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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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어른을 가르치는 수도 있다. ‘가르친다’는 것을, 꼭 말로 드러내어 가르치는 것으로 새길 필요는 없다. 한 사람이 어느 곳에 새로 들어와 살면서 무심코 그곳을 바꾸어 놓는 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로 (그곳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곳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곳 사람들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그다드 카페”라는 영화를 보면, 뚱뚱한 독일 여자가 미국의 어느 사막 지대에 위치한 황량한 주유소 마을에 들어와, 그곳을 완전히 딴 곳으로 바꾸어 놓는다.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영화를 보면, 바베트라는 여자가 북구라파의 어느 (또) 황량한 바닷가에 위치한 삭막한 목사관(牧師館)에 들어와, 그 집을 온기와 생기가 넘치는 곳으로 바꾸어 놓는다. 마술 같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런 마술을 부리기도 하는 것이다. “빨간머리 앤”을 생각해 보라. 앤을 입양한 마릴라 아주머니와 매튜 아저씨는 분명히 경우 바르고 성실한 사람들이었지만 행복하지는 않은 사람들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던 그들을, 보잘 것 없는 입양아 아이가 송두리째 바꾸어 놓지 않는가? 어렸을 때 보았던 영화로 “길은 멀어도 마음만은” 역시 그런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한 쌍의 남녀는 남자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하였지만 아이까지 낳고 한 동안 잘 살았다. 남자는 죽고 여자 혼자 아이를 키웠다. 죽은 남자의 아버지가 아이(자기 손자)를 요구하였고 여자(아이 어머니)는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여 아이를 할아버지에게 보낸다. 영화는 아이와 아이 어머니 사이의 이별과 그리움, 상봉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와 아이 할아버지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영화를 볼 수도 있다. 지체 높고 부자이며 고집 세고 외로운 할아버지가 손자로 인해 변해가는 것이다.
내가 내 조카아이로 인해 변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아이가 삼례 우성 아파트를 무심코 변화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아이는 적막하던 집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내 생활에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두 사람의 동거에 관한 글을 내가 이미 여섯 편이나 썼다는 사실이 증명한다. 나는 방금 웃음 띤 얼굴로 그 여섯 편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3개월은 너무 짧은 기간이었나? 나는 예전 생활로 돌아왔다. 며칠 전에 아이가 서울로 돌아갔다. 모의고사를 보고 점수를 확인한 후 ― 국어 과목의 점수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 공부 계획을 바꾸어 학원에 등록하기로 한 것이다. 역시 3개월은 너무 짧은 기간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아이가 나를 전혀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이와 3개월을 지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종종 와이프 생각을 했다.
사실은, 내 동생(내 조카아이의 아버지)도 한 동안 나에게 와서 지낸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정확한 연도를 알아보기 위해 나는 인터넷 검색창에 “이웅평 귀순 일자”라고 처넣었다. 1983년 2월 25일. 동생이 우리 집에 있을 때 그 사건이 일어났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연도는 다른 식으로 추리해 볼 수도 있었다. 내 동생은, 1년이나 다닌 학교를 때려치우고 재수를 하기로 결심하였으며, 바로 그 때 나한테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자 ― 내 동생과 내 조카아이 ― 는 같은 이유로, 그리고 같은 시기에 나한테 왔던 것이다. 자기들의 고등학교 동기들은 대학교 2학년에 막 진학하거나 진학해 있을 때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운 시절을 맞이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본인의 사소한 실수나 어쩔 수 없는 불운으로 큰일을 그르치는 등 속상하고 억울한 경험을 하기 마련이다. 내 동생은 아들을 나한테 보낼 때, 아들이 자기와 거의 동일한 경험을 하면서 거의 동일한 인생 경로를 밟는다면서 안타까워하였다. 동생은 “형한테 와서 지내기로 한 것까지 똑같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똑같은 것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부자는 공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너무 일찍 돌아갔다. 지난번에 동생이 계산해 본 바에 의하면, 동생이 내 집에서 지냈던 기간은 단 두 달이다. 이것이 나에게는 평생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부자 사이에는 차이점도 있다. 조카아이는, 자기가 먼저 큰아빠한테 내려가 있겠다고 말했으며, 자기 계획과 자기 결정에 의하여 돌아갔다. 내 동생은 내 결정에 의하여 돌아갔다. 내가 돌아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동생 입장에서 볼 때 기가 막히는 것은, 돌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오는 것도 지 형이 결정했기 때문이다. 지 형이, 자기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자기를 지 형 집으로 데리고 갔던 것이다. 부자 사이에는 다른 차이점도 있다. 그 사이에는 30여년이라는 긴 세월이 놓여있지 않는가? 조카아이는 아버지의 지원과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 유명 기숙학원의 수강료와 강남의 과외비 액수를 듣고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내 동생은 그렇지 못한 형편이었다. 30여년 전, 미안하다, 돌아가야겠다고 동생에게 말할 때, 나는 이런 것, 저런 것을 생각하면서 차마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2
참으로 뼈아픈 기억이지만,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뼈아픈 것, 종신토록 뼈아픈 것이 하나 더 있다. 아니, 최근 들어 하나 더 생겼다. 그 때 나는 동생을 그렇게 보내면서, 이런 것이 결혼생활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집 사람을 많이 원망하였다. 이 사람은 시동생을 아끼지 않는구나. 이 사람은 맏며느리로서의 책임감 같은 것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구나. 이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이 집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구나. 나는 대놓고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저 아이가 지금은 저러고 있어도 몇 년 안에 실력자가 되어 나타날텐데, 당신,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소?
나는 그 때 중학교 교사였고, 우리는 내 직장에서 가까운 광명시 철산리에 살았다. 11평짜리 주공 아파트. 요즘 사람들은 11평짜리 아파트라는 것이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있었다. 정말 작은 아파트이다. 거실은 없다. 안방은 그런대로 넓었으며 내 공부방으로 쓴 작은 방이 한 개 더 있었다. 언제 이야기를 들어보니, 병진형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바로 그 단지에서 살았는데, 병진형에 의하면 그 아파트는 연탄을 땠다. 그 때 막 태어난 큰 아이를 포함해 세 식구가 거기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네 식구가 된 것이다. 내 동생이 물론 작은 방을 썼다.
나는 당사자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동생을 데리고 왔다고 말했지만, 그 때 나는 또 다른 당사자인 집사람과도 상의하지 않았으며 상의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줄 알라고 통보를 하였다. 젊은 녀석이 상당히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것 같다. 그 아파트는 연탄을 땠다는 말을 듣고도 나는 연탄아궁이나 연탄보일러의 모습을 회상해내지 못했는데, 그것은, 나는 한 번도 연탄을 갈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설거지를 포함하여 일체의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웅평이 미그기를 타고 넘어온 날, 나는 동생을 데리고 수퍼에 가서 라면을 두 박스 사오면서, 당시 수색에 사시던 부모님 생각을 하였지만, 아들 없는 집의 맏사위임에도 불구하고 장인, 장모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런 무심한 남편은 아침이면 일어나 출근을 해버리며 퇴근해 돌아와서는 이것저것 수발들 것을 요구한다. 20대 중후반의 새댁은 아기까지 업고 종종걸음으로, 이제는 도련님의 수발까지 들어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는 중에 차츰 날도 더워지기 시작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상황에서 집사람이 나에게 SOS를 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 때, 저 아이가 몇 년 안에 실력자가 되어 나타날 것이라는 말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더 심한 말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말에 담긴 원망의 마음을 상당히 오래, 아니 너무 오래 간직하였던 것 같다. 동생이 돌아간 후 집안은 평온을 되찾았지만, 나는 말수가 줄어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일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당시의 나의 모든 어리석은 행동과 나의 속 좁은 마음을 후회하고 반성하였다. 집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나 하나 믿고 부모, 형제를 떠나 이 집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는가? 그러다가 최근 들어, 나의 후회와 반성의 마음은, 집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한층 더 크게 확대되었다. 조카아이가 내려온 뒤부터의 일이다. 몸소 경험해 보니, 분명하게 알겠더라. 같이 살지 않던 사람과 같이 살기 시작하는 것은 녹록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이것은, 새로운 동거인이 얼마나 매너가 좋은가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며, 내가 새 동거인을 얼마나 아끼는가 하는 것과도 거의 관계없는 것이다.
사실, 나는 조카아이에게 해 준 것도 거의 없으며 희생한 것도 거의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이렇게 엄살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집사람에게 가지고 있던 원망하는 마음, 섭섭한 마음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나는 집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며 완전히 양해한다. 나는 집사람을 완전히 용서한다. 그러나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은 내 쪽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집사람에게 용서를 구한다.
집사람이 어렸을 때 좋아하던 희곡작가인 유진 오닐의 작품 중에 “밤으로의 긴 여로”라는 것이 있다.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오닐의 자전적인 작품으로, 여기에서 오닐은 자신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그리고 있다. 연극은 하루 동안에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수십년 동안의 사건을 다룬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 등장인물들은 계속하여 예전의 일을 회상하는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목에 나오는 ‘길고 긴 낮’은 그 하루 낮을 가리키기도 하고 가족사를 이루는 수십년을 가리키기도 한다. 아뭏든 오닐은 그 작품을 “가족에 대한 동정과 이해와 용서의 마음으로” 썼다고 한다. 만약 집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도 이제는 연륜이 쌓이고 또 그만큼 여유도 생겼을테니, 우리 부부는 조카아이를 더 잘 돌보아, 더 오래 우리 집에 머물게 했을지도 모른다. 조금씩 조금씩 어두워지다가 깜깜한 밤이 되었다. 외출하였던 식구들은, 그래도 여기밖에 없다는 듯이, 모두 귀가하였으며, 그들 입에서 하루 종일 쏟아져 나왔던 독한 말들, 서로의 상처를 헤집는 독한 말들도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내 기억에 의하면, “밤으로의 긴 여로”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층에 있던 여주인공 ― 그 집안의 어머니 ― 이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장면으로 끝난다. 암전.
첫댓글 거참 사람 가슴을 먹먹하게하는 글이네.. 영태 자네 부인께서는 하늘에서 다 용서하셨을꺼야. 아니 가시지기 전에 이미 다 이해하고 섭섭한 감정 없이 가셨겠지..용서를 구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던데 조카 녀석이 존경하는 큰아버지에게 큰 용기를 북돋아 주었구나..얼마 남지 않은 대학 시험에 조카가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를 기원해본다~~
容恕!
저도 글을 읽으면서 순간 학준 兄 마음과 같이 울컥했소이다.
영태 교수님이 조카를 집으로 보냄과 동시에, 떠오른 아내 생각.
떠난 사람들의 빈자리를
보면서 느꼈을 空虛感.
아내뿐이 아니라 동생과
조카에 대해서도 容恕를 구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 했습니다.저도 제가 容恕를 구해야 할 많은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나도 영태처럼, 아니 보다 많이 아내에게 섭할 일 많이 했는데... 공감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