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이 격하게 자리다툼을 하고 있어서인지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특히나 올해는 예년보다 낮은 기온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맘때가 이런 날이라면 한겨울의 날씨는 안 봐도 뻔하다. 연병장에 서있는 세혁을 포함한 몇몇의 군인들에겐 정말로 다행인 일이었다. 태백의 겨울, 그 한기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추운 것이었고, 그 덕에 작년의 지옥 같았던 혹한기를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억하는 그들이었다. 더군다나 세혁의 경우엔 누구보다 심각한 케이스였다. 군 생활 내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양발 3도 동상의 경험. 하마터면 발가락을 절단해야하는 사태까지 올 뻔 했던 그 지옥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혹한기라는 단어는 세혁에게 화생방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되었다. 그런 혹한기로부터 잠시 뒤면 해방된다니, 세혁에겐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다. 지금 연병장에 쪼르륵 서있는 몇몇 군인들은 전역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역이라는 단어는 천국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물론 이제 그들 앞에는 경쟁만이 남게 될 ‘진짜 사회’라는 고통의 현실이 펼쳐지겠지만, 638일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달력만을 찢어먹겠다는 기세로 바라보며 이 날을 기다려온 그들이었다. 때문에 오늘의 의미 그리고 전역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 즉 민간인으로써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그들에겐 고통의 현실을 뛰어 넘을 힘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는 전역을 앞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날은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쓰레기로 느껴지던 눈이 또 오는데 그게 축복으로 느껴져서 더 기분이 좋았던 날이라고.
그리고 세혁에게 전역의 의미, 민간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그 누구보다도 컸다. 그 이유로는 김연정이 있었다. 존재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세 글자, 김연정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세혁에게는 그 어떠한 의미보다도 크게 다가왔다. 연정은 무려 638일 동안 세혁을 기다려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의미의 기다림으로만 볼 것이 아니었다. 연정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인이 군대에 있는 연인을 기다린 다는 것은, 그 연인은 동료들로부터 우상이 된다. 물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묘한 질투 탓에 난처해지는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를 쉽게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미묘한 법칙은 세혁의 군 생활에서도 아주 적나라하게 작용해왔던 것이다. 연정의 면회가 있는 날이면 후임들은 물론이거니와 몇몇의 선임들까지 동경어린 눈빛으로 세혁을 바라보곤 했으며, 혹여라도 떨어질지 모를 콩고물을 기대하며 세혁의 비위를 맞춰주기 일쑤였다.
어찌되었던 세혁에게는 여러모로 반가운 순간이 몇 분 뒤면 펼쳐질 예정이었다. 북한이나 제3국이 심각한 수준의 무력 도발을 벌여 전시상황이 벌어진다거나,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그 순간이 왔다. 대대장이 연병장의 단상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세혁은 급하게 베레모를 고쳐 썼다. 인상부터가 정말 악마 같던 대대장이었는데, 오늘따라 그 모습이 한없이 자애로워보였다. 부사관의 지시를 따라 좌우로 늘어선 군인들은 마지막으로 군기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한사람씩 일보 앞으로 나서 대대장에게 전역신고를 마쳤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세혁의 차례였다. 기쁘다는 마음보다도 이 순간이 꿈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세혁은 대대장의 앞으로 나섰다.
“충 성- 병장 임 세 혁 2013년 11월 20일 부로 전역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 고 합니다. 충 성-”
“그래, 다들 수고했다. 전역한 후에도 국가를 위해 열심히 살아라.”
짧게 인사를 마친 대대장, 그를 향해 오늘의 주인공들이 모두 경례를 하는 것으로 일정은 모두 끝났다. 세혁은 가벼운 마음으로 생활관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길게는 1년 반 짧게는 2개월 남짓 함께했던 생활관 식구들은 세혁에게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내왔다. 세혁은 그런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관물대속 물건들에 열중했다. 괜시리 그 시선에 응했다간 ‘전역빵’이라는 암묵적으로 합법화된 무시무시한 구타행위가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조용히 짐을 싸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직 군 생활을 남겨둔 후임에 대한 예의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던 연정의 사진도 조심스럽게 떼어내자 관물대는 세혁이 처음 군 생활을 시작했을 때 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음속이 한층 후련해졌다.
생활관을 나서기 전 소대에서 친분이 있던 후임들과 전역 후 술 약속도 잡고 가벼운 인사치레를 나누었다. 이젠 정말 이곳을 떠난다.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게 크다는 거짓말은 애초에 마음속부터 갖지 않는 게 좋았다. 떠나는 것이 서운하긴 했어도 분명 다시 돌아오고 싶지는 않은 곳이 바로 군대였다. 때문에 뒤는 깔끔해야 했다. 세혁은 미련 없고 깔끔하게 생활관을 떠났다.
부대정문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짐은 많았지만 그것의 무게조차 실감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세혁과 전역일이 같은 동료들의 발걸음도 그러했다. 그들은 한결같은 발걸음으로 부대의 정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나지막한 철망으로 만들어진 문이 드러났다. 발걸음은 한결 더 가벼워졌다. 이 문을 넘어선다면 그와 동시에 민간인이 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부대의 정문을 넘는 순간, 끝없는 해방감을 느낀 그들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들의 발걸음은 일제히 멈췄으며, 동시에 한곳으로 시선이 쏠렸다. 그곳에는 그들의 가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물론 다른 군인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세련된 트렌치코트 차림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긴 생머리를 흩날리는 여인이 서있었을 뿐이었다. 일제히 그녀 쪽으로 쏠린 시선 속에서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바로 세혁이었다. 그리고 이내 세혁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들려왔지만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세혁에게 중요한 것은 638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오로지 자신을 위해 기다려 준 연정이 품안에 있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제대로 연애한 시간보다 일명 곰신·군화 커플로 지낸 기간이 더 많은 세혁과 연정이었기에 서로에 대한 그리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렇기에 세혁은 품에 안긴 연정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나 이제 꽃신 되는 거야?”
연정이 내뱉은 한마디, 그 짧은 한마디의 울림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것은 이 순간 세혁에게 최고의 한마디였다. 머릿속으로 멋있게 준비하고 있었던 연정에 대한 전역신고와 사랑고백은 그녀의 짧은 한마디에 모두 지워져버렸다. 오로지 감정 속에 담아두고 있던 진짜 한마디, 사랑한단 말을 반복하는 것이 그 모든 말들을 대체하고 있었다.
연정의 입장에서도 다른 거창한 말은 필요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세혁이 반복하고 있는 이 사랑한단 말도 이미 필요하지 않은 말이었다. 그저 지금 자신이 안겨있는 임세혁의 품 그 따듯한 것 하나로 나머지 모든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연정의 모든 그리움은 이 강렬한 한방으로 해결되었다. 꿈만 같았다. 연정의 기다림은 옹호해주는 사람보다 힐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적어도 진심으로 그것을 옹호해준 것은 연정 자신과 혜원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정은 기다렸다. 단지 세혁을 사랑한다는 그 단순하고 모순투성이인 논리 하나로, 모든 것을 버텨왔다. 그리고 그런 시선들 속에서, 또한 수많은 유혹들 속에서 버텨온 자신에 대한 모든 보상을 이 순간 모두 받았다. 아니 앞으로 세혁과 함께할 모든 시간들이 그 보상일 것이었다. 무던히도 행복했고 또 행복했다.
“맞다 세혁아, 혹시 내일 모래 시간 돼?”
“나야 당연히 가능하지, 당분간 백수잖어... 금요일이네, 근데 내일 모래는 왜?”
“혜원이가 에로우 공연 꼭 보러 오랬거든, 너 잡아서... 헤-”
한혜원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Arrow의 정기공연 주기가 다가와 있었다. 왠지 뒤풀이에 끌려갈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엄습했지만 세혁은 어차피 관객의 입장이기에 공연을 빠질 이유가 없었다. 또한 연정이 함께한다는 전제하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오랜만에 Arrow식구들도 볼 겸, 금요일의 일정은 비워두기로 했다. 어찌되었든 오늘 하루는 연정과 단 둘이 보낼 시간이었다. 전역일은 당연히 가족들과 함께해야 한다지만 긴 시간 자신만을 기다려준 연정이었다. 결국 세혁은 약간의 불효를 저지르기로 마음먹었다.
###
이른 아침부터 혜원의 신신당부가 담긴 전화를 받았다. Arrow의 모든 멤버들이 13기 최고의 보컬인 임세혁의 전역을 기다리고 있다나 뭐라나. 여하튼 엄청난 부담감을 주는 내용이 가득한 전화였다. 아직 짬내가 풀풀 나건만 최고의 보컬은 또 뭐고, 기다리긴 개뿔. 얼굴도 모르는 14, 15기 아이들이 갓 전역한 예비군인 세혁을 보면 그 이미지를 어찌 생각하겠는가. 상상만 해도 이마가 지끈거리는 것이, 보나마나 그리 달가운 광경은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정도 공연을 보러 간다는 것이었으며, 세혁은 이미 그녀와 함께 가기로 약속이 끝난 상태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연정에게 누가 되지 않게 최대한 코디에 신경을 썼다. 물론 어떤 스타일로 코디를 해보아도 느껴지는 짬내를 어찌할 순 없었지만, 최대한 ‘민간인에 가까워지도록’ 코디를 맞췄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짬내의 발원지인 헤어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던 세혁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말 그대로 암울한 모습이었다. 무릇 패션의 완성은 헤어라고 했다. 덕분에 세혁은 그냥 군인이었다. 두상을 그대로 드러낸 헤어로는 어떻게 꾸며보아도 그 이미지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세혁은 헤어를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축 늘어지는 표정으로 스냅백을 집어 들었다.
복장은 민간인의 그것을 하고 있었지만 세혁의 몸은 그것에 따라주지 않았다. 아무리 군기가 빠졌다 하더라도, 제식이 몸에 밴 상태이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예전엔 편하게 입던 스타일임에도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깔깔이는 더할 나위 없고 군복보다도 불편하게 느껴질 지경이니 세혁의 몸은 이년 치 짬밥 먹은 티를 여실히도 내고 있었다. 물론 세혁 딴에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야 임세혁 흐잉 뭐 이렇게 멋있게 하고 나왔어... 누굴 꼬실라구...”
“누구긴 누구야 우리 여친님이지. 나 때문에 여신 여자친구까지 놀림 받으면 곤란하잖아?”
“으이구 바보야- 난 너만 있으면 되네요. 치...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해 능청스러워가지고. 우리 임세혁씨 군대 다녀오더니 아주 능구렁이가 다되셨네.”
연정은 세혁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포근한 느낌에 얼굴엔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세혁의 손이 머리를 쓸어내리자 미소 짓고 있던 얼굴이 붉어졌다. 평범한 애정행각이었지만 그마저도 설렜다. 결국 이런 날이 오기에 그녀가 참았던 그 긴 시간은 기다릴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연정은 살며시 세혁을 올려다보았다. 곱게 휜 곡선의 눈꺼풀 속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흡사 강아지의 그것과 같아보였다. 그리고 세혁을 모두 다 담아낼 기세로 오로지 세혁만을 비추고 있었다.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이렇게 예쁜 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봐주는 그녀가 옆에 있기에, 세혁은 자신감을 조금이나마 되찾을 수 있었다. 세혁은 연정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고마웠다. 함께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세혁은 연정에게 한없이 고맙기만 했다. 그리고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을 세혁은 머릿속으로 다짐했다.
연정과 세혁은 그동안 참아왔던 시간들을 보상하며 서로에 대한 애착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은 서한대학교 캠퍼스 소극장 앞에 도착했다. 금요일 오후임에도 캠퍼스엔 제법 사람이 많은 것이 시험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벌써 시험기간이라니, 세혁은 자신이 휴학생 신분이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어쨌든 공연준비가 한창인 공연장의 분위기는 제법 분주했다. 세혁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얼굴이 확연하게 많아졌다는 사실은, 세혁이 가진 이년여의 공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에로우 공연 보시러 오셨나요? 안으로 들어오세... 엇- 혹시 국통 11학번 김연정 선배님 아니세요? 우와 팬이에요-”
이건 뭔 난데없는 놈인가. 연정은 또 어찌 알고 있으며 팬이라니. 세혁은 갑작스레 등장한 연정의 팬(?)이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 과도하게 자신감 넘치는 녀석은 연정에게 꾸벅 인사를 하더니 갑작스레 연정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공연안내를 하고 있던 것과 손에 들린 정기공연 안내책자로 보아 Arrow의 신입생으로 추정되는 녀석은, 엄청난 패기로 한 여자의 남자친구를 가볍게 무시했다. 그것도 자신의 직속 선배인 세혁을 말이다. 게다가 연정은 별것 아니라는 듯 녀석의 손을 선뜻 잡아주는 것이 아닌가. 숨이 턱 막히는 상황이었다. 이 난데없는 상황에 세혁은 기가 차다는 듯 연정을 바라보았지만, 연정은 한쪽 어께를 으쓱하며 장난어린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이게 바로 질투유발이라는 것인지. 그렇다면 세혁의 표정으로 보아 연정의 계획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아잉 임세혁 표정 풀어-”
“뭐가.”
“아잉 왜 그러냐? 그러지 망”
“여어 군바리 왔냐?”
질투를 마음껏 표현하지도 못했는데 새로운 목소리가 모든 것을 끊어버렸다. 세혁은 잔뜩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목소리의 주인공을 맞았다. 세혁의 아니꼬운 표정이 향한 쪽에서는 혜원이 능글능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 대한 눈치는 있었는지 혜원은 연정의 팬임을 자처한 녀석에게 세혁을 소개했다. Arrow 선배에, 연정의 남자친구라는. 상당히 짤막한 프로필이었음에도 녀석은 바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짧은 숨을 들이키더니, 세혁에게 꾸벅 인사를 하곤 냅다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리고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보던 세혁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연정에게서 지금 상황에 대한 해명을 들었고,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연정이 몇몇 학생들의 추천으로 학교의 홍보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은 오히려 세혁에게 꽤나 엄청난 자부심을 안겨주는 격이었으니 말이다.
세혁은 어쨌든 공연책자를 찬찬히 살폈다. 모르는 후배들의 이름이 세션구성의 대부분인 것으로 보아 그동안의 공백이 느껴졌다. 원곡 가수들로 보아 연주의 분위기는 대체로 예전의 것을 유지하는 듯 했지만 그마저도 못 보던 신곡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튼 Arrow의 공연이었다. 그 사실만으로 일단 세혁의 기대감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14, 15기 후배들과 현직 부회장 한혜원을 대표로한 몇 안남은 13기 멤버들이 보여줄 공연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 채 책자를 덮었다. 그러나 세혁은 이내 책자를 다시 펼쳐야했다.
“야 한혜원 잠깐만 이번에 차운 선배 공연해? 8기시잖아... 이형 졸업 안했어?”
“아... 그런 게 있어 비밀이얌!”
“어... 이거...”
연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몰라’를 연발하며 저 멀리 달아나는 혜원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혁은 무언가 깨닫는 게 있었다. 마지막 무대, Special Stage라는 문구가 박혀있는 그 무대에 세션을 살핀 세혁은 아찔해졌다. 기타 김차운. 드럼 한혜원. 2년 전에 세혁과 함께하던 세션들이 선다는 것의 의미를. 그 무대의 보컬과 곡명이 공란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누구보다 적나라하게 깨우쳤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물론 섣부른 짐작일 수도 있겠지만 그 무대의 보컬이 정말 세혁이라는 우려가 사실이라면 그것만은 좌시할 수 없었다. 제대한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짬내가 풀풀 나는 세혁이 연습도 미처 하지 못하고 무대에 선다는 것은 곧 개망신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했던 혜원과의 통화. 꼭 오라는, 기다린다는 것이 정녕 이 마지막 무대를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세혁의 머릿속을 가득히 메웠다.
여섯시에 시작된 공연은 한 시간 넘는 시간동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세혁의 눈에 공연이 들어올 리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초조해지기만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옆에 있는 연정을 두고 불안한 기색을 마음껏 표현할 수도 없는 노릇, 한혜원에 대한 원망의 눈길을 보내는 것 외에는 세혁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시간이 늦게 가길 바랐지만 원래 시간은 인간의 의지와는 반대로 흐르는 법이었다. 두 시간 반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이 흐르는 데에 필요한 것은 순식간이라는 단어뿐이었다. 마침내 공연은 마지막, Special Stage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공연장은 잠시 암전상태로 변했고 그 순간 세혁의 마음 또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잠시 뒤, 핀 조명 하나가 무대 위를 환하게 비췄고, 그 자리엔 이번 공연의 사회를 맡았으며 Arrow의 현직 부회장이자, 세혁에게 착잡한 상황을 안겨준 장본인인 혜원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김차운이 일렉기타를 튕기며 사운드를 맞추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들어온 그 모습에 세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러분 공연 재밌죠?”
‘하나도 재미없다 이 빌어먹을 마귀할멈아’
“이제 마지막 공연만이 남아있는데요... 이 공연하기에 앞서, 여러분들 추우시죠? 그래서 아주 따듯한 사연을 하나 소개해드릴까 하는데요.”
‘이건 뭔 개소리다냐.’
“저희 에로우의 보컬중 하나가 아주 닭살 돋는 연애를 하고 있어요. 갓전역해서 여자친구 꽃신 신겨준 거 보면 여자로써 질투도 나고 부럽기도 한데, 그 친구커플이 내일 모래면 800일이래요. 이쯤 하면 우리 식구님들은 대충 짐작들 하셨으려나, 헤헤 암튼, 그 친구의 여자친구가 2011년 하계 축제 때 저희 에로우의 공연을 보고 그 친구한테 반했대요. 그래서 제가 부회장으로써 그 친구의 허락 없이 연애를 응원하는 공연을 준비했는데요. 이점 먼저 사과하고요, 임세혁씨. 히히히히... 미안해 친구야- 그 친구가 불렀던 곡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그 친구의 여친 김연정양과 여러분들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어때요 여러분? 들어보고 싶죠?”
“와아아아악-”
남의 애정 넘치는 연애사는 그 자체로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연애사의 주인공이 서한대 여신 김연정이라는 사실이 더욱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석 여기저기에서 들려온 엄청난 환호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은 응원의 환호성이자 부러움의 탄식이기도 했으나 진심 아닌 힐난의 의미도 간간히 섞여있었다. 그러나 정작 세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혜원의 입에서 나온 800일이라는 그 단어에서 모든 소리의 재생이 멈춰버렸다. 의미 있는 여자친구와의 기념일, 제대의 기쁨이라는 그럴싸한 핑계 속에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기념일을 뜻밖에도 자신의 친구 한혜원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 세혁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충격은 세혁으로 하여금 무대 위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끔 만들었다. 게다가 혜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흘러나온 전주. 강력한 일렉기타의 인트로로 시작되는 그 곡의 정체는 세혁에게 무대로 달려 나갈 수 있는 탄력을 만들었다. 부활의 리플리히. 진한 사랑의 고백을 노래하는 곡이었다. 세혁이 무대의 중앙에 서고, 두 바퀴 째 반복 중이던 전주가 일순간 끊어졌다. 그리고 무대는 다시 암전을 맞았다.
이년 만에 돌아온 어색한 무대, 그 위에는 자신과 함께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어색함 가득한 그 자리의 앞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온전히 그녀를 위해 절친이 만들어준 이 무대를 세혁은 망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았고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공연시작을 알리는 혜원의 스틱소리, 다시 한 번 전주가 흘러나왔고, 세혁은 짧은 시간동안 예전의 기억과 감각을 되살렸다. 그리고 세혁이 눈을 떴을 때, 공연장의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핀조명의 환한 빛은 온전히 무대의 세혁과 객석의 연정만을 비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