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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불자임을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그 눈을 갖자는 것이다. 2013.3.10.
3월 두 번째 주 봉은사는 날씨가 쌀쌀하고 바람이 불었어요.
큰스님이 나오시기 전에 공양 봉사를 하시는 자원봉사자분들이 모두 마당에 나와 계시길래 오늘 특별한 날이냐고 여쭈니
“햇빛이 좋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다같이 까르르 웃으셨어요.
천천히 마루에 나오시던 큰스님께서도 웃음소리에 영문모르시고 덩달아 웃음을 지으셨는데요. 늘 큰스님을 마중 나오시는 총무스님이 보살님들에게 차에 달고 다니는 종이연꽃을 드렸다고요, 보살님들은 대단한 행운이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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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연꽃은 그 아침, 한 권으로 읽는 경전 <경전 숲길>의 저자이신 정운스님이 큰스님께 선물 드리고, 큰스님은 총무스님께 선물 드리고, 총무스님은 그걸 제일먼저 다래헌 자원봉사자님들에게 선물드린 것이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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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그런 날도 있어야지.”
하고 큰스님께서 자원봉사자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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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불어도 햇빛이 토닥토닥 등을 따뜻하게 해주던 날, “오늘 염화실의 거사님들이 많이 나오셨다”고 다래헌 앞에서 큰스님을 기다리던 보살님들이 말씀하셨어요.
<법문>
오늘은 법화경의 28품 중에서 화성유품을 이야기할 차례다.
화성유품이 두 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다.
화성유와 대통지승불에 대한 내용인데 화성의 비유라고 하는 화성유(化城喩)를 쉬운 표현으로 하면 ‘마법의 성’이다. 마술 같은 신통을 이용해서 가짜 도시를 임시로 만들어서 긴 여행을 하는 사람이 쉬었다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화성유는 다음시간에 보고 오늘은 대통지승불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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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 미혹한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당신의 깨달음에 근거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꾸며내서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다.
법화경 뒤에 가면 “내가 혹 있는 이야기를 하고, 혹 없는 이야기도 하고, 혹 내 이야기도 하고, 혹 남의 이야기도 한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까지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눈을 뜨게 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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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서 법화경에서 만나게 되는 중요한 두 분의 부처님이 있다. 앞서 나온 일월등명불과 오늘 나오는 대통지승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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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 태양
월 : 달
등 : 등불, 태양도 달도 없을 때 대신 세상을 밝혀주는 빛. 초나 기름,전기 상관없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을 밝히는 빛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것이 부처님의 이름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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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 광대하고
통 : 툭 터진
지승 : 지혜가 수승한 분
광대하게 툭 터진 위대한 지혜를 가지신 부처님이 대통지승불이다.
일월등명불이나 대통지승불이나 그 이름의 속뜻은 깊은 의미에서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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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처님이 실재로 몇 년도에 어떤 나라에서 있었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 그를 통해 어떤 감동을 받고 어떤 깨달음을 얻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불교에서 인용하는 글들을 보면 단순히 ‘경전에’라고만 말한다.
요즘 논문을 쓸 때는 ‘무슨 경전, 무슨 장경의 몇 페이지 내용을 인용했다’라고 주해를 단다.
옛날에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나 부처님 같은 분은 그 실재여부를 전혀 문제삼지 않았다. 오로지 우리 중생들이 미혹한 마음을 떨어 버릴 수가 있고, 눈을 뜨고 깨달을 수가 있다면 실재했든 아니든 전혀 문제 삼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나 법문을 들을 때는 그런 점을 감안하고 들어야 한다.
세세하게 어디에 있는 이야기냐, 몇 페이지 몇 째줄에 나오는 이야기냐, 역사적인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진다면 불교의 실체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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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지승불이라는 이야기를 읽어보기 전에 모든 존재는 양면성을 알아야 한다.
우리 육신이나 마음이나 이 세상 천지만물 그 무엇도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법화경에서는 본불(本佛 궁극적 차원에서의 부처님) 적불(迹佛 역사적 차원의 부처님)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사람도 눈으로 파악하는 현상적인 차원, 역사적인 차원의 내가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은 본래적인 입장, 궁극적 차원의 내가 있다.
이 양면을 우리가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양면을 함께 수용하고 함께 이해하는 것을 바른 견해[정견(正見)]다.
마이크나 풀 한포기, 모든 것들이 그렇다.
금방 흩어져 허공속으로 사라지는 저 구름 한송이, 연기 한가닥도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역사적인 차원이 있는가 하면 무량불 이전부터 무량불 이후까지 본래로 영원히 존재하는 궁극적인 차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이런 현상에 미혹당하지 말아야 하고 거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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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이러한 원리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는 견해나, 안목을 뭐라고 이름 지으면 좋을까 해서 생긴 말이 중도정견(中道正見)이라는 말이다.
중도를 불성이니 진여니 마음이니 본성이니 열반이니 이런 낱말의 또 다른 표현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중도는 보는 방법이다.
불성을 보든지 마음을 보든지 진여를 보든지 간에 보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는 것을 중도정견이라고 한다.
눈앞에 보이는 역사적인 것도 포함해서 궁극적 존재로서의 차원, 사람사람이 본래로 부처다, 모든 사물들은 그대로 진리다, 라고 까지 볼 줄 아는 두 가지 입장이 있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입장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볼 줄 알아야 중도적인 바른 소견을 가진 사람이다.
한 쪽으로만 치우쳐서는 중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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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지승불의 이야기도 치우친 소견을 가지고 보면 ‘세상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는가’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유형 무형의 모든 존재는 부처님으로부터 지옥 아귀 축생 산천초목 천지 만물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금방 흩어지고 마는 한줄기 연기나 구름 한조각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차원이 있고 궁극적인 차원이 있다.
그 두면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대통지승불도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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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찻잔이 하나 있다. 이 찻잔은 한달 전에 만들었거나 일년 전에 만든 찻잔일 수 있다. 그러나 찻잔을 만든 흙이나 돌과 같은 소재의 본질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모든 존재가 그렇다.
우리 육신도 기껏해야 칠팔십 년, 백 세를 산다고 외형적인 형태로는 백년을 전후 해서 계산할 수 있지만 우리 육신을 형성하고 있는 지수화풍 모든 존재의 근본 성품은 그 역사가 언제인지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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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신라 때 석불이 천년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 돌의 역사는 얼마나 되었는가를 묻는다.
조각은 천 년 밖에 안됐지만 본래 가지고 있었던 돌의 역사가 천년 밖에 안된 것은 아니다. 그 한 가지 사실만 가지고 깊이 이해하기로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
우리 육신을 형성하고 있는 지수화풍 사대도 역시 그 역사가 70년 80년만이 아니다. 수억만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육신이다.우리 모든 존재는 다 그런 차원이 있다.
이러한 궁극적 차원과 역사적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법화경도 불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천태지자 스님 같은 이들이 법화경을 해석할 때 본불이니 적불이니 본문이니 적문이니 하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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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본불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고 적불이라고 하는 것은 자취, 흔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으로서의 부처님이다.
이것은 부처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개개인의 문제고 모든 현상의 문제다.
이 두가지 면을 함께 볼 때 제대로 부처님을 이해하는 것이고 세상 만사를 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1. 대통지승불의 멸도
1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간 옛적 한량없고 그지없고 불가사의한 아승지겁전에 그 때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이름이 대통지승(大通智勝)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이시니라. 나라의 이름은 호성(好城)이요, 겁의 이름은 대상(大相)이었느니라.
비구들이여, 그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가 매우 오래 되었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땅덩이를 가령 어떤 사람이 갈아서 먹을 만들어 가지고 동방(東方)으로 가면서 일천 국토를 지나서 먼지만한 점을 하나 찍고, 또다시 일 천 국토를 지나가서 또 점을 하나 찍고 이렇게 하여 땅을 갈아서 만든 그 먹이 다하도록 갔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모든 국토를 수학을 잘하는 어떤 사람이나 그의 제자들이 그 수효를 다 알 수 있겠는가?”
“알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 사람이 지나간 국토에서 그 점이 떨어진 것이나 떨어지지 않은 것을 모두 모아 부수어서 먼지를 만들어 그 먼지 하나로 한 겁을 친다 하더라도 그 부처님이 열반(涅槃)하신 지는 이 숫자보다도 더 오래되셨느니라. 한량없고 그지없는 백천 만 억 아승지 겁이나 되지만 나는 여래지견의 힘으로써 그렇게 오래 된 일을 마치 오늘의 일처럼 환하게 보느니라.”
이렇게 화성유품의 서두가 시작한다. 범부는 이러한 길고 긴 시간을 상상할 수가 없다. 깨달으신 분은 보통 사람과 달라서 이렇게 길고 긴 세월을 이야기 한다.
대통지승불이 오래 전에 열반하셨다 하는 이야기를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치 오늘 일처럼 환히 본다.
이러한 내용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앞서 제가 본불과 적불에 대해 말씀드렸다.
대통지승불 뿐만 아니고 모든 존재는 궁극적 차원이 있고 역삭적인 차원이 있다.
우리들이 역사적인 차원은 기껏해야 70년, 80년 살았다고 하지만 궁극적 차원으로는 무수한 세월부터 있어왔다.
봉은사의 미륵불을 돌로 조각한 역사는 불과 몇 십년 안되었다.
그렇지만 돌의 역사는 얼마인지 모를 정도로 아주 오래고 오랜 역사다.
모든 존재는 그와 같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우리가 같이 볼 줄 알아야 된다.
역사적인 차원만 가지고 이야기 할 수도 없고, 궁극적 차원만을 가지고 이야기 해서도 안된다. 이것을 같이 이야기 하고 같이 수용해야 불교인의 관점에서 사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가정이나 회사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잘 이해하고 활용하면 풀리지 아니할 문제가 아무것도 없고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3. 대통지승불의 성도(成道)
(1) 십겁이 지나고 불법이 현전하다.
‘십겁좌도량(十劫坐道場) 불법불현전(佛法不現前)’ 이라고 하는 유명한 구절이다.
‘십겁동안 도량에 앉아 있었지만 불법이 나타나지 않더라’ 하는 이야기다.
선문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 구절을 두고 선사스님들이 얼마나 많은 법문거리를 삼았고 법거량을 많이 했는지 모른다.
왜 십겁동안 도량에 앉았는데 불법이 안나타났느냐.
고봉스님 같은 이는 아무리 멍청이라도 한 철만 열심히 하면 불법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한철은 90일이다. 빠르면 3일 보통 사람도 7일이면 부처를 본다고 선요에서 표현했다.
그것이 불법이다.
그런데 일겁도 수수억만년인데 십겁이라고 하는 그 오랜 세월 동안 불법이 안 나타나고, 십겁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불법이 나타나났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사스님들이 표현하기를 ‘본래로 우리가 부처님데 다시 부처일 이유가 있느냐’고 하였다.
본래 부처인데 부처가 다시 나타날 이유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까 십겁좌도량 동안 불법이 나타나지 아니했다고 거량을 했다. 멋진 법거량이다.
본래 부처인데 부처가 다시 나타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 도라고 하는 것은 한순간도 우리 인간의 삶을 떠나 있을 수가 없다, 만약에 한 순간이라도 떠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라고 할 수가 없다고도 하였다.
도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도를 알든 모르든 우리는 이미 도 속에 있고 도로써 살아오고 있고, 이리가도 도고 저리가도 도고 캄캄해도 도고 밝아도 도다.
어떤 삶을 살아도 우리는 도 속에 산다.
그것은 궁극적 차원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이러한 면을 다 가지고 있다.
본래로 도라고 하는, 본래로 불법이라고 하는 이 사실, 이러한 면을 다 가지고 있다.
그것이 천태스님이 말씀하신 본불, 본래부처라고 하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면은 태양과 같은 밝은 면이다. 밝은 면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밝은 면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구름이 끼고 밤이 오고 어두운 것은 문제삼지 않는다.
그래서 제가 늘 부르짖는 말이
“당신은 부처님”
“사람이 부처님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가 바로 법화경의 이러한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여러비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통지승불의 수명은 오백 사십만 억 나유타 겁이니라. 그 부처님이 처음 도량에 앉아서 마군들을 깨뜨리고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으나 불법(佛法)이 앞에 나타나지 아니하여 이와 같은 일 소겁으로부터 십 소겁이 되도록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몸과 마음을 동하지 않았지마는 불법은 오히려 앞에 나타나지 않았느니라.
우리는 본래로 탐진치 삼독과 팔만 사천 번뇌를 지닌 그대로 부처다.그래서 삼독이 본래로 불법이다.
이 삼독을 빼놓고 따로 불법이 없다라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원석을 갖다 놓고도 ‘이것이 바로 불상이다’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불상의 소재는 이미 그 속에 있다. 누군가 새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나무토막도 그대로 불상이다’ 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소재가 있는 한 새기는 일은 간단한 것이다.
시간만 가면 누가 새겨도 새긴다.
얼굴이 잘 나야 부처인 것도 아니고, 못나야 부처인 것도 아니고 형상에는 문제 삼지 않는다. 자고로 부처님의 형상을 우리가 이렇게 많이 만들어 놨지만 같은 불상이 없다. 우리 얼굴이 다 다르듯이 불상의 얼굴이 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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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의 이치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러한 이치는 법화경에서만 말할 수 있는 이치다. 어떻게 보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그동안 법화경을 많이 들어오셨으니까 궁극적 차원으로서 우리들 자신과, 역사적 차원으로서의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양면이 충분히 소화가 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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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통해서 세상을 알고 인생을 안다, 불법을 깨닫는다는 표현도 가능한데, 그것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불교를 믿는다, 불교를 안다, 도를 통했다, 견성을 했다, 성불을 했다 라고 했을 때 그러한 내용을 무엇으로 증명하고 어떻게 표현되는가 하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여러분들은 불교신자인데 가정에서나 사회 생활에 있어서 불자로서의 행동과 삶이 어떻게 표현되어져야 하는가를 별로 고민하지 않고 편하게 산다.
그래도 간혹 한 번씩은 ‘내가 불교를 믿는 사람인데,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인데, 절밥을 먹은 것만 해도 여러 수십 그릇을 먹은 사람인데’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다.
(2) 십육 왕자의 찬탄
그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에 십육명의 왕자가 있었느니라.
맏아들의 이름이 지적이었으며, 여러 아들들이 각각 여러 가지 진기한 놀이기구를 가지고 있었느니라. 아버지가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진기한 놀이기구를 버리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데 그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전송하였느니라.
그들의 조부 전륜성왕이 일백 대신과 백 천 만 억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도량에 이르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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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지승불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성불을 하시고 그 아들인 십육왕자가 찬탄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델로 이야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앞에서 일월등명 부처님이나 여기 대통지승불이나 그 외에 경전에 등장하는 많고 많은 부처님이 나오는데 그 모든 부처님의 모델이 누군고 하니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조금씩 변형시켜가면서 대통지승불이다 아미타여래다 아촉여래다 무슨 부처다 무슨 부처다 수십만 수백만 부처님을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경전 성립사적인 깊은 이야기는 다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고, 여기는 조부 전륜성왕이 일백대신과 백천만억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자기 아들이 성불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오는 이야기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버지도 왜 안그렇겠는가.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었든 없었든 그 마음은 똑같았을 것이다
...모두 다 대통지승 여래를 가까이 모시고 공양 공경하며 존중 찬탄하였느니라. 그 곳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숙여 발 아래에 예배하고 부처님을 여러 번 돌고는 일심으로 합장하여 세존을 우러러 바라보며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그 게송은 당신 아들이 출가해서 수도를 해서 성불했다 라고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법문하기 전에 찬불가를 노래 부르듯이 아버지도 자식들도 모두 이렇게 몰려와서 노래를 부른다. 불교의 의식이 전부 경전에 근거한 것이다.
(2) 십육 왕자의 찬탄
6 큰 위덕을 갖추신 세존께서 중생들을 제도하시려고
한량없는 억만 년을 지내고 이제 비로소 성불하셨습니다.
온갖 소워을 이미 구족하시어 참으로 훌륭하시고
더없이 길상하십니다.
세존께서 매우 희유하여 한번 자리에 앉아
십 소겁 동안을 지내시었습니다.
몸과 손과 발을 고요히 하여 움직이지 않으시며
마음도 항상 담박하여서 조금도 산란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죽 찬탄하고 밑에 내려가면 16왕자가 법을 청한다.
앞에는 아버지 되는 부왕이 게송으로 찬탄한 것이고 밑에는 16왕자가 법을 청하는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16왕자가 법을 청하다.
이 때 십육 왕자는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나서 세존께 법륜을 굴리시기를 청하면서 다 같이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세존께서 설하시는 법문은 매우 편안합니다. 모든 천신들과 사람들을 어여삐 여기시어 이롭게 하여주십시오.’ 라고 하였느니라.
그리고 다시 게송으로 말하였느니라.
‘세상의 영웅이시며 짝할 사람 없으시어
이렇게 부처님을 찬탄한다.
앞서 제가 불교를 믿고 불교를 공부했을 때 그 영향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져야 하고 어떻게 비춰져야하는가를 문제 삼았는데 밑에 내용이 그에 대한 이야기다.
시방의 범천왕이 법을 청하다.
한 분이 부처가 되고 나면 첫째 가장 가까운 아버지 그리고 자식들로 부터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 성인을 위하고 그 성인의 깨달음을 만국민에게 널리펴서 모든 국민들을 길상스럽고 복되게 하려고 하려고 한다.
그래서 시방의 범천왕들이 모두 법을 청하다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범천왕을 요즘으로 치면 구청장이나 시장이나 하는 사람들로도 표현할 수 있다.
부처님의 광명이 비치다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통지승불께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 시방으로 각각 오백만 억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느니라.
이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대통지승불이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 6가지로 진동을 하였느니라.
안이비설신의 우리 몸도 마음도 감동을 하는 것이다.
한 두 번 감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화엄경에서는 6종 18상으로 진동하였다.
삼육 십팔해서 십팔계를 뜻하는 것이다.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과 안계 내지 무의식계까지도 모두가 부처님 깨달음에 크게 감동하였다.
그것을 6가지로 진동하였다.
진동하는 것이 경전에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요즘 표현으로 하면 지진이 1000도나 2000도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 진도 9만 해도 큰일이 난다.그런데 경전에는 진도 1000, 2000정도가 일어났다고 하는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육종진동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귀로 들으나 코로 냄새를 맡으나 무엇을 하든 간에 그 감동은 우리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큰 감동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철야동안 신묘장구대다라니만 열심히 기도하고 나도 각자 느끼는 감동은 말할 수가 없다.
그 다음 중요한 내용이 나와서 제가 별을 세 개 달았다.
★★★
그 세계의 중간에 해와 달의 빛이 비치지 않던 캄캄한 곳이 모두 밝아져서 그 곳에 있던 중생들이 서로 보게 되어 모두 이렇게 말하였느니라.
해와 달이 비추지 않던 캄캄한 곳이 모두 밝아졌다.
우리가 불교를 만나기 이 전, 불교의 진정한 의미를 공부하기 이 전에는 무턱대고 살면 사는 줄 알았다. 그때는 희망도 꿈도 없는 그야말로 캄캄한 곳이었다. 그 캄캄한 곳이 불교를 믿는 마음으로부터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 중요한 말이 나온다.
★★★
‘이곳에 어찌하여 홀연히 중생들이 생겼는가.’하였느니라. 또 그 세계의 하늘 궁전과 범천의 궁전에 이르기까지 여섯 가지로 진동하며 큰 광명이 두루 비치어 세계에 가득하니 다른 여러 천상의 광명보다도 더 훌륭하였느니라.
이곳에 어찌 하여홀연히 중생이 있는가,
제가 법화경을 읽다가 이 대목을 읽고 ‘아 그렇지 불법은 바로 옆사람을 볼 줄 아는 것이 불교다’라고 별표를 쳐놓았다. 불교를 깨달았다고 하고 불교를 알고 믿고 불교를 한다고 하는 것이 결국은 어떻게 표현되어져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곳에 어찌하여 홀연히 중생이 생겼는가’
중생들은 이곳에 본래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나만 생각하고 살았다.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불법을 제대로 믿음으로 해서 비로소 남을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남을 배려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다.
*
불법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은 이웃에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 억울하게 사는 사람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불법을 공부하면서부터 비로소 그런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근래 불교 매스컴을 보면 아프리카나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의 생활이 나온다. 특히 어린이들이 못먹고 온갖 질병에 허덕이는 모습들을 방영하면서 도와주자고 하는 광고가 많다.
저는 옛날에 그런 것을 다 보고 살았고, 이웃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그 때는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사는 것인데’ 하면서 그 사람들은 병이 들었든 굶든 이렇든 저렇든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광고만 봐도 마음이 흔들리고 아프다.
작은 경험이지만 붉교를 이해한다고 하는 것,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안목이 생긴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성도는 빛으로써 표현되는데, 빛은 안목이다.부처님이 성도를 하고 나자 세상과 인간을 살펴볼 줄 아는 안목이 생겼다는 것이다. 눈이 생겼다. 그래서 빛이 비쳤다. 그 빛을 통해서 옆에 사람이 있는 것을 비로소 보게 되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인가.
그동안 옆에 사람이 있어도 못봤다는 것이다.
*
이 이야기를 가까이 끌어다가 이야기 하기로 한다면 법회할 때, 기도할 때 먼저와서 자리 맡아놓고 싸우지 말자는 말이다. 사람을 배려할 줄 마음.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그 눈을 갖자는 것이다.
불교 공부해서 뭐하자는 것인가. 다른 사람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성도하셨는데 ‘태양보다도 몇 배 더 밝은 빛이 비췄다’ 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태양이 아무리 밝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태양은 태양만치만 비추면 그 뿐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마치 천개의 태양이 동시에 비추는 것과 같다고 하지만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비추면 지구가 다 타버리지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열리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얼마나 우리 중생의 마음이 어둡고 캄캄했던가.
어둡고 캄캄한 그 마음이 열리는 것이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비추는 것과 같다, 라고 까지 부처님은 표현하고 있다.
이 구절을 내가 읽고는 ‘그래 불교는 바로 이거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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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라고 하는 믿음을 가슴속에 조금씩 키워가면서 그 믿음을 통해서 나와 옆에 사람 이웃 또 다른 사람을 그렇게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
처음에 대통지승불의 존재를 말하면서 궁극적 차원을 이야기 했다.모든 사람들의 궁극적 차원은 본래로 부처다.
그렇다면 본래로 부처인 중생이 내 옆에서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이해하면서 살자는 것이다. 그것을 석가모니가 대통지승불을 등장시켜서 또 이렇게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깨달으신 분의 지혜는 참으로 깊고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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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믿음이다.
‘법화경에 이러한 내용이 있구나’ 하는 신심을 내서 그것을 통해 꿈이 생기고 희망이 생기고 나의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어제 봉은사에 와서 어떤 신도님이 와서 인사를 하면서 “법화경을 40번을 썼습니다” 라고 하였다. 법화경을 40번을 쓴 신도님들이 이 가운데 있다. 무슨 힘으로 그렇게 썼겠는가. 신심 하나로 그렇게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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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차원으로 우리가 법화경을 이해하기로 하면 법화경은 공덕이 많다고 한다.내가 법화경을 이야기 할 때 간혹 드리는 말씀인데 부산의 어느 신도님이 미국에 사는 딸이 아이를 가져서 돌봐주기 위해 갔다.
마침 병이 나서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병원에 갔는데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법화경을 책상에 두고 사경을 하더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라고 하면서 왜 법화경을 읽느냐’고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나는 기독교를 믿지만 법화경이 그렇게 영험이 있대요.’하면서 법화경을 쓰면 부자가 되고 뭐도 좋아지고 뭐도 좋아지고 하면서 설명을 하더라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법화경을 더 믿는 것이다.
부산의 그 불자는 당신 아들이 스님이고 절도 가지고 있고 법화경 강의에도 와서 공부하던 사람이다.
기독교인도, 영험이 있다고 하면서 법화경을 놓고 사경을 하더라는 이야기가 하도 신기해서 돌아오자 마자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런 이야기는 부처님도 모르는 이야기고 우리 불자들도 모르는 세계다.
우리가 이러한 시간을 통해서 이 속에 담겨있는 뜻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백 분의 일 천분의 일이나 이해하겠는가.
그저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읽고 쓰고 해서 이 법사가 미처 발견해내지 못한 아주 깊고 오묘한 이치를 스스로가 공부해가는 것이다. 읽고 쓰고 하면서 거기에서 스스로 발견해 낸다면 정말 상상도 못한 큰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또 어떤 목사는 법화경을 강의하고 책을 낸 목사도 있다.
저도 그 책을 사다가 보기도 하였다.
그 목사는 워낙 훌륭한 목사라서 법화경만 강의한 책을 낸 것이 아니고 원각경도 책이 나온 것이 있고 심지어 화엄경까지 강연하고 책을 냈다.
우리 불자들은 정신 차려야 된다.
이러다가 불교의 법화경이니 화엄경이니 좋은 것은 전부 이웃 종교에서 가져가서 영험을 더 많이볼 판인 것이다.
제가 법화경을 좋아하고 하다 보니까 이런 상황들도 알게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 신도님들에게 알려드리는 것이다.
오늘 대통지승불 이야기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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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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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묘법연화경=\\\=감사
....그를 통해 어떤 감동을 받고 어떤 깨달음을 얻느냐는 것이 중요하다..._()()()_
또 다른 매력으로... 언제부터가 은근히 기다려지는 이 시간, 도반이어서 좋고...^^
불자임을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가,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그 눈을 갖자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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