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저녁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추운 저녁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시골집 대문 앞에서 나를 기다릴 것만 같다 승훈이냐? 어두운 대문 앞에서 키가 작으신 어머니가 오바도 없이 가는귀가 먹은 어머니가 추운 골목에서 나를 기다릴 것만 같다 나는 기차를 타고 어머니 계신 마을로 내려간다 시작도 끝도 없다 시작과 끝은 모두 어머니다
- 시집〈너라는 햇빛〉세계사 -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생각난다면 철이 들었다는 거다. 늙었다는 거다. 나도 너도 없고, 시도 시적인 것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다며 줄곧 무의미시와 비대상시와 환상시를 써왔던 '아방가르드한' 시인에게도 어머니는 의미와 대상이 실재한다.
작고, 외투도 없고, 가는귀도 먹은 채 어둔 '시골집 대문 앞에서' 아직도 기다릴 것만 같은,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은 없음의 가치 때문이다. 없고, 없고, 없다면 그 없음의 화신이 어머니다. 우리가 평생 겪는 없음의 숙주가 어머니고, 우리 삶의 모든 불화와 고통, 기쁨과 희망이 나를 있게 한 어머니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없다면 이런 없음의 가치, 부재의 가치, 폐허의 가치조차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멸의 이름이 어머니다. 추운 겨울 저녁이면 '돌아가신' 어머니가 더 생각나는 이유다.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Seis (Studio Version) · Hiroco.M · Hiroko Muraka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