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무능력이 우리를 구원한다
연중 제27주일
- Don Marco Cannavò 마르코 칸나보 신부(이탈리아 밀라노 대교구)
2026년 9월 30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피앗(Fiat)!
포도 재배 농부와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포도밭을 가꾸는 일이 얼마나 많은 보살핌과 정성과 열정을 필요로 하는 농사일인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농부는 일 년 내내 일해야 합니다. 수확의 품질은 수많은 세심한 손길에 달려 있지만, 그 모든 정성을 기울인다 해도 결실이 결코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밭은 가장 ‘변덕스러운’ 작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때늦은 서리나 우박이 마지막 순간에 한 해 수확을 망쳐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포도밭의 이미지가 주님과 당신 백성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포도밭이 언급될 때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그 백성이 끊임없이 저지르는 불충실 사이의 대조가 강조됩니다.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구나.”(이사 5,2 참조)
주님께서 이 포도밭, 곧 우리에게 바라시는 열매는 분명 선행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눈에 더욱 소중한 열매는 ‘감사’의 행위로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오직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가 행하는 선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무엇보다 먼저 흠숭과 감사, 곧 주님께 감사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참조)
신약성경에서는 오늘의 복음 말씀 외에도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다”(요한 15,1 참조)라고 선포하실 때 포도밭의 이미지가 다시 등장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참포도나무이실까요? 본래 인류는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밭이었으나 그 보살핌에 부응하지 못했고, 불충실하였기에 참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참포도나무이십니다. 그분만이 온전히 충실하시며, 성부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는 오직 그분만을 향해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참포도나무이신 당신께 접붙여지지 않으면 아무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에만 우리는 충실한 포도밭이 되고, 열매를 맺으며,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당신 포도밭의 관계에 관한 구원 역사는 오늘 제1독서에서 묘사되는 우리의 불충실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여정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길을 잃었지만, 그분께서는 우리가 정처 없이 방황하던 광야로 찾아오셔서 유혹을 이겨 내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마침내 성부와 친교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이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충실과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지 못하는 처지, 그 모든 은총에 선한 삶으로 보답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함을 마주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맙시다. 우리에게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진실이며, 이는 도리어 우리를 주님의 자비로 이끌어 용서를 청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와 일치합시다. 유일하고 참된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결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거나 멀어지지 맙시다.
1924년 10월 30일, 예수님께서는 루이사에게 당신의 사랑 안으로 들어와 결코 그 사랑 밖으로 나가지 말며, 그 사랑을 따라 달리고, 당신의 사랑 안에 머물러 예수님께서 피조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피조물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피조물을 창조하시면서 언제나 그를 사랑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피조물의 안팎에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끊임없고 새로운 사랑의 행위로 피조물을 향해 달려가고자 하셨습니다. 피조물의 모든 생각, 시선, 말, 숨결, 심장 박동과 그 밖의 모든 것 안에는 영원한 사랑의 행위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모든 것 안에서 이 피조물을 사랑하고자 하셨던 까닭은, 피조물에게서도 그와 같은 끊임없고 새로운 사랑의 보답을 모든 것 안에서 돌려받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주어 사랑을 얻고자 하셨고, 사랑받기 위하여 먼저 사랑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피조물은 사랑의 리듬을 지키지도, 창조주 사랑의 메아리에 응답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사랑을 거부하고 배척하며 모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욕 앞에서도 하느님의 신성은 멈추지 않으시고 피조물을 향해 새롭고 끊임없는 사랑을 계속해서 부어 주셨습니다. 피조물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에, 하늘과 땅은 그 사랑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보답해 줄 영혼을 기다리며 온통 그 사랑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한번 뜻을 세우시고 결심하시면, 어떤 거스름과 역경도 그 뜻을 바꾸지 못하며 당신의 불변성 안에서 온전히 영원히 머무르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사랑의 또 다른 극치로서, 성부의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Humanity)을 취하시어,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푸셨고 또 베풀고자 하셨던 그 모든 사랑에 온전히 보답해 드리고자 하늘과 땅을 채우고 있던 사랑을 당신 안에 고스란히 모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의 생각, 눈길, 말, 심장 박동, 움직임과 발걸음 하나하나의 사랑 그 자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아주 작은 지체 하나에 이르기까지 천상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의 손길로 빚어졌으니, 이는 하느님께서 피조물에게 베풀고자 하셨던 모든 사랑을 온전히 품어 안으시어 하느님께 모든 피조물의 사랑을 되돌려 드리고, 피조물의 모든 행위 안에서 사랑 자체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 하나하나는 예수님의 끊임없는 사랑의 행위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우리 안팎의 그 어느 것도 그분의 거듭되는 사랑의 손길로 감싸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은 깊이 신음하고, 숨을 헐떡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이 거대한 사랑의 무게에 짓눌려 아파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으로 사랑하시건만, 그에 걸맞은 사랑을 돌려받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고통은 가장 쓰라리고 잔혹합니다. 어떠한 에누리도 없는 가차 없는 고통이며, 예수님께서 겪으신 십자가 수난보다도 더 아픈 고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토록 무거운 사랑의 무게는 가벼워질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응답받을 때, 그 사랑은 사랑하는 이의 사랑 안에서 갈증을 풀고 온전한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받지 못할 때 사랑은 넋을 잃고 애가 타며, 자신이 아낌없이 내어 준 사랑이 오히려 죽음의 상처로 되돌아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수난’은 얼마나 더 쓰라리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십자가 수난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단 한 번의 죽음을 안겨 드렸을 뿐이지만, 사랑의 수난에서는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온 사랑의 행위 하나하나, 곧 보답받지 못한 각각의 사랑의 행위만큼이나 수많은 죽음을 겪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많은 사랑에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뜻(Fiat) 안에서 우리는 이 모든 사랑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며 작용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아 예수님과 함께 모든 피조물의 행위 안에서 사랑이 됨으로써, 모든 피조물의 사랑을 온전히 그분께 되돌려 드리도록 합시다.
첫댓글 피앗! 아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