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2. 화요일: 치앙마이에서 제일 비싼 것
나는 야시장에서 올빼미를 형상화한 작은 물건을 여러 개 샀다. 엄지손톱보다 약간 큰데, 줄만 달면 목걸이로 쓸 수 있게 되어있다. 올빼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코끼리, 용 등 온갖 동물들이 다양하게 있었지만, 나는 올빼미만 고집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한 개에 (깎아서) 15바트(600원)에 샀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한 개에 20바트에 샀다. 불상도 샀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 작은 것이다. 그 중 비교적 큰 한 개는 상아재질인 듯 보인다. 그러나 물론 그렇지 않다. 199바트. 이것은 정찰제였다. 더 작은 쪽은, 내가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돈을 지불하고 산 물건이다. 그 물건의 바닥에는 지금도 2900이라는 숫자가 적힌 흰 딱지가 붙어있다. 그것은 1500바트(6만원)에 샀는데,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파는 사람도 만족한 가격이었다.
도이 수텝의 산중턱에 있는 유명한 사원에는 진짜 불상이 수십좌 모셔져 있었다. 대개 등신불 크기였다. 하나 같이 아름다웠지만, 특별히 눈에 띤 것은 에메랄드로 만든 녹색의 불상이었다. 그런 불상이 두 좌 있었다. 나는 호기심으로 가득찬 한 명의 관광객이 되어, 크나큰 금빛 불탑과 더불어, 그들 불상들을 둘러보았다. 어떤 것은 걸음도 멈추지 않은 채 건성으로 보고 에메랄드 불상처럼 처음 보는 것은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간혹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어느 사원에서는 크나큰 입상을 보고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상의 크기나 재질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겠는가?
그 사람 싯다르타는 그렇게 앉아서 무엇을 하였던가? 물론 생각을 하였다.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혹은 그가 그렇게 앉아 생각을 하여 알아낸 것은 무엇인가? 내가 들고 온 세 권의 서적에 의하면, 싯다르타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알아낸 것은 “연기(緣起)”라고 한다. “사성제(四聖諦)”는 그것을 조금 자세하게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성제 중의 고(苦)제는, 노병사(老病死)만이 아니라 사는 것 자체가 고라는 가르침이다(一切皆苦). 한편, 연기의 가르침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원인에 의하여 일어났으며 그 원인이 사라지면 더불어 사라진다는 가르침이다(諸行無常). (이 두 가르침은, 하나의 아이디어가 두 영역에 적용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는 것 자체가 고이지만, 다행히 고도 연기법의 적용을 받는다. 즉 고에도 원인이 있으므로 우리가 그 원인만 제거하면 고로부터 풀려날 수 있다. 제자들은 “세존께서 고도 연생(緣生)이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 원인은 욕망이라고도 말하고, 무명(無明)이라고도 말한다. 그 원인은 자아, 자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諸法無我). 그렇다면 그 자기라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고로부터 풀려나는 방법이 될 것이므로, 고로부터 풀려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방법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부처는 그 방법에 관하여 특이한 대답을 내어놓는다. 아니, 특이한 성격의 대답을 내어놓는다. 그 대답은 순환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까?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고 할까? 지루하게 불교학 개론을 강의하는 대신에, 이러한 한 가지 특별한 성격만 말해 보겠다. 나는 치앙마이의 여러 사원을 산책하는 중에 이 한 가지 성격을 발견하고 기뻐하였다.
사성제의 이야기 안에 사성제 자신이 또 들어있는 것 같다. (연기법의 이야기 안에 연기법 자신이 또 들어있는 것 같다.) 영화나 소설 중에도 그런 형식을 취하는 것이 많이 있다. 예컨대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는 한 형제의 이야기인데, 그 중 형이 극중에서 소설을 쓴다. 그런데, 그 소설의 제목이 바로 “흐르는 강물처럼”이며, 그 내용이 바로 영화의 내용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작은 아씨들”도 그렇게 되어있다. 극중에서 둘째인 조(Jo)가 소설을 쓰는데, 그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위에서 약간 말한 대로, 그리고 잘 알려져 있는 대로, 사성제는 고집멸도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사는 것 자체가 고라는 것이며, 고에는 원인(집)이 있다는 것이며, 그 원인을 제거하는 길(도)이 있다는 것이며, 그 길을 따라가면 도달하게 되는 이상적인 경지, 즉 열반(멸)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특별히 그 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 길은 과연 무엇인가? 위에서는 ‘방법’이라고 부른 바 있지만, 그 길은 과연 무엇인가?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 길은 물론 팔정도(八正道)이다. 나중에 그것은 육바라밀(六波羅密)로 정식화되기도 한다. 그 여덟 가지 길, 혹은 여섯 가지 방법이 모두 중요하겠지만, 거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성제(혹은 연기법)를 이해하는 것이 고의 원인을 제거하는 길, 즉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사성제의 이야기에 의하면, 사성제를 이해하는 것이 길인 것이다. 이런 이상한 성격을 가리켜 위에서 순환론이니 뫼비우스의 띠니 하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사성제가 이러한 순환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성제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성제 자체가 열반에 이르는 길이므로, 사성제는, 일단 열반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려준 후 소임을 다했다는 듯이 물러나는, 임시적인 것이 아니다. 싯다르타는 서른 다섯에 사성제(연기법)를 깨달았지만, 그 이후 여든이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하여 사성제에 관하여 사색하였다.
모르긴 몰라도 사성제의 순환론적 성격은 고, 집, 멸, 도 각각의 의미하고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당장 고제, 즉 노병사만이 아니라 생이 그대로 고라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하고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러한 고제, 사성제의 하나인 고제를 이해하는 것, 혹은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단순히 이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의미까지 지닌다는 점이다. ‘실제적 의미’라는 말은 고를 벗어나고 열반에 이르는 길을 걷는 ‘수행의 의미’를 가리킨다. 거꾸로 말하면, 자기가 고제를 이해하였다고 주장하려면, 그 사람은 그 가르침을 단지 머리로 따져서 알아듣고 동의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되며, 그 가르침대로 일상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치앙마이 사람들은 아침마다 길거리로 나가 탁발 승려들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시간만 나면 사원을 찾아 부처님에게 절하고 그의 대리인들에게서 축복을 받는다. 그 행위 중 대다수는 기복적인 것일 것이다. 승려들은 시침 뚝 떼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듯한 말을 한다. 그러나 치앙마이에, 자신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이러저리 몰려다니는 관광객과 복을 받으려고 줄을 서서 머리를 조아리는 중생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왓 프라싱 ― 치앙마이에서 가장 큰 사원 ― 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6시가 다 되어있었다. 마침 그 때가 저녁 예불 시간이었는지, 본당은 승려들로 가득차 있었으며 그 안에서는 낭랑한 독경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때 독송된 경전은 반야심경이 아닌가 한다고 일행에게 말하였다. 아무려면 어떤가? 반야심경이건 무엇이건, 모든 경(經)과 논(論), 소(疏)는 사성제에 대한 후대의 해석이 아닌가?
첫댓글 사성제 (고.집.멸.도)..순환론적. 이것이 치앙마이에서 제일 비싼 것?
인생은 苦!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때론 인생 뭐 있어 못 먹어도 고!!! 이 말에도 매우 동의한다 ㅎㅎ
못먹는데 고 하면 바가지 쓰는데 왜 고를 해 ? 참 아버님 기분 좋게 해드리려면 가끔 무작정 고 해서 바가지 써야겠구만 ! 그게 효도지 ㅎㅎ
역시 태국은 불교의 나라야 자존심의 나라고
흐흐 못먹어도 고? 태국이 자존심의 나라이기도 하구나. 나는 태국과 동남아에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어.
경멸했던 流의 여행에서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커다란 수확을 하셨구려.
人生은 苦?
하지만 이런 故,孤,考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구만, 고라는 게 하나가 아니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