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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7,36-8,3)
요한복음에서 간음한 여인을 연상시키는, 이름도 성도 모르고 단지 죄인으로 유명한 ‘여인 하나’(7,37)가 ‘아름다운 일을 한 여인’으로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맡게 해주는 이야기가 오늘 복음입니다.
이 본문에 제목을 붙인다면 무엇이 될까요? ‘죄와 벌’이 아닌 ‘죄와 용서’, ‘믿음과 구원’, ‘예수와 여인’. 여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윤리적인 죄가 아닌가 싶은데 경건한 바리사이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적대시하면서 멸망할 이들과 상종하면 자신들도 불결해져서 하느님과도 멀어진다고 규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여자들과 드러내 놓고 가까이 지내는 것은 남의 이목 때문에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오늘도 예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의 편이 되십니다. 이름도 없는 이 여인은 말도 없습니다.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도 못하고 발치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시자 손수건도 옷자락도 아닌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랐습니다. 그녀의 행위가 말 대신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예수님은 말없는 선의의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십니다. 반면 예수님을 초대한 주인은 환영인사도 손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여인의 행동을 못마땅해합니다.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음식만 제공한다.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하듯이 말입니다. 순간 ‘아마 이 사람은 예언자가 아닌 모양이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저런 대접을 받으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초대한 것은 아닐까?’ 하며 후회했는지도 모르지요. “중요한 것은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다. 아이가 비뚤어진 길을 걸어와서 그렇게 고독한 모습으로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 말이다. 화를 내지 말고 슬퍼하라. 복수가 아니라 연민의 정을 가지는 것이다.” 연민이 없는 그를 보며 야누쉬 코르착의 말이 생각납니다. 동시에 지난 4월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사상 최대의 총기난사사건을 일으킨, 분노보다 슬픔이 앞서는 교포 학생이 생각납니다.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이었건 간에 그녀의 마음과 행동을 받는 예수님은 의도적인지 잊어버렸는지(정작 그들이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면서: 루카 14,7) 몰라도 당신을 대우하지 않는 사람의 집에도 차별 없이 손님으로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그들이 돌아서서 ‘그는 손도 안 씻고 음식을 먹는 율법을 어기는 자’(마르 7,5)라고 헐뜯고, 그는 ‘먹보요 술꾼’(7,34)이라고 소문을 낼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도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7,40)며 상대가 질문에 대답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는 “더 많이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채무자를 더 사랑합니다.”고 당연한 이치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몬은 ‘죄와 벌’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의 초점은 죄 지은 그가 이제부터는 사랑하고 감사하며 새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의롭다고 여기는 시몬은 적게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적게 사랑하고,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고 큰 사랑을 드러냈다고 인정받았습니다. 마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루카 18,9-14).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보고 인정하며 뉘우치는 것은 아름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나탄은 한 이야기를 통해 다윗의 잘못을 지적해 줍니다. 나탄의 슬기와 용기도 그렇지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하고 깨달은 즉시 잘못을 인정한 다윗의 훌륭한 점도 여기에 나타납니다. 자신의 죄를 은폐하거나 왕의 자존심으로 합리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방탕한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9) 하듯 다윗도 자신의 죄가 단지 한 인간, 우리야한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저지른 잘못이라고까지 뉘우칩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이 탄생됩니다.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부서지고 꺾인 마음을`/`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51,18-19)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7,50) 바오로 사도도 말합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갈라 2,16) 구약시대에는 사제나 왕에게 몰약을 섞은 기름을 부어 성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메시아란 ‘기름부음받은자’란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도유로 충만한 메시아였지만 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죄인의 선한 뜻이 마치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름부어 드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것도 머리도 몸도 아닌 발에. 스승이 발을 씻기는 것을 거부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고 하신 예수님은 여인이 눈물로 발을 씻자 여인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요한 13,10)고 하셨듯, 발에 기름부음 당하심으로 여인에게 메시아로서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해방과 사랑을 체험한 여인이 어찌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겠습니까? 십자가 아래까지도 따라갔을 것이고, 날이 밝기만 하면 시신에 발라드리려고 향유와 향료를 준비했을 것입니다(루카 23,56; 24,1). 오늘날도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하며 향유 바르는 삶을 사는 예수님의 여인들이 많음을 믿습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만나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부자 시몬인데, 그는 열심하고 모범적인 바리사이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죄인으로 표현된 여자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적극적인 신앙인들로서, 성경에 명시된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 애쓴 이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주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시몬의 집에 초대받아 갔으니 죄인과 가까이 어울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집주인에게는 영 못마땅하게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빚진 사람 둘의 이야기를 하시며 모두 탕감받았다면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시몬의 대답은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연하고 상식적인 대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돈 문제에 관한 상식은 잘 알면서 죄인을 용서하는 상식에는 어찌하여 둔감하냐고 지적하십니다. 시몬은 지식과 이론을 중시하였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신앙의 길을 걷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행동을 앞세웠습니다. 곧,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바꾸어 생각하면 ‘너를 구원하는 것은 네 믿음이다.’라는 뜻입니다. [서울] 어제는 죄인 오늘은 성인
두사람이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행중에 문제가 생겨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사람은 기분이 나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래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뺨을 때렸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마침내 오아시스에 도착한 두 친구는 그 곳에서 목욕을 하기로 했습니다. 뺨을 맞았던 사람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다 늪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때 뺨을 때렸던 친구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늪에서 빠져 나왔을 때 이번에는 돌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그를 때렸고 또한 구해 준 친구가 의아해서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을 때는 모래에다 적었는데 왜 너를 구해 준 후에는 돌에다 적었지?”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잘못했을 때는 그 사실을 모래에 적어야 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 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떼니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예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름도 성도 모르고 단지 죄인으로 유명한 ‘여인 한 사람’(요한 7,37)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죄 많은 이 여인이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일을 한 여인’으로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경에 기록되어 기억되고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죄 많은 이 여인이 구원의 역사 안에서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없는 이 여인은 말도 없이 오직 행위로써 자신의 진심을 예수님께 보여 줍니다.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더니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바릅니다. 이 모습에서 여인은 자기 자신의 잘못과 죄를 ‘용서’ 청하는 가장 겸허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할 때 주님은 우리의 잘못을 모래 위에 기록하시고,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하였을 때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며 당신의 자비와 은총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겸허히 고백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성덕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제의 죄인이 진심어린 참회로써 오늘의 의인이 되는 교회입니다. 과거 행실이 좋지 못했던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오늘 성녀가 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강도가 마지막 순간에 진심으로 뉘우침으로 천국으로 초대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입니다. 오늘 이 순간 하느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총을 받은 우리가 이제, 그 사랑과 자비를 가족과 이웃 안에서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김지영 신부
[군종] 용서의 삶
찬미 예수님! 한 주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연중 제11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제가 어렸을 적에 있었던 일을 떠올려 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옆집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집은 매일 요쿠르트를 받아먹고 었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 집 방문 앞에는 맛있는 요쿠르트가 놓여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그만 옆집에 있는 요쿠르트에 손대게 되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머리를 썼습니다. 요쿠르트를 먹기 위해서 위에 있는 은박지를 뜯으면 금방 들통 날 것 같아서 요쿠르트 바닥에 작은 구멍을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요쿠르트를 입으로 조금씩 빨아먹었습니다.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조금만 먹고 표시가 나지 않도록 해놓겠다는 처음의 작전과는 다르게 그만 그걸 다 먹어버렸습니다.
그때 저는 도둑질을 했다는 죄책감 보다는 그 사실을 숨겨야 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쓰레기통에 버리고 모른 척 했습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오래가질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어머니는 저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저는 ‘재호야, 잠깐 보자’ 라는 말에 얼마나 떨렸던지 ‘아~ 이제 맞아 죽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저의 예상과는 다르게 돈 100원을 주시면서 무엇이 먹고 싶으면 정정당당하게 사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옆집 아주머니께 가서 용서를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가기는 싫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아주머니께 가서 용서를 청했습니다. 저는 그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었고 또 그렇게 노력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이런 크고 작은 잘못들을 용서받은 기억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때 용서받은 마음이 어떠할 것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와 같이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 여인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저와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인은 예수님께 큰 사랑을 드러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 큰 사랑의 행위가 아주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늘 항상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하느님께 바쳐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 주위에 있는 이웃을 용서해 주지 못하고 미움으로만 가득 차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해 줄 줄 아는 그런 하루, 그런 한 주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김재호 신부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기 (김규한 신부)
이번 주 복음말씀은 그 유명한 "예수님발에 향유를 붓는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복음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드라마틱한 이 장면을 통해 참으로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되고 싶으면 하느님이 만들어준 눈으로 그 여인을 바라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여러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 곁으로다가와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후 발에 입맞추며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이때 모든이들은 그여인을 자기가 만든 눈으로 바라보았고 예수님은 하느님이 만들어준 눈으로 바라 보셨습니다. 자기눈으로 바라본이들은 "저 여자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구나, 시간을 낭비하고 있구나"등으로 생각하였고 하느님 눈으로 바라본 예수님은 "저 여인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주어야지"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천당에 간다는 것은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나라의 손님이 되는것이 아니고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되어 하느님의 생명, 존재, 사랑을 몽땅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만이 하느님의 생명, 존재, 사랑을 몽땅 누릴수 있습니다. 이런이유로 하느님나라의 주인이 되기위해서는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처럼 되어야 하느님의 생명, 존재, 사랑을 몽땅 누릴수 있는 천당에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처럼되는 비결은 바로 "모든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기"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내 육체, 내 직위, 내 명예, 내 재산, 내 지식등이 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세상 전체가 환영, 그림자, 물거품, 지나가는 바람, 말라버리는 아침이슬 처럼 보입니다. 참으로 존재하는 하느님만이 모든것의 모든 것으로 생생히 보입니다. 하느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 또 생각을 전환시키고 끊임없이 하느님 생각으로 전환시킬수있습니다. 기쁨을 하느님의 미소로 보고 감사를 하느님의 마음으로 보고 고생을 '조금 있으면 휴식'으로, 슬픔을 '조금있으면 기쁨'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고통받는 가난한이를 하느님의 자녀로 바라봅니다. 하느님 눈을 가지면 하느님처럼 됩니다. 다같이 하느님의 눈을 가져 지금 여기서부터 "대자유인, 구원받은이" 로 살아 갑시다. 오직 사랑만이 (전숭규 신부) 부끄러운 초등학교 시절의 일을 고백합니다. 어린 나이에 먹고 싶은 것도 많았으나 늘 용돈이 부족했습니다. 궁리 끝에 아버지의 지갑을 털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잠이 드신 틈을 타서 바지 뒷주머니를 보니 지갑이 있었습니다. 지갑을 열어 보니 지폐가 여러 장 들어 있었습니다. 한두 장을 꺼내도 표가 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훔친 돈으로 가게에 가서 마음껏 과자를 사먹었습니다. 친구들에게도 선심을 썼습니다. 그래도 돈이 남아서 학교에 가지고 가서 저축을 했습니다. 내용도 모르시는 담임선생님은 기특하다며 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친구들에게는 인심을 얻고 선생님에게는 칭찬도 받고,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격이었습니다. 저의 도둑질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모르시는 듯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저에게 할 말이 있으니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순간 “이젠 들통이 났구나”하는 생각에 눈앞이 아찔했습니다. 아버지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 돈을 어떻게 했느냐”로 물으셨습니다. 저는 사실대로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통장을 가져오라고 하시며 확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것이 야단의 전부였습니다. 며칠 뒤에 동네 어른들이 저희 집에 오셨는데, 아버지는 저를 부르시더니 저금통장을 가져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통장을 어른들에게 보여 주시며, “우리 막내가 용돈을 아껴서 이만큼이나 저금을 했다오”하시며 자랑하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두 번씩이나 확인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시딤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아버지는 아들의 못된 버릇을 고칠 수가 없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을 랍비에게 데려가 아들의 버릇을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랍비는 아들을 건네받아 하루 동안 따뜻한 품에 안고 지냈습니다. 다음날 아버지가 랍비를 찾아갔을 때 아들은 마술에 걸린 듯 얌전해졌습니다. 도덕적인 설교가 아니라 사랑이 그 아이를 치유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죄 많은 여인을 사랑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그릇된 과거 삶을 청산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 여인을 치유한 것입니다. 저 또한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못난이를 하느님은 용서해 주셨고, 더욱이 사제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런 저를 받아 들여 봉사의 직분을 맡겨 주었습니다. 이처럼 많이 용서받고 사랑받았으니 이제 저에게 남은 일은 더 많이 사랑하며 사는 일입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간절한 통회의 마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태초에 에덴동산에는 모든 생명체가 암수 짝이 있었으나, 남자인 아담(사람)만이 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담 옆에 아리따운 여자가 서있게 됩니다. 하와가 탄생된 것이지요. 그때 아담이 기쁜 나머지 목청껏 부르짖은 탄성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아마도 아담의 탄성 뒤에 또 다른 말을 덧붙이라면 “얼씨구 좋구나, 지화자 좋구나!”가 제격일 것입니다. 이렇게 기뻐하였던 아담은 뱀의 꼬임에 넘어간 사랑하는 하와가 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함께 먹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느님께서 아시고는 분명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창세 3, 11) 이쯤 되면 사내대장부가 나무숲 사이에서 뛰어나와 무릎을 꿇고, “제가 따 먹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와를 고발합니다. 방금 전 사랑과 기쁨의 탄성을 잊어버리고 말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 3, 12) 곰곰이 묵상하면 인간이 지은 첫 번째 죄인 원죄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따먹은 뒤의 잘못된 처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았던 죄, 자신의 죄를 남에게 덮으려 하였던 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 같은 죄를 끊임없이 짓고 있습니다. 자신은 깨끗한 척, 아무런 죄가 없다는 듯이 살면서 남을 단죄하는 성향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성경과 이스라엘 역사가 위대한 것은 이 같은 사실에 부끄러움 없이 그대로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은 단연코 다윗 왕입니다. 그 위대한 임금의 더러운 치부도 그들은 있는 그대로 밝히고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둘도 없는 충신이었던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와 간통한 사실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진정 다윗이 위대한 까닭은 아담과 같은 치사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회개의 자세였던 것입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 13)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내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시편에는 다윗이 참회하는 기도를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면,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 47)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성인 성녀나 위인들까지도 용서받지 않고 생을 살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용서 받음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도 용서하며 살았기에 그 위대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사람들의 단점을 살펴보면 내 자신 안에는 더 추악한 같은 단점과 잘못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신학은 눈물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가 예전에 지었던 수많은 잘못에서 용서받은 기쁨과 회개의 끊임없는 눈물에서 비로소 신학이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성 바오로의 고백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 24~25) 내 안에 있는 죄를 내 자신 스스로 볼 수 없으므로 이웃을 통하여 볼 수 있도록 하시는 주님, 그분께서는 나의 잘못에 대하여 탓하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간절한 통회가 있을 때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그때 비로소 감격의 주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 50) 〈춘천교구 게쎄마니 피정의 집 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