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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saṅkappavitakkā
이 글은 '생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이하 {네이버} 등의 자료이고, 빠알리 원문은 대부분 6차 결집{World Tipitaka}이다.
먼저 우리말 '생각'은
①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 - 올바른 생각.
② 어떤 사람이나 일 따위에 대한 기억. - 고향 생각이 난다.
③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관심을 가짐. 또는 그런 일.
- 우리 수영장 갈 건데 너도 생각이 있으면 같이 가자.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생각'을 이상과 같이 정의한다.
대략 ① 論理(量), ② 記憶, ③ 意向(意圖)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
② 記憶에 대해서는
사물이나 사상(事象)에 대한 정보를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하는 정신 기능.
ⓐ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入 ⓑ 저장하고: 藏 ⓒ 인출: 出로 정리할 수 있다.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so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 pe ...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 (SN 48.10)
catūsu satipaṭṭhānesu — ettha satindriyaṃ daṭṭhabbaṃ. (SN 48.8)}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랜 전에 말한 것도 기억하고 열거(나열하는 기억)하는 것을 記憶力이라고 하며
이러한 기억의 기능은 '4念處(4處-念)'에서 보아야 한다고 나타난다.
{cattāro satipaṭṭhānā samādhinimittā (MN 44)}
빠알리 sati는 入-藏-出하는 기억(念, upaṭṭhitā)이라는 의미로만 쓰이지 다른 의미는 없다.
處는 우리말로는 시공간 혹은 지위, 신분이라는 의미이지만
paṭṭhānā는 딛고 설 자리, 대상, 수행주제라는 의미이지만 확립(待期, upaṭṭhitā)의 의미는 아니다.
그래서 cattāro satipaṭṭhānā는 ① 기억에 의해서 (집중의) 대상으로 삼을 네 가지 토대들(4念-處).
②. 대상으로 삼을 네 가지 토대들에 대한 기억(집중; 4處-念).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cattāro satipaṭṭhānā samādhinimittā}에서는
기억의 대상인 身-受-心-法이라는 네 가지 수행대상들이 삼매의 표상일 수는 없기 때문에
대상들에 대해 기억이 (확립되어 있을 때의 心 전체적인 상태가) 三昧相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이처럼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지만 마음은 삼매에 들지 못하고
오염원들은 제거되지 않는다. 그는 그 표상을 취하지 못한다<*nimittaṃ na uggaṇhāti>. …
Sa kho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bhikkhu
lābhī ceva hoti diṭṭheva dhamme sukhavihārānaṃ, lābhī hoti satisampajaññassa.
Taṃ kissa hetu?
Tathā hi so, bhikkhave, paṇḍito byatto kusalo bhikkhu sakassa cittassa nimittaṃ uggaṇhātī’’ti. (SN 47.8)
비구들이여, 이렇게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비구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묾을 얻고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얻는다. 무슨 이유인가?
비구들이여, 그 현명하고 슬기롭고 능숙한 비구는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의 표상을 취하기<*sakassa cittassa nimittaṃ ug-gaṇhāti> 때문이다.
… ‘eko paviveke anabhiramanto cittassa nimittaṃ gahessa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 (AN 6.68)
… 혼자서 한거하는 것을 즐기지 못하면서
마음의 표상을 취하리라<*cittassa nimittaṃ gahessati>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마음의 표상을 취하지 못하면서
바른 견해<*sammādiṭṭhi>를 원만하게 갖추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바른 견해를 원만하게 갖추지 못하면서
바른 삼매<*sammāsamādhi>를 원만하게 갖추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바른 삼매를 원만하게 갖추지 못하면서 족쇄들을 제거하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족쇄들을 제거하지 못하면서 열반을 실현하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공통되는 ② 記憶은 언어적 기억인 '생각'과
표상(nimitta 이미지, 相)과 같은 비언어적 기억도 포괄하는 念으로 범주의 차이가 있다.
표상(nimitta)이란 心 상태나 대상을 전체적으로 反映하는 前兆나, sign이나 image 형태의 정보이다.
{pubbe kho, gahapati,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yā vuṭṭhahantassa, gahapati, bhikkhuno
cittasaṅkhāro paṭhamaṃ uppajjati, tato kāyasaṅkhāro, tato vacīsaṅkhāro”ti. (SN 41.6)
장자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뒤에 말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말의 작용입니다. …
장자여, 비구가 상수멸에서 출정할 때 먼저 마음의 작용들이 일어나고
그 다음이 몸의 작용들이고 그 다음이 말의 작용들입니다.
takko vitakko saṅkappo appanā byappanā cetaso abhiniropanā vacīsaṅkhāro (MN 20)
사색, 생각, 사유, 전념, [마음의] 고정, 마음의 지향, 말의 작용[口行]}
vitakko는 takko, saṅkappo 등과 같은 유의어로 나타나고 口行(vacī-saṅkhāro)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의미는 '생각'과 거의 유사하지만 ① 論理(量), ② 記憶, ③ 意向(意圖)에서
takko는 ① 論理(量)에 가깝고 saṅkappo는 ③ 意向(意圖)에 가깝지만 기본적으로는
직접(sayaṃ) 경험한 自證이든, 스스로 고안한 이론에 의한 ② 記憶이든,
붇다나 그 직계제자로부터 배우든, 외도로부터 배운 것인 他聞의 ② 記憶이든
이러한 기억된 정보에 의한 '생각'이라는 측면에서 모두 동일하다.
불제자는 먼저 붇다나 그 직계제자로부터 배우거나 經에 나오는 他聞의 ② 記憶에 따라
그 순서대로 그 방법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呼吸念 수행은 탁발을 하고서, 수행에 적합한 장소에 가서,
대면할 것에 대한 기억을 확립하고서, 즉 16단계 혹은 32단계를 잊지 않는 기억을 확립한다.
그 기억된 상태에서 그렇게 수행하다가 스스로 경험한 自證을 '생각'하는 것이다.
{“tasmātiha, bhikkhave, bhikkhu cepi ākaṅkheyya —
‘ye me gehasitā sarasaṅkappā te pahīyeyyun’ti,
ayameva ānāpānassatisamādhi sādhukaṃ manasi kātabbo.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만일 비구가
'세속에 대한 나의 기억과 사유<*gehasitā sara-saṅkappā>를 모두 제거하리라.'라고 원한다면
이러한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sati>을 통한 삼매를 잘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위딱까(vitakkā)는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일으킨 생각'으로 번역한다.
한역에서는 尋求 혹은 尋으로 표현하고 이와 자주 짝이 되어 나타나는
위짜라(vicāra)는 '지속적인 고찰'로, 伺察 혹은 伺로 표현한다.
이 둘을 尋伺 혹은 覺觀으로 한역하는데 그 각각의 단어로는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고
논의 설명에서도 단초를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不定心所라는 것만 취한다.
대상을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지만 크게
직접 경험한 것(自證)이거나 간접적으로 들은 것(他聞)일 수 있고, 內外로 분류할 수도 있다.
또한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으로 대상을 만나게 되었을 때
대상의 전체적인 표상이 일차적인 정보이고, 표상은 정보를 주고받거나 저장하는 방식이다.
수동-능동-내부-외부로 분류되는 직간접적인(自證-他聞) 대상은 서로 얽혀있다.
간접적이거나 외부 대상을 수동적으로 만나서 대상의 표상이 내부로 들어오게 되면
그 대상과 관련된 기존의 정보가 없다면 대상에 대한 생각은 생겨나지 않고
어떤 느낌으로 모아지더라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면 거의 무시될 정보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즐겁거나 괴로운 정보라면 내부 정보로 기억되어 이후 생각의 단초가 된다.
즐거운 정보가 내부에 저장되고 나면
이후 내부의 욕구에 의해 외부의 대상을 능동적으로 대면하고자 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그 대상을 만날 수 없게 되면 그와 유사한 상황을 기대하게 되고
만나게 되면 점점 더 탐닉하게 되나 때로는 그 탐닉도 효능이 줄어들거나 없어지기도 한다.
지금은 원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다시 필요에 의해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 일상이다.
예를 들어 애기가 태어났다고 하자, 먼저 바뀐 신체 환경에 울음으로 불편을 나타내겠지만
이것도 어느 정도 지나면 익숙해지게 되고
호흡과 식사와 배변은 이미 생명의 태생과 함께 동반하여 있는 것이다.
감촉에 대한 반응에 이어서 맛, 냄새, 소리, 형상의 순서로 반응이 나타나고
울음과 옹알이 수준에서 서서히 생각을 의사 표현하는 말을 배우게 된다.
見, 聞, 嗅, 嘗, 接의 역순서이고 마지막이 語行(口行)이다.
이미 어느 정도 수동-능동-내부-외부로 분류되는 대상을 만나고 있다.
{daharassa hi, thapati, kumārassa mandassa uttānaseyyakassa saṅkappotipi na hoti,
kuto pana pāpakaṃ saṅkappaṃ saṅkappissati, aññatra vikūjitamattā ! (MN 78)
목수여,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 뒤척이지도 못하고 반듯하게 누워만 있는 갓난아이에게는
사유<*saṅkappa>라는 [개념도] 없이 단지 부루퉁할<*vikūjita 지저귐, 옹아리> 뿐인데
어떻게 나쁜 사유를 하겠는가?}
대상, 대상의 표상, 기억 혹은 저장되고, 다시 '생각'으로 이어지고, 말로 표현하게 되는 과정은
경문에도 나타나 있을 것이다.
니까야에서 용례를 찾아보면 욕계의 66법에 이어서 尋伺가 나타나고
색계에서의 尋(vitakkā)은 초선에서 伺(vicāra)과 함께 나타나는 법이다. 제2선에서는 소멸된다.
그러므로 尋伺는 욕계에 속하는 법이거나 색계는 초선에서만 나타나고 그 이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붇다의 보살시절 현겁의 최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전환점이 있었다.
특별한 언급이나 * 표시가 없으면 한글 번역은 {초불}의 번역이다.
{na kho panāhaṃ imāya kaṭukāya dukkarakārikāya adhigacchāmi
uttari manussadhammā alamariyañāṇadassanavisesaṃ.
siyā nu kho añño maggo bodhāyā’ti?
tassa mayhaṃ, aggivessana, etadahosi —
‘abhijānāmi kho panāhaṃ pitu sakkassa kammante sītāya jambucchāyāya nisinn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ā.
siyā nu kho eso maggo bodhāyā’ti?
tassa mayhaṃ, aggivessana, satānusāri viññāṇaṃ ahosi —
‘eseva maggo bodhāyā’ti. (MN 36)
그러나 나는 이런 극심한 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초월했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지 못했다. 깨달음을 얻을 다른 길이 없을까?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etad> 들었다.
'아버지가 삭까족의 농경제 의식을 거행하실 때 나는 시원한 잠부 나무 그늘에 앉아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vitakka>과 지속적 고찰<*vicāra>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abhijānāmi kho panāhaṃ 나는 기억한다.>,
혹시 그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되지 않을까?'
악기웻사나여, 그런 내게 그 기억을 따라서<*satānusāri> 이런 알음알이가 [즉시에] 일어났다.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
보살시절 선정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에서도 답을 찾지 못하여
그 당시 많이 하던 고행을 했지만 이 역시 성자에 어울리는 知見을 얻지 못하신 세존께서는
과거 모든 수행 과정을 회상(기억)하시다가 '이것이 있었다.'
원문에는 {etad}라고 나타나지만 번역에는 '이런 생각'이라고 의역했다.
{evaṃ cetaso pari-vitakko udapādi}라는 표현도 경문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문맥상으로 적절하다.
{abhijānāmi}는 abhi-jānāti의 1인칭 단수형이고 '잘-안다'라고 직역된다.
명사형인 abhiññā는 6神通에서 많이 나타나고 証知,自証<*自證>으로 日譯하기도 한다.
기본적인 의미는 '본인이 직접 경험하여 안다.'라는 맥락에서
'기억한다.'라고 번역하면 자연스러운 경우가 많고 {초불}에서도 이와 같이 번역한 곳이 많다.
또한 {밀린다팡하 Milindapañha}에서는 도움 받아 배운 (kaṭumikā) 간접적인 기억과 대비되는
자신이 경험한 직접적인 기억(sati)을 abhiññā라고 설명한다.
본 경문에서도 '나는 기억한다.'라고 번역하면 자연스럽고,
이어지는 {sati-anusāri}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생각'의 전체적인 내용은
'지금까지의 수행방법으로는 菩提道{maggo bodhāyā}를 성취하지 못했다.'라는 것이고
'초선이 보리道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識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생각'은 특정 하나의 대상, 예를 들어 형색에 대한 생각,
고향이라는 특정 대상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절차적이고 순서적으로 이어지고 이어지는 생각이다.
그래서 여기서의 '생각'은 앞에 나오는 ① 論理(量), ② 記憶에 해당된다.
{kāmavitakkaṃ, byāpādavitakkaṃ, vihiṃsāvitakkaṃ, kāmasaññaṃ, byāpādasaññaṃ, vihiṃsāsaññaṃ
— ime kho, bhikkhave, cha dhamme appahāya abhabbo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uṃ. (AN 6.74)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 악의에 대한 생각, 해코지에 대한 생각,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 악의에 대한 인식, 해코지에 대한 인식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법을 제거하지 못하면 초선에 들어 머물 수 없다.
nekkhammavitakkena, abyāpādavitakkena, avihiṃsāvitakkena,
nekkhammasaññāya, abyāpādasaññāya, avihiṃsāsaññāya —
imehi, kho, bhikkhave, chahi dhammehi samannāgato bhikkhu diṭṭheva dhamme sukhaṃ viharati
avighātaṃ anupāyāsaṃ apariḷāhaṃ,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gati pāṭikaṅkhā”ti. (AN 6.75)
출리에 대한 생각, 악의 없음에 대한 생각, 해코지 않음에 대한 생각,
출리에 대한 인식, 악의 없음에 대한 인식, 해코지 않음에 대한 인식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지금여기에서 속상함과 절망과 열병이 없는
행복한 삶을 살고, 몸이 무너져 죽은 다음에는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 예상된다.
idhāvuso, paṭhamaṃ jhānaṃ samāpannassa bhikkhuno kāmacchando pahīno hoti,
byāpādo pahīno hoti, thīnamiddhaṃ pahīnaṃ hoti, uddhaccakukkuccaṃ pahīnaṃ hoti,
vicikicchā pahīnā hoti;
vitakko ca vattati,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paṭhamaṃ kho, āvuso, jhānaṃ evaṃ pañcaṅgavippahīnaṃ pañcaṅgasamannāgatan”ti. (MN 43)
도반이여, 여기 초선을 증득한 비구에게
감각적 욕망이 버려지고, 악의가 버려지고, 해태와 혼침이 버려지고,
들뜸과 후회가 버려지고, 의심이 버려집니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과 희열과 행복과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citt-ekaggatā>이 있게 됩니다.
도반이여, 초선에서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이 버려지고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을 가지게 됩니다.}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yā kho, bhikkhave, imehi sattahaṅgehi cittassekaggatā parikkhatā ,
ayaṃ vuccati, bhikkhave, ariyo sammāsamādhi saupaniso itipi saparikkhāro itipī”ti. (AN 7.45)}
*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比丘들이여, 이들 7支들에 의해서 心의 한 곳으로 모아지고<*cittass-ekaggatā> 갖추어진 것을
比丘들이여, 이것을 성스러운 正定이 기반을 갖추었다라고 또한 필수품을 갖추었다라고 한다.
正見으로부터 시작하여 正念에 이은 正定의 초선은 팔정도의 마지막 덕목의 첫 번째 선정이다.
팔정도의 正思惟(saṅkappo)는 慧蘊에, 正語(vācā)는 戒蘊에, 그리고 正念과 正定은 定蘊에 속한다.
定蘊에 속하는 正念은 일단 內로(ajjhattaṃ) 三昧에 드는 수행법이다.
그 후 外로(bahiddhā) 身受心法에 대한 知見이 생겨난다고 한다.
여기서 內로(ajjhattaṃ)란 6入이 기준이고, 6入의 內가 名色이다.
{“kimārammaṇā, samiddhi, purisassa saṅkappavitakkā uppajjantī”ti? “nāmarūpārammaṇā, bhante”ti.
“te pana, samiddhi, kiṃadhipateyyā”ti? “satādhipateyyā, bhante”ti. … (AN 9.14)}
名色(을 대상)으로 (/으로부터 paccaya) saṅkappavitakkā 思惟 ․ 尋(생각)들이 일어나고
이 思惟 ․ 尋들을 領導하고(adhipateyyā) 이끄는 것은 念(기억)이라고 한다.
名色(nāmarūpa)는 욕계에 속하는 것과 색계에 속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고
무색계에는 당연히 名色이라는 표현이 나올 수 없다.
12연기支에서 名色은 (무명-행-)識의 입장에서 外이고 六處의 입장에서는 內이다.
{iti ayañceva kāyo bahiddhā ca nāmarūpaṃ … dvayaṃ paṭicca phasso saḷevāyatanāni (SN 12.19)
* (識을 지닌) 身이 있고, 밖에 名色이 있다, … 이 둘을 반연하여 觸이 있고, 六處들이 있다.
‘eso, bhante, majjhe siṅghāṭake nisinno’ti. (SN 35.198)
* 六處(門)으로 들어가면 (초선의) 4거리(4大; 名色) 中에 왕(識)이 앉아서 止觀을 수행한다.}
만약 (무명-행-)識 즉 4蘊이 드러나고 意(-法 2)處가 획득된 상태라면 그것은 무색계,
5蘊이 드러나고 6內(-外 12)處가 획득된 상태라면 그것은 욕계에서의 태어남(生)이다.
{khandhānaṃ pātubhāvo āyatanānaṃ paṭilābho (DN 22)}
욕계(4念處)와 가장 가까운 색계 초선 보다 더 內가 제2선이다.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AN 4.123)}
색계도 5蘊이 드러남은 욕계와 동일하지만 추세(麤細 oḷārikaṃ vā sukhumaṃ)의 차이는 있고
6內(-外 12)處가 아니고 최소한 香과 味는 제외되고 聲은 禪의 가시라고 말씀하신다.
{‘Saddakaṇṭakā kho pana jhānā’ vuttā bhagavatā. (AN 10.72)}
그러면 초선의 정형구에 나오는 尋伺{sa-vitakka-ṃ sa-vicāra-ṃ}의 '생각'은
색계 名色 상태에서 무엇을 대상으로 하여 어떻게 하는 '생각'일까?
이것이 본 글의 주제이다.
무엇을 이라는 '대상'은 '4念處(身受心法)'이고
'어떻게'라는 방법은 '경험적 기억(abhiññā)에 따른 생각'이다.
{tassa ce, bhikkhave, bhikkhuno evaṃ carato evaṃ viharato
kadāci karahaci satisammosā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sarasaṅkappā saṃyojaniyā,
dandho, bhikkhave, satuppādo.
atha kho naṃ khippameva pajahati vinodeti byantīkaroti anabhāvaṃ gameti.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머물 때
그가 이따금씩 마음챙김을 놓아 버리기 때문에<*sati-sammosā>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sara-saṅkappā>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일어나게 되면
비록 마음챙김<*sati>이 느리게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는 즉시에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끝장내고 존재하지 않게 한다.
idha, bhikkhave, bhikkhuno cakkhunā rūpaṃ disvā
nuppajjanti pāpakā akusalā sarasaṅkappā saṃyojaniyā.
veditabbametaṃ, bhikkhave, bhikkhunā — ‘abhibhūtametaṃ āyatanaṃ’.
abhibhāyatanañhetaṃ vuttaṃ bhagavatāti. (SN 35.79)
여기 비구들이여, 눈으로 형색을 본 뒤 비구에게 족쇄와 관계된
기억과 사유<*sara-saṅkappā>가 있는 나쁘고 해로운 법들[不善法]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 경지는 지배되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지배의 경지<*(6)處의 극복 āyatana abhibhūta>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kāmavitakko, byāpādavitakko, vihiṃsāvitakko.
ime ca bhikkhave, tayo akusalavitakkā kva aparisesā nirujjhanti?
catūsu vā satipaṭṭhānesu suppatiṭṭhitacittassa viharato animittaṃ vā samādhiṃ bhāvayato. (SN 22.80)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과 악의에 대한 생각과 해코지에 대한 생각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디서 이러한 세 가지 해로운 생각이 남김없이 소멸되는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에 마음이 확립되어 머물거나 표상 없는 삼매를 닦을 때 그렇게 된다.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t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ṃ dhammaṃ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āraddho hoti;
satisambojjhaṅgaṃ tasmiṃ samaye bhikkhu bhāv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bhāvanāpāripūriṃ gacchati. (SN 46.3)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멀리 떠남을 갖추어 머물면서
그 법을 계속해서 생각<*기억/念 anu-s-sarati>하고 계속해서 고찰<*생각/尋 anu-vi-takketi>하면
비구에게는 마음챙김<*기억/念 sati>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래서 비구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꾸준히] 닦는다.
그러면 비구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는 이러한 닦음을 통해서 성취된다.}
부기하면 4處-念 즉 身受心法이라는 수행주제를 기억(sati)에 의해서 지켜보는 수행인
'正念'과 관련된 혹은 그 결과에 대한 기억(abhiññā)에 따른 생각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4念處수행과 관련된 과정, 방법 등에 대한 절차적, 순서적 생각이고
또한 그렇게 수행했을 때, 혹은 5蓋가 제거되었을 때의{pañca nīvaraṇe pahīne}
心의 전체적인 표상(心相)에 대한 생각이다.
{tesampi vitakkānaṃ asatiamanasikāraṃ āpajjato
ye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te pahīyanti te abbhatthaṃ gacch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vasī vitakkapariyāyapathesu.
yaṃ vitakkaṃ ākaṅkhissati taṃ vitakkaṃ vitakkessati,
yaṃ vitakkaṃ nākaṅkhissati na taṃ vitakkaṃ vitakkessati. (MN 20, MN 2)
그 <*어떤> 사유들을 마음챙기지 않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을 때<* vitakka a-sati-a-manasi-kāra>
탐욕과도 관련되고 성냄과도 관련되고 어리석음과도 관련된, 나쁘고 해로운 사유들이 제거되고 사라진다.
그런 것들이 제거되기 때문에 마음이 안으로 안정되고 고요해지고 전일해져 삼매에 든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사유의 행로에 대해 자유자재한<* vitakka-pariyāya-pathesu> 비구라 하나니,
그가 원하는 사유는 사유할 것이고 그가 원하지 않는 사유는 사유하지 않을 것이다.
“vitakkentā ca kho tumhe, bhikkhave, ‘idaṃ dukkhan’ti vitakkeyyātha,
‘ayaṃ dukkhasamudayo’ti vitakkeyyātha, ‘ayaṃ dukkhanirodho’ti vitakkeyyātha,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vitakkeyyātha. (SN 56.7)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생각을 일으킬 때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yaññadeva, bhikkhave, bhikkhu bahulamanuvitakketi anuvicāreti, tathā tathā nati hoti cetaso. …
api ca kho me aticiraṃ anuvitakkayato anuvicārayato kāyo kilameyya.
kāye kilante cittaṃ ūhaññeyya. ūhate citte ārā cittaṃ samādhimhāti. (MN 19)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것에 대해 사유를 거듭해서 일으키고 고찰을 거듭하다보면
그대로 마음의 성향이 된다. …
그러나 '내가 너무 오래 생각하고 고찰하면 몸이 피로할 것이고,
몸이 피로하면 마음이 혼란스러울 것이고,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삼매에서 멀어질 것이다.'라고 [꿰뚫어 알았다.]
… 그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물면
kāyārammaṇo vā uppajjati kāyasmiṃ pariḷāho, cetaso vā līnattaṃ, bahiddhā vā cittaṃ vikkhipati.
tenānanda , bhikkhunā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itabbaṃ.
tassa kismiñcideva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ato pāmojjaṃ jāyati.
pamuditassa pīti jāyati. pītimanassa kāyo passambhati. passaddhakāyo sukhaṃ vedayati .
sukhino cittaṃ samādhiyati.
몸을 대상으로 하여 몸에 열기가 생기거나 정신적으로 태만해지거나 밖으로 마음이 흩어진다.
그러면 그는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pasādanīye nimitte> 마음을 향하게 해야 한다.
그가 청정한 믿음을 고취하는 표상으로 마음을 향하면 환희가 생긴다. 환희가 생기면 희열이 생긴다.
마음에 희열이 있는 자의 몸은 고요하다. 몸이 고요한 자는 행복을 경험한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so iti paṭisañcikkhati — ‘yassa khvāhaṃ atthāya cittaṃ paṇidahiṃ, so me attho abhinipphanno.
handa, dāni paṭisaṃharāmī’ti.
so paṭisaṃharati ceva na ca vitakketi na ca vicāreti.
‘avitakkomhi avicāro, ajjhattaṃ satimā sukhamasmī’ti pajānāti”.
evaṃ kho, ānanda, paṇidhāya bhāvanā hoti.
그는 이렇게 숙고한다. '내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마음을 향하게 한 그 목적이 이제 성취되었다.
이제 나는 거두어들이리라.'라고,
그래서 그는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고찰을 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고찰을 하지 않고
안으로 마음챙기면서<*avitakkomhi avicāro, ajjhattaṃ satimā> 나는 행복하다.'라고 꿰뚫어 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다른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수행이 있다.}
여기{SN 47.10}에서 vitakketi ca vicāreti는 pasādanīye nimitte cittaṃ paṇidahitabbaṃ이다.
또한 {MN 125}에는 尋伺가 身(受心法)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난다.
{āraññakānañceva sarasaṅkappānaṃ abhinimmadanāya …
ime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etaso upanibandhanā honti …
' mā kāyūpasaṃhitaṃ vitakkam vitakkesī’ ’’ti. '
So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 (故鄕에 대한) 念-思惟(sara-saṅkappa)를 제거하기 위해 …
4念處(sati-paṭṭhānā)에 心을 묶는다(/집중한다). … 여래는 더 나아가 그를 다음과 같이 훈련시킨다.
'身(受心法)과 관련된 尋을 尋하지 말라.<*Ee>'라고. 그는 無尋-無伺 제2선에 머문다.
思惟 ․ 尋(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은 욕계와 색계 초선에서의 名色이라면
이때 욕계와 색계 초선의 공통점은 地大이다.
왜냐하면 제2선은 壞劫과 같이 地大(有對 paṭigha)가 없고 水大 등으로 이루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名色의 名身(nāmakāya)과 色身(rūpakāya) 사이에서
命名觸(adhivacanasamphasso)과 有對觸(paṭighasamphasso)에 의해
相(nimitta)이라는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은 {대인연경 (DN 15)}에 자세히 나와 있다.
또한 識 - 名色 互緣에 대해서도 가장 상세하게 설하고 있는 경이기도 하다.
12연기 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에서
이미 識-名色-六入의 內外에 대해서, 또한 六入이란 욕계에서의 生이라고도 설명하였다.
그러면 욕계에 태어나고 나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66{Chachakka (MN 148)}법이다.
그것은 6內根-6外境-6內識-6內觸-6內受-(6外想-6外思)-6外愛로
촉에서 수(상사)로 이어지는 것을 감안하여 표기하였다.
그리고 6外愛에 이어서 6外尋-6外伺로 총 60법(DN 22)이 나타나는 경문이 있고
6外愛에 이어서 6界-5蘊(界)로 총59법(SN 25, SN 26, SN 27)이 나타나기도 하고
6外尋-6外伺-5蘊 총65법(AN 7.95 10. āhuneyyavaggo)이 나타나기도 한다.
59법에 대한 欲貪은 心의 오염이고, 이 법들을 벗어난 분들이 불환자이다.
즉 욕계를 벗어나신 분들이라고 나타나니 이러한 60법과 59법은
욕계에 속하는 법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연기의 六入-觸-受-愛-取-有에서 取-有에 해당하는 자리에 4食(āhārā)이 나타나기도 하고
이상과 같이 尋伺(6外尋-6外伺) 혹은 界(6界-5蘊界)로 이어지는
이 세 부류의 4食(āhārā), 6外尋-6外伺 혹은 6界-5蘊界은 모두 名色과 연관되는 법들이다.
界(dhātu)란 사람에 비유하면 뼈대나 골격과 같은 기본 틀이 되는 元型을 말한다.
표상(總相 nimitta)이라는 3界의 정보가 홀로그램처럼 心에 분산되어 저장되는 元型이다.
반면에 尋伺는 慾界 혹은 色界 초선까지 저장되는 정보이다.
{dhātunānattaṃ paṭicca uppajjati phassanānattaṃ,
phassanānattaṃ paṭicca uppajjati vedanānānattaṃ,
vedanānānattaṃ paṭicca uppajjati saññānānattaṃ,
saññānānattaṃ paṭicca uppajjati saṅkappanānattaṃ,
saṅkappanānattaṃ paṭicca uppajjati chandanānattaṃ,
chandanānattaṃ paṭicca uppajjati pariḷāhanānattaṃ,
pariḷāhanānattaṃ paṭicca uppajjati pariyesanānānattaṃ,
pariyesanānānattaṃ paṭicca uppajjati lābhanānattaṃ.
ime nava dhammā duppaṭivijjhā. (DN 32)
① 界의 다양함을 조건으로 … <* ② 觸의 다양함 … ③ 受의 다양함 … >
④ 想의 다양함 … ⑤ 思惟(*saṅkappa)의 다양함 … ⑥ 의욕(*chanda)의 다양함 …
⑦ 열뇌(熱惱)의 다양함 … ⑧ 추구(追求)의 다양함 …
⑨ 얻음의 다양함이 일어납니다. 이 아홉 가지 법이 꿰뚫기 어려운 것입니다.
“mahati kho esā, kaccāna, dhātu yadidaṃ avijjādhātu.
hīnaṃ, kaccāna, dhātuṃ paṭicca uppajjati
hīnā saññā, hīnā diṭṭhi, hīno vitakko, hīnā cetanā, hīnā patthanā, hīno paṇidhi, hīno puggalo,
hīnā vācā; hīnaṃ ācikkhati deseti … (SN 14.13)
깟짜야나여, 위력적인 요소가 있나니 그것은 무명의 요소이다.
깟짜야나여, 저열한 요소를 반연하여 저열한 인식, 저열한 견해, 저열한 생각, 저열한 의도,
저열한 소망, 저열한 염원, 저열한 사람, 저열한 말이 생긴다. 그는 저열한 것을 설명…
atīte, bhikkhave, chandarāgaṭṭhāniye dhamme ārabbha cetasā anuvitakketi anuvicāreti.
tassa atīte chandarāgaṭṭhāniye dhamme ārabbha cetasā anuvitakkayato anuvicārayato
chando jāyati. …
tassa anāgate chandarāgaṭṭhāniye dhamme ārabbha cetasā anuvitakkayato anuvicārayato
chando jāyati.
tassa paccuppanne chandarāgaṭṭhāniye dhamme ārabbha cetasā anuvitakkayato anuvicārayato
chando jāyati. (AN 3.113)
비구들이여, 욕탐의 원인인 과거의 법들을 반연하여 마음으로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한다.
이렇게 욕탐의 원인<*욕계에서는 66법>인 과거<*미래, 현재>의 법들을 반연하여<*ārabbha> …
마음으로<*cetasā>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하기 때문에 열망<*chando>이 생긴다.
yaṃ kho, bhikkhu, divā kammante ārabbha rattiṃ anuvitakketi anuvicāreti —
ayaṃ rattiṃ dhūmāyanā.
yaṃ kho, bhikkhu, rattiṃ anuvitakketvā anuvicāretvā divā kammante payojeti
kāyena vācāya manasā — ayaṃ divā pajjalanā. (MN 23)
비구여, 낮에 행한 것에 대해 밤에 사유하고 고찰하는 것이 밤에 연기를 내뿜는 것이다.
비구여, 밤에 사유하고 고찰한 것을
낮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manasā> 행위에 적용시키는 것이 낮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여기서 낮이란 말 그대로 일상생활을 말하고 밤이란 홀로그램 형태의 정보가 편집되는 시간이다.
또한 일생 중의 업이 '생각<*기억>'으로 저장되고 다시 일상생활에서 현행되기도 한다.
尋伺는 意(mana)와 함께 표현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心所<*cetasā>이다.
그래서 尋伺된 것이 身口意 行(업)한다고 나타난다.
반면에 무명-行에서는 身口心으로 나타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여튼 口의 위치는 身-意 사이이거나 身-心 사이에 위치한다.
앞에 언급된 互緣으로 다시 돌아가면 먼저 6內處는 5蘊-取와 같이 苦(聖諦)라고 한다.
또한 六入處는 舊業(의 업보)이며 有(to become)를 반연하여 생겨난 生이다.
六入 이전의 識 緣 名色에서 識은 사후 생전의 이른바 재생연결식이다.
識 緣 名色에서의 名色은 6界를 取하여 모태에 들 때 현현한 상태를 말한다.
반면에 名色 緣 識은 六入 이후 66의 흐름에서
取-有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4食이나 尋伺(6外尋-6外伺) 혹은 界(6界-5蘊界)는
心으로 다시 훈습 혹은 저장되는 內在化(to become) 과정으로 생각된다.
{ye hi keci, bhikkhave,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amānā
anussaranti sabbete pañcupādānakkhandhe anussaranti etesaṃ vā aññataraṃ. (SN 22.79)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들이든 바라문들이든 수많은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하는 자들은
모두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를 기억하는 것이지
그 외 다른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6내외에서 생겨난 모든 법들은 5蘊에 귀속된다고 한다.
흔히들 5蘊 名色이라는 표현을 많이 하는데 엄밀하게는 5蘊 取-有된 것이 名色이다.
地水火風空識의 6界는 5蘊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분류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SN. 12.12)
'識食 · 能招未來有 · 令相續生 · 有有故 有六入處 · 六入處緣觸' (大正 2. 102c, 잡372)}
有됨(變成, becomed, bhūte)이 有(있으면, sati) 六入處(saḷāyatanaṃ)라고 나타나므로
욕계에서의 有됨(bhūte)이란 名色(nāmarūpa)의 위치이다.
이것이 識-名色 互緣에서 識 緣 名色은 死後 生前의 사건이고
名色 緣 識은 일생 중의 사건이다. 이 둘을 논에서는 業有 혹은 生有로 구분하기도 한다.
또한 12연기에서 識을 반연하여 생겨난 名色에서
六入으로 진행되지 않으면 이것이 색계에서의 태어남이 되고
識을 반연하여 名色이 생겨나지 않으면 무색계에 태어남이 된다.
만약 (무명에 덥히고 '갈애에 묶인'에 언급되는) 愛을 반연한
取, 有 혹은 生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면 死生 間(antarā)이 된다.
흔히들 中陰이라고 표현하는 그 상태이다.
{antarāparinibbāyissa.
imassa kho,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AN 4.131)}
'間(antarā, 中陰) 열반자'란 금생 기준으로는 불환자이고, 사후 생전 사이에서 해탈한 자이다.
5하분결은 해결하였고 生 획득과 관련 결박들은 제거되었지만,
(生)有 획득과 관련 결박들은 제거되지 않은 자라고 한다.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ne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
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n”ti. (AN 6.63)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감각적 욕망이 아니로다.
생각을 통해서 생긴 애욕이 인간의 감각적 욕망이니
세상의 다채로운 대상들은 그냥 그렇게 머물 뿐이어라.
슬기로운 자들은 그것에 대한 의욕을 길들이노라.}
3界를 벗어남은 욕계부터 벗어나는 것이지 무색계 선정을 통하여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 싶다.
벗어남에 수많은 과정과 수행이 있겠지만 6근 단속 등을 통하여 외부 대상인 6境과,
또한 이른바 '이데아(물자체)'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內로 이지 싶다.
한처에서의 실참수행의 시작이 4념처라고 한다면 이것은 삼매수행이다.
삼매란 특정대상에 대한 집중이 아니라 마음이 거친 물질로 대표되는 6境에 대해 물들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지켜보면서 5蓋를 제거하여 안정되고 균형 잡힌 心 상태이고
색계 삼매에 드는 것이 팔정도의 마지막 덕목으로 생각한다.
{idha, bhikkhave, ekacc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takkī hoti vīmaṃsī,
so takkapariyāhataṃ vīmaṃsānucaritaṃ sayaṃ paṭibhānaṃ evamāha — (DN 1)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논리가<*takkī>요 해석가<*量 vīmaṃsī>이다.
그는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打 āhata> 해석을 수반하며<*追跡 anucarita>
자신이 스스로 규명<*脈絡에 맞게 paṭi-bhāna to shine 익어서 터져 나온>하여 이렇게 말한다.
보라, 밧디야여. 그대는 소문으로 들었다 해서 [나의 말을 따르지 말라].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고 들었다.'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 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 takka, naya, ākāra-pari-vi-takka, diṭṭhi-ni-j-jhāna-k-khanti (AN 4.193) / (AN 3.66)>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는 말라.]
이 존자는 심오하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논리의 영역이 아닌 a-takka-avacara>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러한 문장<* 의미 있는 표현 attha-pada (AN 4.192)>을 사용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그런 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etadahosi>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오하여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수승하고
사유의 영역을 넘어섰고<*a-takka-avacaro (MN 26)>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들만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착을 좋아하고 집착을 기뻐하고 집착을 즐긴다.
집착을 좋아하고 집착을 기뻐하고 집착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런 경지,
즉 '이것에게 조건이 됨'인 연기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모든 형성된 것들의 가라앉음, 모든 재생의 근거를 완전히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빛바램, 소멸, 열반을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puna caparaṃ, bhikkhu, bhikkhu yathāsutaṃ yathāpariyattaṃ dhammaṃ
cetasā anuvitakketi anuvicāreti manasānupekkhati, uttari cassa paññāya atthaṃ nappajānāti.
ayaṃ vuccati, bhikkhu — ‘bhikkhu vitakkabahulo, no dhammavihārī’”. …
비구여, 다시 비구는 비구가 들은 대로 완전히 외운 대로
마음으로 법을 사유하고 고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한다.
그러나 그는 통찰지로써 더 높은 뜻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비구여, 이 비구는 사유는 많이 하지만 법에 머무는 자라고는 하지 않는다. …
uttari cassa paññāya atthaṃ pajānāti.
evaṃ kho, bhikkhu, bhikkhu dhammavihārī hoti. (AN 5.74)
그리고 그는 통찰지로써 더 높은 뜻을 꿰뚫어 안다.
비구여, 이와 같은 비구가 법에 머무는 자이다.}
'생각'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가 물어 횡설수설했다.
尋伺를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해도
사마타나 더 높은 뜻을 꿰뚫어 알지 못하면 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이리 저리 논리로 쳐도(打) 실제 초선을 증득하신 분이
이상과 같은 생각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삿된 口業을 지은 것이 되나,
{yathā yathā, bhikkhave, bhikkhu yathāsutaṃ yathāpariyattaṃ dhammaṃ
cetasā anuvitakketi anuvicāreti manasānupekkhati
tathā tathā so tasmiṃ dhamme atthapaṭisaṃvedī ca hoti dhammapaṭisaṃvedī ca. …
비구가 들은 대로 외운 대로
마음으로<*cetasā> 생각해 보고 지속적으로 고찰해보고 마음으로<*manas> 숙고해 볼 때,
그는 그 법에 대해서 의미를 체득하고 법을 체득한다. …
스승이나 어떤 존중할 만한 동료 수행자가 비구에게 법을 설하지도 않고,
그가 들은 대로 외운 대로 남들에게 자세하게 법을 설하지도 않으며,
들은 대로 외운 대로 법을 자세하게 암송하지도 않으며,
들은 대로 외운 대로 마음으로 생각해보고 지속적으로 고찰해 보고 마음으로 숙고해 보지도 않는다.
api ca khvassa aññataraṃ samādhinimittaṃ suggahitaṃ hoti
sumanasikataṃ sūpadhāritaṃ suppaṭividdhaṃ paññāya.
yathā yathā, bhikkhave, bhikkhuno aññataraṃ samādhinimittaṃ suggahitaṃ hoti
sumanasikataṃ sūpadhāritaṃ suppaṭividdhaṃ paññāya
tathā tathā so tasmiṃ dhamme atthapaṭisaṃvedī ca hoti dhammapaṭisaṃvedī ca. (AN 5.26)
그러나 그는 어떤 한 가지 삼매의 표상을 잘 취하고
마음에 잘 새기고 잘 호지하고 통찰지로 잘 꿰뚫는다.
비구가 어떤 한 가지 삼매의 표상을 잘 취하고
마음에 잘 새기고 잘 호지하고 통찰지로 잘 꿰뚫을 때,
그는 그 법에 대해서 의미를 체득하고 법을 체득한다.
… so taṃ nimittaṃ āsevati bhāveti bahulīkaroti svādhiṭṭhitaṃ adhiṭṭhāti. (AN 9.35)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
초선에 들어 머무는데 능숙하다.
그는 그 표상을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고, 바르게 확립한다.
“puna caparaṃ, bhikkhave, bhikkhū yathāsutaṃ yathāpariyattaṃ dhammaṃ
cetasā anuvitakkenti anuvicārenti manasānupekkhanti.
ayaṃ, bhikkhave, pañcamo dhammo saddhammassa
ṭhitiyā asammosāya anantaradhānāya saṃvattati. (AN 5.155)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들은 들은 대로 완전히 외운 대로 법을 사유하고 고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정법을 확고하게 하고
혼란스럽지 않게 하고<* asammosāya: 잊어버리지 않게 하고/기억하여> 사라지지 않게 하는
다섯 번째 경우다.
“anussareyya sambuddhaṃ, dhammañcānuvitakkaye.
abyāpajjaṃ hitaṃ cittaṃ, devalokāya bhāvaye. (AN 5.179)
부처님을 계속해서 생각하고<*anu-s-sareyya> 법을 사유하며<*anu-vi-takkaye>
천상 세계를 위하여 악의 없고 이로운 마음을 닦아야 하리.
다시 아난다여, 비구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로부터는 마음이 해탈하였다.
그러나 재생의 근거<*upadhi>를 파괴한 위없는 [열반을 대상으로] 마음이 해탈하지 못하였다.
그는 죽을 때 여래도 친견하지 못하고 여래의 제자도 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들은 대로 배운 대로
법을 사유하고 고찰하고<*cetasā anu-vitakketi anu-vicāreti>
마음으로 숙고한다<*manas-ānu-p-ekkhati>.
그가 들은 대로 배운 대로 법을 사유하고 고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할 때
재생의 근거<*upadhi>를 파괴한 위없는 [열반을 대상으로] 마음이 해탈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바른 시간에 법을 경청하는<*atth-upa-par-ikkhāya> 여섯 번째 이익이다.
아난다여, 바른 시간에 법을 경청하고 바른 시간에 의미를 자세히 살펴볼 때<*atthupaparikkhāya (AN 6.56)>
이러한 여섯 가지 이익이 있다.}
論, 註釋, 論文, 著述, 意見 등은 어떤 주제 문장 단어 등의 대상에 대한
心의 尋伺(생각이 떠올라 모아진 假說)이거나
그 尋伺를 논리적으로 검증하고 사례를 통하여 적용가능한지를
意에 의해 보고서 말하거나 글로 쓰는 행위이다.
이것은 최소한 혼침(middha)에 대한 하나의 대응방법은 되지 싶다.
{“no ce te evaṃ viharato taṃ middhaṃ pahīyetha,
tato tvaṃ, moggallāna, yathāsutaṃ yathāpariyattaṃ dhammaṃ
cetasā anuvitakkeyyāsi anuvicāreyyāsi, manasā anupekkheyyāsi.
ṭhānaṃ kho panetaṃ vijjati yaṃ te evaṃ viharato taṃ middhaṃ pahīyetha. (AN 7.61)
목갈라나여,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머물러도 혼침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대는 들은 대로 배운 대로 법을 사유하고 고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해야 한다.
그대가 그렇게 머물 때 혼침이 제거될 수도 있다.}
첫댓글
다시 ^^ 일부 보완하고 새로 편집하였습니다.
생략하려니 섭섭하고 다 넣으려니 번잡하고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