대에 두 명의 병사가 타고 있습니다. 그러면 병거에 탄 군사의 수만 해도 6만 명입니다.
그리고 마병(馬兵)이 6천 명이었습니다. 마병은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진격해서 상대 진영을 흐트러뜨리는 역할을 감당하는 선발대를 의미합니다. 그런 군사들이 6천명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병거나 말을 타지 않은 보병의 숫자도 엄청나게 많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어서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싸우러 나온 블레셋 군대의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겨우 3천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군대는 무기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에 나오는 22절에 보시면 당시에 이스라엘 군대가 가진 무기는 사울 왕과 왕자 요나단이 가지고 있는 칼 두 자루가 전부였습니다. 일반 군인들에게는 칼이나 창이 없었습니다. 아마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나무로 만든 창이거나 몽둥이가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을 뿐만 아니라, 해양민족인 그들은 일찍이 철기문화를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철로 만든 무기들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제대로 싸움이나 되겠습니까? 무기에서도 그렇고 군사의 수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사울왕은 군대를 이끌고 일단 후퇴를 하게 됩니다. 그들이 후퇴를 한 곳이 바로 길갈이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사울이 왜 길갈로 후퇴를 했을까요? 길갈은 요단강에서 불과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 평지입니다. 군대를 추가로 모집하고 집결시키기에 굉장히 좋은 장소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길갈로 후퇴를 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 첫발을 내디뎠던 곳이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가 머물면서 이스라엘을 진두지휘했던 본부가 있었던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길갈은 굉장히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는 그 이유 말고도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가 바로 길갈입니다. 사무엘상 11:15에 보시면 사울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된 곳이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의 공격을 받고 사울 왕이 길갈로 돌아간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왕으로 추대해준 곳이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이 세운 사울 왕이 큰 위기를 맞아 길갈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모든 백성들이 사울 왕을 돕기 위해 그곳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4절에 보시면 사울 왕의 생각대로 많은 백성들이 길갈로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군대의 규모를 보고 깜짝 놀라서 도망치기에 바빴습니다.
오늘 본문 6-7절에 보시면 길갈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요단강을 건너 도망을 친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15절에 보시면 사울 왕과 함께 길갈에 남은 사람은 불과 600여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600명도 사울 왕과 함께 싸우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과 함께 남은 사람들도 두려움 때문에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자기 몸을 숨기기에 바빴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도 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울 왕은 자신이 길갈로 돌아가면 많은 백성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 자신을 도와줄 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의 이런 생각이 크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사울 왕에게 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백성들이 사울 왕의 곁을 다 떠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울 왕이 길갈로 돌아간 것은 백성들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백성들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는 말은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146:3에 보시면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사람을 의지한다면 그것이 바로 패배의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이런 상황에서 자기를 왕으로 추대해준 백성들을 의지하려는 생각보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생각을 먼저 했어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믿음의 자세를 먼저 보였어야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사울 왕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더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더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한 때는 정말로 든든한 후원자였던 백성들이 막상 위기상황에서는 전혀 사울 왕에게 도움이 되어주지를 못했습니다. 과거에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길 때에는 사울 왕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어려워지니까 사울 왕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사람은 좋을 때는 뭐든지 다 해 줄 것 같지만 정작 내가 필요로 할 때에.... 아니면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위기가 느껴지면 먼저 내가 살 궁리를 하지 목숨을 걸고 도와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라고 확실하게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곁에서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할 때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그것도 계속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지만 열왕기하 19장에 보시면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습니다. 맞서서 싸울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앗수르 왕이 보낸 편지를 손에 들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항복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협박하는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히스기야 왕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 산헤립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조롱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항복하라고 협박하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저들을 대항해서 싸울 힘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한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룻 밤 사이에 185,000명의 앗수르 군사들이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히스기야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들에게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이 내용이 성경에 세 번씩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똑같은 사건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굳게 믿고 신뢰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우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반대로 유다의 마지막 왕들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하나님보다 강대국인 애굽을 더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애굽의 힘을 빌려서 이스라엘의 살 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가 의지하려는 애굽은 너희에게 갈대 지팡이에 불과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애굽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은 바벨론에게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애굽을 의지하던 유다와 유다의 왕들도 다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 비참한 말로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우리에게 결코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시편 18편에서 다윗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아키바라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정신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반란에 실패하자 로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성경공부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만일 성경공부를 하다가 붙잡히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키바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계속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이 ‘왜 성경공부를 시키느냐?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아키바는 이런 비유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 배고픈 여우가 시냇가를 거닐고 있는데 물속에서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도망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바쁘게 헤엄쳐 다니느냐?”라고 여우가 묻자 물고기들은 “어부들이 그물로 우리를 잡으려고 하기 때문에 도망 다닌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여우는 속으로 맛있는 생선요리를 먹을 수 있겠다. 라는 생각으로 물고기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육지로 올라올래? 내가 안전한 곳을 가르쳐줄게. 어부들이 한 명도 없는 곳이야.” 이 말을 들은 물고기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이 미련한 여우야, 너는 우리에게 이 물속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물고기에게는 그물에 걸릴 위험이 있어도 물속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아키바는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 때에 가장 안전한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성경은 물과 같은 것이어서 성경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공부를 멈출 수 없다. 라고 말해준 것입니다.
여러분! 물고기는 어부들의 그물에 걸릴 위험이 있어도, 낚시꾼의 낚시에 걸릴 위험이 있어도 물속에 있어야 가장 안전합니다. 우리의 삶에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다가와도 성도인 우리들은 하나님 품속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시는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길갈이 사울 왕을 위기상황에서 건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 왕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를 코로나라고 하는 이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 위로자가 되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라와 민족도 사랑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세계선교를 말할 수 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무슨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의 국가적인 큰 어려움 속에서도 모든 성도들이 나라를 위해 더욱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1절 이하에 보시면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중보자가 되어 고통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위로자가 되어주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않은 방법으로 승리를 허락해주시고, 이 나라와 민족을 더 크고 강대한 나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늘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거의 한계상황에 도달해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 즉 예측불허(豫測不許)의 상황입니다. 누구도 확실한 답을 줄 수 있거나 결과를 속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미리 속단을 내리다가 실족하였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국가적으로 기도의 날을 정하여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 됨을 선포하였습니다. 누가 어리석은지 지혜로운지를 우리는 잘 판단해야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을 바로 그 때가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입니다. 고난의 바다를 하나님이 지나가게 해주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스가랴 10:12에 보시면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44:5에서는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시편 115:11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지금의 힘든 시기를 잘 지나가게 해주시고 또 이런 고난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더 견고해지는 은혜를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위기상황으로 말미암아 국민들이 다 불안해하는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함으로써 지금의 모든 위기상황을 잘 극복해나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였더라면
삼상 13장 / 양인국목사
1. 사울은 사십 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 가운데 삼천을 택하여 군사로 삼았고, 그중 이천은 자신의 지휘 아래 두었고 나머지 천명을 요나단의 지휘 아래 있게 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10:5, 13:3).
2. 3,4절의 말씀이다.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그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 여기 게바는 블레셋의 수비대가 있는 곳이다. 요나단은 게바에 있는 수비대를 쳤다. 사울은 요나단의 일로 블레셋이 반격해 올 것을 알고 이를 대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군사를 모집하였다. 본문에서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었다”는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대비하여 백성들 가운데 군사를 모집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블레셋은 사울이 예측한 것처럼 요나단의 수비대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큰 군대를 이끌고 벧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쳤다. 그들의 군대 규모는 병거가 삼만이었고 마병이 육천 명 그리고 군사의 수는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다(13:5). 6,7절은 블레셋 군대에 대한 이스라엘의 두려움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여기 “위급함” “절박” 등은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전쟁도 하기 전에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그래서 그들은 숨거나 또는 도망하였다.
우리는 전쟁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이런 모습을 보며 다음과 같은 물음을 가져본다. 이와 같이 위급한 현실에 직면한 이스라엘은 두려움으로 떨거나 도망가는 일 외에 블레셋과 싸워 승리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까?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와 같은 위기에 직면한 때가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여호사밧 시대에 모압과 암몬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도 국가적인 위기를 만났고(대하20:1,2), 히스기야 시대에 앗수르의 산헤립의 침략을 받았을 때에도 이스라엘은 위기였다(대하32장). 이처럼 그들도 사울의 때에 블레셋의 침략으로 인하여 직면하게 된 것과 동일한 위기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적들로 인하여 두려워 떨거나 또는 도망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과 싸워 승리를 얻었다. 그들이 이와 같은 위기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나가 구원을 탄원했기 때문이다. 사울도 블레셋의 침략을 받아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나가 전심으로 구원을 탄원했더라면 오히려 위기를 승리의 기회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할 지도자가 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은 이와 같은 영적 지도력이 없었다.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13:8-12)”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위기 가운데 사울이 한 일은 사무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정한 기한 내에 그곳에 오지 않았다. 사무엘이 정한 기간은 “이레”였다. 본문은 사무엘이 어째서 정한 기한 안에 오지 않았는지 말하고 있지 아니하므로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후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한 말들을 생각할 때 사무엘은 정한 날짜에 오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으나 환경이 그를 지체시킨 듯하다. 사울은 사무엘이 기한 내에 오지 않자 사울의 군사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울은 조급한 마음에서 왕으로서는 할 수 없는 번제를 드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급해 지는 것은 사울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하면 조급함은문제 해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울로 하여금 조급하도록 한 것은 군사들이 블레셋의 군사력에 압도되어 도망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울의 지휘아래 있던 군사의 수는 이천이었는데, 블레셋의 군사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망가고 남은 사람은 육백명 정도였다. 그런데 블레셋의 군사력을 생각하면 이천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으나 육백명의 군사를 가지고 있으나 블레셋과 싸워서 이길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사울이 블레셋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군사의 수를 지키는 것이 아니었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이와 같은 때 하나님께 나가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어리석게도 이천명의 군사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조급해 하며 하나님이 뜻을 거역하고 제사장들만 드릴 수 있는 번제를 드린 것이다. 사울의 이야기는 모든 시대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조급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사울이 번제를 드린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13:12). 그는 백성이 자신으로부터 흩어지는 것을 보았고, 블레셋 사람이 믹마스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와 같은 위기 가운데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번제를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번제는 제사장 외의 누구도 드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은 성전 봉사와 제사를 드리는 일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만 허락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사울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하여 번제를 드렸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여기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은 은혜를 구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명하심을 거스르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울이 불신앙에 빠진 것은 위기만을 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울이 제사를 드린 후 사무엘이 그곳에 도착했다.
13-15절의 말씀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의 수를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라”
여기 “망령되이 행하였다”란 어리석게 행했다는 뜻이다. 사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초율법적이 되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자라는 의미다. 사울의 이와 같은 모습은 자아 중심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아 중심적인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사는 것은 최선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라고 책망하며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이라고 책망하였다. 사울은 스스로 어리석은 길을 택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를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 주셨지만 그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는 왕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여기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바로 가까운 장래에 그의 왕권이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지도자는 중요하다. 지도자가 마땅히 행할 일을 하지 못할 때 그로 인하여 그의 지도력에 의존하고 있는 백성들이 큰 불행을 당하게 된다. 실제로 본문이 말해 주고 있는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볼 때 사울과 그의 통치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장래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만일 사울의 생애 가운데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였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지도자의 행위 하나하나는 자신과 자신의 지도력을 받는 자들에게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사울이 이처럼 어리석은 길을 택하신 것에 대하여 슬퍼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심정은 다음 구절이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여기 “그리하였더라면”이란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영히 세워질 수 있는 길은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평화의 때에든지 전쟁의 한 가운데 있을 때든지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할 것이다. 이것만이 형통의 길이며 또한 영영히 세워질 수 있는 길이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삶의 여정에서 블레셋을 만날지라도 그리고 나의 군사들이 흩어질지라도 조급해하지 않게 해 주시고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 주의 도움을 구하게 해 주옵소서. 아멘
사울과 길갈
삼상 13장 1~7절 / 안효관목사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었던 엘리야 선지자는 왕비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한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이제 내 생명을 취해 가시라’고 하소연을 하고 깊은 잠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갖다 주십니다. 그것을 먹고 다시 깊은 잠을 청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엘리야를 깨웁니다. 깊은 휴식을 취한 엘리야게 다시금 먹을 것을 주십니다. ‘먼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이것을 먹고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부르십니다. 엘리야가 머물고 있던 브엘세바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호렙산까지는 거리가 약 350km쯤 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온통 사막입니다. 먹을 것이나 마실 물을 쉽게 구할 수 없는 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막을 가로질러 그는 350km를 걸어서 호렙산까지 갔습니다. 거리상으로 보면 350km는 걸어서 10일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40일에 걸쳐 호렙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길이 사막의 힘든 길이기 때문에 오래 걸렸는지, 아니면 호렙산까지 가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다른 훈련을 시키셨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엘리야는 40일 만에 호렙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호렙산에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내 할 일 다 했으니 죽여달라’고 하소연하던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으로 세우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의 후계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엘리야는 다시금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엘리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습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브엘세바 광야에 있던 엘리야를 밤낮 40일이나 걸어서 가야만 하는 호렙산으로 부르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해야 할 사명을 주시면서 다시금 돌아가라고 하셨는데, 다시금 돌아가야 할 길이라면 왜 굳이 그 먼 길로 부르셨는가 말입니다. 그냥 브엘세바 광야에서 엘리야에게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런 이런 일을 네가 해야 하니까 지금 당장 엘리사에게로 가라.’ 그렇게 말씀하셔도 될텐데, 왜 굳이 호렙산으로 불러서 그 일을 시키셨을까요? 분명 엘리야는 40일 동안 사막을 가로질러 오면서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어 고생했을 것이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에서 마실 물도 구할 수 없어 갈증으로 고생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굳이 엘리야를 그 먼 호렙산까지 부르셨을까요? 히든 길을 말입니다. 철이 덜 든 엘리야에게 고생 좀 해 보라고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부르시면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왕상 19:8) 호렙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름으로 한다면 시내산입니다. 이 시내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산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곳이 바로 이 시내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이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맺은 곳도 바로 이 시내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시내산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산과도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의에 빠져 있는 엘리야 선지자를 그 시내산 - 호렙산으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서 인생을 새롭게 출발하자고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고 있기에 엘리야는 브엘세바 광야에서 ‘내 할 일 다 했으니 이제 죽여 달라.’고 하소연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40일이란 긴 시간 동안 낮에는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고통스럽고 밤에는 차가운 바람이 살을 에우는 듯한 칼바람이 불어오는 그 사막을 가로질러 하나님 산 호렙까지 달려간 것입니다. 호렙산에 가면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을 것 같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사울 왕에게 길갈도 그런 곳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 된 이후에 큰 위기에 빠졌던 모습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는 때였습니다. 그 때 사울 왕에게는 군사가 3000명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그보다 더 많았었는데, 3천 명만 남겨두고 다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3천 명 가운데 2천 명은 자신이 데리고 있고, 나머지 천 명은 왕자인 요나단이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이 자신이 이끌고 있던 군사를 이끌고 블레셋 영토에 속한 게바로 진격해 들어가서 게바에 있던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했습니다. 물론 요나단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했습니다.
그러자 게바의 수비대가 이스라엘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안 블레셋이 큰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땅으로 쳐들어왔습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땅에 들어온 블레셋 군대가 얼마나 규모가 컸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병거가 3만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병거(兵車)는 말 두 마리가 이끄는 전투용 마차입니다. 일반적으로 병거 한 대에 병사가 두 명이 탑니다. 그렇다면 병거에 탄 군사만 해도 6만 명입니다. 그리고 마병(馬兵)은 6천이었습니다. 마병은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적진에 돌격하여 적의 대오를 흐트러뜨리는 역할을 하는 선발대입니다. 그런 사람이 6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거나 말을 타지 않는 일반 병사도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 수를 다 셀 수가 없어서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싸우러 온 블레셋 군대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군사는 얼마입니까? 불과 3천명 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군대에게는 변변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본문 바로 뒤인 22절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 군대 가지고 있던 무기라 해야 왕인 사울과 왕자인 요나단이 가지고 있는 칼 두 자루가 전부였습니다. 일반 군사들에게는 칼이나 창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나무로 만든 창이나 몽둥이가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군사도 엄청나게 많은 뿐만 아니라, 해양민족인 블레셋은 일찍이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철로 만든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과 블레셋과 싸움이 되겠습니까? 무기에서도 대적이 될 수 없고, 군대의 숫자에서도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대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군대를 이끌고 일단 후퇴를 합니다. 후퇴해서 간 곳이 길갈이었습니다. 사울이 왜 길갈로 후퇴를 했을까? 길갈은 요단강에서 불과 3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곳입니다. 요단강 바로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길갈은 평지입니다. 아마도 군사를 추가로 모집하고 집결하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길갈로 후퇴한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길갈은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올 때, 그들이 첫발을 디뎠던 곳이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여호수아 4장에 보면 요단강을 건넌 후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 바닥에서 돌 12개를 주어다가 기념비를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단강에서 각 지파에 1개씩 모두 12개의 돌을 주어다가 기념비를 세웠는데, 그 기념비를 세운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결예식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례를 행한 곳이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결예식을 행한 후에 약속의 땅에서 첫 번째 유월절을 지켰는데, 그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킨 곳도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킨 다음 날 광야 40년 동안 먹었던 만나가 그쳤습니다. 그곳도 길갈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군대의 수장인 여호수아가 머물면서 이스라엘을 지휘했던 지휘본부가 있었던 곳도 바로 길갈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길갈은 이처럼 아주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는 그것 말고도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장소가 길갈입니다. 사무엘상 11:1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추대한 곳이 길갈입니다.
사울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가문은 별로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스스로 고백했던 것처럼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가장 작은 지파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 가운데서도 사울의 가문은 가장 약한 가문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한다면 사울은 정치적인 빽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고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왕이 세워지는데, 막강한 힘과 배경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강력하게 통치할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사울은 사내대장부다운 기백이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사무엘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으로 제비 뽑히자 행구 사이에 숨어 나오질 못했습니다. 그는 소심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고 하니까 당연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왕으로 제비 뽑히긴 했지만 온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반쪽 왕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중 암몬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사울은 온 이스라엘에 군사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모아진 사람들을 이끌고 암몬과 싸우러 가서 당당하게 승리하고 돌아옵니다.
그러자 사울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이유는 정치적인 배경도 없고 지도력도 없고 또 사내다운 기백도 없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암몬과 전쟁을 하면서 비록 정치적인 배경은 없을지라도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사울을 반대할 이유가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사울을 길갈로 데리고 가서 왕으로 추대를 합니다. 사울이 온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길갈에서 왕으로 추대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의 침공을 받고 사울이 길갈로 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왕으로 세워준 곳이 길갈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왕으로 세워준 사울이 큰 위기를 맞아 길갈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돕기 위해서 자원하여 그리로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4절에 보면 사울의 생각대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길갈로 모여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군대를 보자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너무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본문 6-7절에 보면 길갈로 모여들었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요단강을 건너 도망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본문 바로 뒤인 15절에 보면 사울과 함께 길갈에 남아 있던 사람은 불과 600여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600명도 사울과 함께 담대하게 브레셋과 싸우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사울과 함께 그곳에 남아 있기 했지만 그들도 두려움 때문에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기 바빴습니다. 숨지 않고 사울과 함께 있어준 사람들조차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사울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워줄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길갈로 가면 많은 백성들이 자신을 도와 블레셋과 싸워줄 줄 알았습니다. 불과 1년 전에 온 백성들이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려움에 처한 이 때에도 백성들이 자신을 도와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그런 생각을 크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사울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백성들은 사울에게서 떠나가고 사울을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아니 사울이 지금 무엇을 잘못 생각한 것입니까? 사울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길갈로 간 것은 백성들에게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1년 전에 사울은 길갈에서 온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를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왕으로 추대한 사울이 지금 큰 어려움과 위기에 빠져서 자신들이 왕으로 추대했던 바로 그곳 - 길갈로 후퇴해 왔다는 것을 알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려와서 사울을 도와줄 줄 알았습니다. 그 백성들의 도움으로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백성들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그가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146: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우리를 도우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어버리고서 - 믿음을 잃어버리고서 사람만 의지한다면 그것은 실패의 지름길입니다.
사울은 그런 상황에서 자기를 왕으로 추대해 준 이스라엘 백성을 의지하려는 생각보다 먼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생각을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우심을 받으려는 믿음의 자세를 먼저 하나님께 보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인 백성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한 때는 정말 든든한 후원자였던 백성들이 사울을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길 때에는 사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 같으니까 사울을 버리고 도망치기에 바빴습니다. 나부터 살아야겠다고 다 사울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사람은 좋을 때에는 뭐든지 다 해 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내가 꼭 필요할 때 - 아니 자기들에게 손해가 되거나 자기들에게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하면 자기 살 궁리를 먼저 하지 목숨 걸고 나를 도와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진 않을찌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만이 진정한 도우심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분명하게 그리고 자주 말씀해 주십니다.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 당시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인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침공해 왔습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그 기세로 남 유다까지 집어 삼키기 위해서 18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온 것입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그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온 앗수르와 싸울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그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하고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보낸 편지를 들고 성전에 들어가 갔습니다. ‘항복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폅박하는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히스기야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산헤립이 사시는 하나님을 조롱하며 이렇게 항복하라고 협박하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우리에게는 대항하여 싸울 힘이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옵소서.’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85,000명이 그 날 밤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히스기야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세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9장, 역대하 32장, 이사야 37장입니다. 왜 성경은 같은 사건을 세 번씩이나 기록하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같은 사건을 세 번에 걸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까?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마지막 왕들인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애굽을 의지하려 했습니다. 바벨론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애굽의 힘을 빌려 바벨론에 대항하여 살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가 의지하려는 애굽은 너희에게 갈대 지팡이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십니다.(겔 29:6) 애굽을 든든한 지팡이처럼 생각하고 애굽의 힘을 빌어 살 길을 찾으려 했던 유다의 마지막 왕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의지하고 있는 애굽은 든든한 지팡이가 아니라 아무 힘도 없는 갈대 지팡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갈대 지팡이는 힘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합니다. 쉽게 부러져버립니다. 도움이 전혀 되지 못합니다. 그처럼 애굽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갈대 지팡이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다의 마지막 왕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려 하지 않고 애굽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애굽을 지팡이로 삼으려 했습니다. 결국 애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갈대 지팡이에 불과했습니다.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은 바벨론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동안 애굽을 의지했던 유다와 유다 왕들은 바벨론의 공격을 받아야 했고, 비참한 말로(末路)를 겪어야 했습니다.
여호아하스는 왕이 된지 석달 만에 애굽 왕에 의해서 폐위되고 하맛 땅 립나에 유배당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야김은 왕이 된지 11년 되던 해에 바벨론의 공격을 받고 쇠사슬에 결박당한 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여호야긴 역시 왕이 된 지 석달 열흘만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유다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왕이 된 지 11년 만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멸망하면서 자기 아들들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서 살해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자신은 두 눈을 뽑힌 채 사슬에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끊임없이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을 의지하려다가 비참한 꼴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결코 우리에게 안전한 보장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이시고 우리의 방패이십니다. 시편 18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며 노래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도우시는 반석이십니다. 내가 피할 수 있는 바위와 산성이 되어주시고, 적으로부터 나를 막아주시는 방패가 되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존경 받는 아키바라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주후 132년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랍비 아키바가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반란에 실패하자 로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성경공부를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만일 성경을 공부하다가 잡히면 사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공부하면서 진정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을 안 로마가 유대인의 민족정신을 빼앗으려 한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하면 사형에 처해지는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 랍비 아키바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계속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이 ‘왜 성경공부를 시키느냐?’고,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랍비 아키바는 이런 비유를 말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배고픈 여우가 시냇가를 거닐고 있는데 물속에서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도망 다니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바쁘게 헤엄쳐 도망 다니느냐?”고 묻자, 물고기들은 “어부들이 그물로 우리를 잡으려고 하기에 바쁘게 도망 다닌다.”고 대답했습니다. 영악한 여우는 속으로 맛있는 생선요리를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는 고기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육지로 올라 올래? 내가 안전한 곳을 가르쳐줄게. 어부들이 한 명도 없는 곳이야.” 이 말을 들은 물고기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이 어리석은 여우야, 너는 우리에게 이 물속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다고 생각하냐?” 물고기에게는 그물에 걸릴 위험이 있어도 물속이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랍비 아키바는 물고기가 물속에 살 때 가장 안전한 것처럼, 유대인에게 성경은 물과 같은 것이어서 성경을 떠나서는 살 수 없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공부를 멈출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물고기는 어부들의 그물에 걸릴 위험이 있어도, 낚시꾼의 낚시에 걸릴 위험이 있어도 물속에 있어야 가장 안전합니다. 우리의 삶에 때로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때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다가와도 우리 신앙인들은 하나님 품 안에 거해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보호하시는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힘들 때일수록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려 하지 말고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더욱 신뢰해야 합니다.
길갈이 사울을 어려움에서 건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를 어려움에서 건져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 내게 참된 힘이 되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요 피난처이십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홍한석목사 / 삼상 13장 5~14절 )
출중한 인물 사울왕
이스라엘의 긴 사사시대를 마감하고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백성들의 뜻을 따라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사울을 왕으로 택하시고 기름 부어 세우셨습니다. 사울은 모든 면에서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당대 이스라엘에 사울만한 사람이 없었지요. 사무엘상 9장에 기록과 같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는 사울의 모습을 보면 순종하는 태도와 부모에게 효심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처음 만날 때 선지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영적 지도자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울은 집안으로도, 인물로도, 상당히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11장에서 사울이 왕이 되자마자 암몬과 싸울 때의 모습을 보면 굉장히 용맹하고 용감한 사람이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12장까지 사울이 왕이 되는 과정이 지나고, 13장 이후를 읽다 보면 사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향한 기본적인 믿음의 자세는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불순종하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사건이 터집니다. 사울이 왕이 된 지 2년쯤 되던 해 블레셋이라는 나라가 쳐들어와서 전면적인 전쟁의 상황에 빠집니다. 전통적으로 전쟁을 위해 출정할 때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사울왕 역시 전면전을 앞두고 출정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가 일주일을 기다려도 오지 않습니다. 막강한 철기로 무장한 블레셋 군대와의 긴 대치 국면에서 적들의 기세에 눌린 이스라엘 군대가 두려워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이러한 위급함에 서둘러 전쟁에 나가려고 기다리라는 사무엘 선지자의 명을 어기고 자기가 직접 제사를 집례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계기로 사울이 왕이 된 지 2년 만에 사무엘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이제 내가 ‘네 나라와 네 왕권을 보장 못 한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사울왕의 불순종을 망령된 행동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마음에 매우 못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왕은 폐하시고 하나님이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왕으로 세우시겠다”(14절) 교만해져서 불순종하여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기에 사울을 버리시고 하나님은 마음에 맞는 다른 사람을 찾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라
사울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보면 우리는 한 가지 교훈과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출중한 사람이 되려 하지 말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라.” 반대로 말해보자면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면, 너는 출중한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모든 면에서 잘해야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아야지, 인기를 얻어야지. 이런 관심을 갖기 전에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될까.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니, 하나님의 성령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성령 안에 거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십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이것이 신앙의 전부, 신앙의 정수입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목표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예배도, 기도도, 찬양도, 봉사도, 구제도, 전도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니까, 그리고 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가 아니라 겸손한 자를 찾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사람이 겸손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탁월하고 출중한 자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출중한 자, 능력이 있는 자, 탁월한 자를 찾으셔야 한다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세상 보기에 무녀리 같은 사람, 말라빠진 막대기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낮출 수밖에 없는 사람 말입니다. 하나님이 겸손한 자를 찾으시는 이유는 낮은 자를 높이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심입니다. 겸손한 자를 붙드셔서 쓰시는 이유는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시면 우리에게 떡고물이 묻습니다. 우리도 영화로워져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면 홀로 영광 받으시고 끝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도 함께 영광 받도록 하십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붙들려 쓰임 받지 못했습니다. 사울에게는 이미 교만의 싹이 텄습니다. 나중에는 교만이 극에 달하지요. 사울은 이미 자신이 높아져 하나님께 붙들릴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다면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사울의 자손이라 불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을 택하시고 붙드시고 높이셔서 ‘다윗의 자손 예수’가 된 것이지요.
사랑하는도 여러분, 무엇이 먼저입니까? 내가 훌륭해 보이는 사람 되는 것이 먼저입니까? 그래서 멋지고 내세울 만한 일들을 먼저 찾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아니면 사람 보기에는 좀 바보 같아도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 되는 것이 먼저입니까? 우리는 겸손히 믿음으로 하나님의 합한 자가 되고자 생각하고 결정하고 도우심을 구하며 기도하지 않으면, 100% 내가 출중한 사람이 되려는 곳으로 갑니다. 내가 박수받고, 인정받아야 사는 교만한 마음이지요.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데리고 일하지 않으십니다. 쓰지 못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늘 낮추고, 하나님 마음에 들려 하는 사람,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 눈치 먼저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눈치를 보는 사람.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그 사람이 내가 되길 바라고, 그 사람이 내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시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되기 원하고 바랄 때 하나님이 나를 높이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함께 영광을 누리는 은혜를 반드시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기다림
유은호목사 / 삼상 13:5-13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의 작가 이솝(Aesop, 기원전 6세기)은 『이솝우화』 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우화 가운데 ‘황금 알을 낳는 암탉’이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황금 알을 낳는 예쁜 암탉 한 마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암탉의 몸속에 금덩어리가 들어 있는 줄 알고 암탉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 암탉은 여느 암탉과 똑같았습니다. 그는 단번에 부자가 되려다가 가지고 있던 작은 이익마저 잃고 말았습니다.”(이솝/ 천병희 옮김. 『이솝우화』 (파주: 숲출판사, 2013), 313.).
기다리지 못하면 있는 것마저 잃고 손해를 당합니다. 인생에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지만 기다림 만큼 어려움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인생에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가 있다면 기다리는 사람은 성공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다리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지만,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6절에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게됩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을 기다려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축복과 은혜를 많이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5-6절을 읽겠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병거 삼만, 마병 육천, 백성은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이 모여서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와 심지어 요단을 건너 다른 나라로 도망을 갔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을 따른 모든 백성도 떨고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아침에 학교에 가려면 버스를 두 번 정도 갈아타고 1시간 정도 가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버스에 여자 차장이 있어서 차장이 태우는 인원을 조절했습니다. 그런데 워낙 학생들이 많아서 차장의 조절도 무시하고 무조건 버스가 오면 버스를 탔습니다. 이 버스 못타면 지각할까봐 불안해서 차장이 못 타게 하는 데도 차장을 뿌리치고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는 거의 6.25때 피난 열차같이 엄청나게 싣고 갔습니다. 지금같이 버스가 시간 간격으로 오던 시대가 아니라 학교 앞에 내리고 보니까 바로 뒤에 같은 번호 버스가 거의 비어서 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렸다면 편하게 올 수 있었는데 너무 마음이 조급해서 기다리지 못하고 고생하면서 버스를 타고 온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읽겠습니다. 사울은 이레 동안 선지자 사무엘을 기다렸지만 사무엘이 오지 않자 백성들은 흩어지고 그래서 불안해서 사무엘이 와서 번제를 드려야 하는데 자기가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실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레동안 기다렸지만 오지 않자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번제를 드리는 실수를 한 것입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공격으로 백성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사무엘을 온전하게 기다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 환경을 보고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온전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하다가 실수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위 환경이 어렵고 불안하더라도 환경이나 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온전하게 기다려야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인생에서 주위의 환경이나 사람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구원을 온전하게 기다려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축복과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6세기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1509-1564)은 그의 대표적인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서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 마음의 정서를 그에게 맡겨 길들이고 잡아메라고 요구한다...우리는 삶을 자기의 계획대로 꾸려 나가고 있는 사람들 모두의 재능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녹초가 되도록 열심을 쏟는 수많은 재주가 모두 그들의 야망과 탐욕의 정서를 채우고 빈곤과 비천함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목적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그리하여 그들이 흔들림 없이 확신에 찬 마음으로 자기를 버리고 맡김으로써 그 은총에 이르게 하자.”(존 칼빈/ 문병호 옮김, 『기독교 강요 3』 (서울: 생명의말씀사, 2020), 289-290.).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의 정서를 하나님께 맡겨 길들이고 잡아메라고 합니다. 사울은 블레셋의 위기앞에서 오히려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오는 사무엘을 더 기다렸어야 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더 기다리지 못한 것은 백성이 흩어져 가는 것을 보고 불안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닥치고 위기가 왔을 때 불안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잠잠히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고, 인간적인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간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모두 어려움이 닥치고 위기가 왔을 때 여러분의 인간적인 생각과 행동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다려서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과 은혜를 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읽겠습니다. 그런데 참 공교롭게도 사울이 자기가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마자 곧 사무엘이 왔습니다. 번제는 사무엘이 와서 드렸어야 했는데 백성이 흩어져 가는 것을 보고 사울이 불안해서 번제를 드렸는데 사무엘이 그후에 아주 오래 있다가 온 것이 아니라 사울이 번제를 드리자마자 곧 바로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항상 일이 안될 때 타이밍이 이렇습니다. 아마 사울도 속으로 아 조금만 더 기다렸을 걸 하면서 후회했을 것입니다. 인생의 승부는 하나님을 조금 만 더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빨리 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내가 먼저 인간적인 행동을 하면 꼭 내가 행동을 한 뒤에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이 시간 여러분 모두 이런 실수를 하지 말고 하나님을 조금더 참고 기다리셔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번은 나폴리의 총독인 오수나 공작이 죄수들이 노를 젓는 배를 시찰한 일이 있었습니다. 총독은 죄수를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서 어떤 죄를 짓고 여기에 오게 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죄수들은 한결같이 누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함께 죄를 지은 자가 자기에게 죄를 다 뒤집어 씌웠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판사가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못했다고 하면서 모두가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죄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총독님, 저는 돈이 탐나서 남의 지갑을 훔친 죄인입니다. 그 벌을 지금 달게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죄수의 말에 감동 받은 총독이 부관에게 말했습니다. “오, 이 사람은 정말 죄인이군! 그러니 그를 여기서 끌어내서 배 밖으로 데려가게. 여기에는 이 사람 말고는 죄인이 하나도 없는데 그냥 두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가?”
오늘 본문 11절가 12절을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도착하여 사울 왕이 행한 것이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사울이 백성이 흩어지고, 사울은 정한 날에 오지 않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고, 주께 은혜를 구하기도 전에 칠 것 같아서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다고 핑계를 대고 자기가 번제를 드린 것을 합리화 시켰습니다. 사울의 인생을 볼 때 여기서부터 사울의 인생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이 도착했을 때 정직하게 죄를 지었다고 솔질하게 고백했다면 혹시 용서 받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여기에 더해서 핑계를 대고 합리화 시켰습니다. 사울이 번제를 드린 것도 잘못한 것이지만 그후에 핑계를 대고, 합리화 시킨 것이 더 큰 잘못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바로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길이 살 길입니다. 사울같이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핑계대고 합리화시키는 순간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울과 같은 길을 걷지 않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13절을 읽겠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번제를 드리고 나중에는 그 죄를 인정도 하지 않고 핑계대고 합리화 시키는 것을 보면서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사울 왕의 나라가 길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사울, 그리고 그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핑계대고 합리화 시킨 사울의 나라는 결국 블레셋의 공격으로 망하고 사울은 전쟁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사울왕과 다윗왕을 비교해서 말합니다. 다윗왕도 그의 인생을 보면 사울 못지 않게 여러 가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사울 왕과 다른 점은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와서 죄를 지적했을 때 다윗 왕은 정직하게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때 죄를 사해 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사울의 길에서 다윗의 길로 인생의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핑계를 대고 합리화 시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다윗과 같이 혹시 죄를 지었을 때에도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다윗 왕의 길로 갈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용서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다윗 왕의 길을 따라가는 인생이 되셔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어려서 형이 그림을 그리는 받침대를 잘못해서 부러뜨려 놓고 내가 안한 것 같이 하고 있다가 형이 발견하고 이거 니가 부러뜨렸지 했는데 아니라고 해 놓고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내가 부러뜨렸다고 하고 맞고 끝나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죄를 인정하고 벌을 받든, 용서를 받든 죄를 빨리 해결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죄를 부인하고 핑계를 대고 합리화 시키는 순간 이미 마음에 무거운 돌을 얹고 살 듯이 형벌을 받고 살다가 나중에는 더 큰 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을 기다리며 살다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의 인생이 하나님을 기다리셔서 축복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자라게 하는 도구이다
사무엘상 13:1-7 / 행복한목사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어보도록 하자.
1-4절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여 그중에서 이천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산에 있게 하고 일천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사울의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가증히 여김이 되었다 함을 듣고 길갈로 모여 사울을 좇으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지 이 년째가 되는 해에 일어났던 사건을 말씀하고 있다. 사울은 병사 3천 명을 택해서 2천 명은 자기 밑에, 그리고 1천 명은 자기 아들 요나단의 밑에 두게 하였다. 그런데 요나단이 자기 밑에 있던 병사들과 함께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해서 전멸시켜버렸다.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반격을 가해올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전 지역에 나팔을 불어서 병사를 모집하였다. 사울로부터 소집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남자들은 사울을 따르기 위하여 길갈로 모여들었다.
5절에서는 이스라엘을 침공한 블레셋 군대의 병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여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서 벧아웬 동편 믹마스에 진 치매”
요나단이 블레셋의 수비대를 쳐서 전멸시킨 것을 계기로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는데 그 숫자가 병거가 3만, 마병이 6천, 그리고 보병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5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병거는 지금의 전차 부대, 마병은 장갑차 부대로 보면 될 것 같은데, 그 당시 이스라엘에는 병거나 마병이 전혀 없었으며 보병에게도 무기가 거의 없었다. 여기에 대하여 22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22절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으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사울과 요나단 외의 일반 이스라엘 병사들에게는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는 무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던 낫이나 괭이, 또는 호미나 도끼 같은 농기구들을 무기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이스라엘을 침공한 블레셋 군대는 지금으로 말하면 전차, 장갑차, 그리고 소총으로 무장한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병사가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하여 오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에 6.25 전쟁이 일어났을 그 당시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올 때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었는데 그 당시 남한의 전투력은 북한과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군은 남한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거침없이 밀고 내려왔다.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 군대가 그렇게 이스라엘을 전멸시키기 위하여 엄청난 병력으로 밀고 들어왔던 것이다.
그 위기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6-7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좇은 모든 백성은 떨더라.”
자기들을 완전히 전멸시키기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블레셋 군대가 병거와 마병을 앞세우고 자기 나라로 쳐들어오는 것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싸우고자 하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목숨만이라도 건지고자 각자가 살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일들을 얼마든지 만나게 된다.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절망뿐인 상황 말이다. 거기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도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였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으로 인하여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벌벌 떨며 어떻게 하든지 그 힘든 상황을 피해서 달아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절박한 상황,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은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고 그래야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 힘들고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유익을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런 절박하고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은 한 번만 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에게 닥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년 전에도 이런 상황을 만났었다. 그들은 암몬 사람이 길르앗 야베스를 침공할 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했지만 절망을 느끼며 온 백성들이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들에게는 그 힘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이 전혀 없었으며 그들에게는 고통에 빠진 그들의 동족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성령님께서 사울에게 강력하게 임하셔서 사울을 붙드시고 일하셨다. 성령님은 사울을 통하여 그 짧은 시간에 이스라엘 병사 33만 명을 모으시고 그다음 날 그 병사들이 암몬 사람을 완전히 전멸하게 하셨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나자 그들은 그때처럼 자기들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자기들의 능력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을 또 만난 것이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이 그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겁을 집어먹고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자기가 살 곳으로 뿔뿔이 다 흩어져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왜 그들은 2년 전에 일어났던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또 옛날로 돌아가서 두려움에 벌벌 떨 수밖에 없는가?”라는 것이다.
2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을 기억하고, 그때처럼 성령님께서 그들 편에서 그들을 도와주시면 암몬 사람들을 완전히 전멸시키신 성령님께서 이번에도 블레셋 사람들을 완전히 전멸시키실 줄 알고 담대한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이 그들이 보여야 하는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신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아마 지난주에도 그 경험을 했을지 모른다.
목사인 저는 매주 그것을 경험한다. 설교는 해야겠는데 무슨 본문으로 설교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해할 때 하나님께서 그런 저에게 설교할 본문이 생각나게 하신다. 그리고 그 본문을 붙잡고 어떤 내용으로 설교원고를 작성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해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에게 설교원고를 작성하도록 이끌어 가신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그 설교원고를 가지고 강대상에서 성도님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살아있는 말씀으로 전해서 성도님들이 그 말씀을 통하여 새로운 힘과 은혜를 공급받아서 세상에 나가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전혀 없는 자신으로 인하여 난감해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어리석고 무능한 자를 붙드시고 친히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전하게 해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전하는 자도 듣는 성도님들도 다 함께 새로운 힘과 은혜를 공급받게 하심으로써 세상을 승리로 통과하게 해주신다.
이런 경험을 매주 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설교원고를 만들려고 할 때마다 두려움과 염려에 사로잡힌다. 단 한 번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라는 확신에 사로잡혀서 설교원고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도와주신 그 하나님을 또 한 번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목사의 기대를 거의 완벽하게 채워주신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블레셋 군대와 같은,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도 없고, 극복할 수도 없는 문제, 힘든 상황을 계속해서 허락해주시는 이유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동일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먼저 우리는 두려워 벌벌 떨 수밖에 없다. 지난 주일에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어도 속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은 어떻게 막을 수 없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준다. 그 두려움으로 인하여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두려움을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해결해주신 그 분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 것도 바라보거나 의지하지 않고 신실하신 그분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은 지금까지 그러셨듯이 전능의 능력으로 우리가 만난,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인 문제, 상황을 다 해결해주시며 극복하게 해주신다.
그때 우리는 성경 속에만 갇혀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시고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 경험을 통하여 우리는 과거보다 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며 과거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과거보다 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된다. 이것이 성도의 성장이며 그 신앙이 자라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난 것과 같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인 문제, 상황을 허락해주시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힘들고 어려운 문제, 상황을 허락해주실 때마다, 그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두려워 벌벌 떠는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그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뢰고 배고픈 아기가 엄마를 뚫어지게 바라보듯이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 우리의 모든 마음을 쏟아붓자.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그 아기에게 마음껏 젖을 먹이는 엄마처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만 의존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하셔서 도움의 손길을 베푸셔서 우리가 만난 문제를 해결해주시며 우리가 만난 힘든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신다.
우리는 그 놀라운 경험을 통하여 과거보다 더 많이, 더 강하게, 더 간절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 의존적인 사람으로 조금씩, 계속적으로 자라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이 그렇게 점진적으로 자라가는 우리를 흡족하게 바라보시며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키시고 그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완성해 나가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려 나가실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를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들기 위한 연병장이며 훈련소이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고 우리가 만나는 모든 힘든 문제, 힘든 상황을 지혜롭게 승리로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힘든 문제, 힘든 상황을 만날 때마다 과거보다 더 하나님을 바라보고, 과거보다 더 간절히 하나님을 의존함으로써 하나님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점점 자라가도록 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