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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송화가족 원문보기 글쓴이: 송화
전남 영광군 연흥사
연흥사는 일명산(日明山)에 자리잡은 대한 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다. 연흥사에는 내려오는 사적기가 없어 확실한 창건내역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정유재란(1579년)때 병화를 입은 후 1667년(현종 8년)에 부운(浮雲)스님이 화주가 되어 중창한 후 여러 차례 중창을 하였다고 한다.
최초의 기록은 18세기의 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등에 나타난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유물은 석탑으로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미 고려 초에 사찰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 목조불상과 불상의 복장품으로 전해지고 있는 묘법연화경으로 보아 연흥사는 17세기 전반기에 다시 중창되었다고 본다.
이후 꾸준히 사찰의 면모를 유지해 오다가 쇠락하여 다시 법당을 헐고 1902년에 현 위치에 대웅전을 옮겨 중수한 사실이 「대웅전중수서문(大雄殿重修序文)」에 적혀 있다. 이는 완산후인 오위장(完山后人 五衛將) 이홍규(李弘圭)가 썼으며 수리는 백양사의 청계(淸溪)스님이었고, 편수는 김대엽(金大燁)이었다. 내용을 보면 당시에도 사찰의 내력을 몰라 삼한(三韓)의 고사(古寺)라 했으며 절이 이미 무너지고 몇 간의 암자는 풍우에 시달려 퇴락하였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다.
현재 연흥사에는 대웅전, 삼성각, 요사채 3동, 창고 등의 건물이 있고, 파손된 석탑 1기, 부도 1기, 목조불상 3구, 묘법연화경 6종 14책, 탱화 5점, 다라니경 1점, 맷돌 1점 등이 있다.
위치
연흥사는 영광군 군남면 용암리 890번지 위치하며, 용암저수지 앞에 있는 서당 마을에서 남서쪽 계곡의 포장된 자동차 한 대가 다닐 수 있는 소로를 따라 가면 일명산(현지 주민들은 서운산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연흥사 앞에는 군유산(403.2cm)이 있고 서쪽에 일명산이 있어서 완전히 이들 산 속에 묻혀 있다.
찾아오는 길
군남면은 영광읍에서 남쪽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사찰은 면소재지에서 다시 남쪽으로 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군남면 용암리에서 용암저수지를 지나 소로를 따라 올라가면 일명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교통편은 군남면에서 용암리까지 버스가 드물게 있고, 영광읍이나 군남면에서 택시로 들어와야 한다
전남 함평군 용천사
용천사는 함평 모악산에 자리한 대한 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다. 전언에 의하면 백제시대 600년(무왕 1년)에 행은선사(幸恩禪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그런데 《조선사찰사료》에 수록된 <용천사대웅전현판단청기>에 보면 중국 당나라 현종 재위기간, 즉 712~756년 사이에 국행(國幸)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여하튼 용천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고려시대 1275년(충렬왕 1년)에 각적(覺積)국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국사. 왕사 가운데 각적국사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각진국사(覺眞國師)가 아닌 가 추정한다. 각진국사(1270~1355)는 현재 장성 백양사 출신의 승려로 1351년 왕사로 책봉되고 사후에 국사에 추증되었으며 송광사 16국사 중의 한 분으로 그의 영정은 국보 제 56호이다. 그러나 중건연대가 1275년이고, 각진국사의 출생연대가 1270년이어서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절이 폐허되었다가 1632년(인조 10년)에 법당을 새로 짓는 등 중창이 있었고, 1638년에 쌍연(雙衍) 개연(慨然)스님이 중수하였다. 그러나 그 뒤 건물이 퇴락되므로 1705년(숙종 31년)에 여러 스님과 시주들이 힘을 합해 절을 중건하고는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청기를 지었다. 당시의 석등 등이 남아있다.
근래에 와서는 1938년에 중수되었으나 한국전쟁 중에 다시 불탔다. 1964년에 금당(錦堂)스님이 옛 보광전에 대웅전과 요사를 세워 법통을 이어왔고, 1984년의 요사채 건립, 1988년의 전통사찰 등록 등으로 오늘에 이른다. 최근에는 1996년에 대웅전을 다시 중건하였다.
위치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415번지 노령산맥 봉우리인 해발 347.8m의 모악산에 자리 잡고 있다. 남서쪽으로는 좁고 긴 계곡이 형성되어 있고 계곡 주변으로 꽃무릇공원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현재 용천사 주변은 상사화가 군락을 이루며 야생하고 있어 등산길로도 이용되고 있다.
또한 삼림욕장, 자연생태공원 조성 등으로 가족놀이에도 인기가 있다. 사찰을 방문하는데 지리적인 어려움이 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사찰과 속세가 가깝게 이어져 장점과 단점을 표현하기 어렵다.
대나무가 많아 모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한 여름철에 방문하고자 할 경우에는 긴 옷차림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찾아오는 길
함평읍에서 북쪽으로 국도를 따라 신광면까지 와서 함평 해보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용천사 입구에 이른다. 입구에서 2km 들어가면 용천사가 자리잡고 있다.
전남 함평군 보광사
보광사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절이 아니다. 보광사에 대한 역사는 관련자료 마다 다르다. 다만 함평군에 의하면 1924년 함평 모진택이 처음 집을 지어 별당으로 활용하다가 용천사 신도에 의해 1938년경 포교당으로 설립되어 이범림이 대표승이 되어 운영했다. 1942년 성월스님에 인수되어 보광사 선원으로 명명되었고 1962년 불교단체로 등록하였다.
그러나 현 주지의 말에 의하면 1800년대에 모진택이란 분이 개인 별장으로 지은 것인데 1924년 비구니 사찰로 개조하여 운영해 오고 있고, 1968년 10월 5일 조계종에 등록되었다고 한다. 건물 외모를 보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데 특이한 것은 2층 지붕을 하고 있다. 법당의 전면 상단에 극락보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위치
보광사는 함평군 함평읍 함평리 289에 위치한다. 건봉산의 줄기에 위치하는데 이 산은 함평의 주산이기도 하다. 구전에 의하면 이 산의 명당터가 보광사의 위치라고 한다.
찾아오는 길
보광사는 함평군청에서 영광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따라 약 400~500m 가다가 다시 왼쪽으로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주택가 골목길을 따라 200m쯤 가면 약간 높은 언덕에 위치한다.
전남 무안군 원갑사
원갑사는 무안 해제면의 강산(糠山)아래 자리하는 대한 불교조계종 대둔사의 말사이다. 절은 서남쪽 다도해를 바라보고 있는 임해(臨海)사찰로 지도(智島), 임자도(荏子島) 등 도서면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바닷길의 기원처로 관음신앙이 강하였다 한다.
불갑사, 영암 도갑사와 더불어 3갑사라고 불린다. 이 절은 신라 신문왕(재위 681 ~ 691)때 혹은 해공왕(재위 765 ~ 780)때 의상대사가 건립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근거를 찾기 어렵다.
원갑사에는 강산사에 대한 현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 「무안군지」(1922)에 강산사가 있다고 기록 되어 있고 「금성지」에도 원갑사가 강산에 있다고 쓰여진 것으로 볼 때 이름이 강산사이었다가 원갑사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무량전과 요사 2동 그리고 깨끗한 현대식 해우소 등 매우 단출한 사찰이다. 무량전 앞마당에 수령 수 백 년의 팽나무 2그루, 살구나무, 느티나무가 각 1그루 모두 네 그루가 우람하게 서 있다. 원갑사 일원은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제면 소재지에서 지도방면으로 3㎞ 지점인 산길리 신동 입구에서 우회전하여 다시 3㎞ 가면 길 우측에 원갑사가 위치한다. 버스는 해제면 소재지까지 있고, 여기까지 택시를 타고 들어와야 한다.
전남 무안군 도덕사
도선국사의 수행의 체취가 가장 많은 도량이 영암 도갑사입니다. 도갑사는 신라시대에 4대 고승의 한 분이며,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시조인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도선국사는 풍수지리에 따라 중요한 길지에 사찰을 세워야 국가의 발전과 국민의 평안을 이룰 수 있다는 비보설을 주장하면서 전국에 많은 사찰을 건립한 스님입니다.
도갑사에는 도선국사와 관련이 있는 문화유산을 전시하는 ‘도선국사성보관’이 있습니다. 성보관은 전시공간으로 활용뿐 아니라 도선국사연구소를 겸하고 있습니다. 성보관에 전시된 유물과 저서 그리고 특별히 제작하여 보여주는 그래픽 영상을 통해 스님의 사상과 업적을 그리고 종교적 깨달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성보관에는 도선국사의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님의 진영 원본과 ‘도선국사실록’과 ‘도선답산가(영인본)’ ‘영암지도갑사적’과‘도선비결(영인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유물로는 전할 수 없는 도선국사의 설화 · 탄생지와 관련한 영암 구림지역의 전설이 성보관에 오롯이 새겨져 있습니다. 또 ‘도선의 출생과 구림의 지명유래’, ‘도선의 출가와 낙발지지’, ‘도선의 입당과 도선이바위’, ‘풍수지와 비보설’ 등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 때 966칸의 당우와 전각이 있었던 도갑사는 정유재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많은 성보들이 유실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었던 유물들도 일제시대와 6.25을 겪으면서 소실되었고, 참배객의 부주의로 77년 대웅전마저 전소되었습니다. 현재 도갑사에서 고승들의 수행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해탈문과 명부전 두 전각과 석조물뿐입니다. 삼층석탑, 석조, 미륵불, 11기의 부도 등 석조성보 자아내는 수행의 향기가, 대웅전 뒷쪽 복원불사 현장을 감싸고 있습니다.
위치
월출산의 남쪽 자락인 도갑산을 등진 넓은 대지에 위치하는 도갑사는 빼어난 산세와 풍광을 병풍삼아 주변 풍광이 아름답다. 영암에서 학산가는 819번 지방도로를 따라 군서를 지나 구림리 구림초등학교 다음 삼거리에서 안내판을 따라 좌회전하여 2km정도 나아가면 도갑사에 도착한다.
찾아오는 길
1) 승용차 이용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광산 IC로 나와 13번 국도를 타고 송정 나주를 지난다. 영암읍 라이온스탑 앞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13번 국도를 타고 1km가량 가다가 오리정 오거리에서 819번 지방도로로 갈아탄다. 구림사거리에서 도갑사 진입로로 좌회전 하여 약3km가량 가면 도갑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하게 된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목포IC로 나와 2번 국도를 타고 독천 쪽으로 달린다. 학산에서 영암쪽으로 가는 819번 도로를 갈아타고 계속 가면 오른쪽으로 도갑사로 가는 도로가 연결된다.
2) 대중교통
우선 광주까지 가서 광주에서 시외버스를 이용하여 영암으로 가면 된다. 서울 ⇔ 광주는 배차 5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4시간이 소요된다. 부산 ⇔ 광주는 배차 20분 간격이며 4시간 10분이 걸린다. 대구 ⇔ 광주는 배차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3시간 30분이 걸린다. 광주에서 하찬 한 후 다시 고속버스 이용하여 영암으로 간다. 광주 ⇔ 영암사이는 배차간격 10분이며, 1시간 20분 걸린다. 영암에서는 직행버스를 이용하여 도갑사로 가는데 영암시외버스 정류장 ⇔ 도갑사행 버스는 20분이 걸린다. 도갑사행 군내버스는 오전 8:10, 9:40, 11:30, 오후 1:15, 3:40, 5:25, 7:30에 운행한다.
서울에서는 서울 ⇔ 영암을 직접 가는 고속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배차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입장료> 주차장 이용요금 무료, 버스20대 주차가능.
전남 무안군 법천사
절의 창건은 백제시대 553년(성왕 30)에 덕이(德異) 또는 덕예(德隸)조사가 세웠다고 전하며, 혹은 725년(성덕왕 24)에 서역(西域)의 금지국(金地國)에서 온 정명(淨明)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嚴 1090 ~ 1141)이 이곳에 와서 공부하자 제자 500여명이 찾아와 함께 수도하며 절을 중창하였는데 처음에는 산 이름이 영취산(靈鷲山)이었으나 이때부터 승달산이라고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1662년(현종 3)에 영욱(靈旭)스님이 중창하였다. 한편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법천사는 원명국사가 주석하던 곳”이라는 등의 기록이 있고 「범우고」와 「가람고」에도 역시 절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절은 계속해서 유지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896년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절이 거의 폐허화되었으나 1913년에 정병우(丁丙愚)가 암자를 지으면서 법등이 이어졌고 그 뒤 곽활연(活然)스님이 주석하면서 중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70년 이후에는 법천사 옛 터에 중창을 하면서 활연 스님의 제자인 강지원(智元)스님이 주석하고 있다
1990년에 대웅전이 건축되고, 1992년에 산신각이 복원되었으며, 1993년 삼존불이 봉안되었다. 최근에는 천왕문, 종각 등이 신축되었다. 법천사의 산내 암자로 원명국사가 지었다는 목우암이 있는데 현재 완전히 독립한 사찰로서 법천사와는 분리되었다. 목우암에 있는 아미타삼존불과 부도들도 법천사의 것이다.
무안읍에서 200번 좌석버스로 20분(목포대학교 정문 하차) 목포대학교 후문 쪽 등산로 따라 3㎞에 위치한다. ② 몽탄면에서 군내버스로 10분 거리인 달산리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소요된다. 저수지를 오른 쪽으로 끼고 차가 한 대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면 법천사 입구를 나타내는 석장승이 나타난다. 다시 소로를 오르다 보면 법천사와 목우암을 가는 길이 갈라진다.
전남 무안군 목우암
목우암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원나라 임천사(臨川寺)의 중 원명(圓明)이 바다를 건너와 승달산에 택지하고 풀을 엮어 암자를 지었다고 세전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암자가 목우암으로 추정한다. 그 후 <금성지(錦城誌)>의 기록에 의하면 당대, 혹은 원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인종, 의종 연간에 중국 임천사의 스님 원명이 세웠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원명은 고려시대 때 원명국사로 보고 있다.
과거 목우암은 법천사의 산내암자였으나 법천사가 폐사되면서 목우암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였고, 주변 일대의 토지를 모두 소유하게 되었다. 그 후 법천사가 다시 중건될 때는 그 지역만 별도로 목우암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삼존불은 법천사에서 옮겨진 것으로 현재까지 그대로 목우암에 있다.
무안읍에서 200번 좌석버스로 20분(목포대학교 정문 하차) 목포대학교 후문 쪽 등산로 따라 3㎞에 위치한다. ② 몽탄면에서 군내버스로 10분을 타고 가면 달산리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소요된다.
저수지를 오른 쪽으로 끼고 차가 한 대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을 따라가면 절 입구를 나타내는 석장승이 나타난다. 다시 소로를 오르다 보면 법천사와 목우암을 가는 길이 갈라진다.
전남 나주시 복암사
복암사는 승걸산 아래 좁은 산간에 자리한 대한 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다. 절은 언제 누구에 의해 창건되었는지 문헌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으나 절에서 전하기로는 654년(백제 의자왕 14)에 보광사의 20여개 암자중의 하나로서 안신선사가 창건하면서 복천암(伏泉庵)이라 이름하였고, 고려 시대 때인 1219년(고종 6) 진각국사가 중창하여 복암사라 하였으며 그 뒤 1601년(선조 34)에 사명대사가 3창했다고 전해진다.
근래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선암사의 이월영 스님이 1939년에 지은 선암사 <대각암 상량문(大覺庵 上樑文)> 가운데의 복암사 주지 고화봉 이라 적혀있는 현판이다. 이 현판으로 1939년 당시 복암사가 잘 유지되고 있었고, 아울러 절의 주지가 고화봉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복암사가 선암사의 말사였으므로 대각암 중수에 복암사에서 시주금을 보탰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1974년에 세워진 원명스님의 공덕비를 통해 1904년에 원명스님이 절을 중건하면서 관음전·삼성각·수학당 등을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92년에 전각 건축불사를 마무리하여 큰법당, 삼성각, 요사 등의 전각이 있었다. 그러나 9년 전 다시 불이 나서 대부분 불타고, 최근 중창불사를 하여 대웅전, 관음전, 설법전 겸 종무소, 종루, 선방, 요사채 등이 있다.
나주에서 목포로 가는 국도 1호선을 따라가다가 다시면에 접어들면 임제선생의 묘와 창계서원이 있다. 이를 지나서 낮은 고개를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승걸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여기에 복암사라는 돌에 쓰여진 표시가 있어 이를 따라 1.7km 들어가면 사찰이 나타난다. 완행버스는 국도변에 정류소가 있으며, 직행버스의 경우에는 다시면 정류소에 내려서 택시를 타면 10분 거리이다. 요금은 4000~5000원이다.
전남 나주시 심향사
심향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창건주로는 통일신라시대 원효(元曉), 혹은 고려 때인 951년에 도선 국사(道詵 國師)를 꼽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특히 도선 국사 창건설은 도선의 생몰 년대인 827~898년과 부합되지 않아 더욱 신뢰하기 어렵다.
한편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고려시대 현종(1009~1031)이 나주에 와서 10여 일간 머물 때 이곳에서 나라의 평안을 위해 기도드렸다고 한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현재 경내에 고려시대의 석불(미륵불)과 지붕돌 등이 남아있어 고려시대에 절이 경영된 것을 알 수 있다. 창건 당시 심향사의 이름은 미륵원(彌勒院)이었다고 한다.
고려 광종 2년(951)에 신왕사(神王寺)로 고쳤다가 다시 신황사(神皇寺)로 바꾸고, 곧이어 다시 심향사로 바뀌었다. 이 가운데‘신왕사’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신황사’라는 명칭은 정조 13년(1789) 조성된 상량문에서 확인된다. ‘심향’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중(八部衆) 가운데 하나인 건달바(乾達婆)를 뜻하는 것으로, 이 건달바는 오직 향기만을 먹으므로 심양행(尋香行)이라고도 부른다. 창건이후의 역사도 자세하진 않지만 고려말인 공민왕 7년(1358)에 다시 중건되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조 13년(1789)에 몽수(夢守), 최정(最定) 스님이 중창하였다. 이후 1796년에 미륵전이 무너져 이듬해 중건하였는데, 이때 앞서 언급한 1789년에 작성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이 상량문에는 ‘금성산신황사용화당중건(錦城山神皇寺龍華堂重建...)’이라 쓰여 있어 당시 절 이름이 신황사였고, 또 미륵전도 용화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근래 들어 1982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하면서 극락보전으로 전각의 이름을 바꾸었고, 1985년에는 민가 형태의 요사인 백설당(白雪堂)을 중건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절 일원은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나주 향교 대성전의 초석은 연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심향사에 있던 것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심향사는 나주시 대호동 825번지 금성산 중턱에 위치하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白羊寺)의 말사(末寺)이다. 사찰 전화번호는 061-334-2880이다.
찾아오는 길
(1) 대중교통 이용
나주역 앞에서 택시를 탈 경우 5~10분 거리에 있으며, 버스는 160번을 타고 나주공고앞 하차하여 도보 5분 거리에 있다.
(2) 고속도로 이용
호남고속도로 광산나들목에서 나주방향으로 이어진 13번 국도를 타고 대호동 김천일장군 유적지를 지나 금성중·고등학교에 도착한다. 이 학교 정문으로 들어서 바로 펼쳐지는 왼쪽 작은 길을 따라 200m 정도 올라가면 심향사가 있다
전남 나주시 미륵사
미륵사는 544년(백제 성왕 22)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창룡사(蒼龍寺)라 칭했다고 한다.이에 관한 문헌자료는 전하지 않으나 백제 때부터 철천리로 이름난 야철산지의 큰절로 알려져 있다.이곳 철야현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 제10 「민애왕편」과 『삼국사기열전』제4 「김양」편에 민애왕과 신무왕의 왕위쟁탈전이 일어났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나주는 영암 구림, 나주 회진, 영산포 등 영산강 뱃길을 통한 해상무역의 거점지로서, 장보고의 도움으로 신라의 왕위 찬탈을 노린 신무왕 김우징과 민애왕 김명의 결전지였다. 고려시대에는 미륵불상의 조성과 함께 왕건과 견휜의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는데, 나주의 해상력과 경제력을 얻으려는 왕건과 견휜이 이곳 덕룡산 자락을 배경으로 대치했을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창건 이후 미륵사에 대한 연혁은 찾을 수 없으며, 현재의 미륵사는 6.25 이후 거의 폐사되어 인법당의 모습으로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지금부터 30~40년 전에는 미륵당이라 불리면서 무속인(巫俗人)이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후 1990년대 후반에 주지 원일(圓日) 스님이 부임하여 대웅전을 비롯한 삼성전ㆍ요사채를 건립하여 가람을 정비하면서 전남의 용화도량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위치
미륵사는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산 124번지 덕룡산(德龍山) 기슭에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白羊寺)의 말사이다. (061-331-3436)
찾아오는 길
자가용
나주로 가는 길은 호남고속도로 서광주 IC와 동광주ICㆍ비아 IC에서 진입하는 세 갈래의 길과 서해안고속도로 함평 IC를 따라 나주로 진입하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모든 IC에서 대략 30~40분 정도면 나주시로 접어들 수 있으며, 순천이나 화순ㆍ영암 등에서도 1시간 정도면 쉽게 들어설 수 있다. 서울 쪽에서 출발할 경우 서해안 고속도로 함평 IC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나주로 진입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며, 다른 지역에서는 서해안 및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나주시에서 영암방면 13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영산대교를 지나 외국어고등학교 삼거리에서 23번 봉황방면 지방도로 접어든다. 봉황면 못 미쳐 와우리 삼거리에 철천리 철불좌상의 입간판이 보이고, 그곳에서 봉황농공단지를 지나 819번 세지방면으로 접어들면 왼쪽으로 덕룡산 중턱에 미륵사가 보인다. 불회사와 운흥사 방면에서 미륵사로 가려면, 나주방면으로 진입하여 송현리에서 좌회전한 뒤 819번 지방도를 따라 세지방면으로 6㎞쯤 가야 한다.
대중교통
고속버스ㆍ철도ㆍ항공 등 대도시에서 나주로 가는 여러 방면의 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다. 서울에서 출발할 경우 고속버스는 강남에서 4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며,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2시간의 배차간격으로 운행된다. 기차를 이용하려면 호남행 열차를 타고 나주역까지 4시간 정도 소요되며, 오전 7시 5분부터 오후 11시 40분까지 1시간마다 운행된다. 미륵사로 오는 버스는 광주역에서 출발하는 180번 버스가 있으며, 하루 14대 정도 운행된다.
주차시설은 대형버스나 자가용 20여 대 정도가 주차할 수 있으며, 미륵사 아래까지 진입할 수 있다. 봉황ㆍ세지에는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소형 음식점들은 있으나 잠잘 곳은 없으며, 숙박은 나주시내나 영산포를 이용해야 한다.
전남 나주시 불회사
불회사에 관한 문헌기록은 호좌남평덕룡산불호사대법당중건상량문(湖左南平德龍山佛護寺大法堂重建上樑文)불호사창건주원정국사전말사적(佛護寺創建主元禎國師顚末事蹟)일봉암기(日封菴記)불호사불량시주공덕기(佛護寺佛粮施主功德記) 등이 있다.
이중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資料)"에 기록된 ?호좌남평덕룡산불호사대법당중건상량문?에 의하면 불회사는 백제 침류왕원년(384) 인도승 마라난타가 동진(東晋)으로부터 서해안 변산반도 법성포로 들어와 먼저 불갑사(佛甲寺)를 창건하고 곧바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한다. 또 다른 설에는 신라시대 희연조사(熙演祖師)에 의해 중창 불사가 이루어 졌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이 두 설 모두 입증할 만한 유물이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아 검토의 여지가 남아 있다.
이후 조선 태종 3년(1403)에 원진 국사(元? 國師)가 3창했다는 내용이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진여문 맞은편 산기슭에 있는 고려 말 충숙왕 4년(1317)에 건립된 원진국사(圓眞國師)의 부도를 3창주인 원진국사의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서로 다른 인물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불회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의 지리서와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불호사(佛護寺)로 기록되어 있는데, 창건 시에는 ‘불호사’로 불리다가 대체로 순조8년(1808) 무렵부터 지금과 같은 ‘불회사’로 바뀌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는 1664년, 1747년, 1798년 세 차례 화재가 일어 건물은 소진되었는데, 그때마다 뒤이어 중창하였다. 이 외에 1693년에는 괘불탱화가 조성되었고,
1791년 3월 26일에는 연담(蓮潭)스님의 제자인 제해(濟海) 스님이 나한전을 상량했는데, 이 나한전은 1798년 화재 시에도 불을 면하고 건재하였으며, 이어 1799년에는 명부전이 신축되었다. 이 무렵 복원되었던 당우들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4채의 불전만 겨우 화를 면하였으며, 나머지 모든 당우와 암자들은 아군의 공비토벌작전에 의하여 완전히 소실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어려움 속에서 당시의 주지스님들이 생활의 필요에 따라 임시적으로 건립한 요사채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위치
불회사는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999번지 덕룡산 남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자세한 사항은 전화 061-337-3440/9414 불회사 종무소로 문의하면 되고, 불회사 홈페이지 w.bulhoesa.org 를 활용하면 된다.
찾아오는 길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에 위치한 불회사는 임정버스정류장 앞에서 818번 지방도를 따라 화순쪽으로 3.2km 가면 길 왼쪽으로 불회사 승강장이 있고, 오른쪽으로 작은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0.9km더 들어가면 불회사 주차장이 나온다. 숙식할 곳은 없으며, 불회사 가까운 중장터나 다도에는 식당이 있다. 대중교통은 광주 백운동에서 출발하여 남평, 도래, 다도, 중장터를 지나 불회사 입구에 도착하는 180번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 버스는 하루 12회 운행하며 1시간10분가량 소요된다.
(1) 대중교통 이용
광주에서 남평-도래-다도-중장터행 시내버스인 180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불회사 입구에 하차하는데 하루 12회 운행하며 약 1시간 10분이 걸린다. 그리고 광주에서 나주 영산포-다도-중장터행으로 가는 시내버스도 가능하다. 역시 불회사 입구에 하차하며 하루 14회 운행하며 약 1시간 40분이 소요된다. 버스 하차 후 도보로 15분 거리에 불회사가 있다.
전남 나주시 문성암
꿈에 현몽한 나주 문성암(文聖庵)
문성암이라는 이름대로 글을 매우 잘 하는 사람이 출현할 것이라는 꿈을 꾸고 사찰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과거 운흥사(雲興寺)의 암자인 문수암(文殊巖)이 있었던 곳으로 문수는 문수대성(文殊大成)이며 여기에서 문성(文成)을 따서 암자의 이름을 지었고, 문수가 지혜를 의미하기 때문에 선원 터로 적합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문수보살이 화현한 터라고도 한다.
문성암을 세운 다정스님은 죽림사와 운흥사를 오가며 수행할 때 문성암 앞의 커다란 소나무를 보고 사찰이 있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또 운흥사 초가에서 기거할 때 스님이 문성암 쪽에서 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꿈을 꾸고 절을 짓고자 결심하였다. 처음 터를 닦을 때 같이 일을 하던 보살이 꿈을 꾸었는데 불이 나서 그 불길이 하늘을 태웠다고 하는 길몽을 꾸었다고도 한다. 본래의 암자가 폐허가 된 후에는 해발 200m정도의 산 속인데도 물이 넉넉하여 논으로 경작되어 왔는데 지금도 특히 물이 좋다고 한다.
다도면 소재지에서 818번 지방도로를 따라 화순 도암면 방향으로 향하면 장암교에서 암정리 강정마을 진입로가 보인다. 여기에서 다시 진입로를 따라 약 3km 가서 강정저수지를 지나가면 길 좌측에 운흥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을 따라 올라가면 문성암이 나타난다. 문성암 입구까지는 180번 버스가 다닌다. 나주 남평에서는 차량으로 약 20여분 소요된다
전남 나주시 운흥사
운흥사는 1711년 월화 탄천(月華 坦天)이 지은 『덕룡산운흥사사적(德龍山雲興寺事蹟)』, 1775년 정석계(鄭石溪)가 쓴 『운흥사진여문중창기(雲興寺眞如門重創記)』, 「도성암육창기(道成庵六創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통해 그 연혁을 살펴볼 수 있다.
창건은 신라 효공왕대(孝恭王, 897~912)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초막을 지은 뒤 사찰명을 도성암(道成庵)이라 하였다. 이후 1018년(순종 9)에 보도화상(普徒和尙)이 중창하고 1126년(인종 4)에 중국인 도학(道學) 스님이 사찰을 복원하였다. 1573년(선조 6)에 원풍(元豊) 스님이 현감 이등, 수좌 유운숙(柳雲叔) 등과 힘을 합쳐 4중창하고 1684년(숙종 10)에 5중창하였다. 1694년(숙종 20)과 1702년 두 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용화당ㆍ만월당ㆍ지장암 및 본사의 법당과 요사채 380여 칸이 소실되었으며, 1711년(숙종 37) 축현(竺玄)ㆍ일해(一解)ㆍ취성(就性)ㆍ석한 등 네 스님이 시주금으로 대웅전과 진여문ㆍ칠성각을 개창하고 요사채를 복원하였고, 1758년(영조 34)에 보령화상(普玲和尙)이 수좌 서국강(徐國綱), 호장 강담(姜淡)과 함께 중창하였다.
한편 사찰의 명칭을 살펴보면, 1565년에 조성된 「지장보살조성발원문」과 『동국여지지』에서는 웅점사(熊岾寺), 18세기 중반에 기록된 『여지도서』에서는 웅치사(熊峙寺)로 표기하고 있어, 초창시의 도성암에서 어느 시기엔가 웅점사로 바뀌었다가 다시 웅치사로 개칭한 것으로 여겨진다. 『운흥사사적』에는 사찰에 빈번한 화재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찰명인 ?웅(熊)?자 아래에 불 화(火)가 있는 탓이라 하여 ?운(雲)?자로 바꿨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16세기까지는 웅점사였으나 그 뒤에 웅치사로 고쳐 부르다가 18세기 후반 들어 운흥사로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에는 380여 칸의 웅장한 규모를 갖춘 사찰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전각으로는 고법당(古法堂)을 비롯하여 응진당(應眞堂)ㆍ신법당(新法堂)ㆍ약사전ㆍ미타전ㆍ보현전 등 15채의 건물과, 요사(寮舍)로서 동상실(東上室)ㆍ서상실(西上室)ㆍ선당(禪堂) 등 10채의 건물이 있었으며, 산내암자로는 동암(東庵)ㆍ소포암(小浦庵)ㆍ학수암(鶴壽庵)ㆍ원통암(圓痛庵) 등 20암자가 운흥사 주위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운흥사는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가운리에 위치하고 있다.
찾아오는 길
자가용
나주로 가는 길은 호남고속도로 서광주 IC와 동광주ICㆍ비아 IC에서 진입하는 세 갈래의 길과 서해안고속도로 함평 IC를 따라 나주로 진입하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모든 IC에서 대략 30~40분 정도면 나주시로 접어들 수 있으며, 순천이나 화순ㆍ영암 등에서도 1시간 정도면 쉽게 들어설 수 있다. 서울 쪽에서 출발할 경우 서해안 고속도로 함평 IC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나주로 진입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며, 다른 지역에서는 서해안 및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된다.
나주시내에서 남평방면 1번 국도를 따라 화순 쪽으로 진입하다가 신제 삼거리에서 818번 지방도로를 따라 다도면으로 접어든다. 그곳에서 화순 도암면 방면으로 난 818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장암교에서 암정리 강정마을로 들어서는 진입로를 따라 약 3.5㎞ 지나면 강정저수지와 운흥마을이 나오고, 마을을 조금 지나친 곳에 석장승이 좌우로 서있는 운흥사를 찾을 수 있다.
광주에서 올 경우는 나주방면 1번 국도를 따라 신제 삼거리에서 818번 지방도를 타고 찾아오면 되는데, 그곳에서부터 줄지어 서 있는 『녹야원』 표지판이나 『운주사』 표지판을 쫒아오면 쉽게 해남의 고찰인 운흥사를 찾을 수 있다. 대형버스는 일주문 옆 공터에 2대 정도 주차할 수 있으며, 자가용은 운흥사 요사채 아래에 10여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다.
대중교통
고속버스ㆍ철도ㆍ항공 등 대도시에서 나주로 가는 여러 방면의 교통편을 이용할 수 있다. 서울에서 출발할 경우 고속버스는 강남에서 4시간 20분 정도 소요되며,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2시간의 배차간격으로 운행된다. 기차를 이용하려면 호남행 열차를 타고 나주역까지 4시간 정도 소요되며, 오전 7시 5분부터 오후 11시 40분까지 1시간마다 운행된다.
전남 나주시 죽림사
죽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 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죽림사 사적(事蹟)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 경진년(서기 440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종죽암(宗竹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인 죽림사기(竹林寺記)에도 죽림사의 창건연대가 눌지왕 경진년(서기 440년)으로 되어 있다.
1983년 극락보전 수리 때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 16과와 청동불두가 발견되어 죽림사는 적어도 통일신라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죽림사 사적(竹林寺 事蹟)과 죽림사기(竹林寺記)에는 아도하상(阿道和尙)이 440년(백제 비유왕 14)에 종죽암(宗竹庵)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다. 죽림사기에 의하면 창건시의 규모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7전, 3당, 2실, 3요, 6암, 1사가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극락보전, 영산전, 삼성각 등의 전각과 염화실, 청향각, 회심당 및 수각 등의 요사가 있다. 그리고 부도 5기, 대형 맷돌, 석불좌상 등이 있다.
광주-나주 간 국도를 따라가면 남평읍에 못 미쳐 지석강 다리를 건너기 직전 화순 도곡온천으로 가는 도로가 나오는데 이 도로를 1km쯤 가다가 남쪽으로 꺾어져 영천교를 지나 좌측 길을 따라 2km 들어간 계곡 속에 위치한다. 또 나주에서 남평읍을 거쳐 광주로 오가는 180번 버스가 있다. 남평읍에서는 택시를 이용하거나 승용차로 들어와야 한다
전남 화순군 만연사
만연사는 척불사상(斥佛思想)이 한창이던 조선시대 초기에도 자복사(資福寺)로 남아 있었을 만큼 비중 있는 고찰이다. 그러나 이 절에 관한 문헌이나 사적비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만연선사가 창건하였다는 설화만이 전하고 있다.
만연사 창건주로 알려진 이 만연선사는 실제로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설화에서 “조계산 송광사로 돌아가던 선사가 무등산 중봉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던 길에” 만연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은 송광사와 관련이 있는 스님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수선사 제6세인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冲止, 1226 ~ 1293)스님의 『원감록(圓鑑錄)』에 보이는‘만연선노(萬淵禪老)’‘만연지공(萬淵之公)’이라는 인물이 바로 이 만연선사일 것으로 추측된다.
즉 『원감록』에는 충지스님이 만연선노와 만연지공에게 보낸 몇 편의 시(詩)가 전하는데, 충지스님이‘선노(禪老)’니‘공(公) ‘등의 존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면 충지스님보다 최소한 20~30년 이상의 선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만연사는 조계산 수선사 창건주 보조국사 지눌의 사리탑을 모신 곳이고, 수선사 제2세인 진각국사 혜심(慧諶)의 비석과 영각을 모셨다”는 것은 이 사찰의 창건 시기를 혜심의 재세 전후로 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셈이다.
또한 수선사와의 관계가 특별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추정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그리고 고려 말기에는 향나무로 삼존불상과 십대명왕상, 16나한상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사찰은 고려시대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6년(1406)3월까지 조계종. 총지종. 천태소우종. 화엄종. 도문종. 자은종. 중도종. 남산종. 시흥종. 신인종 등 11종만 존재하고 태종 7년에는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총남종. 시흥종 등 7종만이 남게 되었다. 이후 세종 6년(1424)에 교종·선종의 양종으로 통폐합될 때까지 만연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즉 전국 총남종 8사 중의 하나로 나주 보광사(普光寺). 창평 서봉사(瑞峯寺). 인제 현고사(玄高寺) 등과 함께 남게 되었다.
광주에서 화순까지는 12km이고, 화순읍에서 만연사까지는 4km이다. 광주시내버스(17, 117, 118, 126번) 화순교통(200, 217, 218번)이 화순읍까지 수시로 운행한다. 화순읍에서 만연사까지는 도보 또는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광주광역시 신광사
원래는 광주시 동구 지산동 조선대학교 교내에 있었는데, 1991년 북구 두암동 현재의 위치로 옮긴 대한 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이다. 새로이 대웅전, 삼성각, 반야당, 무설당, 일주문 등의 전각을 세웠다.
이 절에는 객승과 94세, 89세, 75세 된 노인과 연고 없는 대학생, 여고생, 초등학생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면서 여법하게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신광사는 국태민안과 호국영령을 위하여 매년 제를 올리고 있다.
고속도로 동광주IC에서 광주 순환도로로 들어간 후 두암지구에서 나가서 우회전을 세 번하게 되면 다시 순환도로 아래로 무등산 방향으로 가게 된다. 순환도로와 인접한 곳에 신광사가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