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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범죄
삼상 13:8-14
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10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1)문안하매
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삼상 13:8-14 / [제사장 노릇을 하는 사울] 사울은 여전히 길갈에 남아 있었고, 그를 따르던 군인들은 사기를 잃은 채 공포에 빠져 있었다. 사무엘은 본래 사울에게 길갈에서 7일 동안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상황이 아주 위급해져 가는 데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남아 있던 군인들마저 사울을 버리고 떠나기 시작하였다. 9) 그래서 사울은 할 수없이 번제와 화목제에 쓸 짐승들을 가져오게 한 다음에 제 손으로 제물을 바치기 시작하였다. 10) 사울이 막 번제를 드리고 나자 사무엘이 도착하였다. 사울이 그를 맞으러 나가 인사를 하자, 11) 사무엘은 대뜸 `왕은 어째서 그토록 제멋대로 행동하였소?' 하고 책망하였다. 사울이 길게 변명하였다. `블레셋 족속이 이미 믹마스에 와서 진을 치고 있는데, 우리 군인들은 놀란 나머지 산지 사방으로 도주해 버리고 그나마 따르던 군인들도 점차 떠나가는데, 제사장님마저 약속된 시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12) 여호와께 번제를 드려 도와 달라고 빌기도 전에 적군들이 길갈로 내려와서 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번제를 직접 드렸습니다.' 13)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을 향해 여지없는 심판을 선언하였다.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하오. 어째서 그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대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않았소? 아무리 위태로운 처지에서라도 그 명령만 지켰더라면 여호와께서 그대와 그대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영구한 왕조를 약속해 주셨을 것이오. 14) 그러나 그대가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대한 약속을 놓치고 말았소. 여호와께서는 이미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서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정해 놓으셨소'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출정제사를 집례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사울의 왕위가 폐위될 것임을 예언합니다.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8-10)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비해서 군대의 숫자나 무기 등 모든 면에서 불리했습니다. 겁에 질려서 전의를 상실하고 숨기에만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6-7). 게다가 사울의 군대 이천 명이 집결해 있는 믹마스에 블레셋의 막강한 군대도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자기와 함께한 백성의 수를 세어보니 육백 명 가량이라”라고 말합니다(15). 시간이 지체 될수록 군사들이 흩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8). 빨리 출정제사가 드려져야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인데 이레가 지나도록 사무엘이 오지 않고 있습니다. 사울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져 갔고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립니다. 그리하여 제물을 가져오라 명령하여 직접 번제를 집례합니다(9). 사울은 전쟁에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출정 이후 상황이 불리해지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제사장만이 집례해야 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죄에 죄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11-14) 사무엘은 사울을 만나자 마자 크게 책망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고 다른 왕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이 사무엘 대신 제사를 드린 것이 죄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은 전쟁을 잘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사울은 자기의 왕권을 전쟁과 연결시켜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막강한 군사력을 가져야 계속 왕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용감하게 앞장서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고 탁월한 작전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가짐입니다. 눈에 보이는 블레셋 때문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싸움은 용감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어느새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은 어느새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쟁에 패할 것을 두려워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하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실수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분명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고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보이는 것에 급급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적 용 : 우리의 가정과 교회 일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상황들에 너무 급급해서 정말 중요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현실의 다급함은 언제나 우리를 그럴듯한 명분으로 유혹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생활의 염려와 다급한 위기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릴만한 타당한 명분을 제공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만약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중요시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제사도 못 드렸고, 그 사이 백성들은 모두 떠나갔고, 거기에 블레셋의 삼만의 철병거와 육천의 기마대가 쳐들어왔다 해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한줌 재와 같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우리의 어떤 상황도 하나님 앞에서는 핑계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경은 이 모든 사실을 통해 사울에 대해 담담히 평가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시험에서 탈락했을 뿐이라고.
호크마 주석
=====13:8
사울은 10:8의 사무엘의 명령에 따라 길갈에서 사무엘을 '이레'동안 기다렸어야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10:8과 본절 사이에 전개된 많은 사건들, 즉 사울이 왕으로 공식 소개된 사건(10:27-24), 암몬 군대를 결파한 사건(11:1-11), 사무엘의 길갈 메시지(12:1-25), 사울과요나단의 블레셋 수비대 공격(13:1-4) 등의 사건들을 매우 신속히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로 이해하여 시간상의 난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10:8에서의 사무엘의 명령은 오히려 11:14-12:25의기사와밀접한 연관을 맺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서 11:14-12:25에는, 사무엘이 10:8에서 언급한 주요 사항인 화목제와 사무엘의 훈계등이 확실히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1:15에는 10:8에서 언급된 제사 중 번제에 대한 언급은 없고 오직 화목제만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번제는 화목제가 드려질 때 필연적으로 함께 드려진다는 점에서(1:24), 11:15에서 언급이 생략된 듯하다. 더구나 2년이나 지나서<1절> 시행될 일을 10:8에서 미리 지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타당치 못하다. 따라서 여기의 '사무엘의 정한 기간'은 본서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사울이 군사행동을 개시하기 전이나 혹은 군사 행동을 개시한 후 백성들을 소집하면서 사무엘과 사울 간에 약속된 또다른 기간으로 봄이 매우 자연스러울 것이다. 서무엘은 그대 일주일 후 길갈로 내려갈 것을 사울에게 약속했음에 틀림없다. 한편 여기서 '정한'이라는 말은 히브리 본문에는 없고, 다만 칠십인역(LXX)과 갈대아역(The Chaldee)의 영항을 받은 번역자의 삽입일 뿐이다. 아무튼 여기서의 핵심은 이러한 연대순의 문제가 아니라, 사울이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리지 아니했다는 것과, 따라서 사무엘의 제사장적 권위가 무시되어 결국 사울이 하나님께 망령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 혹자(Edelkoort)는 여기서 사울이 사무엘과 약속한 이레(7일)는 기다렸기 때문에, 기다리지 못한 잘못은 없고 다만 사무엘의 제사장적 기능을 침범한 잘못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사무엘이 약속된 이레의 마지막 날이 완전히 지나도록 길갈에 오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울이 사무엘과의 약속을 어긴 채 자신의 손으로 제사를 드린 그 시점을 기준으로 할 때 사무엘이 오지 않았음을 가리킨다(10절). 백성이...흩어지는지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 전투(7:7-11)에서 사무엘의 집전으
=====13:9
사울이...번제를 드렸더니 - 이것은 사울이 자신이 직접 제사장의 역할을 했다는 뜻은 아니다(smith). 그때 이 제사는 엘리으 증손자 아히멜렉에 의해서 시행되었을 것이다(21:1' 22:9,16). 따라서 사울이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 다만 그때의 제사 성격상 반드시 사무엘에 의해 드려져야만했었을 제사를(7:9) 사무엘 외에 다른 사람이 대충 드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걸국 여호와의 선지자의 권위를 경솔히취급했다는 뜻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으 뜻을 저버린 망령된 일(13절)과 다름 없었던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번제'(*, 올라)와 '화목제'(* , 쉘라밈) 앞에 각각 정관사 '하'(* , the)가 붙어있는데, 이것은 사무엘이 드리도록 되어있는 '그'제사를 가리킨다(R.Payne Smith).
=====13:10
필하자...온지라 - 이 말은 그때 사울의 제사드린 행동이 지극히 성급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즉 이 말은 사울이 제사를 드린 때가 사무엘이오기로 약정된 그 날이 저물기 훨씬 전이었음을 강력히 사시한다(Goslinga). 그러므로 그때 사울은 사무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그 날이 저물 때까지 온전히 사무엘을 기다렸어야만 옳았다. 사울이...문안하매 - 여기서 '문안하다'(* , 바라크)란 말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찬송하다'(시34:1; 106:48), 그리고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축복하다'(2:20; 시129:8)의 뜻으로 사용되는, 엄숙한 의식적(儀式的) 단어이다. 따라서 사울의 이같은 인사는 당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을 두렵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13:11,12
본문은 사무엘의 도착 전에 제사를 드렸던 사울이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라는 사무엘의 질책 섞인 질문에 국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부분이다. 그 변명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즉 (1) 이스라엘 군사들의 흩어짐, (2) 사무엘의 도착 지연, (3) 블레셋 군대의 공격 가능성 등이다. 결국 사울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부득이 자신이 제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울의 변명은 결국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과 사무엘과 하나님을 끝까지 의뢰하지 못한불순종의 결과에 다름아니었다. 진정 사울은 여호와께 기름 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 누구 보다도 큰 전쟁에 임하기 전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려야만 했고, 그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해야만 옳았다. 그러나 사울은 그러한 순종과 믿음의 시험에 실패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입증시키고 말았다.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 이것은 '여호와의 얼굴을 뵙지 못하였다'라는 문자적 의미를 의역한 것이다(출32:11; 렘26:19). 결국 사울은 그때 자신의 주도 하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블레셋과의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려 하였던 것이다.사실 희생 제사는 성전(聖戰)에 앞서 항상 드려졌으며(7:9), 이 같이 한 증용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성전의 신적 합법성을 하나님께로부터 승인받기위함이었다(7:9; 14:8-10,37; 23:2,9-12; 28:6; 30:7,8; 삿20:23,27; 삼하5:19,23).
=====13:13
괴악한 자 - 문자적으로 '어리석은 자'(the wanton fools, RSV)란 뜻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지혜가 부족한 자가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므로 결국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를 가리킨다(시 14:1). 왕께 말하라...거절치 아니하시리라 - 다말의 이러한 말은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때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다말은 왕께 말씀만 드리면 근친간(近親間)이라도 결혼이 가능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율법에는 엄연히 근친 상간과 근친혼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레 18:6-18). 그런데 이에 대해 혹자는 근친 상간에 대한 율법의 조항이 남매간의 결혼을 완전히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Thenius).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율법에 명시된 분명한 사실을 아무 근거없이 부정하는 결과가 된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탈무드(Talmud)는 다말이 다윗의 친딸이 아닌 누군가의 사생아였기 때문에 암논과의 혼인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Wycliffe). 그러나 성경은 다말이 다윗의 친딸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으니(1절 ; 대상 3:9)이 역시 그릇된 주장이다. 따라서 우리는 남매간의 결혼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다말이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이같이 둘러댄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Keil, Lange, Payne, Josephus, Clericus).', '악하다'란 의미로서, 곧 매우 어리석고도 사악한 범죄 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성경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침범한 범죄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왕이...여호와...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 여기서 '명령'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어떤 율법 규저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왕 사울 자신이 지켜야 했던 직무의 한계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때 사울은 성전(聖戰)의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의 절대적 지도를 받아야 했다. 이것이 성전(Holy Wor)의 원리였다. 그러나 사울은 급박한 상황을 이유로 들어(11,12절) 이같은 원리를 지키지 않았고, 바로 그것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무시한 사울의 망령된 범죄 행위였던 것이다.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 이것은 사울 왕조가 조건적이었던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12:25). 즉 사울은 여호와를 향한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자신의 왕권을 자신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13:14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 여기의 이 말은 사울의 왕권이 그의 생전에 취소될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Keil). 이것은다만 사울의 왕권이 그의 당대에서 끝날 것이라는 뜻이다(13절). 한편 사울의 왕권이 그가 죽기 전에 취소될 것이라는 선언은 그의 결정적인 두번째 실수(15:9,15) 뒤에 나타난다(15:17-23). 혹자는 여기서 사울의 첫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너누 가혹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생생한 경고(8:10-18)에도 불구하고 끝내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정 제도를 허락하신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깨닫고 실천해야만 했다. 즉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대로 열방과 같은 왕(8:5,20)이되어서는 결코 안되며, 오직 하나님의 요구대로 그 뜻을 구현하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울은 블레셋과의 대전투라는 중요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백성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권'을 성결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사울의 거역 행위를 엄히 문책하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징계는 결코 불변적이고 결정정인 것이 아니었다. 즉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후에라도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진정 뉘우치고 회개했더라면, 그는 자신의 왕권을 훨씬 오래 연장할 수 잇었을 것이다(왕하20:1,6). 그러나 징벌을 받은 후 사울은 더욱 강팍케 되어, 결국 스스로 자신의 왕권을 단축시키고 만 셈이 되었던 것이다(15:26). 그러기에 미리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대신할, 마음에 맞는 한 인물을 준비하셨는데, 이같은 모든 신적 섭리의 배후에는 다만 역사를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예지(豫知)와 豫定), 그리고 전지성(全知性)이 깃들어 있을 뿐이다. 그 마음에 맞는 사람 - 이것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열방과 같은 왕'(8:5)과는 날카롭게 대조되는 말이다. 또한 이것은 사울의경우와는 달리, 그의 왕권이 신적(神的) 기원을가지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편 여기의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다윗을 가리킨다(16:12,13' 행13:22). 구하여(* , 바카쉬) - 이 단어는 '살피다', '찾다'의 뜻으로서, 자신에게 꼭 필요란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 헤매는 것을 가리킨다(대하15:15; 시54:3; 전12:10; 렘5:1; 호2:7,9).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다.
< 설 교 >
사울이 잃어버린 것
추석을 마치고 돌아와 반갑습니다. 교통은 복잡했지만 고향에서 부모님 만나고 돌아오는 마음은 편하고 푸근한 마음입니다. 혹 내려가지 않고 자녀들이 찾아온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추석을 지나면서 추석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추석은 다만 음식먹는 날이거나 부모자녀간의 정을 나누는 날이 아니라 피곤하고 지친 마음이 가족을 만나 좀 더 부드러워지고 좀 더 편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해인 수녀가 쓴 “달빛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추석 보름달을 보고 쓴 시 같습니다.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좀더 환해지기를/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좀더 둥글어 지기를
그렇습니다. 추석은 다만 잘 먹는 날이 아닙니다. 잘 먹으려면 좋은 식당으로 가면 됩니다. 다만 효도하는 날이 아닙니다. 효도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만나면 순수해집니다. 세상사람 만나면 긴장해야 하고 자기를 감추거나 과장해야 하고 본의 아니게 생존을 위해 자기 주장, 자기 피알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이 만나면 뭘 감출 것이 있습니까? 무슨 모난 마음과 편견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보름달처럼 순하고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모든 무장을 해제합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 아픔 다 잊어버리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섭니다.
그렇게 순하고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느날 악하게 되어 이스라엘 역사에 큰 옷점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언제나 처음이 중요합니다. 나라마다 초대 왕. 초대 대통령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 고려 왕건, 이조 이성계, 미국의 워싱톤 대통령,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수상, 역사를 시작한 초대 왕, 초대 대통령은 언제나 백성들의 존경과 주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조금만 잘했으면 이스라엘 역사에 정말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을텐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받고 블레셋에게 죽어 마지막에 벳샨 성벽에 매달리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우리는 사울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도대체 사울은 왜 이런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사울이 간직했어야 할 중요한 몇 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울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그리고 사울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회복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을 잃었다.
사무엘상 9장과 10장은 하나님이 사울을 선택하고 그를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지파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기스, 고향은 기브온이었습니다. 사사시대가 끝나가고 사무엘이 늙자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나라처럼 왕을 주십시오”. 사무엘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백성들의 요구가 많아지자 어쩔 수 없이 왕으로 세우기로 하고 사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삼상10:1절입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븟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아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다고 말합니다. 아무나 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할 사람 곧 제사장, 선지자와 왕에게 부었습니다. 기름은 올리브 기름인데 올리브 기름은 쓰임새가 많습니다. 식용으로 쓰고 화장품으로, 치료제로도 씁니다. 성소에 등불도 밝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울에게 기름만 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도 부었다는 것입니다. 삼상10:9-10입니다.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여기서 그는 “사울”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 받고 막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도 임했다는 것은 그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성령의 기능은 여러모로 기름의 기능과 닮았습니다. 우선 성령과 기름이란 말의 히브리어 어근이 같습니다. 이 말의 기본 알파벳이 세 글자입니다. “쉰, 눈, 멤”, 이 말에서 “기름”, “쉐멘”이 나왔고, “성령”, “네샤마”도 나왔습니다. 글자의 순서를 바꾸면 “쉐멘, ”기름”이 되고 “니샤마”, “성령”이 됩니다. 기능도 같습니다. 올리브 기름도 부드럽고 성령님도 부드럽습니다. 올리브 기름도 사람을 살리고 성령님도 사람을 살립니다. 올리브 기름을 부으면 안에서는 열이 나고 밖에서는 빛이 나고 성령님도 우리안에 들어오면 우리 안에서는 영적인 에너지, 힘이 나고 우리 밖에서는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그래서 “열이 나면 빛이 납니다”. 올리브 기름과 성령의 공통적 기능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기름과 함께 하나님의 영을 부으시자 사울이 영에 붙잡혀 데굴 데굴 구르며 예언을 시작합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야 예언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 삼상10:9, “하나님이 세 마음을 주셨고”, 새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왕이 되는 권세가 땅에서 오거나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자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삼삼10:11, “사울도 선지자중에 있느냐?”. 사울이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세울 때 하나님의 영, 성령을 부어 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하나님의 영을 오래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영을 잃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후에 나타난 사울의 문제는 모두 여기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라지자 사울에게는 인간적 욕심과 정욕만 남았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나타나자 사울은 그에 대한 질투과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평생 다윗에 대한 적대심과 미움에 사로 잡혀 그의 인생을 망치고 맙니다. 그 이유를 설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삼상16:14입니다. “여호아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아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를 번뇌케 한지라”. 이 말씀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주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고, 그 대신 주께서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악한 영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악한 영의 사주를 받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사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끝까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실수했어도 다윗처럼 기도해서 성령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시51:11-12, “하나님이여, 나를 주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다윗이 두려웠던 것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령이 떠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령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인격의 차이가 아닙니다. 능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실수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없을 때 기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였습니다.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다면 다윗을 그렇게 미워했을까? 만일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역사했다면 여덟 번이나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까? 만일 사울안에 하나님의 영이 역사했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을 죽이려고 그의 모든 정력과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며 이스라엘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까? 사울은 정말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칩니다. 곧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시느니라”. 또 27절입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두 번 나옵니다. 성령님은 마치 자동차로 말하면 기름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기름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름은 자동차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은 20절, “모든 것을 아시느니라”. 성령은 우리안에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영입니다. 성령은 27절,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은 우리안에서 모든 것을 가르칩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서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무엇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안에 성령님이 떠나가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죄를 지어도 성령님은 우리를 회복시킵니다. 성령은 우리를 능하게 하십니다. 사랑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언제나 문제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성령의 기름을 내게 부어 주옵소서. 제 기도에 부어 주옵소서. 제 설교에 부어주옵소서. 우리의 예배에 부어 주옵소서. 우리의 찬양에 부어 주옵소서. 우리 성도들에게 부어 주소서. 다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부어 주옵소서. 주님의 일에 부어 주옵소서. 성령님, 우리를 떠나지 마옵소서. 한때 잘 나갔다 마지막에 버림받은 사울처럼 될까 염려됩니다. 우리와 동행하셔서 승리하게 하소서”. 아멘.
겸손을 잃었다.
사울이 잃었던 두 번째는 겸손이었습니다. 사울의 이야기가 처음 성경에 나올 때 사울은 아주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우선 인물이 대단했습니다. 삼상9:2에 “준수한 소년”이요 키가 보통 사람보다 어깨위만큼 더 컷습니다. 그는 또한 효자였습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다니다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이 부분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잃어버린 백성을 찾고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나귀를 찾은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을 대변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잃어버린 백성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대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 받을 때 보인 모습은 겸손의 극치였습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으려고 보니까 사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 갔나 했더니 사울이 숨었습니다. 삼상10:22보면 짐보따리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왜 짐보따리인가 하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으러 올 때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럿이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올 때 홀 몸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저런 짐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짐을 한쪽에 쌓아 놓았는 데 사울이 그 짐뒤에 숨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순진한 사람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왕이 되다니” 아마 황송해서 숨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백성들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삼상10:24입니다.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부르니라”. 더 쉬운 번역입니다. “백성이 사울을 향하여 크게 함성을 질렀다. 우리 왕 만세”. 사울은 처음부터 백성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왕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자 모든 백성이 “그래. 사울은 그럴만해. 그는 좋은 왕이 될거야”하고 환영했습니다.
더 좋은 것은 그가 왕이 된 후 한 행동이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 데 삼상11장에 나옵니다. 하나는 그가 왕이 되자 마자 그가 늘 하던 농부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삼상11:5절입니다.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사울이 왕으로 즉위한 후 첫 번째가 다시 농부로 돌아간 사건을 두고 학자들의 해석이 있습니다. “이제 막 왕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아직 머물 왕궁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또 얼떨결에 왕이 되었고 또 전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 무슨 일을 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사울이 매우 소탈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얼떨결에 왕이 된 것은 맞지만 왕의 자리를 특권의 자리로 여기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라고 해서 자기가 할 집안일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굉장히 서민적인 왕이었습니다.
왕이 되어 했던 두 번째 일은 난폭한 독재자로부터 백성들을 구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나하스라는 폭군에게 고통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 말을 듣자 사울은 소를 잡아 각을 뜨고 “나를 따르라”를 외쳤습니다. 그 길로 단숨에 달려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독재자의 손에서 건져냅니다. 사울의 이런 모습은 사울이 매우 인간적이며, 정의로우며, 특권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이랬던” 사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겸손하고 사심이 없었던 사울이 서서히 독재자, 폭군으로 변합니다. 삼상9-10장에서 왕이 된 후 13-15장으로 오면 완전히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삼상13장, 15장에 보면 사울은 세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삼상13장에서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있을 때 제사장인 사무엘을 대신하여 자기가 제사를 드립니다.
14장에서는 불레셋과의 전쟁중에 갑자기 금식을 선포하며 금식하지 않은 사람은 벌을 내리겠다 했는 데 아들 요나단이 걸립니다. 이로 인해 전쟁이 어려움에 빠집니다.
15장에서는 아말렉과 전쟁이 벌어졌는 데 하나님이 아말렉을 다 진멸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왕은 죽이지 않고 전리품만 뺏어 자기 곳간에 숨깁니다. 분명히 이 사건들은 사울의 첫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겸손하던 사울은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왜 사울은 처음의 그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망하는 길로 갔을까?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중이었습니다. 13, 14장은 불레셋과 싸우고, 15장은 아말렉과 싸웁니다. 두 번째 사울은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울의 목표는 오로지 승리입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도 불사합니다.
13장 사건을 봅시다. 지금 불레셋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은 하나님께 먼저 제사드리고 전쟁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는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사울이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리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이 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쉬운 번역입니다. 삼상13:12, “불레셋 사람이 나를 치러 곧 길갈로 올라올텐데 나는 아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도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직접 나서서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사울은 불레셋과의 싸움을 전쟁으로 생각했지만 사무엘은 예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전쟁은 사람과의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사무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전쟁을 군사적인 일로 생각했지만 사무엘은 영적인 일로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사람들을 잘 단결시키고 전준비시키면 이길 줄 알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해야 전쟁에 이긴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15장에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말렉과 그 소유물을 전부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사울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려고 가장 좋은 짐승들은 죽이지 않고 남겨 두었다고 말합니다. 언뜻보면 대단히 좋은 믿음입니다. 전리품을 취했는 데 그것으로 예배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니 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배의 생명이 제물입니까? 예물이 좋아야 예배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따르지 않으면서 남의 소나 양을 빼앗 제물로 바쳤다면 하나님이 그 불순종의 예물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제물보다 순종을 더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사울의 우선적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올 때까지 못 기다린 것도 하나님께 빨리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다리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그렇게 되면 전쟁에 질까봐 그런 것 아닙니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불순종하더라도 좋은 소나 양으로 제사하면 그것을 본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것 아닙니까? 사울은 하나님을 자기 승리의 수단이나 방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울의 눈에는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크게 보였고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위해 하나님을 방편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책망했더니 사울이 말합니다. 삼상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다같이 “내가 백성을 두려워 하여”.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워 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불레셋 군대를 더 두려워 했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실패를 더 두려워 했습니다. 이것이 결국 그로 하여금 남의 생에 두고 두고 실패를 가져온 원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의 그 겸손한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무엘은 그를 떠났고 하나님은 그에게 왕권을 빼았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10: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울이 하나님을 버리자 하나님도 그를 버린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끝까지 겸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처음 믿을 때 그 순수한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잃어버린 첫 사랑을 다시 회복하겠습니까? 계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우리가 처음 구원받고 감격했던 그 믿음, 우리가 처음 성령받고 방언했을 때 그 기쁨, 우리가 처움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을 받고 “이젠 잘해봐야지” 했던 마음, 그 처음 믿음과 겸손을 주여, 우리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옵소서.
은혜를 잃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은혜를 잃었습니다. 사울은 평생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빛나는 초대 왕으로 부름받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본래 하나님의 뜻은 왕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고 직접 다스리는 나라, 그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하나님께 왕을 요구합니다. 그 동기도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왕을 세워 달라”. “다른 나라”란 예를 들면 불레셋이나 애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었잖습니까?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심정의 배후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피하여 직접 통치하고픈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왕 요구는 하나님의 주권의 거부요 하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으로서 자신들이 자기 삶에 관한 결정권을 갖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고 그 첫째 왕으로 사울이 선택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감히 하나님이 안된다 하는 것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사울이 만일 이 은혜를 평생 기억했다면 훗날 그렇게 잘못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지만 거절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 거절만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후에 왕들의 잘못을 일일이 책임지시며 끝까지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 이 은혜를 사울이 깨달았다면 사울이 그렇게 잘못 되었을까요? 그래서 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둘로 나눕니다. 하나님의 본래 뜻과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뜻, 하나님의 본래 뜻은 하나님이 가지신 본래의 계획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허용하시는 뜻은 본래 하나님의 뜻은 아닌데 인간이 요청할 때 하나님이 허용해주시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고 사울이 초대 왕이 된 것, 그것은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허용하면 끝까지 지키시고 돌봅니다. 사울은 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울이 받은 은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미 그는 삼상15장에서 버림받고 왕권을 다른 사람에게 뺏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왕권은 금방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16장에서 다윗이 나타나 기름부음받지만 삼상31장에 가서야 사울이 죽습니다. 그 사이 사울은 다윗을 엄청나게 핍박합니다. 엔게디, 하길라, 마사다, 다윗을 온통 유대광야로 내몰아 죽음 직전까지 가게 합니다. 조금만 사울이 일찍 죽었어도 다윗이 덜 고생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사울은 다윗에 의해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블레셋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은 사울을 살리셨을까? 아마 사울이 회개하라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사울은 하나님의 오래 참고 견디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손자 므비보셋이 받은 은혜까지 하면 그는 실로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번도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 한 번도 사울이 기도한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골리앗이 싸움을 걸어왔을 때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윗 잡느라 온통 국정이 마비되었을 때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불레셋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에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례받지 않은 자에게 부끄럽게 죽는 것만 생각하고 자기를 죽여달라고 만 했습니다. 그는 은혜를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은헤를 잃어버린 사람의 특징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학자 카슨은 <바울의 기도>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은 몇 가지 변명이 있다고 합니다.
❶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바쁘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❷ 영적으로 너무 메말라서 기도가 안 된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영적으로 매마른 것입니다.
❸ 기도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기도하지 않는다. 필요가 없어 기도하지 않는 것이 겸손하지 않아서 기도하지 않는다.
❹ 마음에 원한이 사무쳐서 시도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도안하면 그 원한마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❺ 너무 부끄러워서 기도할 면목이 없다. 기도는 내 모습이대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❻ 적당히 만족하며 살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은혜를 모르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알면 기도합니다. 은혜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겸손하면 기도합니다.
물론 기도해도 금방 효과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학생 하나가 랍비에게 자신이 끊임없이 배우고 기도하며, 믿음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진실로 자기 곁에 가까이 계신 것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도를 중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랍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소가 아침 일찍 외양간에서 들판으로 가지 않습니까? 거기서 밭을 갈다가 다시 외양간으로 되돌아 옵니다. 매일 이와같이 하지만 소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갈아놓은 밭에서는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까?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가을에 사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것을 우리가 회복할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 성령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울은 첫 사랑, 겸손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겸손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울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헤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내일부터 은혜를 회복하는 가을을 여는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기도합시다. 기도로 성령을 겸손을 은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의 제사는 뭐가 틀렸을까?
박진수목사 / 삼상 13:8-15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절까지 이르는 40일 영성 순례의 절반 정도가 지난 셈입니다. 사순절이 깊어지고, 부활절이 가까울수록 몸과 마음이 십자가의 주님과 가까워지고 있으신지요? 오늘 새벽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도바울은 인생의 목표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 3:10-11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의 삶의 주제는 오직 예수! 였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닮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부활의 능력과 생명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이전에 좋던 것에 그다지 큰 가치를 두고 살지 않았습니다.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빌 3:7-8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이전에 좋던 것이 더 이상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일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니, 이전에 좋던 것은 마치 배설물처럼 가치가 없었습니다. 이게 뭘까요?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게 많은 사람들 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있기 마련이고, 예배드리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때때로 교회 갈 기분이 아니라 빠지기도 하고, 때론 어떤 사람이 보기 싫어서 교회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보다 귀하고, 중요하고, 급하고, 먼저인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뒤로 미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알고, 더 깊이 아는 일 외는 다 배설물로 여깁니다. 예수님을 알고 더 깊이 아는 일이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과 고난의 신비를 어떻게 해서는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본받아서, 어떻게 해서든지 부활과 영생에 이르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을 통해 복음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해서든 더욱 깊이 복음을 알고, 경험하고, 참여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마 거기엔 오직 복음으로 사는 사람만 알 수 있는 생명과 기쁨,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진짜로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한다면, 이런 바울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십자가를 붙들고,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는 소망에 우리는 관심이 있을까요? 우리는 오직 예수로 사는 능력과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자, 누리고자, 나누고자 그렇게 애쓰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사순절을 지내며 우리가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구원과 생명, 기쁨과 능력이 있음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예수님보다 더 급한 일이 있다면, 예수님보다 내 마음과 생각, 감정을 빼앗는 것이 있다면, 그럼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구하며 살고 있을까요?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고요한 가운데 말건네 오시는 십자가의 주님 그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 사순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사순절이 깊어지고, 부활이 가까울수록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더욱 깊어지는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찬양 – 예수의 길
오늘 설교 제목은 “사울의 제사 뭐가 틀렸을까?”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둔 사울 왕이 전쟁 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무엘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약속한 날이 되도록 사무엘이 오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상황이 위급하다고 판단한 사울 왕은 결국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왕의 행동이 망령되다며 책망합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의 요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분문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생각할 주제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사울이 사무엘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린 것이 망령된 행동인가를 생각해 보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의 시간을 거쳐서,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사울이 첫 번째 왕으로 세워지기까지 대략 3,4백년 동안을 왕이 없이 지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는 시간 동안에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치러야 했습니다. 강한 왕권을 가진 주변나라들과 전쟁을 치루면서, 이스라엘도 왕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강력한 왕이 국가를 통치하면, 주변나라들의 침략을 효과적이고 강력하게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도 왕을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왕을 주시기로 허락하셨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먼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미스마로 불러 모았습니다. 각 지파의 대표들을 불러 모아 제비를 뽑아서 왕을 세우기로 합니다. 그렇게 베냐민 지파가 뽑히고, 또 제비를 뽑으니 마드리의 가문이 뽑혔습니다. 또 제비를 뽑으니 기스의 아들 사울이 왕으로 뽑혔는데, 하나님은 백성들 앞에서 제비뽑기를 통해서 한 번 더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증하셨습니다. 하지만 왕이 된 사울도, 처음 왕을 갖게 된 이스라엘도 모두가 어색했습니다. 왕의 자리가 어색한 사울은 왕이 된 후에도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 이전 해오던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사울이 왕으로 역할과 자리를 확인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암몬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사울은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자타공인 왕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시 왕의 중요성은 전쟁에 있었습니다. 주변 나라들과의 갈등 속에서 전쟁을 효과적으로 치루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요구했고, 그래서 전쟁에서의 승리가 결정적인 왕권 역할이고 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왕이 된 지 1년쯤 지났을 때,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직면하게 됩니다. 본문 1-2입니다.
삼상 13:1-2 1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2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당시 왕의 중요한 기능이 전쟁이었기 때문에, 사울은 삼 천명의 상비군을 조직합니다. 이전까지 이스라엘에는 직업군인은 없었습니다. 평상시에는 거주지에서 자신의 직업을 갖고 지내다가, 어느 날 이스라엘과 이민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백성 모두가 집결에서 전쟁에 임하는 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체재였습니다. 그러다가 왕권이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직업군인제도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군대 규모는 크지 않았습니다. 총 3천명의 상비군 중에서, 2천명은 사울이 이끌었고, 천명은 왕자 요나단이 이끌었습니다. 그러다가 요나단의 부대가 블레셋과의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앞두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 상황이 쉽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의 군대 규모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면,
삼상 13: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앞에서 이스라엘의 군대가 몇 명이라고 그랬지요? 네, 3천 명.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있다는 포고령이 이스라엘 전지역에 선포되자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들이 길갈로 소집되었습니다. 하지만 철기를 사용하는 블레셋의 군대는 병거가 삼만, 기마병이 육천, 보병은 바다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군대는 두려움에 떨며 오합지졸이 되었습니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이스라엘 군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6-7입니다.
삼상 13:6-7 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무지막지한 대규모 블레셋 군대에 이스라엘은 기가 눌렸습니다. 모두 숨거나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조바심이 났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전쟁에 유능한 지도자라고 해도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한 병사들을 데리고 좋은 결과를 내기는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제사를 요청하고 적어도 7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제사를 집례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일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전쟁도 역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 전에 선지자에게 요청해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전쟁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기를 소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선지자 사무엘이 오지 않았습니다. 가뜩이나 거대한 블레셋 군대 앞에 두려워하는 군사들은 사무엘마저 보이지 않자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의 기강이 무너지는 일은 순식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특단의 초치를 취합니다. 사무엘이 오지 않으니, 사울 자신이 하나님께 직접 번제를 드리기로 합니다. 그런데 참 얄굳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사울이 번제를 마치자 마자 사무엘이 나타난 것입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제사는 제사장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급함과 초조함에 사울은 제사장이 집례하여야 할 제사를 스스로 집례하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책망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자신이 제사를 드릴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설명합니다.
삼상 13:11-12 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의 책망에 사울은 말합니다. 블레셋 군대는 막강하고, 이스라엘 군은 두려움에 하나 둘 이탈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제사를 드리고 전열을 갖춰야 하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아 이스라엘 군대의 위기와 붕괴가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블레셋이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전쟁을 치르게 될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번제를 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무섭게 사울을 책망합니다.
삼상 13:13-15 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15 사무엘이 일어나 길갈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올라가니라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의 수를 세어 보니 육백 명 가량이라
여러분은 사울의 제사에서 뭐가 틀렸다고 생각하시나요? 단지 교만하고 오만하게 왕이라고 해서 제사장의 권한을 침법한 것이 잘못이었을까요? 사실 전쟁을 이끌어야 하는 사울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닙니다. 생사 오가는 전쟁터이고, 번제 없이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야 비록 사울이 제사장은 아니지만, 왕의 주도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뭐가 그렇게 큰 잘못인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사무엘을 아주 엄중하게 사울을 책망합니다. 사울의 다급한 입장, 블레셋의 공격이 임박한 것을 고려한다면 어느정도 이해가 될 법한데도, 사무엘은 왕을 향해, 어찌 그리 망령되이 행했느냐며 책망합니다. 만일 왕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했다면, 하나님이 사울의 왕조를 지켜 주셨을 것이지만, 왕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기 때문에 사울왕조가 길지 않을 것이라 저주같은 책망을 합니다.
사울은 제사장이 아니기 때문에 제사를 집례한 것은 분명 사울의 실수입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성과 급박함을 고려한다면 이해가 가능한 실수 아닐까요? 사울은 지금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어쩔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왕이 대신 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하나님은 그토록 엄중하게 사울을 책망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사무엘과 사울의 결정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은 급박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제사가 문제인 것은 사람의 생각과 판단을 따라 드리는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기다려야 했지만, 사울은 상황과 형편에 쫓겨 자신의 판단을 따라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는 하나님의 뜻과 판단을 구하는 것인데, 사울은 자신의 판단에 하나님의 뜻을 끼워 맞추려 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에 충성되게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역시 평소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갈리는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편안하고 안정적일 때는 잘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급박하고 위기 상황이라면 삶의 태도는 여지없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공포 정치에 세상의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간악하고 간교한 유대인들의 계략에 세상의 지혜를 따라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이고, 모욕이고, 절망이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뜻이니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 십자가의 길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에서 나타납니다. 내 생각, 내 판단, 경험으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들만 나타낼 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도움을 보고 싶다면, 내 생각과 달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 속에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이백민목사 / 삼상 13:8-14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A Man After God’s Own Heart)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자기 마음에 맞을수록 친해지고 맞지 않을수록 멀어집니다. 살면서 누군가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삶이 외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윗에게 가장 마음이 맞는 사람은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그 아버지 사울왕 보다 다윗과 더욱 마음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소위 ‘절친’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바로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복음송 테이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듀엣으로 복음송을 불렀는데 다윗과 요나단과 같이 신앙적으로 아주 친한 사이임을 강조한 것 같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마음이 맞았기 때문에 절친이 되었고 덕분에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하였고 다윗은 나중에 요나단 사후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도와주고 끝까지 보호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삶을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원수 같은 삶에서 하나님과 가까운 친구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 73: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 맞는 사람은 각각 어떤 사람입니까?
1.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 – A Man Who Doesn’t After God’s Own Heart
본문 말씀에는 사울왕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기 위해 길갈에 모여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 모이고 있었는데 사울왕은 전쟁에 임하기 전에 사무엘이 와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를 올려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군을 본 이슬라엘 백성들 중에 겁을 먹고 도망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무엘이 정해진 기일에 오지 않자 사울왕은 다급해졌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레위지파인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수 있었는데 베냐민 지파로 제사장 자격이 없었던 사울왕이 직접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져오게 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삼상 13: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삼상 13: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불순종이 겉으로는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 곧 요즘으로 하면 예배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멸하라고 하신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기 마음에 드는 전리품들을 남길 때도 겉으로는 얼마나 하나님을 위하는 척하였습니까?
(삼상 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인간적으로 거룩하게 보일 수도 있었던 사울의 행동,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했던 사울의 행동이 하나님께는 전혀 거룩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받는 행동이었습니다.
(삼상 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도 항상 좋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중에도 이와 같은 것들은 없습니까? 거룩하게 보이고 좋게 보이지만 하나님께 속되고 부정한 것들이 있습니다.
사울의 삶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맞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는 맞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2.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 A Man After God’s Own Heart
하나님 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하며 필요할 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불순종하는 사울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사울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삼상 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그 시대의 종교인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사울왕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막 7: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종교나 직분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불신자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성경 역사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잘 맞는 사람과 친해지고 친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잘 맞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며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출 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곧 예수님의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요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3.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 A Man Fulfil All God’s Will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울왕을 버리시고 새로운 왕을 선택하셨습니다. 사울 다음에 왕이 된 다윗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한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행 13: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행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명령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을 때 항상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하여 자신의 뜻대로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다를 때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였습니다. 사울왕은 사무엘이 죄를 물을 때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보다 핑계하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단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따랐습니까?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삼하 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결국,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뜻을 고집하며 살아갔던 사울왕은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던 다윗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믿음의 사람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100% 완벽하게 이루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의 일생은 성부하나님의 마음에 완벽하게 맞는 삶이셨습니다. 얼마나 잘 맞았습니까?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이 말을 들었던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인 증거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0: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요 10: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구원과 영생이 있습니다.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이삼규목사(낙양교회) / 삼상 13:8-15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당신, 참 마음에 들어요.”라는 말을 들으셨다면 아마도 기분이 최고로 좋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위대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 준다면 그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면 어떨까요?
삼상 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일까요?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진 사람이지만 그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음으로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까요?
사울은 왕이 된 후에 삼천 명을 택하여 군대로 삼았습니다. 그중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나머지 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였습니다.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요즘 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 소년 세 명이 실종되었다가 시체로 발견되어 장례를 치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소행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자치구를 향하여 보복 공격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과 악연은 사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의 공격을 알고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과 일전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삼상 13: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블레셋 군대는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 명이며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다고 합니다.병거가 삼만 이라면 오늘날로 말하면 탱크가 삼 만이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이런 대규모의 군대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군대가 몇 명이었습니까? 겨우 삼천 명이었습니다. 그것도 칼을 가진 사람은 사울과 요나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막대기나 쇠스랑이나 연장을 가진 정도입니다. 이런 오합지졸의 군대를 가지고 블레셋 병거 삼 만과 엄청난 군대를 어떻게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삼상 13: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삼상 13: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절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웅덩이는 물을 가두어 두기 위한 물 없는 웅덩이를 의미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을 도망 가버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사울을 따른 모든 백성들은 떨고 있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을 맞이한 이스라엘은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 왜 기다렸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또 사무엘이 길갈로 내려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삼상 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사울은 목이 빠지라 이레 동안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7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동요하고 떨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는 사무엘도 오지 않고 백성들은 흩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삼상 13: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진퇴양난에 놓인 사울은 어떤 행동을 하였습니까?
삼상 13: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그런데 사울이 번제 드리기를 막 끝낸 상황인데 사무엘이 도착을 하였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한 시간만 더 기다렸더라도 이런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정리한 후 금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파 들어가도 금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치고 지친 그는 그만 금광을 헐값에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금광을 인수한 사람이 1미터쯤 더 파고 들어가자 황금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금광을 판 청년은 참으로 속이 상하였습니다. 후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1미터의 철학을 정립하고 모든 일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보험회사 영업사원이 되었습니다. 그가 고객을 상대할 때도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지금까지의 수고가 허사지’하는 생각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설득하여 결국 보험을 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그러한 집념으로 사업을 하여 자신의 금광을 사서 큰 부자가 된 사람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1미터의 철학’이 중요합니다. 사울이 한 시간만 기다렸더라도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묻습니다.
삼상 13: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삼상 13: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사울은 다급한 상황 때문에 부득이하게 번제를 드렸다고 변명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성도는 상황이 어려워지더라도 사람을 붙잡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울은 백성들이 두려워 떨고 사방으로 흩어지자 조급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인 사무엘을 통해 번제를 드리고 그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뜻을 어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성도의 싸움이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리기 원하십니다. 사울은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을 붙들어 블레셋과 싸워 이겼던 지난 역사를 기억했어야 했습니다(7장).
물론 사람마다 각자 기준이 다르고 정도에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고 해서 어떤 이의 잘못이 잘못이 아닌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사울의 처지를 십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오랜 시간 인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상 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삼상 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망령되이 행하였다’라는 히브리어는 “싸칼”이라고 하는데 “바보가 되다, 어리석다, 어리석게 행동하다”는 의미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스스로를 바보처럼 만들어서 어리석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번제를 누가 드렸느냐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리신 명령에 사울이 불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분명히 경고하였습니다.
삼상 12:14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삼상 12:25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하리라
사울의 번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드린 번제여서 오히려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 된 것입니다. 사울은 빨리 번제를 드려서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블레셋의 침입에 대비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왕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이었고, 하나님 앞에서는 명령된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에,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사울도 왕으로 세움을 받기 전에는 자신을 가장 미약한 자로 고백하는 겸손을 보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달라졌을까요?권세를 잡고 나니까 그의 마음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 권세를 스스로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위에 집착하는 것을 하나님은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곤경에 처해도 순종하는 사람
사울은 블레셋의 위협을 받으며 차분하게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블레셋과 싸워 이겨 보겠다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더 중요시 한 것입니다.
사울을 책망한 사무엘은 기브아로 떠나버렸습니다. 사울이 제사를 드리지 않고 기다렸더라면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사울이 행할 바를 가르쳐 주었을 것입니다.
삼상 10:8 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백성은 600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울에게 있었던 1400명의 군대가 도망을 가지고 나머지 600명이 남은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열세인 것을 알고 북쪽 지파에서 내려오는 지원병을 차단하고 게릴라전을 일으키기 위해 특공대를 세 대로 나눠 침투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더욱 불리해졌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성도가 강한 대적을 맞아 위기를 겪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말씀의 어떤 부분을 지켰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느냐에 대한 믿음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고 힘들어질수록 눈에 보이진 않지만 만물의 주관자이시고 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대적이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대적을 더 크고 강한 존재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뜻과 의지를 내세우기보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며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곤경에 처해도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하는 자입니다. 상황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해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할 때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전능하신 그분의 손으로 구원해주실 것입니다.믿습니까?
능력이 없어도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능력이 없어도 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골리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삼상 17:4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의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요
삼상 17:5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으니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며
삼상 17:6 그의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었으니
삼상 17:7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더라
골리앗은 키가 2m 40-50 정도 된 거인이었습니다. 머리에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입었고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고 어깨에는 놋 단창을 메었는데 그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었고 방패든 자가 앞에서 행하였습니다. 이런 골리앗을 맞서 싸우는 다윗은 무엇을 준비하였습니까?
삼상 17:40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골리앗과 다윗이 게임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골리앗이 다윗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삼상 17: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만약 개라면 막대기로 때려잡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상대는 블레셋의 거인 장수였습니다.그런 골리앗과 맞서 다윗이 싸워 이겼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떠하였습니까?
삼상 13:22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더라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철공 기술이 없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 연장을 만들려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서 만들어 가지고 왔습니다. 옛날에는 철공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였습니다. 철공 기술이 있어야 강철 검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가 강철 검을 제작하느냐에 따라 전세는 달라집니다.
군대는 다 흩어지고 나머지 600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인데 무기는 단 두 개뿐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칼이 쥐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블레셋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블레셋은 병거만 3만이었습니다. 마병이 6000이었습니다. 군대ㄹ도 해변의 모래와 같았습니다. 이런 군대와 어떻게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과 싸워야 하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러서지 말고 그들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붙들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일까요? 겸손히 순종하는 사람, 곤경에 처해도 순종하는 사람, 자기가 가진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가장 존귀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을 위해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 겸손하게 참고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성공 비결
양의섭목사(왕십리중앙교회) / 사무엘상 13:8-15a
전쟁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가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적들이 몰려오는데, 자신들보다 훨씬 많습니다. 중과부족입니다.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럼에도 지휘관은 자기가 신호를 하기 전까지 총을 쓰지 말랍니다. 그야말로 떼거리로 적들이 몰려오는데, 병사들은 초조해 합니다. 적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이젠 죽었다 싶은데, 정말이지 극도의 공포심 속에 도망하고 싶은 데, 갑자기 ‘사격개시!’하는 명령이 떨어지고 일제히 반격을 가합니다.
나는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오금이 저립니다. 어떻게 저렇게 버틸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극도의 공포심에 에라 모르겠다 도망갈 것 같은데 병사들은 끝까지 두려움 속에서도 버팁니다. 오로지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이래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자기감정, 자기의 사사로운 판단에 의해 움직였다간 어떠한 전투에서든지 다 패하고 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어쩌면 이런 전투의 한 복판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꼬이며 악화되고, 그래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지고, 마침내 불안함이 커다란 괴물로 변해오고, 자신은 더욱 더 작아져 가고, 이러다가 저 괴물에게 먹히고 마는 것이 아닐까 싶은 그런 절박한 심정, 절박한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 그런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사울, 왕이 된 남자입니다. 왕이 되고 2년째에 사울이 곤경에 처합니다.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상황이 얼마나 불안하고 답답한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이 있는 3절에 보면 사울은 아들 요나답에게 군사 천명을 주고 블레셋 수비대를 치게 하였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싸움이 붙자 동원된 블레셋 군대의 진용을 보니 이건 상대가 안 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온 블레셋이 모여들었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왕이 생기고 붙는 싸움이라 블레셋이 총동원을 한 모양입니다. 5절에 보니 블레셋의 병거가 삼만 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답니다. 이에 대항하는 이스라엘의 군대는? 3천명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백성들도 동원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맞붙은 이스라엘, 블레셋의 진용을 보고 겁을 먹습니다. 6-7절에 이스라엘 진영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싸움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겁부터 먹었고, 급기야 그들은 숨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강을 건너 멀리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사울과 함께 있던 이들, 도망 못 간 이들은 두려움 속에 모두들 떨었습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사울은 어떻게 하는가요? 사울은 고민합니다. 싸움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 진영은 겁부터 먹었습니다. 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래가지고는 싸울 수 없습니다. 백성과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반절시킬 방법이 없을까요? 사울은 그 때 중대한 결단을 합니다.
8-9절,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제사는 사무엘 선지자가 와야만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한 기한이 다 되어 가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갑니다. 백성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사울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자기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제사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11절 이하,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부득이! 왜 부득이?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오지 않고, 블레셋은 더욱 더 집결하고...
사울의 행동, 어쩌면 부득이 하고도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흩어지는데, 적들은 몰려오는데, 사기는 떨어지는데 어쩔 것인가요? 지도자로서 당연히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는 법. 그래서, ‘백성과 군사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가?’, 그것을 찾아보고 그것을 자신이 급하게 처리 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요?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제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는 이들이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건데, 사울은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백성과 군사들을 위한 쇼맨십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림으로, 그것도 자신이 집례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자신이 구하는 것 같이 보였지만,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미 그 상황에는 하나님께서 기다리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들이 몰려온다고, 상황이 급박하다고 그만 자기가 총을 먼저 쏴 버린 격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블레셋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것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백성들이 자기에게서 흩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살던 이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떨어지는 것, 그래서 홀로 남는 것이었습니다.
왕권? 사실 원치 않던 인물이었습니다. 왕 시켜주겠다고 할 때 좋아라 한 인물이 아닙니다. 부끄러워 숨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요, 비정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왕이 되려고 일을 꾸미던 이가 아닙니다. 또한 사람들도 처음에 사울이 왕의 재목이라 할 때 모두들 웃었습니다. 그 사람이 무슨 .... 왕과 사울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습니다. 사람들도 그랬고, 사울 자신도 자신이 왕의 재목감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고 보니, 되고 보니 좋습니다. 왕이란 게 얼마나 좋은지... 뒤늦게 바람난다고, 해 보니까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거기에 집착합니다. 이거 잃어버리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이거 잃어버리면, 이거 없으면 어떻게 사노 하면서 집착에 집착을 합니다. 전에는 그거 없어도 멀쩡하게 잘 살았는데 언제부터인지 그거 없으면, 그거 잃어버리면 죽는 줄 압니다. 그러다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지자 자기로선 할 수 있는 일을 다 합니다. 자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여기까지만도 별로 그를 탓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가 왕이 된 것, 누구의 뜻이었는가요? 하나님! 누가 세워주셨습니까? 하나님! 약속, 옵션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전쟁에 내보내시며 당신의 사자 사무엘을 통해 명하셨습니다. 기다리십시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현실이, 상황이 돌아가는 것이 너무 급박하다고,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져 있음에도 끝까지 하나님께 주목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가 임의로 손을 썼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사울을 책망합니다. 13절 이하,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발등에 떨어진 불, 그것만 보고 그것을 끄겠다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다 한다고 해결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명령이 있다면 그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효율성이요 실용적이요 급해서 그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더 큰 낭패를 당합니다.
보십시오, 사울의 다음 싸움이 아말렉과 싸움인데(삼상15장)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 진멸하라고 하셨음에도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 드릴 거라는 구실을 대며 빼돌립니다. 지적을 당해서야 하나님께 드릴 거라고 변명을 합니다. 그래서 이때 그 유명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책망을 받습니다. 죽이라고 명령한 아말렉의 왕 아각은 많은 뇌물을 받고 살려줍니다.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의 이권 챙기는데 더 주력합니다. 명분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곤 마침내 다시 블레셋과 싸움을 벌이는데, 그 때는 더욱 공포스러운 블레셋의 거대한 장수 골리앗과 마주 합니다. 골리앗을 마주하고 방법을 찾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매일 같이 싸움터에 나서서 하나님을 모욕하며 싸우자고 하는데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조차도 마음에 없습니다. 해결방법을 찾겠다고 몇 날 며칠, 몇 달을 끙끙대지만 두려움만 커져갈 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에서 눈에 불을 켜고 해결책을 찾지만 절망감만 커질 뿐입니이다.
이 때 등장한 이가 누군가요? 다윗! 다윗은 사울과 똑같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누구에게 주목하는가요? 여호와 하나님, 살아계신 야훼 하나님! 그래서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 현장에서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가며 외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6) 그리곤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러면 성공합니다. 현실은 누구나 다 똑같이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 넘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 분께 집중해야 합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 뒤에는 죽이겠다고 달려오는 애굽의 군대!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진퇴양난입니다. 절망의 한 가운데 처해있습니다. 백성들은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이 상황까지 이끌어온 지도자 모세를 죽이고 다시 애굽으로, 바로의 노예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렇게 위험한 때에 모세는 뭐라고 하는가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져 있다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믿음으로 버티며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일어나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십니다. 나를 위하여, 내 인생을 위하여, 내 사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일어나십니다.
두려움이 몰려오고, 불안함이 증폭되지만, 이럴 때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2~3)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성취케 하십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무서우면 도망갈 궁리부터 하지 말고, 골방에라도 들어가십시오. 그곳에서 하나님께 간구 하고 또 간구 하십시오. 마침내 크고 은밀한 일들을 내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른바 성공하기 위해 챙겨야 할 것들은 현장에서 무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에 신경 쓰다 보면 제 정신으로 못 삽니다. 그래가지고는 성공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눈길,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 보면 장사하려는 이들에게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4:14-16)
뭔가 하나를 하려면 챙겨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저것, 재정, 관공서, 인간관계, 경험, 자리, ... 구멍가게 하나를 하려고 해도 챙겨야 것들이 엄청 많은 형편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일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우리가 주목하고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입니다. 주님께 우리의 모든 초점을, 포인트를 맞춰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이런 것들에게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이런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과연 우리 하나님께 주목할 수 있고,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주목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를 얻을 것이요, 성공을 얻을 것입니다. 성취하시고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마침내 챙겨주시고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성공 비결, 우리들의 성공 비결이 뭘까요? 우리들이 실패한 인생이 아닌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요?
시편 기자가 이렇게 일러줍니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37:3-6)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라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가 옳았다고, 네 삶이 그릇되지 않았다고 정오의 빛 같이 빛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주목하십시오. 현실에 맘 뺏기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에 주목하십시오. 맘이 불안하고 흔들리면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고, 우리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정오의 빛같이 빛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많은 일들,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다 일일이 챙기시렵니까? 그 변화무쌍한 조건들에 마음 흔들리며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만 주목하십시오. 그러면 다른 것은 다 해결됩니다. 가장 중심적인 것, 그것에만 삶의 포커스를 맞추십시오.
“...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의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대하15:15)
끝까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하나님께 주목하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원하던 그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하는 인생, 꼭 그리 되시기를!
이윤재목사 / 삼상 13:8-15
추석을 마치고 돌아와 반갑습니다. 교통은 복잡했지만 고향에서 부모님 만나고 돌아오는 마음은 편하고 푸근한 마음입니다. 혹 내려가지 않고 자녀들이 찾아온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년 추석을 지나면서 추석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추석은 다만 음식먹는 날이거나 부모자녀간의 정을 나누는 날이 아니라 피곤하고 지친 마음이 가족을 만나 좀 더 부드러워지고 좀 더 편한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해인 수녀가 쓴 “달빛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추석 보름달을 보고 쓴 시 같습니다.
너도 나도 집을 향한 그리움으로/ 둥근 달이 되는 한가위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빛처럼 순하고 부드럽기를
우리의 삶이/ 욕심의 어둠을/ 걷어내 좀더 환해지기를/ 모난 마음과 편견을 버리고/ 좀더 둥글어 지기를
그렇습니다. 추석은 다만 잘 먹는 날이 아닙니다. 잘 먹으려면 좋은 식당으로 가면 됩니다. 다만 효도하는 날이 아닙니다. 효도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만나면 순수해집니다. 세상사람 만나면 긴장해야 하고 자기를 감추거나 과장해야 하고 본의 아니게 생존을 위해 자기 주장, 자기 피알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이 만나면 뭘 감출 것이 있습니까? 무슨 모난 마음과 편견을 가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보름달처럼 순하고 부드러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나올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모든 무장을 해제합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 아픔 다 잊어버리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섭니다.
그렇게 순하고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느날 악하게 되어 이스라엘 역사에 큰 옷점을 남긴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입니다. 언제나 처음이 중요합니다. 나라마다 초대 왕. 초대 대통령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 고려 왕건, 이조 이성계, 미국의 워싱톤 대통령,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수상, 역사를 시작한 초대 왕, 초대 대통령은 언제나 백성들의 존경과 주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조금만 잘했으면 이스라엘 역사에 정말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을텐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버림받고 블레셋에게 죽어 마지막에 벳샨 성벽에 매달리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우리는 사울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도대체 사울은 왜 이런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사울이 간직했어야 할 중요한 몇 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과연 사울은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그리고 사울을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회복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을 잃었다.
사무엘상 9장과 10장은 하나님이 사울을 선택하고 그를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베냐민지파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기스, 고향은 기브온이었습니다. 사사시대가 끝나가고 사무엘이 늙자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다른 나라처럼 왕을 주십시오”. 사무엘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백성들의 요구가 많아지자 어쩔 수 없이 왕으로 세우기로 하고 사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삼상10:1절입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븟고 입맞추며 이르되 여호아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하나님이 지도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다고 말합니다. 아무나 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일할 사람 곧 제사장, 선지자와 왕에게 부었습니다. 기름은 올리브 기름인데 올리브 기름은 쓰임새가 많습니다. 식용으로 쓰고 화장품으로, 치료제로도 씁니다. 성소에 등불도 밝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사울에게 기름만 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도 부었다는 것입니다. 삼상10:9-10입니다.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여기서 그는 “사울”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기름부음 받고 막 떠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 결과 그가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도 임했다는 것은 그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성령의 기능은 여러모로 기름의 기능과 닮았습니다. 우선 성령과 기름이란 말의 히브리어 어근이 같습니다. 이 말의 기본 알파벳이 세 글자입니다. “쉰, 눈, 멤”, 이 말에서 “기름”, “쉐멘”이 나왔고, “성령”, “네샤마”도 나왔습니다. 글자의 순서를 바꾸면 “쉐멘, ”기름”이 되고 “니샤마”, “성령”이 됩니다. 기능도 같습니다. 올리브 기름도 부드럽고 성령님도 부드럽습니다. 올리브 기름도 사람을 살리고 성령님도 사람을 살립니다. 올리브 기름을 부으면 안에서는 열이 나고 밖에서는 빛이 나고 성령님도 우리안에 들어오면 우리 안에서는 영적인 에너지, 힘이 나고 우리 밖에서는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그래서 “열이 나면 빛이 납니다”. 올리브 기름과 성령의 공통적 기능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기름과 함께 하나님의 영을 부으시자 사울이 영에 붙잡혀 데굴 데굴 구르며 예언을 시작합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붙잡혀야 예언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9절, 삼상10:9, “하나님이 세 마음을 주셨고”, 새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왕이 되는 권세가 땅에서 오거나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예언하자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삼삼10:11, “사울도 선지자중에 있느냐?”. 사울이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세울 때 하나님의 영, 성령을 부어 주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하나님의 영을 오래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 하나님의 영을 잃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후에 나타난 사울의 문제는 모두 여기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이 사라지자 사울에게는 인간적 욕심과 정욕만 남았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나타나자 사울은 그에 대한 질투과 시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평생 다윗에 대한 적대심과 미움에 사로 잡혀 그의 인생을 망치고 맙니다. 그 이유를 설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삼상16:14입니다. “여호아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아께서 부리시는 악령이를 번뇌케 한지라”. 이 말씀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주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났고, 그 대신 주께서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악한 영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악한 영의 사주를 받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사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끝까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 실수했어도 다윗처럼 기도해서 성령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시51:11-12, “하나님이여, 나를 주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다윗이 두려웠던 것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성령이 떠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령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다윗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인격의 차이가 아닙니다. 능력의 차이가 아닙니다. 실수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없을 때 기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였습니다.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다면 다윗을 그렇게 미워했을까? 만일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역사했다면 여덟 번이나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까? 만일 사울안에 하나님의 영이 역사했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을 죽이려고 그의 모든 정력과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며 이스라엘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까? 사울은 정말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칩니다. 곧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요일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시느니라”. 또 27절입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여기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두 번 나옵니다. 성령님은 마치 자동차로 말하면 기름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기름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기름은 자동차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은 20절, “모든 것을 아시느니라”. 성령은 우리안에서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영입니다. 성령은 27절,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성령은 우리안에서 모든 것을 가르칩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서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무엇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안에 성령님이 떠나가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죄를 지어도 성령님은 우리를 회복시킵니다. 성령은 우리를 능하게 하십니다. 사랑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언제나 문제는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성령의 기름을 내게 부어 주옵소서. 제 기도에 부어 주옵소서. 제 설교에 부어주옵소서. 우리의 예배에 부어 주옵소서. 우리의 찬양에 부어 주옵소서. 우리 성도들에게 부어 주소서. 다른 사람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부어 주옵소서. 주님의 일에 부어 주옵소서. 성령님, 우리를 떠나지 마옵소서. 한때 잘 나갔다 마지막에 버림받은 사울처럼 될까 염려됩니다. 우리와 동행하셔서 승리하게 하소서”. 아멘.
겸손을 잃었다.
사울이 잃었던 두 번째는 겸손이었습니다. 사울의 이야기가 처음 성경에 나올 때 사울은 아주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우선 인물이 대단했습니다. 삼상9:2에 “준수한 소년”이요 키가 보통 사람보다 어깨위만큼 더 컷습니다. 그는 또한 효자였습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다니다 사무엘을 만났습니다. 이 부분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잃어버린 백성을 찾고 있었다”. 그가 잃어버린 나귀를 찾은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을 대변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잃어버린 백성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대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 받을 때 보인 모습은 겸손의 극치였습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부으려고 보니까 사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디 갔나 했더니 사울이 숨었습니다. 삼상10:22보면 짐보따리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왜 짐보따리인가 하면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 부으러 올 때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여럿이 함께 왔습니다. 그리고 올 때 홀 몸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저런 짐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짐을 한쪽에 쌓아 놓았는 데 사울이 그 짐뒤에 숨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순진한 사람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왕이 되다니” 아마 황송해서 숨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왕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백성들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삼상10:24입니다.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부르니라”. 더 쉬운 번역입니다. “백성이 사울을 향하여 크게 함성을 질렀다. 우리 왕 만세”. 사울은 처음부터 백성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왕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자 모든 백성이 “그래. 사울은 그럴만해. 그는 좋은 왕이 될거야”하고 환영했습니다.
더 좋은 것은 그가 왕이 된 후 한 행동이었습니다. 두 가지가 있는 데 삼상11장에 나옵니다. 하나는 그가 왕이 되자 마자 그가 늘 하던 농부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삼상11:5절입니다.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사울이 왕으로 즉위한 후 첫 번째가 다시 농부로 돌아간 사건을 두고 학자들의 해석이 있습니다. “이제 막 왕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아직 머물 왕궁이 없었다. 그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또 얼떨결에 왕이 되었고 또 전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 무슨 일을 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사울이 매우 소탈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얼떨결에 왕이 된 것은 맞지만 왕의 자리를 특권의 자리로 여기지 않았슴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라고 해서 자기가 할 집안일을 하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굉장히 서민적인 왕이었습니다. 왕이 되어 했던 두 번째 일은 난폭한 독재자로부터 백성들을 구한 일이었습니다. 그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데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나하스라는 폭군에게 고통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 말을 듣자 사울은 소를 잡아 각을 뜨고 “나를 따르라”를 외쳤습니다. 그 길로 단숨에 달려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독재자의 손에서 건져냅니다. 사울의 이런 모습은 사울이 매우 인간적이며, 정의로우며, 특권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이랬던” 사울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겸손하고 사심이 없었던 사울이 서서히 독재자, 폭군으로 변합니다. 삼상9-10장에서 왕이 된 후 13-15장으로 오면 완전히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삼상13장, 15장에 보면 사울은 세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삼상13장에서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있을 때 제사장인 사무엘을 대신하여 자기가 제사를 드립니다. 14장에서는 불레셋과의 전쟁중에 갑자기 금식을 선포하며 금식하지 않은 사람은 벌을 내리겠다 했는 데 아들 요나단이 걸립니다. 이로 인해 전쟁이 어려움에 빠집니다. 15장에서는 아말렉과 전쟁이 벌어졌는 데 하나님이 아말렉을 다 진멸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왕은 죽이지 않고 전리품만 뺏어 자기 곳간에 숨깁니다. 분명히 이 사건들은 사울의 첫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겸손하던 사울은 왜 이렇게 변한 것일까? 왜 사울은 처음의 그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망하는 길로 갔을까?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중이었습니다. 13, 14장은 불레셋과 싸우고, 15장은 아말렉과 싸웁니다. 두 번째 사울은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사울의 목표는 오로지 승리입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도 불사합니다. 자, 13장 사건을 봅시다. 지금 불레셋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사무엘은 하나님께 먼저 제사드리고 전쟁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는 시간이 조금 지체되었습니다. 사울이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리고 말았습니다. 사무엘이 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쉬운 번역입니다. 삼상13:12, “불레셋 사람이 나를 치러 곧 길갈로 올라올텐데 나는 아직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도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직접 나서서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사울은 불레셋과의 싸움을 전쟁으로 생각했지만 사무엘은 예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전쟁은 사람과의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사무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전쟁을 군사적인 일로 생각했지만 사무엘은 영적인 일로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사람들을 잘 단결시키고 전준비시키면 이길 줄 알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해야 전쟁에 이긴다는 생각은 못했습니다.
15장에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말렉과 그 소유물을 전부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사울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려고 가장 좋은 짐승들은 죽이지 않고 남겨 두었다고 말합니다. 언뜻보면 대단히 좋은 믿음입니다. 전리품을 취했는 데 그것으로 예배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니 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배의 생명이 제물입니까? 예물이 좋아야 예배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따르지 않으면서 남의 소나 양을 빼앗 제물로 바쳤다면 하나님이 그 불순종의 예물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제물보다 순종을 더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사울의 우선적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올 때까지 못 기다린 것도 하나님께 빨리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기다리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그렇게 되면 전쟁에 질까봐 그런 것 아닙니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불순종하더라도 좋은 소나 양으로 제사하면 그것을 본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것 아닙니까? 사울은 하나님을 자기 승리의 수단이나 방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울의 눈에는 하나님보다 사람이 더 크게 보였고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위해 하나님을 방편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책망했더니 사울이 말합니다. 삼상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다같이 “내가 백성을 두려워 하여”.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두려워 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보다 불레셋 군대를 더 두려워 했고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실패를 더 두려워 했습니다. 이것이 결국 그로 하여금 남의 생에 두고 두고 실패를 가져온 원인이 되었습니다. 처음의 그 겸손한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무엘은 그를 떠났고 하나님은 그에게 왕권을 빼았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삼상10: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울이 하나님을 버리자 하나님도 그를 버린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끝까지 겸손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처음 믿을 때 그 순수한 믿음을 끝까지 유지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잃어버린 첫 사랑을 다시 회복하겠습니까? 계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우리가 처음 구원받고 감격했던 그 믿음, 우리가 처음 성령받고 방언했을 때 그 기쁨, 우리가 처움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을 받고 “이젠 잘해봐야지” 했던 마음, 그 처음 믿음과 겸손을 주여, 우리에게 다시 회복시켜 주옵소서.
은혜를 잃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은혜를 잃었습니다. 사울은 평생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 빛나는 초대 왕으로 부름받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본래 하나님의 뜻은 왕을 세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고 직접 다스리는 나라, 그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하나님께 왕을 요구합니다. 그 동기도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왕을 세워 달라”. “다른 나라”란 예를 들면 불레셋이나 애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었잖습니까?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심정의 배후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피하여 직접 통치하고픈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의 왕 요구는 하나님의 주권의 거부요 하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으로서 자신들이 자기 삶에 관한 결정권을 갖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고 그 첫째 왕으로 사울이 선택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감히 하나님이 안된다 하는 것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사울이 만일 이 은혜를 평생 기억했다면 훗날 그렇게 잘못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지만 거절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 거절만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후에 왕들의 잘못을 일일이 책임지시며 끝까지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 이 은혜를 사울이 깨달았다면 사울이 그렇게 잘못 되었을까요? 그래서 학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둘로 나눕니다. 하나님의 본래 뜻과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뜻, 하나님의 본래 뜻은 하나님이 가지신 본래의 계획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허용하시는 뜻은 본래 하나님의 뜻은 아닌데 인간이 요청할 때 하나님이 허용해주시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고 사울이 초대 왕이 된 것, 그것은 하나님의 허용하신 뜻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허용하면 끝까지 지키시고 돌봅니다. 사울은 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울이 받은 은혜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미 그는 삼상15장에서 버림받고 왕권을 다른 사람에게 뺏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왕권은 금방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16장에서 다윗이 나타나 기름부음받지만 삼상31장에 가서야 사울이 죽습니다. 그 사이 사울은 다윗을 엄청나게 핍박합니다. 엔게디, 하길라, 마사다, 다윗을 온통 유대광야로 내몰아 죽음 직전까지 가게 합니다. 조금만 사울이 일찍 죽었어도 다윗이 덜 고생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사울은 다윗에 의해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블레셋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은 사울을 살리셨을까? 아마 사울이 회개하라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사울은 하나님의 오래 참고 견디시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손자 므비보셋이 받은 은혜까지 하면 그는 실로 넘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번도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에 한번도 사울이 기도한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골리앗이 싸움을 걸어왔을 때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윗 잡느라 온통 국정이 마비되었을 때 나라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불레셋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에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례받지 않은 자에게 부끄럽게 죽는 것만 생각하고 자기를 죽여달라고 만 했습니다. 그는 은혜를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은헤를 잃어버린 사람의 특징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학자 카슨은 <바울의 기도>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은 몇 가지 변명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너무 바빠서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바쁘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영적으로 너무 메말라서 기도가 안 된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영적으로 매마른 것입니다. 셋째 기도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기도하지 않는다. 필요가 없어 기도하지 않는 것이 겸손하지 않아서 기도하지 않는다. 넷째 마음에 원한이 사무쳐서 시도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도안하면 그 원한마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섯째. 너무 부끄러워서 기도할 면목이 없다. 기도는 내 모습이대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여섯째 적당히 만족하며 살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은혜를 모르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알면 기도합니다. 은혜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겸손하면 기도합니다.
물론 기도해도 금방 효과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학생 하나가 랍비에게 자신이 끊임없이 배우고 기도하며, 믿음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진실로 자기 곁에 가까이 계신 것을 느끼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기도를 중단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랍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소가 아침 일찍 외양간에서 들판으로 가지 않습니까? 거기서 밭을 갈다가 다시 외양간으로 되돌아 옵니다. 매일 이와같이 하지만 소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갈아놓은 밭에서는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까?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가을에 사울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것을 우리가 회복할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 성령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울은 첫 사랑, 겸손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겸손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울은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헤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내일부터 은혜를 회복하는 가을을 여는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기도합시다. 기도로성령을 겸손을 은혜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위한 기다림인가?
삼상 13:8-15 / 김기성목사
오늘부터 시작해서 교회의 절기에 따라 대림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며 성탄절을 맞이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각 교회에서는 성탄 장식도 하고, 트리도 하고, 다양한 성탄절 행사를 통해 예수님을 오심을 기다리는 일들을 합니다.
저희 작은 누이 집에 강아지 이름은 ‘폴리’입니다. 경찰 가족이라, 폴리스의 이름을 따서 폴리 이지요. 제가 보기에 그리 똑똑한 것 같지는 않는데, 명품 강아지라고 합니다. 한번은 밥은 주는 것을 보았어요.
밥을 앞에 갖다 놓아도, 주인이 먹지 말고 ‘기다려!’ 라고 이야기를 하면 꼬리를 흔들면서 먹고 싶은데도 참습니다. 주인의 명령이 언제 떨어지나, 그 명령만 기다리고 있지요. 얼마나 먹고 싶으면, 저렇게 꼬리를 흔들고, 음식에 코를 갖다 대고 있을까?
“기다려! 기다려!‘ 하다가 ’이제 먹어!‘하면 그때서야 쏜살같이 그 음식을 먹지요. 절대로 주인이 먹으라는 말을 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먹지 않고 기다리는 충성심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 기다림은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기다려 보았나요? 무엇인가를 기다려 보았는가요? 참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참 힘들고 어렵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도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칠일동안의 기다림이었지만, 그에게는 아주 길고 긴 기다림이었지요.
사울은 왕이 된 지 2년째 되는 해에, 남자 삼천 명을 선발하여 정예 군대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사울은 이번 기회에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죠.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전세가 이상했어요. 숫자에도 밀리고, 무기에도 밀린다는 것을 알았죠. 블레셋 군대는 병거가 삼 만이고, 마병이 육천이고, 군인은 그 숫자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군인 삼천명을 가지고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전세가 불리함을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 둘씩 굴과 바위틈에 은신하고, 더러는 다른 땅으로 피난을 가 버렸습니다.
사울이 생각한 것이 있었죠. 전쟁을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되겠다. 제사를 드리면 두려움으로 흩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한 마음으로 해서 전쟁에 나가면 되겠다 생각을 한 것이죠. 그리고, 제사를 주관하고 드리는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렸지요. 하지만 정한 기일 동한에, 아무리 기다려도 사무엘은 오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못해 사울은 자기 스스로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때 사무엘이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물어 봅니다. ”왕이 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사무엘이 물어 봅니다.
사울이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직접 드린 이유에 대해서 변명을 합니다. 첫째는 백성들은 내게서 흩어지고, 둘째는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않고, 셋째는 블레셋 사람들은 턱 밑까지 다가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울이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일까요? ’불안하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흩어져서 불안하고, 제사를 빨리 드려야 하는데 오지 않아 불안하고, 블레셋 군대가 턱밑까지 왔기에 불안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빨리 제사를 드리면, 이 모든 불안이 해결 될 것으로 생각을 한 것이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울은 자신의 의지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 기다림을 본인 스스로 멈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행동을 보면서 마음속에 질문을 하나 던져 보아야 합니다. ’그 기다림은 과연 누구를 위한 기다림인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그 기다림의 목적은 불안 해소요. 전쟁의 승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눈여겨 볼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12절 말씀에, ’부득이 하여‘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어쩔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죠. 그것이 잘 못 된 것을 아는데, 그렇게 했다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예배를 드리자나요? 그럼 그 예배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나를 위한 예배인가요? 하나님을 위한 예배인가요?‘ 최소한 오늘 본문에 따르면 사울은 자기 자신을 위한 예배를 드린 것이죠. 그때 사무엘은 그 예배를 한마디로 평가를 합니다. 13절 말씀입니다.(시작) 망령되이 행했다.
하나님이 빠져 있는, 나를 위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평가는 망령되이 행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슬픔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에 하나님의 슬픔은 시작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판단과 행동의 예배 모습이죠.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나의 이익을 만들어 내기 위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가만히 잘 보면, 예배를 드린다는 것에, 내 생각과 판단이 들어 가 있지요. 당연하지요. 어떤 문제가 나에게 있어요. 그 문제를 위해 예배에 나와요. 그리고 그 문제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를 드려요. 그것이 어찌 잘 못 된 것일까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여기에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죠. 내 판단과 행동이 예배가 된다는 거예요. 마치 나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내가 중심이 되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것이죠. 내가 중심이 되어 내 판단으로 모든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신앙의 성숙이라는 것은, 나를 위한 예배에서 하나님을 위한 예배로 변해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이 되는 줄 믿습니다. 나를 위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기다림에서, 하나님을 위한 기다림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사울이 놓친 것은, 바로 나를 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한, 기다림 이었다는 것입니다. 불안 해소를 위한 예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위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삶이 예배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그 예배의 형태와 그 마음 자세가, 그대로 우리의 삶 가운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그 예배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이 들어나고, 결국 나는 그 예배를 통해 전 인격이 하나님께 보여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 왕을 버렸을까요? 물론 망령되이 이르러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자신이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버림이 있겠지만,
아마도 하나님은, 그의 전 삶 속에 비춰지는 사울의 모습이, 점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자기중심적인 삶이 보여 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쩌면 그를 버렸을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예배를 위한 우리의 기다림은, 나를 위한 기다림에서 하나님을 위한 기다림으로 우리는 변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성숙이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예배의 삶이 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희한하게 우리의 마음이 점점 변하여,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내 마음에 진정으로 모이게 된다면, 사실 우리의 불안은 점점 없어집니다. 나의 염려는 점점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그 예배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울 왕이 그것을 알았다면, 전쟁에서 숫자에 밀리고, 무기에 밀려도, 나는 오로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리고 그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높여 예배하리라? 라는 마음으로 제사를 기다렸다면, 어쩌면 사무엘이 늦게 온다 해도, 그는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은 누구에게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가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분명히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나의 문제를 바라보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사적 우세로 승리를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숫자적인 열쇠에도, 무기적인 열쇠에도, 승리는 하나님께 매달려 있는 자에게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문제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매달릴 때, 문제가 해결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문제를 보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신앙의 성숙 자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그 ‘기다림‘ 속에 하나님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대림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연 그 기다림은 누구를 위한 기다림일까요?
하나님을 위한 기다림일까요? 나를 위한 기다림일까요? 하나님을 위한 기다림이 내 안에 차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성숙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오셨는데, 하나님은 무슨 마음으로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셨을까?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까? 그 예수님을 위해 나는 어떤 마음을 드릴까? 이 모든 생각과 행동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기다림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뛰어 넘어,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만을 기다리는 그 기다림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온전한 예배자가 될 줄 믿습니다. 그 축복을 다 받아 누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불순종과 순종
주바나바목사 / 삼상 13:8-15
시집을 간 어떤 며느리가 친정 때문에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자기 자신이 보기에는 친정 가족들이 신앙 생활도 더 열심히 하고 부지런해 보이는데 이상하게도 시댁이 더 잘되는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며느리가 보기에도 시댁은 한번은 다른 종교를 믿기도 했고, 신앙 생활도 그다지 열심히 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댁을 친정과 비교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축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궁금해서 어찌 된 영문인지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뵙고 상담을 했습니다. 자세한 사정과 형편을 들은 목사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제가 시댁과 친정 가족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시댁 식구들은 누군가가 자기들에게 잘못을 했을 때 빨리 용서를 하고, 하나님이 이것이 아니다 하시면 재빨리 태도를 바꾸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친정 식구들은 신앙 생활은 열심히 하시지만 무언가 마음에 미움이 있을 때 그것을 빨리 풀어버리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들려올 때도 잘못된 자세를 빨리 바꾸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인일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정말 목사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귀하게 보시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순종하려는 마음과 자세입니다.
실수가 많은 것이 인생인데 잘못된 생각과 삶을 그 즉시 깨닫고 돌아서는 마음이 바로 아름다운 순종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무엇이 순종이고, 무엇이 불순종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주목합니다.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기적적인 대승을 거둔 사울 왕은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그 인기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야말로 온 국민이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가운데 대관식을 올리고 이스라엘의 제1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그의 인생은 활짝 핀 꽃과 같았고 그 상승세가 꺾일 기미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사울 왕이 그만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실수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향하여 “너는 왕으로서는 틀렸다.”라고 선언하고 돌아서시게 됩니다.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도대체 어떤 중대한 잘못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불순종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실수 하나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만들었습니까?
본문 1절부터 7절의 기록입니다.
사울 왕은 취임하여 이스라엘의 국방 체계를 크게 바꾸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이스라엘의 군대 조직은 전쟁이 일어나면 즉시 전 국민을 동원하는 민병대체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3천명이나 되는 상비군을 조직하여 전략적 요충지에 항상 군대를 배치해 둠으로써 국방을 더욱 튼튼히 세워 나갑니다.
그 상비군 중에서 1천명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 왕자의 지휘 아래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자 요나단이 자신의 재량권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사울 왕의 명령을 받고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선제공격했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블레셋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습니다.결국 이스라엘은 자연히 블레셋 사람의 원한을 사는 결과를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은 당장 보복 전쟁을 걸어왔고, 사울 왕 역시 다시 모든 백성에게 동원령을 내림으로써 양국은 전면전의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모든 상황은 사울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블레셋 군의 병력은 양적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이스라엘 군에 대하여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병력의 숫자는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블레셋은 병거가 삼 만이요 마병이 육천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요소였습니다.
완전히 보병만으로 구성된 이스라엘 군에 대하여 블레셋 군은 기병과 전차병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절대적 열세의 병력만 해도 사울 왕으로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거기에 설상가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미처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나마 예비군 동원령을 받고 모여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대 다수가 탈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블레셋 군대의 압도적인 전력에 완전히 겁을 집어 먹고 숨을 곳만 생기면 다 도망쳐 버렸으며, 개중에는 아예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아주 멀리 뺑소니쳐 버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탈주병들을 제외하고 사울 왕 밑에 그대로 남아 있던 병력은 총 6백 명가량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소집된 예비군들은커녕 원래 자기가 거느리던 상비군 3천명 조차 대다수가 도망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나마 남아 있던 병력이 정예부대원들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오합지졸들뿐이었습니다. 군사력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군기와 사기입니다.
즉 전쟁에서 병력 그 자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병사들이 얼마나 군인으로서의 기강이 잡혀 있고 또한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느냐가 더 중요한데, 지금 사울 왕의 경우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최악의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황이 사울 왕을 지극히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이 사울로 하여금 신앙인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할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무딘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울 왕에게는 사실상 그런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그가 암몬 족속과 전쟁을 치르면서 체험했던 경험을 되새겨 보기만 해도 충분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하게 하심으로써 암몬을 간단히 무찌르고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기만 하면 지금의 이 블레셋과의 전쟁도 아무 어려울 일은 없었을 터인데, 사울 왕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만 닥친 주변 상황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성도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마귀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게 될 때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 주변의 모든 상황이 악화되어 가면서 환경이 절망적이라 하여도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의 방법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절박한 분위기가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컨트롤에서 벗어나서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불안하고 절박한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이 모든 것을 완전히 주장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써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실 줄을 확신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기억해내고 의지함으로써 그 악화일로의 상황을 넉넉히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상황을 통해 시험하는 두려움이 사울을 불순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본문 8절 이하 14절의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소식을 들은 선지자 사무엘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7일을 기다리라고 지시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조급해 하지 말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것을 테스트하신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 7일이 지나고 사무엘이 전쟁 마당에 도착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비로소 전쟁을 시작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되어도 아직 사무엘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자 사울은 더더욱 초조해졌습니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 현상이 시간이 갈수록 더 심화되는 때라 더욱 그러했습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사울은 스스로 번제와 화목제 제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하고는 자기 자신이 제사장 노릇을 하면서 번제를 드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사울의 번제가 막 끝나자마자 선지자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사무엘이 이런 사울의 경솔히 행한 일을 보고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질책했습니다.
그 때 사울은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그렇게 처신하게 되었다고 변명했습니다.
사울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번제 드리는 때를 늦출수록 탈주병이 늘어나 병력이 더욱 약해져 가고 있는데도, 그 번제를 드려 주려고 했던 사무엘은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블레셋 군대는 전술의 요충지를 이미 점령해 버리고 더욱 위협을 가중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판단하기를 블레셋 사람이 곧 길갈로 공격해 올 텐데 내가 아직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기에 어찌하든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제사를 먼저 드려야만 하겠다고 자기 딴에는 기특한 자세를 지킨다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사울에게는 그가 그렇게 비상수단으로 번제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음이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나 논리도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의 불순종은 정당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라고 엄중히 책망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오직 제사장만이 제사를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구약시대입니다. 만인제사장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성별 된 사람만이 제사를 주관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바로 그 제사장 고유의 권한과 직무를 침해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즉 그가 행한 일은 단지 사무엘 선지자에 대한 실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월권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일생일대의 돌이킬 수 없는 대실수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잘못 하나로 인하여 그는 그의 왕권이 영원하지 못하고 단절되는 벌을 받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조 대신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세우시기로 작정하신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울 스스로는 자기의 판단과 행동이 옳다고 여겨지는 모든 합리적인 이유와 논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을 결코 정당화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실로 우리 누구나 다 빠지기 쉬운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자기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데에 있어서는 다들 천재적인 머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기를 치고 거짓 된 방법으로 돈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 보는데 라고 아주 간단하게 정당화시킵니다.
자기 딴에는 정연하게 논리를 펼칩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부득이한 경우란 절대로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누구라도 이럴 수밖에 없지 않나? 라든지 아무리 신자라 해도 이것 만큼은 어쩔 수 없지 라는 말들은 오로지 그 사람의 자기합리화요 핑계일 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불순종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논리를 따지면서 자기의 행위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도저히 말도 안 될 소리를 그렇게 뻔뻔스럽게 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강퍅해져 있는 심령은 거의 회복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내가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라는 말은 결코 신앙생활에 논리가 밝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진 불순종하는 자의 핑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때에는 그 말씀을 하신 분이 바로 절대주권자이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한마디도 어김없이 절대복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압도될 때 그것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쉽게 어기게 됩니다.
또한 자기 속에서 어떤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논리에 스스로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조차 쉽게 거역하게 됩니다.
이것이 불순종을 낳게 합니다. 자기 인생 주변이 악화일로에 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무섭게 여기면,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위험한 순간입니다.
불순종으로 이끄는 상황과 우리의 행동을 살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이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이유라도 하나님 명령 앞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 모두 이런 불순종의 삶을 살아간 실수를 다분히 범한 전과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사울처럼 망해야 하겠습니까? 결코 그것은 아닙니다.
불순종을 순종으로 돌이켜야합니다. 바로 바른 신앙의 회복입니다. 어떻게 하면 불순종을 신앙으로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1장28절-32절을 통하여 두 아들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큰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말했습니다.
‘예, 가겠습니다.’하고 아주 정중하게 쉽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큰 아들은 불순종하여 포도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똑 같이‘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말했더니 이 아들은 자기가 무엇이 해야 할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못가겠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거절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뒤에 생각하니 잘못된 것 같아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다는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현대인들을 향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맏아들은 다분히 처세술에 능합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할 때에 아버지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네’하고 대답합니다. 지극히 처세적입니다.
순종하는 것 같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좋은 맏아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지식으로는 순종하였습니다. 말로써는 순종하였습니다. 형식적으로, 예절로써는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순종이 아닌 불순종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주 정직한 사람이고 솔직한 사람입니다. 무슨 자기가 하려고 계획했던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니까 처음에는‘안가요’라고 거부합니다. 참으로 정직합니다. 또 정당하기도 합니다.
안가겠다고 말하고 안가지 않았습니까? 잘못이 없습니다. 이것이 둘째 아들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 아들은 뒤에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갔습니다.
뉘우친다는 말은 회개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뉘우침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뉘우친다'는 말은 생각의 발상을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을 바꾸는 자세입니다.
둘째 아들은 ‘내가 할 일은 내가 하고 아버지가 할 일은 아버지가 해야 합니다. 나는 내 할 일 합니다.’정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못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못 가겠다고 하고 안 갔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뉘우쳤습니다. 지금까지 옳다고 했던 일이고 나는 정당하다고 했지만 아니, 그것은 내 생각이고 나만 생각을 한 것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생각해야 되는데 자기중심적이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 그게 아니지’라고 뉘우쳤습니다.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뉘우침이 있는 순종 그것이 불순종의 회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뉘우칩니까? 계속적으로 뉘우치고 생각을 바꾸고 가치관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 평생 정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오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뉘우치고, 반성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야합니다.
거기에 주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말씀으로 이렇게 우리들에게 축복하십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창26:4-5) 아멘
마음이 불안할 때 당신은
삼상 13장 8~15절 / 안효관목사
사무엘상 13:8-15, 베드로전서 5:6-7
그리스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안'이라고 하는 신이 "신들만 사는 세상에 내가 사람을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는 '땅'의 신에게 찾아갑니다. '땅'의 신에게 "내가 사람을 만들고 싶으니 재료를 좀 달라"고 요청했고, 땅의 신은 흙을 주었습니다. 불안의 신은 땅의 신이 준 흙을 가지고 사람을 빚어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만들고 보니 흙으로 빚은 형상일 뿐 그 안에 생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든 형상을 들고 '영혼'의 신인 '푸쉬케'를 찾아갑니다. 가서 '자신이 땅의 신에게 흙을 얻어서 사람을 빚었는데 생명이 없으니 영혼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영혼의 신 푸쉬케는 흙 형상의 코에 영혼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흙의 형상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지자 땅의 신이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불안의 신에게 '자기가 흙을 빌려주어 사람을 만들었으니 자기가 그 사람을 가져야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혼의 신인 푸쉬케가 '자신이 영혼을 빌려주어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은 자기가 가져가야겠다'고 주장합니다. 불안의 신이라고 자기가 만든 사람을 빼앗기고 싶겠습니까? 애초 사람을 만들 생각을 한 것도 자신이고, 자신이 흙으로 직접 형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데리고 살아야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사람 하나를 놓고 신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세 신은 제일 높은 제우스 신에게 찾아가서 판결을 부탁했습니다. 제우스 신은 이렇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이 죽거든 재료인 흙을 빌려준 땅의 신이 그 육체를 가지고 가거라. 그리고 이 사람이 죽거든 영혼을 빌려준 영혼의 신이 그 영혼을 가져가라. 그 대신 이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불안의 신'이 이 사람을 데리고 살아라." 그래서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늘 불안과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는 노벨상 수상소감에서 "나는 앞으로도 늘 불안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을 그리는 작품을 계속 쓰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죄 때문에 낙원에서 세상 속으로 던져진 우리네 인생은 끊임없이 현실의 불안과 싸워야만 합니다. 언제 어떤 일이 자신 앞에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실존은 '작은 뗏목을 타고 공포의 태풍이 몰아치는 불안의 강을 건너는 사공'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에 보면 불안과의 싸움에서 실패한 한 인생의 모습이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왕이 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3장 1절 이하에 보면 오늘 본문의 구체적인 배경들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때는 40세였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지 2년째 되던 해에 큰 어려움에 부딪히게 됩니다. 왕이 된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용감한 사람 3,000명을 군사로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그 3,000명 가운데 2,000명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왕궁을 지키게 하였고, 나머지 1,000명은 아들 요나단 손에 맡겨 고향 베냐민 기브아를 지키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자기가 통솔하고 있던 군사 1,000명을 이끌고 가서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자리하고 있던 블레셋 군대의 한 요새를 공격하였습니다. 블레셋의 한 요새가 공격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러자 사울왕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길갈로 불러모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드디어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해 들어옵니다. 5절 말씀에 보면, 블레셋 군대가 얼마나 큰 무리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6,000이요, 군사들은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았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정예부대는 겨우 3,000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 백성들은 제대로 군사 훈련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병거나 마병과 같은 특별한 조직도 없었습니다. 13:22절에 보면, 이스라엘에게는 철로 만든 무기인 칼이나 창은 왕과 왕자인 사울과 베냐민만이 가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맨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 병거 삼만과 마병 육천을 앞세우고 해변의 모래와 같이 굉장히 많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블레셋 군대를 보니, 기가 막혀버렸습니다.
저렇게 강한 블레셋 군대와 싸운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의(戰意)를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싸움도 해보지 않고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가장 마음이 불안해진 사람은 다름 아닌 사울왕이었습니다. 불안한 사울의 마음을 위로하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사무엘 선지자뿐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자신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던 사람입니다.
사울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사무엘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내어 길갈로 와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오면 백성들이 용기를 얻게 될 것이고,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실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도 7일 후에 가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는 오겠다고 약속한 날짜가 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와야 불안에 떨며 도망치던 백성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텐데' 사울왕은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가지요, 마음은 불안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사무엘 선지자는 약속한 날짜가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지요. 그러니 사울은 더욱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자 그나마 남아 있던 백성들의 마음도 동요되지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군대를 이탈해 도망쳐 버리고, 이제 남아 있는 사람은 겨우 600명뿐이었습니다. 3,000명이나 되던 군사들 중에도 대부분이 도망가고, 겨우 600명만 남은 것입니다. 그 남아 있는 600명의 군사들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사울왕은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를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보니까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분명 자신이 와서 드려야할 번제가 이미 드려지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왜 기다리지 못하고 번제를 드렸느냐"고 다그치자 사울 왕이 대답합니다. "블레셋 군대는 눈 앞에 진을 치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꾸만 흩어지고 있는데,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오겠다고 약속한 당신은 오지 않고... 그러니 부득이하게 내가 번제를 드렸습니다."
사울왕은 번제를 드리는 것이 부득이하게 드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합니다. "부득이하다"는 말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런 뜻입니다. 사울왕은 지금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어 자신이 번제를 드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의 마음에는 불안이 가득차 있습니다. 막강한 무기로 무장한 블레셋 군대는 언제든지 밀고 들어올 태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블레섯 군대가 무서워서 도망치기 바쁩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니 사울로서는 지금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때로 이런 상황에 부딪히지 않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 것도 없어 보입니다. 앞뒤가 꽉- 막혀 있는 것같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런 상황 때문에 불안하여 안절부절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라 하더라도 작은 일들 앞에서도 우리는 종종 그렇게 불안해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젊은이는 그 사랑이 깨어질까 불안해 하기도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우리 아이가 학교 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혹시 친구들 사이에 왕따 당하지나 않을지, 사고 치지는 않을지, 성적이 떨어지지나 않을지' 늘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 때문에 불안해하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직장의 일들 때문에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 불안한 나날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 속에서 불안한 마음들이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일들에는 면역이 되어 있긴 하지만, 그러다가도 종종 불안이 우리의 마음을 엄습해 올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런 크고 작은 불안들을 어떻게 처리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과 같은 어리석은 방법으로 처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울은 어떻게 불안한 마음을 이겨볼려고 했습니까? 그는 번제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신앙적으로 불안을 이기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사울이 번제를 드린 것은 자기 최면(催眠)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불안하지 않게 최면을 걸고 있는 것뿐입니다.
정말 그가 하나님께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그 불안을 이길 수 있는 용기 주실 것을 기대했다면 그는 하나님의 방법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한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번제를 드린 사울왕에게 사무엘 선지자가 이렇게 책망합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사울 왕이 번제를 드린 것은 망령된 행위였습니다. 어리석었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악한 행위였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종종 마음이 불안할 때에 우리는 정말 신앙적인 방법으로 처리한다고 했는데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닐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해지면 우리가 세상과 상황을 보는 눈이 좁아집니다. 다른 방법을 보지 못합니다. 내가 생각한 그것만이 최선의 방법이고,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울이 그랬지 않습니까? 사울은 번제를 드리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방법 밖에 없어서 잘못된 것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과연 그 방법 밖에 없었겠습니까?
우리 마음에 불안이 가득할 때 그 불안한 마음을 이길 수 있는 신앙적인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사방이 우겨쌈을 당하고 앞뒤가 꽉 막혀서 어느 곳에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늘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길이 있고, 거기에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42편 5절에 보면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인은 마음 속에서 불안하고 낙망이 되어 어찌할 줄 몰라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니, 불안하고 절망적이었던 마음 속에서 잔잔하게 찬송의 소리가 솟아나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불안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마음에 불안이 밀려올 때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길이 보입니다.
본문 다음 장인 14장에 보면, 사울왕은 불안한 마음 때문에 안절부절하고 있는데, 사울의 아들 왕자 요나단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의 종 하나를 데리고 블레셋 군대 안으로 들어갑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은 그 상황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면 수많은 군사와 막강한 무기를 갖춘 블레셋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요나단의 그런 믿음과 믿음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께서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사울이 아무리 불안해 한다 하더라도 그 불안한 마음으로 상황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아니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면 결국 상황에 복종하고 맙니다. 그러나 요나단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가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사무엘상 17장에도 나옵니다. 당시에도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공해왔습니다. 블레셋에는 골리앗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모습을 보고는 모두가 기가 꺾이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을 비롯해서 모든 군사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년이었던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던 이스라엘 군사들과는 달리 골리앗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그가 가지고 간 것은 막강한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들판에서 양을 칠 때 사용하던 나무 지팡이 그리고 물매와 돌맹이 5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17:45)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이란 이름보다 더 강한 무기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오직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17:47)임을 알았기에, 그는 담대하게 골리앗에게 나가 그와 싸웠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다윗이 이겼습니다. 이건 다윗이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믿고 나간 다윗의 믿음이 승리한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불안하십니까? 어떤 때에 불안한 마음이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합니까? 상황이나 조건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본다면 거기에 희망이 있, 거기에 승리가 있습니다.
삶의 문제 때문에 마음에 불안이 밀려올 때, 여러분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마음의 불안을 이기게 하실 뿐만 아니라, 승리를 우리 품에 안겨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불안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든, 어떤 일이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우리는 우리를 절망케 만드는 불안의 마음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기다림에서 실패했습니다. 물론 사무엘 선지자가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차피 자기들의 힘으로 블레셋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불안해 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자기들의 힘으로도 안되고, 그렇다고 불안한 마음으로 발만 동동 굴리고 있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면, 좀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시든 하나님의 방법으로 처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먼저 내 방법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내 방법을 쓰다가 안되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 방법을 쓰기 전에 하나님께 내 문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 우리가 우리 인생의 짐을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 16:3) 내가 하고 싶은 모든 일, 우리의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 37:5)
오늘 신약 본문에서도 말씀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하십니다. 독생자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된 우리를 위해 뭔들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좋은 계획과 꿈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내 생각, 내 계획'을 앞세우다 보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아름답고 좋은 계획과 꿈'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신앙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가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까? 어떤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불안해집니까? 사업의 문제입니까, 가정이나 자녀들의 문제입니까? 건강의 문제입니까, 인간관계의 문제입니까?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 다 맡기십시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풀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들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요즘 저도 많이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앞세우다 보면 결국 저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전체를 위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불안해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을 보고 사정을 보면 분명 불안한 마음이 자꾸만 제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이라면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는 방법 외에 더 좋은 방법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불안하다고 하나님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불안한 마음에는 언제든지 마귀가 틈을 타서 우리 마음에 자꾸만 이런 생각을 넣어줍니다. "네가 한 번 해봐! 길은 이것밖에 없잖아. 어쩔 수 없어." 그러면서 자꾸만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대신에 우리의 생각, 우리의 방법대로 하라고 부추깁니다.
마음이 불안할 때, 자꾸만 조급해질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의 힘들고 불안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크고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에 불안이 마음 깊숙이에 밀려올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영적 성장의 길
삼상 13장 13~15절, 15:21-23 / 오창우목사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입니다. 목적 성취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 그런 말 아니겠어요? 정말 그런가? 그래도 되나? 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야할 길만 가야해요.
오늘 이 시대가 게이트 파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영호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정현준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1976년도 박동선 사건 이후에 워싱턴 포스트가 코리아 게이트, 그 말부터 게이트가 시작이 되었다고 하는데, 뭐 정확한 뜻은 잘 모르겠더라구요.
저도 이 게이트가 의문이 되서 여러 군데 찾아 봤지만 정확한 대답들이 없어요. 암튼 권력형 비리 할 때, 게이트라는 말을 쓴다 하는 말밖에는 없습니다. 영어 사전에 보니까요, 게이트는 문, 출입구란 말이죠. 또 하나는 미국의 속담에 가운데 "Get the Gate" 또는 "Give the gate" 이렇게 쓰면서 해고하다, 퇴출하다 라는 의미로 쓰더라구요.
이걸 보면서 게이트 사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쫓겨나고 그 많은 꿈과 비젼들이 다 무너지고 또 과거에 했던 일까지도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걸 보면서, 참 이런 건 없어야 하겠다. 경제가 경제가 아니에요. 왜냐햐면 정치논리가 너무 앞서기 때문에 경제가 안된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경제가 잘되려면 정치적인 논리부터 없어져야 한다 이것이 연구 결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검찰이 검찰이 아니에요. 법이 바로 서지 않습니다. 정치 검사 때문에 그렇대요. 죄 없다고 얘기했던 사람들이 특검제 하니까 죄 있다고 그러고, 검찰 총장이 옷을 벗고, 청와대 비서관들이 줄줄이 옷을 벗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정도를 잃어버린 사회에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려고 그려요.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지만 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그러잖아요.
저는 비행기표를 사던지, 극장에 가서 표를 사던지 할 때, 안내인의 도움을 받는 것을 참 좋아해요. 그래야 확실하거든요. 실수 안하거든요.
지난 금요일날 대전에 갈 일이 있어 기차표를 사서는, 모자도 쓰고 있고, 정복도 입고 있고, 나이 지극한 여자분이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기차표를 보여드렸어요. 그랬더니 여기 서래요. 그래서 제가 거기 설라고 보니까 마산이더라구요. 같이 가는 일행이 있는데, 제가 거기 섰더라면 또 얼마나 망신이에요. "저는 서울 가는데요" 그랬더니 짜증을 내면서 하는 말이 "그럼 절로 가요" 저는 교회가야지 절 가면 안되는데...... 저쪽에 가서 섰지만 아무리 봐도 서울로 가는 표시가 없어서 한참 좀 해맸어요.
그런데 이 분이 그 좋은 정복 위에다가 이런 조끼를 하나 입었는데 거기 뭐라고 써있었냐 하면, `민영화 저지 사수결사대` 그러니까 국영인데 민영화 되면 안된다 그런 말이에요. 그래 결사적으로 저지하는 사수대라는 말이죠. 그래서 저한테 절로 가라 그래서 속으로 그랬어요. `빨리 민영화 되면 좋겠다`
자기 임무가 뭐예요. 안내하는 거거든요. 좀 친절하게 못해요. 자기 임무를 잃어버렸어요. 정도를 잃어버린 거예요. 그 자리에 공무원 된다 하는 것은 나라 위해 살겠다, 국민 위해 살겠다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안살거든요.
버스 기사가 차를 몰고 가는데, 버스전용차선에 자가용차가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용차선에 자가용차가 가니까 비키라고 크랙션도 좀 누르고 라이트도 켰어요.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자가용 운전사가 화를 내면서 안비켜주는 거예요. 그러니 상황이 어떻겠어요. 빵빵거리고 안가고, 결국은 두 차가 섰어요.
자가용차 운전사가 내려 가지고는 막 욕을 해대는 거예요. 그리고 성에 못이겨 가지고 문을 열고 버스에 올라왔어요. 그리곤 막 욕을 하는데, 버스 운전기사가 할 말을 잃은 것 같아요. 말 안하고 가만히 있더니 버스 타고 올라온 그 문을 탁 닫아 버렸어요. 그러더니 버스를 뒤로 빼더니 앞으로 냅다 달리는 거예요.
내 차는 저기 있는데, 자가용운전사가 어땠겠어요? 막 화가 난거죠. 그 때는 크랙션 왜 눌러 하고 욕하던 사람이 "차 안서 안서" 하고는 막 야단을 해댄 거죠. 그랬더니 버스 운전기사가 뭐라고 했겠어여? 버스 운전기사가 안다는 말이 "그러면 벨을 누르셔야지요?" 벨이 뭔지 알아요? 버스에서 내릴려면 누르잖아요. 할 수 없이 누른 다음에야 겨우 내릴 수 있었대요. 큰 소리쳐도 안되는 것은 안됩니다.
여러분, 목적이 좋으면 수단과 방법도 좋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요,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왕이 되었어요. 많은 사람 가운데 초대 임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다는 거예요. 왜 무슨 나쁜 짓을 해서 하나님이 버리시나?
성경에 가만히 보면, 죄라면 제사드린 죄 밖에 없고요, 예배드렸단 말이에요. 그리고 또 하나는 좋은 제물 준비한 죄 밖에 없어요. 우린 그럴 거예요? 그것도 죄냐? 정말 그렇습니까?
블레셋 나라가 쳐들어왔어요. 병거가 2만이고 마병이 6천이니까 얼마나 많은지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사울왕은 긴장이 됩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 싸우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데 예배를 드려야 되겠는데 제사장이 안오는 거예요. 아무리 가다려도. 블레셋은 곧 쳐들어와 망할 것 같은데, 그래 이거 어떻해요? 사울이요, 자기가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이까짓 제사, 나도 한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짓는데, 나도 제사 드릴 수 있다` 그래 그가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그의 명분은 분명해요. 전쟁에 나가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예배를 드려야 된다. 여러분, 잘했어요? 못했어요? 신앙이 좋아요? 나빠요?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는 책망을 하는데, 어느 정도로 책망을 하느냐? `너 이제 끝장났다. 이제 하나님 너 같은 놈 버리실거야.` 막 화를 냅니다.
왜 그랬어요? 자기가 해야할 일을 왕이 뺏어서 그랬을까요? 그건 아니란 말이에요. 왜 제사를 드렸냐고 묻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됐다 그 말이에요.
말씀드렸잖아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나무 밑에 가서 절하면서 백날을 정성을 드리는데, 하나님이 백날을 하라 그랬어요? 오십일을 하라 그랬어요? 자기가 정하는 거거든요. 자기의 정성이에요. 또 산에 가서 절을 하는데 허리가 아플 정도로 절을 했어요. 누가 그렇게 하라 그랬어요? 자기가 그렇게 하는 거거든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도, 제사를 드리는 것도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 줄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겸손입니다. 나 아무것도 못한다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신앙 좋은 사람들은 철저히 자기를 없는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만 높히고 하나님의 뜻만 기다리는 사람이에요.
이사야서 61장 3절에 보면요, `이사야 선지자가 재 대신 화관을 씌우신다 그랬어요` 여기 재라고 하는 말은 말 그대로 재예요. 나무를 태우든지, 제물을 태우든지 재입니다.
재는 아무 쓸모가 없어요. 그런데 그 재를 머리에 쓰는 거예요. 얼굴에 바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뭐냐면? 나는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여기다 흙도 바르기도 하고 고통과 회개의 표시로 옷을 찢기도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지요. 흙에서 온 인생 난 가지고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 없이 그렇게 왔다 그 말이에요.
그래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재를 쓰고 난 다음에 화관을 주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예배라고 하는 말의 뜻이 히브리어로 `캐랙` 그러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면 무릎을 꿇는다는 거예요. 나보다 하나님을 높히는 거지요. 우리는 이 시간 철저하게 무릎을 꿇여야 해요. 하나님을 높여야 해요. 그게 진짜 예배란 말이에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겁니다.
화관을 쓴다고 하는 말은 뭐냐면 여자들이 머리에 치장을 하는 건데요, 이 중동 사람들 머리에 터번 쓰잖아요? 그걸 색깔 있게 쓴다구요. 여기에 꽃도 좀 꽂구요, 거기다 향수병을 놓기도 합니다. 아름답게 만드는 거지요.
하나님이 재 대신 화관을 쓰여주신다 그 말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무어냐 우리는 재만 쓰면 되요. 그러면 하나님이 화관을 씌워 주신다 말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 것은 재를 쓰는 시간이에요. 철저히 내가 무너지는 시간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화관을 씌워 주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오늘 15장에 보면요, 사울임금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합니다. 하나님이 승리케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거든요 "내가 너를 전쟁에 승리하게 할테니까 너는 전리품 하나도 가져오지 말아라" 전리품 하나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성에 쳐들어왔던 다섯 왕과 싸워서 이깁니다. 많은 전리품을 얻지요. 소돔 왕이 얘기를 합니다. "여보시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당신에게 이 전리품을 주겠소" 아브라함이 뭐라 그래요. "안가져 가겠다" 한마디로 거절하죠. 왜? "너 때문에 내가 부자 되었다는 소리 듣기 싫어" 거절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복주셨다는 얘기만 듣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오늘 사울은 어떻게 하느냐? 그 전리품 가운데 좋은 것을 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칠려고" 하면서 내버려 두는 겁니다.
그 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전쟁에 승리하게 하셨지요?", "예, 했습니다", "전리품 남기지 말라고 하셨지요?", "예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려고 그러지요. 너무 좋아서" 하나님 버리라는데, 그거 가지고 오는 겁니다.
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교회에 뭘 해놓겠다 할 때, 쓰던 물건 좀 갔다 놓지 마세요. 경제적인 논리로는 언제든지 갔다 놓을 수 있어요. 교회 돈 안쓰니까 헌 거라고 갔다 놓고 쓰면 되지. 교회는 경제적인 논리로 교회가 살아서는 안되는 거거든요. 정치적인 논리는 되겠어요? 안되는 거거든요. 신앙의 논리를 가지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누구에게 선물할 때, 쓰던 것 갔다가 선물합니까? 그게 정말 높은 사람한테 그렇게 합니까? 사람 앞에 선물을 해도 경제적인 논리나 정치적인 논리로 하지 않아요. 뭘로 해요? 당신을 높힌다고 하는 최대한 높히는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렇죠? 그까짓 것 제사 지내는데 아무 거나 좋은 것 갔다 하면 되지.
사울이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높혀야 되는데, 높히지 않는 거예요. 그의 마음에 신앙이 없어요. 제사는 드리지만, 제물은 준비하지만, 신앙이 없어요. 단 하나 경제논리, 정치논리 이것 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 뭐라 그러셨어요? "나 이제 너 버린다. 네 마음이 나 버렸지. 나도 이제 너 버려" 우리 이렇게 되면 안되는 거잖아요. 사무엘이 뭐라 그래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그러잖아요. 제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제물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영적인 성장을 한다고 하는 것은 딴 거 아닙니다. 순종하는 겁니다. 영적으로 성장을 하려면 영적으로 분별력이 있어야 하고, 영적으로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야 하는데 그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순종입니다. 순종해야 되요.
우리 신앙의 조상들은 다 순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두 번씩이나 하나님을 떠났어도 그를 축복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그 마음 때문에 그래요.
다윗이 그렇게 잘못을 해도 하나님이 말씀만 하면 그냥 무릎꿇고 눈물을 흘리고 잘못했다 그러고 순종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시려 하는 거거든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버지가 순종하는 걸 보니까 그는 평생 순종하면 살지요. 생명과도 같은 우물, 그 사막 지역에 우물이 얼마나 귀한 거예요? 돈으로 따져도 엄청난 건데요. 그래도 하나님이 모든 걸 하시지, 순종하잖아요. 우물 한 번 뺏기고, 두 번 뺏기고, 세 번 뺏기고, 사람들한테 바보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그는 그랬을 거란 말이에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순종하는 사람 그냥 내버려두지 않지요. 그에게 우물 다섯 개가 아니라 여섯 개까지 받게 하는 축복을 내려 주시잖아요. 거기다가 그를 호위하는 호위병까지 두시잖아요. 자발적으로 `내가 너를 지켜주겠습니다` 그러잖아요.
이런 걸 보고 크니까 아들이 보기에 아버지가 너무 바보같이 살거든요. `난 좀 똑똑하게 살야야지` 그 아들 야곱은 악착같이 살잖아요. 악착같이 돈 벌지만 그게 자기를 지켜주지 않지요. 재물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니까 그 때 살려 주시잖아요.
이걸 본 아들 요셉은 또 어떻게 살아요? `그렇지. 악착같이 산다고 되는 게 아니지? 하나님이 은혜주셔야 되지` 그래서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죄수가 되도 그냥 순종하잖아요. 하나님이 높이시잖아요.
여러분, 신앙이 좋다고 하는 것은 제사를 어떻게 드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얼마큼 우리의 마음을 드리느냐 하는 거란 말이에요.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도, 사도 바울도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서 순종하며 살았거든요.
제가 지난 금요일날 대전에 간 것은 처 외삼촌, 장모님의 오빠되시는데요, 팔십 세에 하나님 부름 받으셨어요. 대학교 법학부를 나오시고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정보부에서 1960년에서 80년까지 21년동안 일하셨어요. 자그마치 21년이에요. 시작부터 은퇴할 때까지. 그 분이 그 때나 지금이나 그 집에 살고 계시는데, 25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계세요.
발인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데, 많은 남자 분들이 울음바다가 되었어요. 정보부하면 얼마나 대단해요. 그 당시에. 그 권력가지고 좋은 일에 많이 썼던 것 같아요. 사상범으로 몰려 죽을 사람들을 많이 살려줬어요. 그 사람들이 예수 믿고 그 사람들이 이 자리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나를 살려주셨다고.
교회장으로 발인예배를 드리는데, 장로님이 기도를 드리는데 그 얘기를 구구절절히 다 하시는 거예요. 장로님 때문에 산 사람이 몇인데요? 21년을 정보부 책임자 사무관으로 일하면서 그렇게 살아왔어요.
교회는 어때요? 어떻게 섬겼는가는 보지 못해서 잘 몰라요.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한 것은 성경책이요, 빨간 색 파란 색 그냥 낡았어요. 나라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분이었어요.
그 아들이 나와서 인사를 하는데,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돈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남겨줬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라구, 순종 잘하라구, 겸손하고 인내하라구, 온유하라구, 이것을 가르켰습니다. 우리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이 신앙 안에 잘 살겠습니다" 인사하더라구요.
그 자손들이요, 다 잘되요. 큰 아드님은요 지사장으로 나갔다 와서 부장으로 오래 있었는데 이사가 안됐어요. 명퇴했잖아요. 그래 나와서 개인 사업하는데, 두달도 안되서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우리 자회사가 있는데 상무로 일해주시겠습니까?" 상무로 가서 일하고 있어요.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들 그 자손이 잘될 수 밖에 없어요.
여러분,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이것이 영적 성장의 길임을 깨달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순종한다는 게 뭐예요? 첫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의 반대는 뭐냐면 내가 나를 인도하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이라는 것은 영적인 삶을 위한 삶이지 육적인 삶이 아닙니다. 영적인 삶의 기본자세는 뭐냐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예요.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거냐 내가 인도하는 거냐 바로 이 차이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내게 오는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랬어요.
예수님 앞에 아무도 올 수 없다는 거예요. 이끌지 않으면, 여기 이끌다는 말은 스스로 한다 자발적으로 한다 그런 말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는 거예요. 이게 뭐겠어요? 성령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이건 내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지식이 많고 돈 많고 배운 것이 많아서, 아닙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병들어서가 아니에요. 성령이 이끄실 때에만 예수를 믿을 수 있어요.
우리가 예수 믿는 동기를 보세요. 특별한 거 없거든요. 그냥 믿은 거예요. 순종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경력이 오래됐다고, 직분이 있다고 하는 거 아닙니다. 경험이 있다고 하는 거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안되요.
주님도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 나아가서 기도하시잖아요. 사도 바울은요, 자기가 배운 학문, 명예, 재산 다 배설물처럼 여겼다 그랬어요. 왜? 성령의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이에요. 신앙의 선배들은 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그런 말이에요.
사무엘 선지자는 오늘 다시 한번 얘기해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요즘 경배와 찬양이 신앙성장과 교회성장의 한 표시로 중요시 여겨져요. 손을 들고 감정을 쏟으면서 찬양하는 모습보면 참 은혜로와요. 그러나, 경배와찬양이 신앙의 목표는 아니란 말이에요.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자하는 순종이란 말이죠.
이사야 1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타깝게 여기는 말씀이 있어요. 제사해라 이거 아닙니다. 제사 그만하고. 너무나 많은 제물에 내가 배가 부르대요.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선행하고 학대받는 자를 도우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네가 죽으라 희생하라 그겁니다.
예수님이 누구예요. 예수님은 사람이고 하나님이세요.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으신 거예요. 십자가 지신 거예요.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신 거예요. 이게 모두 다 성령의 역사요,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한 것이란 말이죠.
어느 집사님의 상관으로 어느 부장님이 왔는데, 좋지 않는 부장님이 오셨어요. 얼마나 괴롭히는지 못 견디는 거예요. 주일날도 예배당 못 가게 할 정도까지 됐어요. 상담을 했지만은 뚜렷한 게 안 나타나요. 그랬더니 옆에서 누가 하는 말이 "그 부장님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기도했어요. 불쌍히 여겨 달라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부장님이 변하지 않고 더 짜증나게 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기도하다 보니까 한가지 깨닫게 되는 게 자기가 변하게 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부장님이 불쌍한 마음이 들고 사랑하는 마음이 들고 그 분의 말씀 잘 듣다 보니까 사랑 받는 직원이 되고 성공하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일을 주시던지 어려운 일을 주시던지 다 기회에요. 성령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우리가 알아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변해야 해요. 세상이 변해서 내가 잘되는 일은 없어요. 복권 맞으면 잘될 것 같죠. 복권 맞은 사람 치고 잘 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다 그지 된다구요. 내가 변해야 되요. 세상이 변해서 내가 복 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변해야 내가 이 세상에서 복 받는 인생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리빙스턴 아시잖아요. 아프리카의 유명한 선교사. 이 분이 어려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어느 정도 가난했냐하면 아버지가 길거리에서 행상을 했어요. 그러니 얼마나 가난해요. 학교도 못다니고. 방직공장에 다니면서 곁눈질로 글을 배웠어요. 그렇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이 그로 하여금 방직공장에서 돈을 받으면 어머니한테 다갔다 드리면 몇푼 받는데, 그돈 가지고 책을 사서 보게 하고, 책 읽을 시간이 없어서 밥먹을 시간에 밥도 안먹고 책을 보고요, 밤에 와서 남들 잘 시간에 촛불 켜놓고 공부를 했다 그래요. 그런 중에도 교회 열심히 나가고 어머니 신앙 본받아서 신앙심이 두터웠다는 거지요.
그는 미개한 나라에 가서 복음 전하는 게 꿈이었어요.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는 뒤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에 가난과 고생이 아프리카 선교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내가 죽어서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역시 가난한 집에 태어나 고생하면 자라고 싶습니다." 세상에 고생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해요. 이것을 통해 나를 더 크게 만드실 줄로 믿습니다.
불평하지 마세요. 성령이 내게 역사하시는 뜻이 있단 말이에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게 주시는 은혜가 예비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성령에 순종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비밀을 알게 하시고 그 분별력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 성경에 보면 우리 신앙인들을 나무에 비유했습니다. 나무는 땅에 묻혀있으면 사는 거예요. 우리가 남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 없어도 성령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믿고 그것에 뿌리 박으면 하나님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으로 함께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거예요. 그리고 주신 기회를 통해 승리하는 거란 말이죠.
마지막으로 순종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에서 아는 것입니다. `백문이불역일견`이고 먹어봐야 맛을 아는 것 아니에요. 겉으로 봐서는 몰라요
여러분 누가복음 10장에 보면요, 여러분이 잘아는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질문하죠.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간단해 너 나 믿어" 이렇게 얘기하면 얼마나 쉽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얘기 안하거든요. "성경에 뭐라고 써있냐?" 그랬더니 줄줄이 외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러면 그렇게 행해라"
그런데 이 사람이 가질 않고 또 질문을 하는 거예요. 성경은 뭐라고 표현했냐하면 `이 사람이 옳게 보이려고`하고, 그런 다음에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더라구요. 누가는 그렇게 해석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보면서 이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되요. 알기는 알아요. 머리 속에서 알기는 알겠는데, 진짜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거예요.
나는 부모님 뱃속에서부터 믿었다 그래서 모태신앙이라고 그러더라구요. 나 그러면 나 모태신앙입니다 그럽니다. `모태신앙` 잘못 발음하면 `못해 신앙`이 되요.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으로 못하는 거예요. 머리가 발달한 사람은요, 따지길 좋아한다구요. 그래서 이 지하도에서 구걸을 하면 백원짜리 하나 제대로 못줘요. 왜 못주냐면? "저 뒤에 분명히 깡패 조직이 있을 거야. 그러니 저 사람 돕는 것은 깡패를 돕는 거지. 돈 주지 말아야 돼" 그렇게 생각 안하셨어요. 누가 와서 도와달라 그러면 "저 사람 사지가 멀쩡한데 도와 달라 그러지. 저사람 게으러서 그래. 도와주면 안돼. 고생을 해봐야 일할라고 하지" 안도와줘요.
머리로 잘하는 사람들이 이웃이 별로 없어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외에 친구가 별로 없다 그러죠. 그거 맞아요. 예수 믿는 사람만 만나니까. 그러나 좀 확대 해석하면 어때요? 그런 사람 친구해야 하는데, 친구 안하거든요. 너무 따지거든요. 안해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잖아요.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한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다 죽어간다, 제사장이 지나갔다 그냥 지나갔어, 레위인이 지나갔다 그냥 지나갔어,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고쳐줬어. 자 내가 너한테 묻는다.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냐?" 누구예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주님 말씀하시잖아요. "너도 가서 그렇게 행해라. 그러면 살리라"
여러분,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예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강도 만났어요. 로마라고 하는 큰 강도를 만나가지고 먹을 거, 입을 거 다 뺏기고 지금 그러고 살아요. 우리가 일본 사람의 식민지 살 듯이 말이에요.
사랑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데 누가 이웃이냐구요? 누구를 사랑해야 하냐구요? 천지에 널린 게 도와줄 사람인데, 왜 이런 사람에게 안보이고 예수님에게만 보이냔 말이에요.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라매요? 이웃 사랑이 뭔대요? 그냥 주는 거예요. 때로는 속임을 당할 수도 있어요. 억울한 일 당할 수도 있다구요. 그러나 하라는 거예요. 따지지 말고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때서부터 역사하시는 거지요. 우린 너무나 똑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을 잘 경험 못하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 믿기 때문에 믿어 주는 거예요. 그냥 믿어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 역사하신다구요.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하는 것은 딴 거 아니에요. 그냥 하는 거예요. 그래도 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여러분,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그리스도인을 사도 바울은 세 가지로 표현하는데, 군사, 경기장을 달리는 경주자, 수고하는 농부 그랬어요. 이 세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이론가가 아닙니다. 실제로 경험하는 사람들이에요. 수고나 땀이나 훈련없이 군사나 경주자나 농부가 될 수 없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어냐면 이들은 법대로 하는 사람이에요. 자지 뜻대로 하는 법이 없습니다.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내 판단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는 사람이에요.
군인이 뭡니까? 군인은요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사람이에요. 만약에 명령을 어기면 군인은 쓸데없습니다. 자기 생활에 억매여서는 안되요. 명령대로 사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경주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법대로 규칙대로 해야 해요. 임춘애 선수가 달리기에서 2등 한 적이 있지요. 나중에 1등으로 메달이 바꿨어요. 왜? 앞에 달린 인도 선수가 금을 밟은 게 확인이 됐어요. 그래서 임춘애 선수가 1등이 됐습니다. 경주자는 철저하게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농부는 어떻습니까? 철저하게 때를 지켜야 해요.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에 거두는 거예요.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여름에 뿌리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뿌렸다가 가을에 열매 거둘 수 있겠어요? 농부처럼 때를 잘맞추는 사람 없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게 딴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을 맞춰 가는 것이에요. 그게 순종이고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겁니다. 우리 신앙의 목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거예요. 그 결과 하나님이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고 면류관 주시고 열매 맺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실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고 이게 순종이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더 무서운 말씀이 있어요. "불과 유황으로 타는 곳에 들어갈 자들" 지옥갈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의 부류가 이렇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하는 자들" 다른 건 다 이해가 되요. 그런데 제일 처음에 나오는 두려워하는 자들이 지옥과 불못에 간다는 거예요.
두려워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고의 위험에 두려워한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경건한 두려움을 갖는다 그런 뜻도 아닙니다. 여기 두려워한다는 말은 `데이로이스`라는 헬라말인데, 진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이 났어요. 사람이 있어요. 구출해 내야 되요, 그냥 내버려 둬야 되요? 구출해 내는 게 맞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거 보고도 구출해 내지 않는 거 이게 두려워하는 거예요.
우리가 진리를 알아요. 그러나 행동하지 않는 거예요. 오늘날 이 시대는요, 이 진리, 규칙, 이대로 안살아요. 길 지나다 침 뱉어야 되요. 뱉지 말아야 되요? 그런데 뱉거든요. 담배 꽁초 버려야 되요, 버리지 말아야 되요? 그런데 버리거든요.
이렇게 진리를 행하는 것을 두려워서 안하는 사람이에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성경이 뭐라 그랬어요. 성경대로 사는 거예요. 뭐 주일 성수해라, 십일조 생활해라, 교회에 충성해라 이게 복이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야죠.
그런데 사울이 뭐라고 얘기를 해요. 왜 제사 드렸냐 하니까 뭐라 그래요? `부득이 드렸다`그래요. 자꾸 조건을 달아요. 하나님 앞에 조건을 달거든요. 그리고 자기 생각대로 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순종하는 게 아닙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거예요. 그대로 사는 거예요. 그 경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이고 이런 사람에게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요, 이 교회를 나오는 것을 백화점 오듯이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백화점에 가면 옷살려면 옷입잖아요. 이거 입고 저거 입고 하다가 안 맞으면 놓고 오잖아요. 음식점에 가서도 이거 고르고 저거 고르고 자기 좋은 거만 먹잖아요. 교회는 백화점이나 음식점이 아니에요. 하나님 나라 거든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우리가 해야할 일을 가르쳐 주시는 곳이예요. 가르쳐주시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축복받는 것이란 말이에요.
나는 어떻게 영생을 얻냐 할 때,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그랬어요. 왜 나를 믿어라 안그랬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요 예수를 믿게 되어 있어요. 사랑하지 않으니까, 실제로 그렇게 안사니까 예수를 안믿는 것이라 말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높히실 때에만 높아질 수 있고 하나님이 버리시면 우리는 버림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드릴 때, 지금은 바른 자세로 드리지만 예전엔 이렇게, 졸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하는 분이 있어요. 왜 그렇게 하냐 그랬더니 성경책이 위에서 내려가니까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면서 이렇게 본대요. 이런 사람은 순종을 잘해 말씀에 은혜받아서 아멘 아멘 한다고 해요. 근데 요즘 사람은 그렇게 안봐요. 성경이 옆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래 옆으로 본대요. 그런 사람은 고개만 옆으로 흔들어서 비판을 잘한다고 하더라구요.
요즘에 애들은 예배 시간에 막 비튼다고 하더라구요. 왜 비트냐고 했더니 처음에 성경을 위에서 아래로 된 거 보다가 나중에 옆으로 된 것으로 바꾼 부모가 낳은 자식이 그렇대요.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성경을 보고 그 말씀대로 살면 거기에 축복이 있고 은혜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을 알고 그 안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 길은 딱 하나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예수 믿지 마십시오. 그냥 순종하는 것,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힘쓸 때,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에게 복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사울은요, 순종할 때 하나님이 세우셨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불순종할 때 하나님이 버리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 날마다 세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
삼상 13장 13~15절 / 엄기호목사
요즘 실업률이 높고 구직이 힘들어지자 취업박람회, 채용박람회를 열면 기대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장사진을 이룹니다. 대학을 나온 청년들의 취업난도 심각해서 그 높은 경쟁률을 뚫으려는 이 시대의 청년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울 뿐입니다.
최근에 자주 쓰이는 ‘스펙’이라는 말도 ‘나’를 세일즈하기 위해 이력서의 경력란을 빼곡히 채우고자 토플, 토익, 각종 자격증 등을 취득하는 구직자들의 비애를 엿보게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직자들이 취업을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인자들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되기위해서 입니다.
한 취업관련 기사를 보니, 기업 인사담당자들이나 홍보담당자들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결같이 ‘직무적합성이 가장 우선’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적은 좀 나쁘더라도 회사가 요구하는 일에 적합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해 낼 수 있는 사람, 마음에 맞는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셨고 큰 일을 맡기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13장 20절에서 24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과 2대 왕이었던 다윗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사울은 사람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고, 다윗은 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을까요? 오늘 이시간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마음에 맞는 자가 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드는 사람
먼저 사울은 사람들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모세에서부터 사무엘 선지자 시대까지는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다스리셨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나 사무엘 같은 민족의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지도권을 맡기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나라가 왕정체제를 갖추고 강한 나라가 되면서, 신정체제가 아닌 왕정체제의 나라로 이스라엘이 바꿔지기를 바라며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자기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옹립하여 왕을 세웠습니다(삼상 8:19-20). 그 왕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사울은 사람들의 마음에 든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사울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먼저 사울은 교만한 왕이이었습니다.
사울은 어느날, 높은 자리인 이스라엘 백성의 왕 된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함께 지내던 동료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모든 백성들이 떠받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옛 일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자신을 교만이란 죄악가운데 던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함을 싫어하십니다(잠 16:18, 딤전 3:6, 요일 2:16, 막 7:22, 욥 11:12, 시 10:3). 주님의 마음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인데 반해 사탄의 마음은 교만한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만을 싫어하십니다.
다음으로 사울은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정직한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임기웅변에 강했고 거짓말을 잘 했습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는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을 만들기 위해서일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이 사람에게는 통할 수 있어도 하나님께는 통할 수 없습니다(잠 19:5, 시 31:18, 시 63:11, 잠 12:19, 계 21:8, 27).
또한 사울은 욕심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돈에 대한 욕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가운데 제일 좋은 것을 빼돌려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했고,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권세와 권력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술수와 방법으로 왕권이 연장될 수 있을 것같았지만 그는 곧 멸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봅시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하나님은 사울을 왕이 된 지 40년 만에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행전의 기자는 이렇게 증거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 13:21-22)
마음에 합한다는 것은 ‘마음에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다윗의 마음을 합해도 부작용이 생기지 않고 뜻이 하나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던 것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든 다윗은 회개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을 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 보내어 전사케 했습니다(삼하 11장). 그는 간음죄와 거짓말하는 죄, 그리고 살인죄를 동시에 지은 큰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 나단 선지자가 그 잘못을 책망하였을 때, 그는 침상이 젖도록 밤새 회개했습니다(시 51편). 하나님께서 다윗이 마음에 드셨던 것은 그가 의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를 지을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회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얼마든지 죄를 은폐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을 때마다 눈물로 회개하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그는 절대로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라의 운영도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들게 하려고 힘썼으며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도 사랑했지만 제일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3절 이하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가운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는말씀이 있는 것처럼 다윗의 일생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었습니다.
대통령 재직시절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지미 카터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시골 출신의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정을 펼칠 때 그에게 있었던 것은 찬사가 아니라 늘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직성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 위한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변함없이 행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학교 교사의 일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 70여명의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만 다음 주일부터는 당신들이 나가는 교회에 나가십시오.”
그리고 과거에 그랬듯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지미 카터 대통령은 여전히 교회학교에서 말씀을 전한 후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카터센터와 국제 해비타트 운동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과 함께 자원봉사와 사랑의 운동을 펼치며, 존경받는 세계 지도자가 된 것은 그가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생애의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만 맞추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다윗같이 꾸밈이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드리는 성도가 됩시다.
회개하는 겸손한 사람이 됩시다. 생각과 마음과 삶이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됩시다.
늘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점점 더 흥하고 성공하는 삶으로 만들어가는 성도가 됩시다.
순종
서명성목사(팔로마교회) / 삼상 13:11-14, 15:22-23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성도들을 당신과의 친밀한 사귐 가운데로 초청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생명의 교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배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기본적인 부르심이자 최고의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배로 시작하며, 마지막 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그곳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참된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갑니까?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해마다 성경을 일독하는 것이 예배자에게 기본이자 필수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갑니다. 예배자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은 평생 동안 추구해야 할 영역입니다. 따라서 예배와 삶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예배당), 특정한 시간(예배 시간)을 넘어 삶의 자리에서 예배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배의 의미와 본질을 좀 더 알고자 예배 시리즈를 시작하였고 이제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8주전과 지금 예배자로서의 자기 모습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벌써 흐트러지고 있습니까? 시리즈를 마친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지속적인 훈련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적셔지며, 예배자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열정으로 충만해질 때 가능해집니다.
지금까지 다룬 6가지 예배의 법칙이 무엇입니까? 기대감, 드림, 반응, 경외, 친밀, 영과 진리, 순종. 오늘 다루는 7번째 예배 법칙은 ‘순종’입니다. 탁월한 예배 인도자와 예배팀, 훌륭한 장비와 시설, 세련된 예배 진행 등 모든 요소가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하여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마음만큼 예배를 깊고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는 없습니다. ‘영과 진리’가 몸 가운데 두뇌로 비유한다면 순종은 운동신경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순종이야말로 삶의 현장에서 반응하고 실천하는 예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와 직접 연결되는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주일에 들은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진정한 예배가 시작되고, 평소에 묵상한 말씀을 순종하는 삶으로 주일예배가 더욱 풍성해집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을 누가 했습니까? 사무엘입니다. 왜 이 말이 나왔을까요? 사무엘상 13장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을 다룹니다. 당시 블레셋의 군사력은 막강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13:5). 이에 비하면 주로 농부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군대는 질적인 면은 말할 것도 없고 수적인 면에서도 블레셋 군대와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신처로 도망가고 그들 중 일부는 아예 멀리 떨어진 요단 지역으로 피신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울의 소집에 응한 이스라엘 군인조차도 적 앞에서 떨었습니다.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사울에게 자신을 만날 때까지 한 주간을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사무엘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을 기다려도 온다던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군인들은 두려움 속에 하나둘 사울 곁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기다리다 못해 번제를 드립니다. 바로 그때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사무엘이 추궁하자 백성들은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않았기에 그랬다고 사울이 대답합니다. 그의 변명은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왕의 소관이 아니라 제사장의 소관입니다. 그는 제사장도 아니면서 제사장의 고유 권한을 침범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사무엘이 제사를 드릴 때까지 기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5장에도 보면 사무엘은 사울에게 아말렉과의 전투를 명합니다. 이는 아말렉과의 전투를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쳐서 그들이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말렉 사람들은 진멸하였지만,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들은 남기고 가치 없는 것들만 죽였습니다. 그때도 사무엘의 지적을 받으니 남겨둔 짐승은 하나님께 제사하려 했다고 변명을 합니다. 사울은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버금가는 죄입니다. 이러한 죄 때문에 하나님도 사울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라는 징계가 선포됩니다.
이것을 보면 예배가 다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울도 나름대로 예배를 드렸으나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순종이 결여된 제사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적인 의미가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헌신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한 번 마음대로 드렸다고 사울과 그 집안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예배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 원리를 따를 때 예배가 인생을 바꿉니다. 단 한 번의 예배로 신앙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한 번의 예배가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불순종은 우리의 삶을 무섭게 갉아 먹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주 예배를 드리면서 불순종의 삶을 삽니다. 예배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교회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전혀 만나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예배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 전부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은 듣고 행한 만큼만 남습니다. 다시 말해서 실천할 때, 적용할 때, 순종할 때 내 것이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순종함으로 예배를 드려라
예배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이고, 우리에게 명령하셨고, 가르쳐주신 신앙행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초청에 인간이 응답하는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초청, 친밀한 교제, 축제의 자리에 초대받은 자로서 순종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자리에 초대받은 것 자체가 기쁘고 즐겁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시 50:14) 이방 종교에서는 사람이 제물을 드려 신을 공궤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물을 맛있게 먹은 신은 제사를 드린 사람에게 복을 베풉니다. 이것은 잘못된 개념입니다. 예배는 내 필요를 채우기 위해,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하나님을 초청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분의 마음에 들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찬양한 후 그분을 저 높은 하늘로 다시 돌려보내드리는 행사가 아닙니다. 예배 자리에 나온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양이나 질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자세를 문제 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로 제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예배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형제 사랑, 화목, 화평의 이슈는 예배와 직결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원수 맺은 상태 그대로 예배를 드릴 때 예배의 능력이 제대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관계 속에 담이 있고, 미움이 있고, 당을 짓고, 분열이 그대로 있는데 이를 해결치 않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제단 앞에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할 뿐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 따로, 삶 따로’하는 신자들에게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형제나 자매와 급히 화해해야 합니다.
Why 보다 How
살다보면 경제적으로나, 육신적으로나, 마음의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흔히 던지는 질문이 “why me(왜 나입니까)' 입니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셨습니까? 이제 살만해졌는데 왜 내 몸에 병이 생깁니까, 왜 사업이 어려워집니까, 왜 자식에게 문제가 생깁니까 등등.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은 그 질문에 즉시 답변을 주지 않으십니다. 문제가 있으면 물론 괴롭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 거하게 합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주님이 능력 주시니 감당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이 채워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다니엘서 3장을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세력이 점점 강대해지자 교만해져서 두라 평지에 거대한 신상을 세웠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신상의 낙성식에 고위관리들을 전원 참석시키고 악기 소리가 들릴 때에 세운 금 신상에 절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을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금 신상에 엎드리어 절하지 않고 뻣뻣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갈대아 사람들이 왕에 일러바칩니다. 그렇지 않아도 포로로 끌려온 유대인들이 자기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시기하던 차에 그들을 제거할 좋은 구실을 찾았습니다. 고소 내용을 보면 왕을 우습게 여겨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적들은 세 친구들의 행위로는 책잡을 것이 없으니 신앙적인 문제를 가지고 공격해 옵니다. 무리의 고소내용을 들은 왕은 분노합니다. 그러나 왕은 세 친구에게 이제라도 신상에 절을 한다면 살려 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심문을 당하면서 세 친구들은 그 동안의 자기의 생애를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여 기구하게 포로로 끌려왔던 일, 다니엘과 더불어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었던 일, 왕 앞에 서서 그들의 지혜와 총명을 인하여 인정받았던 일, 왕의 꿈을 인하여 죽을 뻔하였으나 다니엘과 함께 기도하고 나서 극적으로 살아난 일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록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왔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가운데 높은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 이제 모든 영화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우상에 절하고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절하지 않고 죽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쉬운 선택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 친구들에게는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결단의 순간입니다. 세 친구들은 아마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다시 말하면 왕이 물어보나 마나 우리의 행동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타는 풀무 불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세 친구들은 더 감동적인 말을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즉 하나님의 뜻이 혹시 풀무 불 가운데서 죽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겠다고 말합니다. 세 친구의 담대한 답변을 들은 왕은 자기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는 이들을 인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치밉니다. 풀무 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겁게 하여 이들을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그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곁에서 세 친구들을 붙잡고 가던 사람들이 불에 타 죽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평소보다 일곱 배나 뜨거운 불에 던져졌는데도 그들은 살아났을 뿐 아니라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고 옷의 색깔도 변하지 않고 불탄 냄새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이 그들로 하여금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세 친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구원을 받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왕을 통해서도 높여지는 것을 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어떤 말을 합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는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갈대아인들로 하여금 세 사람을 비난하거나 욕하면 그 집을 거름터로 삼겠다고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아무런 죄 없이 목숨을 잃을 상황에서도‘왜’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원망하기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가에 집중했습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붙듭니다. 이 깨달음은 고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순종은 예배자가 견지해야 할 하나님 중심의 예배정신입니다. ‘왜’는 내 의지를 항변하는 것이요, ‘어떻게’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라고 반문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에 대해‘네’라고 반응하고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하고, 내가 좋아하던 방식, 가치관, 세상, 기쁨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순종할 때 머뭇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유부단한 순종은 헌신의 능력을 잃게 합니다.
기쁘게 항복하라
살다 보면 고난과 역경을 당할 때가 있지만 그럴 때도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다윗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과 두려움, 죽음의 위협과 대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지 수년이 지났고, 다윗을 향한 백성들의 인기는 높아지지만, 왕이요 장인인 사울은 여전히 자신을 죽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시편 62편은 그저 평화로운 안식을 누리며 고요한 마음의 평정 속에서 흘러나온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코앞에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처져 나온 영혼을 향한 명령입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 62:1). 하나님을 향해서 잠잠한 이유는 구원이 하나님에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잠잠하다는 말은 조용한 하나님만 바라고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하고 잠잠히 기다리기가 어렵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잠잠이 하나님만 바라라’는 다윗의 모습이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이 됩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항복입니다. 항복의 사전적 의미는 ‘싸움에 진 것을 상대에게 인정하고 굴복함’입니다. 내가 상대보다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상대방에 넘기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매주 정기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사실 ‘항복하는 훈련’입니다. 롬 6:13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 몸의 모든 지체들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사용하시도록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자신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항복은 순종의 최고 단계요, 예배의 심장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항복은 절대로 우리를 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항복할 때 우리의 자유가 속박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항복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항복을 요구합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예배가 우리를 더 큰 순종으로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아울러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사무엘의 언급을 통해 우리는 예배에서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 자세인지 배웠습니다. 매주 더도 말고 한 가지씩 순종해야 합니다. 육신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데 하물며 나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독생자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께 더욱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교 말씀에, 양심에 호소하는 성령의 인도에, 우리 마음에 다가오는 회개의 영과 헌신의 영에 순종할 때, 우리의 삶은 점점 자라게 됩니다. 그래서 순종은 성숙으로 이어지고, 성숙은 성령의 열매를 포함한 영적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삶의 예배자로 부르셨습니다. 예배자로 사는 것은 삶의 중심에 예수님이 주인 되는 삶, 그분의 주권과 다스림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배는 또한 하나님을 향한 추구요, 우리 중심에서 일어나는 갈망입니다. 성도들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그럴 때 회중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그분을 만날 것이며 은혜의 깊은 바다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다루었던 예배의 일곱 가지 법칙은 마치 톱니바퀴와 같습니다. 7개의 톱니가 맞물려 돌아갈 때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개인의 삶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7가지 법칙은 예배가 삶이요 삶이 예배인 성도의 삶을 일주일이라는 라이프 사이클과 접목시킨 예배의 원리입니다. 다시 한 번 일곱 가지 법칙을 말해볼까요? 기대감, 드림, 반응, 경외, 친밀, 영과 진리, 순종. 첫 번째 법칙인 기대감과 마지막 법칙인 순종의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강화시키고 드림, 반응, 경외, 친밀, 영과 진리라는 법칙은 주일 회중 예배를 강화합니다. 이런 신앙의 사이클 로 5년을 살고 10년을 살 때 그 삶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교우들이 있는 교회의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정은 물론 그들의 삶의 현장에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배의 유일한 관객은 하나님이십니다. 회중은 예배 구경꾼이 아니라 선수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높이며 경배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음 속에 예배의 법칙을 각자에게 적극적으로 적용하면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자, 자원하여 섬기는 헌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삶을 통하여 보여주는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