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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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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설교 | |
성경낭독 : 사 35:1-10; 마 11:2-11 본문 : 행 15:1-21 제목 : “현실적 문제에 대한 교회의 바람직한 태도” |
현실적 문제에 대한 교회의 바람직한 태도
서론 : 배경과 두 가지 생각할 점
바나바와 바울이 다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게 된 이후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14장 마지막 절에서 “오래 있으니라”라고 한 것을 보면 잠깐 머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15장 1절에 나와 있듯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기를”,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2절 말씀에 나오는 대로 이 사실은 큰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3절과 4절에는 이렇게 파송을 받은 이들이 예루살렘까지 가기 위하여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갔고,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함으로 인해 형제들이 다 기뻐”(3절)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에서는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모두 알렸다는 내용들이 나와 있습니다.
1) 우리는 이 일들의 진전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어려움, 때로는 여기처럼 신학적 논쟁일 수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삶의 문제에 대한 어려움일 수도 있는데, 이런 교회적인 어려움을 ‘일들을 진척시켜 나가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가 모일 수 있게 된 동기가 바로 이 안디옥 교회의 어려움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초대교회 시기에 대단히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일이 다 끝나고 난 후인 우리의 관점에서는 “저런 공의회가 없었으면 참 큰일이었겠다”고 싶을 수도 있는 중요한 회의입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이 공의회는 ‘갈등의 와중에’ 생겨난 것이고, 교회가 갈등의 와중에 있다는 것은 사실은 ‘고통’입니다. 신학적 의견 대립이라고 해서 성도들의 감정 싸움에 비하여 고통이 없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언제나 이런 종류의 갈등에는 미움이나 폭언이 뒤따르기 십상이고, 사람이란 제아무리 점잖은 의제를 가지고 다투고 있더라도 감정이 상하게 마련입니다(국정 운영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위해 싸우는 국회의원들을 보십시오). 그렇다면 “이런 갈등 따위는 없는 편이 나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려가시는 방식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복잡다단하게 움직이도록 섭리하시는데, 이런 장면에서 우리는 ‘현재로서 보기에는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 갈등’이 ‘교회 전체가 가져야 할 중대한 신학적 토대를 정립하는 기틀로써’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곧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단순히 갈등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언제나 겉으로 좋아 보이는 것만이 가장 좋은 길이 아니다 라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2) 또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자면 ‘교회가 진리를 파수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공의회로 문제를 보냈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 내에서는 이 문제가 해결이 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안디옥 교회에는 사도 중 하나였던 바울이 있었습니다. 굉장한 위로자였던 바나바도 거기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일어나는 어떤 일에 대한 대답도 ‘쉽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토록 위대한 권위 앞에서 ‘아무도’ 대들거나 대항하지 않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결국 최후까지도 바나바와 바울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수순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토록 위대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 겨우 한 교회 내의 문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단의 유대 선생들의 작은 문제 제기조차도 쉽게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 안의 문제가 이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를 겸허하게 합니다. 우리는 때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있거나, 성경에 능통한 목사가 있으면, 그 교회는 ‘아주 쉽게’ 다스려지리라고 착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가장 위대한 지도자도 가장 작은 한 사람에 의해 고통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제아무리 올바르게 가르치는 사람도 막무가내인 불한당 한 사람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초대 교회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조금 더 조심하게’, ‘조금 더 주의 깊게’ 만듭니다. 혹 나의 섣부른 발언이나 주장이 교회 전체를 크게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심하고 겸허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있는 교회도 이 정도였는데, 우리가 무엇이라고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항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안고 바울과 바나바, 또 몇몇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이 문제는 안디옥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참의 변론”이 필요한 문제였습니다(7절). 이제 이후의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 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또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사용하셔서 교회를 굳게 하시는지, 그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증거 : 문제 해결의 중심을 어디에 두는가?
본문의 말씀을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늘 본문 전체, 혹은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 전체를 다루는 것이 21절까지 말씀인데, 여기까지 말씀은 크게 두 사람의 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1절까지가 베드로의 말이고, 이후 21절 마지막까지는 야고보의 말입니다.
먼저 베드로가 이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있고, 어떻게 풀고 있는지를 봅시다.
“우리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베드로의 이야기에서 처음 주목해야 하는 대목은, 그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다른 여러 가지 인간적 지혜로부터 찾지 아니하고 ‘구속 역사에 대한 통찰’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특히 8절 말씀입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여기서 베드로가 이 사람들에게 설득을 위하여 다른 무엇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근거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합시다. “우리에게와 같이”와 “성령을 주셨다”는 명백하게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교회는 지금 ‘실무적 문제’를 맞고 있습니다. 저도 정기적으로 노회에 가기 때문에 교회가 실무적 문제를 맞는 것을 많이 봅니다. 뿐만 아니라 매달 당회를 하면 실무적 문제가 계속해서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이런 종류의 ‘아주 중요한 실무적 문제’를 맞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측하건대, 분명히 당시의 예루살렘 교회는 이런 ‘실문적 문제’에 대하여 ‘실무적 대응’, 곧 ‘현실적인 대응 방안’을 충분히 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현실적인 대응 방안”이라는 것이 무엇일지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방식으로 한 번 이 예루살렘 공의회에 집어넣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교회에는 두 그룹이 맞서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라는 입장이고, 반대편에서는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셨다”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의 현실적 대응의 가장 좋은 방식은 ‘대화와 타협’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지요.
“지금 두편 다 주장이 첨예하니,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하기로 합시다.
한편에서는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만 한다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그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니, 중간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해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쪽에서는 20세 이상에서는 받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좀 양보해 주시고, 받지 않아도 된다는 쪽에서는 20세가 안 된 아이나 젊은이들은 할례를 받는 것으로 그렇게 조금씩 양보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방식은 보편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타협입니다. 하지만 굳이 타협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경우 교회가 문제를 해결할 때 ‘현실적 대응 방안’을 찾는다는 것이지요. 자신들이 지금 당면한 문제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비추어볼 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고 문제를 단지 ‘현실적, 실무적 문제로서만’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꺼낸 첫 마디는 전혀 이런 것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말하자면 베드로가 지금 한 첫 말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할례를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얻으려면
지금 우리들의 교회가 구속 역사 안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구속 역사 속에서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셨는지
그것을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 보십시오.
베드로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주어 증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증거하셨다”는 것은 ‘증인이 되었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베드로는 지금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것’을 ‘단순한 어떤 사건’으로 보지 않고 무엇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곧 성령님께서 오셨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일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일이 무엇에 대하여 ‘증인이 됩’니까?
이것은 우리가 사도행전을 배우면서 계속해서 살핀 것이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말해왔듯이 사도행전적 교회는 다음의 사실들에 기초합니다.
1) 첫째,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명령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마28:19-20)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2) 둘째, 사도행전 전체가 이 명령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시작 부분은 이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겠다”(행 1:8)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성령이 임하시는 것”과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의 증인”을 주목하십시오.
3) 그리고 셋째, 이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가 확장되어 가는 것이 사도행전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방금 살핀 것처럼 과연 첫 오순절에 임하셨던 성령님께서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땅끝으로 가는 과정들마다 다시 임하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임한 것과 같이 저희에게도”라고 말한 것은 단순한 공감이나 동질성의 문제를 어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베드로는 ‘구속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성령께서 증인이 되셨다”는 말의 뜻입니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지금 사도행전적 교회가 계속해서, 그 지역이 확장될 때마다 성령님이 임하심으로써 그 상황에 대한 증거로 인쳐오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베드로의 이 말은
“지금 이 문제는, 현실적, 실무적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 아니라,
구속 역사 안에서 우리 교회가 어떤 상황을 맞닥뜨린 것인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실무적 문제를 대할 때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타협책’을 찾는 대신, ‘이 시대의 교회 속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무엇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치중했고, 그것은 매우 적확했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시대의 교회에 분명한 지침을 줍니다.
우리 역시 무엇을 볼 수 있어야 하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자주 간과하는 것은 저들이 ‘책 속의 사람’이기 때문에 단순히 저들이 ‘우리와 다를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시대의 그들의 구속 역사와 오늘날 우리의 구속 역사는 다릅니다. 하지만 이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교회인 우리들 사이에는 공통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자가 교회의 문제를 바라볼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이 시대 속에서 이루어가시는 일을 보고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요청’하신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당한 통찰력을 요구합니다.
일전에 전광훈 교회를 예를 들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전광훈 교회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물질적 측면에서 보면 대단한 성공임에 틀림없습니다. 십여 억원으로 그쳤을 교회 보상금을 오백 여억원을 타낼 수 있었으니 그보다 더 대단한 성공은 아마 비할 데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교회의 문제를 세속적 시각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게 될 어마어마한 손실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영혼을 위해 봉사한다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장사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자신들의 영혼을 위하여 심각한 희생과 봉사가 따르는 일을 한다고 결코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지금 자기에게 ‘영업을 걸고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이런 일들을 만날 때, 곧 ‘우리 교회 예배당을 통해서 보상을 받는 일’과 같은 매우 실무적인 문제에서조차,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우리들 교회의 마땅한 위치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바라보고 있습니까?
마이클 잭슨이나 마릴릴 맨슨이 내한한다고 했을 때 교회들이 기를 쓰고 가서 막으려고 했죠? 수많은 교회들이 거기 나가서 피케팅을 하고 길에 드러누우면서 저 유행가 부르는 가수들이 이 땅에 들어오면 한국 땅 전체가 사탄에게 장악될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명같이 여겼던 사람들이, 왜 무슨 도사라는 사람을 스승으로 두고 있는 국가 위정자를 조찬 기도회를 열어 초청하고, 기도를 해 주고, 또 발언할 기회를 줍니까? 언제 교회가 강단을 불신자에게 허락한 예가 있었습니까? 하지만 선거철만 되면 수많은 교회들이 자기 지역의 정치인들을 강단에 세워 한 마디 말을 들으려고 난리가 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바라보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나아가지 않고, 교회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단지 ‘현실의 문제’로만 보고 ‘현실적인 대응 방안’만을 찾으려고 할 때 교회는 표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땅 위에 실현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이 문제를 잘 알았고 정확하게 응대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전혀 이 문제를 현실적 문제로 바라보지 않고 구속 역사의 진전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설파했습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근본적 동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태도
그리고 다음으로 이에 대한 교회의 응대를 봅시다. 교회가 베드로의 이 이야기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12절과 13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기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본문을 읽어봅시다.
12-13절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베드로의 이야기는 7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우리는 그중에 요약하여 8절만 살펴보았지만 전체 내용은 조금 더 깁니다. 그리고 이 베드로의 말이 끝나자, 말을 듣던 청중들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가 바로 다음 절인 12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이 반응을 말하는 첫 단어, 곧 12절의 첫 번째 단어는 바로 “잠잠하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가만히 있어”입니다.
‘들음’과 ‘말함’
1)
여러분, 여기에서 12절이 이 상황을 기록하는 방식을 유의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이 상황이 ‘회의 상황’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회의 상황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복잡하고 시끌시끌하게 의견을 피력하고, 또 그에 대하여 맞대응을 하고, 또 거기에 대하여 서로 발언하면서 힘을 싣고 하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진행되는 곳입니다.
하물며 여러분! 당대의 예루살렘 공의회는 얼마나 대단한 회의였겠습니까? 우리는 거듭거듭 지금 이 시대가 모든 사도들이 다 살아있었던 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이 회의 당시에 예루살렘 교회에 전체 사도가 다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얼마간의 사도라도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를 보면 2세기만 해도 지역마다 유수한 걸출한 교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역사상 첫 공의회인 이 자리에는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있었을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회의의 자리에서’ 베드로가 발언을 마친 순간, 장내는 일절 조용해졌습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우리말로 “가만히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했다’로 읽히지만, 원문의 의미는 ‘아무것도 안 한 것’이 아니라 ‘침묵이라는 것을 한 것’입니다. 즉 이건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입니다. “가만히 있었다”가 아니고, “침묵을 했다”, “잠잠을 했다” 이런 의미입니다.
일동 순식간에 거기 그 많은 유수한 사람들, 교회의 지도자들이 입을 닫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히 말씀드린 대로 여기는 ‘회의의 자리’, 어떻게 보자면 시장 바닥보다도 더 시끌벅적할 수 있는 각양 의견들과 논쟁이 난무하는 자리인데, 어떻게 여기 일순간에 모두 침묵을 선택하고 잠잠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 모두가! (아마도 성령님의 관여하심으로) 우리가 첫 주제에서 말한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 이것이 교회의 실무의 문제가 아니구나!”, “아! 지금 우리는 구속 역사의 선상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 노중에 서 있는 것이구나!” 이것을 즉시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 신자에게 있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21세기의 여러분에게 있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모든 시대, 모든 지역, 모든 언어, 모든 피부색과 다양한 성향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적어도 그 사람이 성도라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은 ‘내편에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잠잠하다”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 ‘시가오’는 구약성경에서는 대표적으로 출애굽기 14장 14절에 나옵니다. 물론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의 비교입니다.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 말씀은 홍해를 건너기 직전, 뒤에서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을 때, 그래서 사람들이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고 여겨 모세를 원망하며 부르짖었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출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아멘!
출애굽기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될 때’ 우리 편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홍해를 가르실 때, 또 그 가르신 물속에 교회의 대적 애굽의 군대들을 수장시키실 때, 교회는 단지 “가만히 있을 것”이 요청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시끌벅적하던 회의장에 베드로의 연설이 메아리쳤을 때, 거기 있던 사람 모두를 잠잠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깨달음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지금 역사하고 계시는구나!”에 대한 깨달음이죠.
제가 앞에서 여기 1세기의 교회, 첫 공의회에 수많은 유수의 지도자들이 모였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도 이들 모두가 지극히 경건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땠겠습니까? 더욱 잠잠했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경건한 사람들이었을 테니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라는 것이 분명해질 때, 인간 편에는 요청되는 것이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잠잠하는 것”입니다.
2)
그리고 여러분 그 다음을 보십시오! 희한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12절은 그들이 “잠잠했다”만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도 기록하고 있는데, 12절에 동사가 두 개입니다. 둘이 and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잠잠했다” 그리고 “들었다”입니다.
신기하게도! 막 토론과 논쟁을 벌이던 이들이 일순간 말을 멈추고 잠잠해진 후에, 그 토론장이었던 곳이 ‘하나님의 역사의 선포의 장’이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이 조용해진 회의장에 바나바와 바울이 무엇을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우리말 성경에는 동사가 이렇게 떨어져 있지만 헬라어에서는 붙어 있습니다. “잠잠했다”, 그리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이제 더 이상 여기는 ‘회의장’이 아닙니다. ‘내 의견을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발언으로 인하여 장내는 모두 이 일이 ‘실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현장’이라는 데 대한 깨달음이 임했고, 경건했던 참석자들은 모두 “잠잠”했고, “듣는” 태도로 전향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방금 전까지 나의 의견은 이렇고 당신의 의견은 저렇고 하던 곳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선포하는” 장소로 돌변합니다.
신자의 태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점은, 우리는 “잠잠”할 수 있고, 또 “듣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완고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이 곧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 모두를 말합니다. “잠잠하지 않는다”, “듣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 반해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가졌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자기 말을 합니다! 그리고 듣지 않습니다! 주인이 뭐라고 했건, 내 의견대로 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 주인은 굳은(단단한, 거친, 난폭한, 엄한) 사람이라!
당신은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려하고 수풀을 헤치지도 않으면서 열매를 모으려는 사람이오!
그래서 내가 이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놓았다 가져왔소!”
이 사람의 의중은 이것입니다. “너는 나쁜 놈이니, 나는 네 재산을 불려줄 생각이 없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앙에 있어 완고한 사람, 목이 곧은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내 생각은 이래”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방향이 있는데, 그걸 내가 아는 얄팍한 지식, 내가 가진 얄팍한 경험에다 집어넣고 그걸 자기 이해에 따라 맘대로 행하면서,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데 듣지 않습니다. 설교를 통해 지적하고, 주변 사람을 통해 지적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알려주는데도, 듣지 않습니다.
완고한 사람, 목이 곧은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라구요? “잠잠하지” 않습니다!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합니까? ‘내 말’을 합니다! “내 생각에는 이래요!”, “내가 아는 바로는 이래야 합니다!”
여러분 보세요! 여기 그토록 똑똑하고 리더십 강한 사람이 많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회의장이 갑자기 ‘듣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경건이 무엇인가요? 내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하는 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잠잠한 이’가 되어야 하고 ‘듣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교회의 수동성’입니다.
그리고 결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대답합니다.
이 구절도 흥미로운데 13절을 보시면 우리말 번역으로 “말을 마치매”라고 되어 있는 여기에 다시 한 번 “잠잠하다”에 사용된 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흔히 나오는 단어가 아닙니다. 신약 성경 전체에 10번밖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두 번 겹쳐서 나옵니다. 말하자면 13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도 말하기를 그치고 잠잠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바나바와 바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회중들에게 알렸는데, 그들조차 잠잠해졌을 때......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때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곧 “대답하였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말은 이 구도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 잠잠했다 – 들었다 –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이들조차 잠잠했다 – 그 다음 나오는 회중의 반응
그래서 이 야고보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회중의 반응’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회중의 반응으로서의 야고보의 발언은,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아멘!”입니다. 비록 13절부터 시작해서 21절까지 길게 나오지만, 야고보의 발언은 앞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대하여 회중의 대표로서 “아멘, 하나님!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응답입니다.
정 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초대교회의 첫 공의회를 통하여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하여 무언가 구체적 결정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분의 뜻을 뚝 떨어지도록 내려주시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말씀의 가르치심이 무엇인지 늘 열심히 궁구하고 연구하고 또 숙고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에 말씀 실력이 요구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다 속삭여주시는 방식으로 교회를 다스리시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셔서’, ‘그분이 보내신 성령님을 통하여’ 신약 교회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의 본의가 무엇인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우리 교회의 삶에 적용해야 할 때는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지에 있어서는 ‘상당한 말씀 실력’이 요구됩니다. 제가 항상 말씀드리듯이 말씀을 깊이 알아야만 시행착오, 곧 하나님과 내 뜻 사이의 갭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 가지 주제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두 주제는 연결됩니다.
첫째는, 사도 베드로는 교회의 현실적 실무에 해당되는 문제를 현실적 실무로만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도 언제나 당면한 문제를 ‘실무적 문제’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언약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구속사적 선택’을 해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교회의 선택은 언제나 ‘더 현실적으로 이익인 것이 무엇인가’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신 참뜻이 무엇인가......라는 견지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에게, 곧 교회에게 함양되어야 할 태도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행하심 앞에서 ‘잠잠’해야 하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말을 많이 하지 말도록 합시다. 내 생각을 많이 말하지 말도록 합시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숙고하도록 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확고하다는 생각이 들 때는 전적으로 나를 다 드려서 순종하도록 합시다.
제가 둘째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항상 숙고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파 교회들은 그런 함정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선명할 때’는 세상 사람들처럼 이익을 따지며 미적대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을 분투합시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순종’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의 말씀들이 우리 교회를 계속하여 굳게 세워나가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모든 성도들께서도 동일한 소망을 품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