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숙제 다 해 왔나?"
국어선생님이 말씀 하시자
"예"
라고 잘도 대답하는 아이들입니다.
"자 그러면 한 사람씩 나와서 먼저 외우는 자가 집에 간다"
라고 하자 서로 먼저 나오려고 합니다.
그 어려운 독립선언문을 이틀만에 그렇게 잘도 외운 아이들이지만 나는 아직 책을 들여다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나도 외우려고 책을 펴놨습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인의 독립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대의를 극명하여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 자존의 정립을 열게하노라.
반만년의 역사의 권위를 장하여 차로 선전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여 차를 표명함이며` (맞는지 안 맞는지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아)
우리반 아이들은 72명인데 잘도 외우고 나갑니다.
선생님도 나중에는 귀찮은지 앞부분만 외워도 가라고 합니다.
이제 아이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갔는데 나도 선생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
"해 봐"
"............................"
"해 보라니까?"
"오오오오드드드드 등은 아아아아 조조조조................."
내가 갑자기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집니다.
그러자 선생님이 보다못해
"가 가"
라고 짜증을 부립니다.
만일 `페스탈롯찌` 같은 훌륭한 선생님이셨더라면
"아 네가 겁을 냈구나 괜찮아, 우리 함께 천천히 읽어볼까?"
라고 했더라면 나는 평생 말을 더듬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깜깜한 교정을 나오면서
"이 버보 멍청이 병신아 ! 그것도 못해? 엉엉엉"
나는 내 자신이 얼마나 미운지 모릅니다.
집에 오면서 나의 자존심이 다 망가진 것에 비관하며 울면서 왔고,깜깜한 방으로 들어가 전등을 켜자 큰 형이 힘없는 소리로
"너왔니?"
라고 합니다.
방은 무척 춥고 아침에 내가 해 놓은 밥은 머리맡에 그냥 있습니다.
나는 부엌으로 나가 불을 때면서 밥을 끓입니다.
그리고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는데 형은 못먹겠다고 합니다.
1951년 4월 15일은 나의 졸업식입니다.
학교 강당에는 4학년과 5학년 아이들과 우리 6학년 아이들이 나와 있었고 학부형들이 많이 와 있었지만 나는 혼자입니다.
선생님들도 다 나와 있습니다.
`우암산 산꼭대기 먼동이틀때
무심천 잔물결에 샛별이 떴다
고요한 청주마을 교동 국민은
대한의 조무라기 우리들 학교
명랑한 우리학교 즐거운 학교
여기서 배워가는 우리는 행복.`
우리학교의 교가를 아직까지 기억합니다.
그러자 4학년과 5학년 후배들이 우리를 위해 졸업식 노래를 불러줍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여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그러자 아이들이 다 울고 학부형도 울고 선생님들이 다 웁니다.
"우리 청주 교동 국민학교의 제19회 졸업식을 거행 합니다."
라고 교장 선생님의 연설이 끝나고 좋업장을 나누어 줍니다.
나는 졸업장을 들고 집으로 갑니다.큰 형에게 보여 주고 싶습니다.
내가 집에 이르러 들어가자 큰 형이 운명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숨이 거칠고 눈빛이 전에 죽어가던 어머니의 눈빛과
똑같습니다.
"엉엉 형 죽지마 죽으면 안돼 엉엉!"
나는 울다가 밖으로 뛰쳐 나갑니다. 형과 싸우고 나간 작은 형은 청주도립병원서무실(그때는 사무실이라 하지않고 서무실이라고)에서 소사(심부름의 일본말)일을 하고 있습니다.
"형 큰형이 죽어가고 있어"
그러자 작은 형이 놀래어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전 속력을 내 달립니다.
(계속)
첫댓글 어머님의 운명에 이어 큰형님까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셨군요.
형광님 글을 읽을 때마다 억장이 막히고 눈물이 흐릅니다 ...
어서오세요 순수수피아님 늘 감사합니다ㅓ.
제가 똑똑했더라면 그렇게 허망하개ㅔ 죽지는 않았을꺼예요
아유
넘 안타깝네요
큰 형님 병원 함 못 모셔보고 그리 허망하게...
곡기를 못드실땐 극한 상황까지 온거라 하더라고요
구구절절 시리고 아린 사연이
눈물겹습니다
라아라님 어서오세요
늘 슬프고 아픈 마음을 드려 죄송합니다. 감사
어쩜 이렇게 그 오래전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록하실 수 있을까요.
부모님도 안계시고 형님까지 아프신 와중에 힘겹게 좋업을 하셨군요.
아, 졸업식 날 형님께서 그렇게 또 먼길로 떠나시는 군요.
작은 형은 평생 대못이 박혀 더욱 힘들게 사셨을 것 같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저의 가정사를 발가벗겨 보여드림이 사실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림이 다 다르기에 이런 가정도 있구나 라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죄송
@형광등등 시대가 그랬으니...
민족의 비극적 삶을 짊어지셨던
형광등등 님 삶 앞에서 숙연할 뿐입니다.
작은형님께서도 마음의 상처가 크셨을 텐데
잘 극복하셨길 바랄 뿐입니다.
다음 편 기다립니다.
졸업식은 했지만
형에게 다가온 일이?
얼마나
마음이 졸였을까요?
어린 마음에.......
어서오세요 사랑벼리님
졸업장 밭는 기쁜날에 날벼락이지요 감사
세상에...
좋은 세상 오는 것도 못 보시고
끝내... 불쌍하셔라 그 참혹한 고생을 하시고
운선님 오셨어요?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비극인데 저는 바보 같아서 그냥 멍청햤답니다.
그당시 힘든 세월의 나날을 보내 셨군요.전쟁속에 삶의 소중함이 크겠지요. 예전에는 학교.군대 외우는게 많았어요 .저도ㅈ국어 시간에 시.를 외우라고 하는 선생님이 있어고 .군대가서 각종 규칙 외우라고 하고 .요즘은 세상이 자율적 인가 봐요. 오늘도 편한 하루 지내세요..
다행복님 어서오세요 찾아주심에 감사드려요,
열중 쉬었 ! 차렸! 실시 ! 하하하 군대 생각이 나시지요?
형님께서 어머니의 갈기 갈기
떨어진 시신을 보시고
큰충격과 상처로 병이생겨
먹지못하다 돌아가신 같습니다 ㅠ
구구절절 아픈사연 목메입니다
정말 억장이 무너집니다ᆢ
예 초코릿님 그런가봐요,큰 혀의 상처가 큰가봐요
ㄱ르래도 살려고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제가 죄인입니다
전쟁중인 상황에서 학교에 다니는 일도 힘든 일이거늘
기미독립선언문은 왜 외워오라하는지,,,
아파 몸쳐 누워 있는 큰형과 작은형의 가출등등,, 부모나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삼형제는 앞날은 어둡기만 합니다.
사춘기의 소년들의 어머님의 시신을 찾아 염습하고 가매장했을 당시 얼마나 충격과 후유증이 컸을까요? 어려운 와중에도 학업을 단념하지 않고 졸업장을 움켜쥐고 형에게 보여주고자하는 어린마음이 대견합니다. 큰형은 어머님을 따라 별이 되었는지요? 설상가상으로 불행이 겹쳐와 목이 메입니다. 아~ 슬픔은 이제 그만 ㅠㅠ
자하님 죄송합니다 제[운명이 그런걸 어쩝니까?
그러나 곧 좋은일도 생길 것입니다.
@형광등등 초등학교 졸업식때 저도 혼자 갔었어요~
육학년 초가을에 저를 키워주시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큰오빠와 올케와 조카 이렇게 살게 되었지요~
남들은 부모형제들와서 북적거리는데 혼자 졸업장 넣는 통도 사고 꽃도 사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것도 슬프다면 슬픈 추억일진데 하물며 님의 슬픔만하겠습니까?
지나고 나면 별일도 아니고
고통과 시련도 내 삶의 밑거름이 되더군요.
@자하 아 자하님 ! 외롭게 살아오셨군요 그 후 많이 힘 드셨겠습니다.
앞으로는 좋은 일과 좋은 날들이 계속 되길 간절히 빕니다 감사
@형광등등 어머니 돌아가시고 자의반 타의반 집을 떠나셨던 아버지가 중학교 무렵에 찾아 오셔셔(그전에는 오시고 싶어도 못오심. 당신의 장모님 즉, 외할머니가 무서워서) 서울에다 방을 얻어 아버지,, 둘째 오빠와 저 이렇게 분가해 셋이 살았습니다, 살림살이 해가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힘든줄도 모르고 그때는 모두 어려운 시절였으니 그려려니하고 살아왔죠~
지금도 둘째오빠는 저를 참 대견하고 기특하다하십니다^^
에피소드가 참 많아요
김10장 한꺼번에 굽는 법 신문 알뜰살림상식에서 보고 연탄위 석쇠에다
은근한 불에 김잰거 10장 올려 놓고 나가 놀다 홀랑 태운 일 ~ㅎ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말씀하십니다^^
@자하 아고라 아까워요 하하하 제가 살때 구멍가게에 가면 김을 10장씩 팔아요 그걸 사서 한장만 가지고도 밥 한그릇 다 먹었어요 하하하 감사
육이오 전쟁때 졸업 하셨네요.
어려울 때 입니다.
우하님 오셨어요? 감사합니다.
저는 그때 국민학교 입학을 했는데, 형광등등님은 졸업을하셨군요.
6.25 사변시 겪으셨던 그 고난을 어떻게 다 기억을 하십니까 ?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