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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과거사 위원회는 조작 위원회(부제, 1차 인혁당 사건) |
지난 7일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오충일/진실규명위원회 위원장)는 '1차 인혁당 사건'(1964년)과 '인민혁명당(인혁당)재건' 사건 및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당시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임을 공식 발표했다.
오충일 위원장은 "당시 간첩 혐의를 받던 관련자들의 진술이 고문으로 어떻게 달라졌으며, 이 중 8명의 사형이 선고 18시간 만에 집행된 과정 등을 밝힐 것”이라며“집권자 의도에 맞춰 고문 수사라든가 여러 형태가 있었고, 발표 내용이나 시기도 그렇게 돼 있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 유족들은 의문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2002년 12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으며,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의 발표가 있자 기다렸다는듯이 '인혁당 사건' 재심 청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23부는 27일 재심결정을 내렸다.
정권 연장을 위해 조작된 사건으로 몰아 부치는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의 발표에 우익진영에서는 속수무책으로 타는 가슴만 쓸어내리며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현실이 참담하기만 하다.
1. 1차 인혁당 사건 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기자회견으로 비로소 세상에 공개된다. 사건의 요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남한 내 지하조직 으로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함과 동시에 학생데모를 4 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케 함으로써 현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로부터 피의자와 조사자료를 넘겨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3명은 '인혁당사건의 피의자들이 간첩활동을 했다는 구체적 증거가 없다' 라는 이유로 불기소 의견을 고집하며 사표를 제출했으며, 이후 검찰의 서명기소로 도예종, 양춘우, 박현채 등에게 징역 1년 등을 선고 했고 결국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을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일회담반대 시위를 잠재우기 위한 공작으로 허구의 김영춘이라는 가공 인물과 인혁당이라는 가공 정당을 조작하여 간첩사건을 만들었다는 공격을 받게된다.
인혁당사건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4.19 이후의 통일운동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기에 당시 통일운동을 주도하던 단체에 대해 간략히 기술한다.
민민청(민주민족청년동맹) 1960년 4월 12일 부산상공회의소 강당에서 결성됐으며 주도세력은 부산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이종률과 그의 제자인 김상찬,하상연 등으로 아마추어 들이 많이 참여한 대중조직으로 출발한다.
통민청(통일민주청년동맹) 1660년 7.29 선거 이후 결성된 혁신정당 중에서 가장 급진적 세력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사회당의 외곽조직인 청년조직으로 프로페셔널한 인물들이 많았다. 사회당은 "수탈과 억압이 종식되는 사회주의적 사회를 건설할 것을 궁극적 이념으로 한다"고 주장하며 중요 산업의 국유화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사회당은 근로인민당, 남로당, 빨치산활동 등의 전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호남출신 인맥이 많고 좌익 전력이 있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활동을 하거나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했다. 통민청은 공개조직과 비밀조직의 이원적 구조로 호남지역 빨치산 출신 인맥과 경남 양산(동래고보 출신 중심) 인맥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박현채는 호남 출신 사회당 인맥을 통해 통민청 비밀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박현채가 비밀조직원으로 활동한 이유는 빨치산경력에 따른 신원문제 였을 것이라는 증언이 있으며, 민민청 활동을 했던 김달수는 박현채는 우동읍(우홍선), 이재문 등과 함께 사회당-통민청 인맥이라는 것은 1964년 인혁당사건 이후 알 만한 사람들이 사이에서는 대부분 잘 알려진 사실이며 통민청의 조직사업은 주로 우동읍(우홍선)이 담당하고 이론가 역할은 김배영이 담당했다고 증언했다.
통민청은 남로당 세포출신이며 근로인민당 출신의 사회당 조직부장인 최백근(실질적으로 사회당 조직확대에 가장 크게 기여한 자)의 비서출신인 김배영, 우동읍(우홍선), 김낙중, 김영광, 이재문 등이 주도했다.
민자통(민족자주통일협의회) 1961년 2월 25일 결성.
민자통의 실무진이라 할 수 있는 부장급은 대부분 민민청과 통민청의 청년들이 맡았기 때문에 사실상 민민청과 통민청의 통합이라 할 수 있다. 민민청의 도예종은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김상찬은 조직부장, 하상연은 선전부장, 김달수는 조직부장, 통민청의 우동읍(우홍선)은 조직위원회 간사, 김배영은 조직부 차장, 최백근은 서울시협의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했으며 민자통 조직의 운영을 담당한 중요 간부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해방후 좌익단체의 활동을 하던자들이 주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예로 민자통 조직위 부위원장인 도예종은 1964년 인민혁명당(인혁당)사건 또는 1974년 인혁당재건위사건의 핵심이었고 민자통과 관련 있는 이재문은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사건의 핵심이었다.
민자통이 1961년 5월 13일의 서울운동장에서 주최한 남북학생회담 및 통일촉진궐기대회에 학생 대표로 연단에 선 경희대생 이수병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으며,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이수병 평전 (인혁당재건위 변혁운동지도자)라는 부제의 도서를 출간하는 등 금년 4월 8일 천주교 인혁당 대책위 주관, 대경지역 민주동문회 인혁당대책위, 전국 민족민주열사 추모사업회 연대회의, 4월혁명회, 민청학련기념사업회,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천주교 인권위원회 주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후원으로 30주기 추모행사를 개최하는 등 이수병의 못다 이룬 자주,민주,통일의 꿈을 경희학원의 전 민주역량이 단결하여 실현해 나가야 한다며 친북좌익 반역세력이 총망라하여 선동하고 있다.
1960년 11월 18일 서울대에서 결성된 이후 1961년 5일 5일 전국 17개 대학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민통전학련) 결성준비대회를 갖고 남북학생회담 개최를 요구한다. 이수병은 민통련(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의 전국조직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민통련은 학생본연의 순수성을 잃지 않기 위하여 민자통이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남북학생회담 및 통일촉진궐기대회 사전통고 없이 참가거부한다. 민족일보 1961년 5월 13일자 광고란에는 서울운동장집회 연사 명단 중 학생은 류근일과 이수병 둘이었으나 실제로는 경희대 민통련 대표인 이수병만이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다.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로 구속된 인물은 도예종(40. 무직), 박현채(30. 서울대 강사), 정도영(39. 합동통신 조사부장), 이재문(31. 대구 매일신문 기자), 허표(31. 부산 봉래초등학교 교사), 박상흥(45. 서적상), 김경희(27. 민중서관 사원), 전무배(33. 서울신문 기자), 박중기(29. 한국여론조사 취재부장), 양춘우(29. 무직), 서정복(24. 서울문리대 철학과 4년), 김정강(25. 서울문리대 정치과 3년), 김정남(22. 서울문리대 정치과 3년), 김중태(24. 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현승일(21. 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김도현(21. 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김승균(26.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4년)이다.
수사발표에 등장하는 김영춘을 제외하고는 민민청내의 암장그룹과 대구,경북그룹(김금수, 도예종), 통민청그룹(우동읍<우종호>, 김배영, 김영광, 박현채)이 주축이며 비교적 사회적 명망이 있는 임창순, 정도영과 민통련 활동을 했던 대학생출신그룹(김승균, 황건<전 사월혁명회 의장>)과 서울문리대 중심의 한일학생회담반대운동그룹(김정남, 김중태, 오병철, 현승일, 김도현 등)이 관련되 있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일단 1차 인혁당사건의 관련자 면면을 보면 민민청과 통민청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던 그룹이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영춘(본명 김세진)은 김봉춘이라는 또 다른 가명으로 영남일보에 기고 활동을 했으며, 당시 편집국장이던 이영세와 도예종 등은 김세진을 만난 적이 있다고 하며, 여러 가지 정황상 김세진의 신원에 대해 알았을 가능성이 크나, 인혁당 관련 생존자들을 최근까지도 김영춘의 정확한 실체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공산당들의 조직체계를 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김영춘이 가공 인물이라는 억측은 90년대 들어 미전향 장기수들의 증언으로 김영춘(본명 김세진)은 남로당계 인물로 해방 직후 예천에서 문학가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6.25때 월북, 4.19 직후 남하하여 대구에서 64년까지 영남일보(민족일보와 같은 성격)에 근무하며 이때 김봉춘이라는 가명도 함께 사용했고 1차 인혁당사건이 발생하자 도피했으나 70년 가족간첩단 혐의로 체포되어 72년 대구교도소에서 사형집행 당한 실존 인물로 인혁당을 창당한 것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인혁당사건에 참가했던 김세원은 '인혁당은 김영춘에 의해 창당되었으며,사회당에서 민자통으로 이어지는 전위당이었다' 라고 증언했으며, 두 차례 사건의 동시관련자 중 생존자인 김한덕은 "2차 인혁당은 분명한 조작이며, 1차 인혁당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고 증언했고, 생존해 있는 또 다른 증인인 김지형도 2차 인혁당은 완강히 부인해도 1차 인혁당의 존재는 부인하지 않았다.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김정강의(80년 전향, 현재 자유평론가로 활동) 회고에 의하면 "서울대 내에 불꽃회를 조직하고, 도예종의 지령에 의해 지하조직을 전국적으로 구성하기 시작했죠. 64년초까지 서울, 대구, 부산, 광주 지역의 각 대학에도 서울대와 같은 규모로 키웠습니다. 그러나, 검거되어 조사 받을 때 경찰은 '전국학생동맹'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인혁당사건은 확대되지 않고 나는 단지 ‘북한찬양’의 혐의만 받게 되죠." 라는 회고를 보더라도 1차 인혁당의 존재는 확실하다.
오래전 이렇게 엄연히 밝혀진 사실을 두고 한홍구는 "김영춘은 4·19 직후 사회대중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한 전 동아대 교수 김상한이며, 남파간첩으로 월북한 게 아니라 거꾸로 박 정권으로부터 지시받고 북파됐다."고 부인했다. 김배영도 인혁당 사건 발생 3개월 뒤에 월북했지만 중정은 그의 행적조차 모르면서 사건에 개입된 것처럼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는 것이 진실위측의 판단이라며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김형욱의 회고에 의하면 김영춘은 김배영의 가명으로 일단 발표해두고 추이를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며, 정보당국 역시 김영춘의 실체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김영춘이 배후에 있다는 확증은 가지고 있었으나 실체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세진의 수사과정에서 비로소 김영춘의 실체가 김세진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1차 인혁당 관련자의 증언에 의하면 1차 인혁당 관련자들은 한국이 신식민지체제이며, 5.16쿠테타를 통해 미국이 경제적 지배의 역할을 일본에게 이양하는 과정이 한일회담이라는 일반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60여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민족끼리 자주 통일을 외치는 자들의 인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인혁당사건 생존자들의 증언과 여러가지 정황상 인혁당의 존재 부정은 근거없는 억측임이 분명히 밝혀졌다. 다음에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얽힌 억측을 풀기 위해 당시 2차 인혁당 사건 복역수들과 같이 긴급조치 위반사범으로 복역했던 우익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실체를 밝혀보고자 한다. |
첫댓글 안타까운 현실에 치를 떨다가, 물 한잔에 속을 달랬습니다. (이 게시물 옮깁니다)
인혁당사건 무죄선고는 좌파들의 전형적인 포퓰리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