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 비류왕의 제2자이다.
몸가짐이 남다르고 원대한 식견이 있었다.
계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 삼국사기 : 근초고왕 원년 ─
동북아 전체가 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던 격동의 4세기. 그러니까 어깨에 각 잡고 다니던 좀 거친 나랏님들이 저마다 옆 동네로 밀고 들어가 돈 좀 뜯고 연장질 좀 하고 다니던 무시무시한 시대가 서서히 정리되어 막을 내리던 즈음, 한반도 중부의 주먹왕으로 자라난 백제를 당당히 국제 무대의 대권 후보로 올려놓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근초고왕(近肖古王)'이다.
바로 이 근초고왕의 일대기를 그리는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이 지난 11월 7일 처음으로 전파를 타고 방송을 시작했다. '환서해대백제'란 모토 아래 근초고왕의 성장, 그리고 웅지와 업적이 담길 이 드라마의 서막은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의 건국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기원전 37년. 소서노는 주몽과 함께 고구려를 세웠지만, 주몽이 전처 소생의 유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자 이에 반발하여 주몽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린다. 마침내 자신의 두 아들 비류 · 온조와 자신을 추종하는 백성들을 이끌고 새로운 땅을 찾아 남쪽으로 떠난 소서노는 지금의 한강인 아리수에 이르러 새 나라를 세우고 '밝지'라 이름하니, 이것이 곧 백제의 시작이다.
자못 막장스러운 드라마 속 건국 시나리오지만, 이는 사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정통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사기'의 기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다만 둘 사이에 존재하는 소소한 차이점과 함께 애초부터 삼국사기의 기록 자체가 워낙 의문시되는 점이 많아 그동안 온갖 구구한 학설과 잡다한 설전의 중심이 되어왔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일단 드라마와 실제 역사의 소소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 차이점을 살펴보고, 이로서 스토리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보자. 그리고 드라마의 각색에서 벗어난 역사의 모습을 대강이나마 알아보자. 삼국사기의 고질적인 논란을 살펴보는 것은 그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다.
"고구려는 당신만의 나라가 아닙니다. 약조를 지키시지요. 내 아들에게 왕위를 물리겠다던 그 약조를 지키십시오."
"한 하늘에 두 영웅은 없는 법! 이 추모가 어찌 소서노와 한 침상에 눕겠는가! 이제부터 소서노는 이 고구려의 태대부인이 아니다! 이 추모의 아내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 : 1화 ─
소서노와 주몽이 싸웠습니까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소서노와 주몽의 반목은 가히 심각한 수준이다. 아무리 당시 고구려가 신생국가에 연맹왕국이라고 해도 한 나라의 국모가, 그것도 어전에서 임금에게 바가지라니? 더욱이 서로가 지니고 있던 혼인 예물을 바닥에 던지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발로 짓이겨 부숴버리기에 이르니, 이 정도면 콩가루 집안 스토리도 여간한 막장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정략적으로 결혼한 사이이자 신흥기업 '고구려'의 공동 창립자인 '소서노'와 '주몽'이 기업의 상속자를 정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내부 반목을 일으켰고, 마침내 집구석에서 뛰쳐나온 '소서노'가 밖에서 '백제'라는 딴 살림을 차리게 되었다는 말인데, 이 완전한 가족 시나리오에서 선명히 그려지는 것처럼 실제로 소서노가 주몽과 저렇게 심각한 대립각을 세웠는지 알아보자.
[그래도 내가 딱히 누구 돋는단 말은 안 하려구]
우선 소서노와 주몽, 두 사람은 싸우고 싶어도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문제는 소서노가 아니라 주몽이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유리가 고구려 땅으로 들어온 지 고작 다섯 달 만에 주몽은 마치 기다린 것처럼 갑작스레 죽어버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유리의 등장과 주몽의 죽음,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외당한 소서노와 그 무리. 이러한 사건은 당시 고구려의 정치 판국에 중대한 변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유리가 '주몽의 자식'이라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인 집단이라고 보았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먼저 외래 집단(주몽)이 기존 집단(소서노)과 함께 새로운 나라(고구려)를 세운다. 그러나 이어서 새로운 외래 집단(유리)이 유입되자 건국을 주도한 기존의 외래 집단(주몽)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배척하여 몰아내거나, 아니면 연합하거나.
사실 이러한 건국 과정은 고대 한반도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고조선과 신라의 건국 과정도 그러하지만 무엇보다 가야 건국 신화가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데, 외래 집단(김수로) - 기존 집단(9간) - 새로운 외래 집단(석탈해 · 허왕옥)의 구도는 위에서 본 것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김수로가 석탈해와 허왕옥이라는 서로 다른 두 집단을 상대로 배척과 연합이라는 서로 다른 방법의 대응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주몽은 유리를 상대로 어떤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정확한 답은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는 이와 관련해 몇 가지 기본적인 정보를 전해준다.
일단 유리 집단은 주몽 집단을 신속히 흡수했다. 유리가 들어오자 주몽이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에서는 평화적 인수, 유리가 들어오고 다섯 달 만에 주몽이 죽어버린 기록에서는 강제 합병이라는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엿보이지만 어느 경우라도 이미 대립의 한 축은 주몽에서 유리에게로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최종 승리자, 유리는 사실 좀 거친 형님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대립의 다른 한 축도 이미 소서노에서 비류와 온조에게로 넘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당초 주몽을 등에 업고 공동의 세력을 구축했던 소서노는 주몽이라는 힘의 중심이 사라지자 자연스레 세대교체의 대세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나 기껏해야 비류와 온조의 배후 조종자로 만족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다음과 같은 비류와 온조의 대화는 이러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처음 대왕이 부여의 어려움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집안의 재산을 기울여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도와 그 애쓰고 힘들인 것이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속하게 되었으니, 우리가 이곳에 남아 그저 군더더기처럼 답답하게 있는 것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로서 우리는 극중에서 그려진 [주몽(유리) vs 소서노(비류 · 온조)]의 후계 선정 대립 구도가 사실은 이미 주몽이 탈락한 상태에서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루어진 [유리 vs 비류(온조 · 소서노)]의 주도권 쟁탈 구도가 각색된 것이라는 점을 여실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드라마에서는 도대체 무슨 심산으로 스토리에 이런 각색을 가한 것일까.
물론 이것은 소서노가 고구려와 백제 건국을 주도한 여장부라는 일반적인 역사 인식에 근거한 시나리오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고구려가 전체 드라마 스토리의 최종 보스로 자리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극 초반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악연을 강조하고, 그것을 숙명적인 것으로 미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지금은 이를 위해 비류왕 초기, 두 나라가 대방고토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팽팽한 접전을 가상해내고 있으나 이것은 나중에 다시 다루는 기회를 기약하자.
하지만 작가든 제작진이든 각색은 어디까지나 각색, 농간은 어디까지나 농간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농간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자세다. 역사에 관측과 추정이 불가피한 것처럼 사극에도 상상과 각색은 불가피한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기르되, 다만 역사의 눈으로 사극을 바라보려는 이러한 시도가 사극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새로운 시사점이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고생해서 써놓고 보니 실제로는 별 말 없군요. 이런;;
제현들의 많은 가르침 바랍니다.
첫댓글 뭐, 백프로 공감할 수는 없다만, 그래도 시청자들이 님만 같다면 전 세상을 하직해도 되겠음. ㅠㅠ
근초고왕을미있게 보는 시청자로서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