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말 서양의 군사기술이 동양보다 더 진보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단순히 용도가 다른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이건 어느쪽이 옳다 그르다를 쉽게 판단하기가 매우 어려운 복합적인 문제라는 겁니다. 저는 정황상 서양의 군사기술(즉 자신들의 목적에 더욱 잘 부합되는 병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종합적으로 봤을 때 더 '진보'한 것이었을수도 있었다고 봅니다(그리고 동시에 그 반대였을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전 역사에 대한 단정적 판단을 할만한 경지에는 아직 한참 못미칩니다.). 왜냐하면 관료제적 안정을 통해 직업군대간 군사적 충돌이 드물었던 동양에 비해, 서양의 봉건체제하에서의 군사적 경쟁이 더 격렬했고 지속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가지는, 동양의 경우 대립하는 주요 세력들간(유목민vs정착민)의 과학기술수준(전투기술이 아니라) 차가 확연했다는 점입니다. 경쟁은 경쟁주체들의 실력이 비슷할 때 가장 빠른 속도의 진보를 낳습니다. 자, 그럼 오늘의 주제인 공성전 기술로 넘어가 봅시다. 중세말 동양의 투석식 공성무기가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해 있었다고 일단 보고, 그렇다면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대략 두가지정도의 요인이 있었다고 봅니다. 첫째는 대개 공성전에서 공격자였던 유목민들은 뛰어난 공성무기를 제작할 만한 여건이 안되었다는 점입니다. 반면 수비측인 중국에선 수성만 하면 되었으므로 공성무기를 개발할 필요성을 별로 못느꼈습니다.(대신 수성시에 유용하게 쓰이는 발사무기나 화학무기를 발달시켰죠.) 물론 수백년에 한번씩 왕조교체시기에는 중국 내부에서의 공성전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나 이는 그야말로 수백년에 한번씩만 일어난 것이었기 때문에 공성전 기술이 지속적으로 축적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반면 비슷한 기술수준을 지닌 영주들간의 소규모 전쟁이 쉬지않고 지속되었던 서양은 기술축적에 유리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죠. 동양에서 공성전 기술은 문명권 내에서의 대등한 기술수준을 지닌 세력들간의 전쟁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던 춘추전국시대에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지만(이시기의 공성전 기술은 동시대의 유럽을 능가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진나라 이후 중앙집권적 통일왕조가 지속되면서 정체되었는데 이는 공성전 기술의 발달을 촉진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시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가지는 아래의 포스트에서 논의한 동서양의 전쟁상황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동양의 성들은 국지적 거점방어가 아니라 전략적 지역방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전체적인 규모는 더 컸지만 부분적으로 봤을 때는 영주의 거처보호에 올인했던 서양의 성들에 비해 공격이 용이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 동양의 성들은 수비범위가 넓었지만 부분부분이 약했다는 단점이 있었고 서양의 성들은 부분부분은 강했지만 수비범위가 좁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부분부분이 강한 서양식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역시 더 강력한 공성무기가 필요했겠죠. 그리고 전쟁의 동원병력이 동양은 많고 서양은 적었던 것도 서양의 공성기술을 촉진한 한 요인이었을 겁니다. 예컨대 동양의 투석기는 인력으로 줄을 잡아당겨 발사하는 원시적인 방식을 오랫동안 채택했지만 서양의 투석기는 도르레나 톱니의 원리 등을 사용하여 되도록 적은 인원으로도 조작가능하게 하고자 고심한 흔적이 많습니다. 이는 성벽은 높으니 강력한 투석기가 필요한데 그걸 쏠 인원은 부족하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발전이었습니다. 동양에서는 뭐, 남아도는게 인원이고 성벽도 낮으니 굳이 그렇게 만들기 어려운 복잡한 무기를 개발할 필요성을 못느낀 거죠. 그런무기를 개발을 했어도 별로 쓰고싶지가 않았을 겁니다. 공성무기는 운송이 어려웠기 때문에 현지에서 자체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식의 일회용 공성무기를 제작하기 위해 늘숙련된 장인들을 대동하고 매번 정교한 공작시설을 세운다는 건 상당히 거추장스러웠을 테니까요. 그렇게까지 안해도 어렵지 않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데, 뭐하러 일을 더 번거롭게 만듭니까? 수염 몇가닥 자르고자 하는 사람이 도끼를 구입할 리는 없지요.
이렇게 해서, 동양의 기술이 일종의 수요-공급의 균형에 빠져 정체된 사이 서양에서는 그들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일단 한번 이 기술적 균형을 돌파하게 되자 기술이 기술을 낳는 선순환구조가 생겨나(예컨대 일단 번거로운 무기를 제작하기로 마음먹고 계속 만들다 보면 이것을 더 효율적으로 제작하는 노하우가 생기고 이 노하우는 다시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데 적용되는 식으로) 급속한 진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군사기술의 패러다임 전환을 겪은 것이죠. 이리하여 천여년 후 동서양의 공성기술이 몽고족에 의해 다시 만났을 때 서양의 공성기술이 동양에 대거 유입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서양식의 복잡한 공성무기는, 처음 개발당시에는 동양에서 쓰기엔 비효율적인 것이었지만 서양에서 우여곡절끝에 그것을 일단 쓰기 시작하자 많은 노하우가 축적되어 마침내 '인력이 남아도는(상징적 의미에서)' 동양에서도 쓰기에 매우 매력적인 무기로까지 발전했던 것입니다. (물론 서양식 공성무기를 열성적으로 동양에 도입한 자들이, 자신들 역시 수효가 적고 게다가 서양식 성채들까지 공략해야 했던 몽고족이었다는 점, 즉 서양인들과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던 자들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들이 서양식 공성병기를 중국에서 처음 사용하자 그 효과는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때 도입된 서양식 투석기가 화약무기에 밀려 서양보다도 훨씬 빨리 사라졌다는 점 역시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볼때 동양에서 투석기가 덜 발달한 게 순전히 기술력 부족 때문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투석기를 만드는 기술 자체는 서양이 앞서 있었지만, 사회 전체의 기술수준은 그런 게 아니었을수도 있다는 거죠.)
명대 이후 동양의 기술정체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론은 고도균형론입니다. 이것은 인구폭발과 쇄국정책 그리고 이미 생활에서의 웬만한 수요는 무리없이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발달해 있던 재래기술 등으로 인해 새로운 기술도입을 자극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동양사회가 '정체'(이것도 민감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부분이라 따옴표를 쳤습니다. 사실 동양사회가 정체에 빠졌다기보다는 서양에서 혁신이 벌어졌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할 수도 있거든요.)에 빠졌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면 장기적으로는 더 큰 효용이 있겠지만 그 효용이 현세대의 개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한 기술도입의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는 식의 딜레마 상태라고 할 수 있죠. 서양에서 진행된 군사기술 혁명은, 서양사회가 잘게 쪼개지고 외부의 영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런저런 몇가지 중대한 사회적 변화들을 겪으면서 일어난 불안정성(또는 역동성)이 기술균형을 돌파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전쟁이 사회의 일부이듯이 기술역시 사회의 일부이고, 사회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전쟁이나 기술을 보려고 하면 아주 피상적인 일면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서양에서의 투석기 개량과정은, 그로부터 수세기 후에 전개될 과학혁명의 조그만 예고편이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ps1: '기술적 균형상태의 돌파여부가 그 사회의 기술패러다임을 결정한다'는 테제를 응용하면, 제가 앞서 벌인 동서양 갑옷관련 토론에서의 주제 중 하나였던 '강력한 복합활의 유무가 어떻게 그 잠재적 효용 이상으로 동서양의 갑옷/전술체계에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단서 하나를 얻을 수 있을것 같습니다. 즉, 동양의 경우 초기에 복합활과 경기병(및 그와 연관된 전술)의 발달속도가 갑옷제조기술의 발달속도에 비해 더 빠른 양상을 띠자 '활동성을 희생시키고 중갑체제로 나갈 것이냐 아니면 방어력을 희생시키고 활동성을 살릴 것이냐'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후자를 택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서양과 같은 정도의 대궁 방어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서양보다도 더 많은 활동량을 희생하고 서양보다 더 비싼 갑옷을 만들었어야 했을 테니까요. 즉 '효율성을 지니기 위한 최소수준'이 서양보다 높았다는 얘깁니다. 당시의 기술수준에선 그걸 감당하기가 어렵다보니 아예 전술체계 자체가 달라져 버렸고, 많은 진보가 이러한 경갑체제에 맞춰 진행되다 보니 나중에 기술수준이 높아져 정작 우수한 중갑을 제조할 수 있는 기초실력이 갖춰진 후에도 이미 훌륭히 발달한 경갑체제를 대체하려면 이전보다도 더욱 높아진 '효율성을 지니기 위한 최소수준'을 충족시켜야 했고 이 엄청 높아진 최소수준을 돌파하고 중갑에 투자를 할 만한 동기가 약했을 수도 있습니다. 기초기술수준이 뛰어나도 이것을 활용해서 그 기술수준에 100% 맞는 갑옷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 노력이 드는데, 이 배리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고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동기가 필요한 겁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1000만원을 투자하면 50년 후에 그 돈이 20억원으로 불어나는 금융상품이 있다고 칩시다(이자율이나 물가상승률은 제로라 가정하고.). 그런데 투자자는 50년의 기한이 다 차기 전에는 돈을 한푼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나이 스무살인 김씨라는 청년이 있는데 그가 여기에 돈을 투자하려 할까요? 안할 확률이 높습니다. 50년이란 기한동안 그 돈을 못쓰고 파파할아버지가 돼서야 부자가 되느니 차라리 그 돈을 필요할 때 바로바로 쓰는편 효용이 크다고 판단하는 편이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투자의 본격적인 성과가 나타나기까지 시간적 갭이 크고 투자자 자신이 그 시간적 공백을 감수할 동기가 충분하지 않을 때, 혹은 투자자 자신이 투자의 성과를 누릴 가능성이 불투명하다고 판단될 때, 투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동양에서의 상황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겠죠. 이미 경갑체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데, 충격전에 새로 관심을 갖게 된 황제 하나가 중갑을 새로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그러나 그럴싸한 중갑을 만들고 활용하기에는 아직 노하우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갑에 비해 상당히 '비효율적인' 수준의 갑옷이 만들어졌고, 이것을 한번 입어본 황제는 중갑의 효용에 회의를 느끼고 더이상의 개발을 중지합니다. 반면 일찍부터 중갑 위주의 전술이 발달했던 서양에서는 중갑에 대한 기술적 배리어가 오래전에 극복되었기 때문에 지속적 투자가 순조롭게 이뤄졌죠. (반면 초기에 효용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져 소홀히 다뤄졌던 원사무기 분야는 같은 원리에 의해 역시 '효율성을 지니기 위한 최소수준'이 높아져 오랫동안 발달이 정체돼 있었습니다. 활의 위력이 약하므로 활에 대한 투자는 비효율적이다->중갑 발달에 대한 큰 제약요인이 없어 중갑 개발이 순조롭게 이뤄진다->이런 중갑에 대해 활은 더더욱 무기력하므로 활에 대한 투자는 더욱 더 감소한다->결국 수백년동안 활과 관련된 전술이나 제조술은 크게 진전되지 않는다는 식의 순환이 일어났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우리나라의 조총 도입과정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당시의 조총은 장전시간이 길고 위력이나 명중율, 사거리 측면에서도 현대의 총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낙후했으며 화약조달도 그리 쉬운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상당한 위력을 자랑하던 우리나라의 활과 일대일 비교를 벌이면 조총은 상대가 안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조총을 시험해본 조선 관리들은 쓸모없다고 판단해 무시해 버렸죠. 반면 활 제조술이 대륙국가들에 비해 낙후해 있고 기타 화약무기의 수준도 뒤처져 있던 일본에서는 조총은 도입되자마자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이것이 일단 실전에 투입되자 조총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전략전술들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습니다. 조총전술의 개발과 함께 조총의 효용은 복합활마저도 훨씬 압도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된 거죠. 조총도입에 저항감을 느끼지 않을만한 최소효율점이 일본의 경우 더 낮았다는 점이, 당시의 전란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일본이 더 적극적으로 신기술을 도입하게 된 배경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기술 도입으로 일본에서 패러다임 혁신이 일어나자 일본의 군사기술은 주변국에 비해 한단계 도약을 하게 된 거지요. 최소효율점 문제로 야기되는 이런 형태의 세력역전현상은 세계사에서 빈번히 등장하던 현상의 하나였습니다.
이상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고, 이런 최소효율점 이론이 다른 요소들보다 꼭 더 결정적이었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정도로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냥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역사는 몇수 앞을 내다보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기보다는 주로 딱 한수 앞을 읽는 사람들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역사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단순하고 순리에 맞는 방향으로 흐르는 겁니다. 어떤 기술이 효용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서너수 앞을 읽어야 한다면, 대체로 그런 기술은 사회에 의해 잘 채택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혁신의 중요성이 전례없이 강조되고 사람들의 정보력이 비할데 없이 높아진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 너무 먼 미래를 내다보는 대담무쌍한 계획들은 투자가들의 외면을 받기 일쑤입니다.
ps2: 한가지 사족을 덧붙이자면, 동양의 공성전 수준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형편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찢어지게 가난하고 고증은 똥닦는데 써버린 판타지 사극의 영향으로 동양에선 성 공격할 때 맨날 가랑이 사이에 헐렁한 사다리나 끼고 왔다갔다했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굳게 자리잡혀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다고 봅니다. 사극들 볼때마다 짜증날때가 한두번이 아니더군요. 여기계신 분들이야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아무튼 자신의 영향력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대중매체만큼이나 위험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무책임한 글쓰는건 저도 마찬가지지만, 뭐 그래도 제 영향력은 땅속에 콱! 박혀있으니까요 ㅋㅋㅋ)
ps3: 어떤 대상의 유용성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은 효율성입니다. 즉 가장 효율적인 것이 가장 우수한 것이지 가장 강력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상 최강의 핵폭탄은 구소련에서 실험한 58메가톤급 수소폭탄이었습니다. 커다란 섬의 절반 가량을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력이었죠. 하지만 서방 과학자들은 이 실험소식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합니다. 암만 위력이 세어봤자 비행기로 투하가 불가능할 수가 없을 정도로 덩치가 크면 말짱 황 아닙니까? 어떤 대상의 효율성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의 고정적 스탯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사용된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소폭탄의 효용성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단지 폭탄자체의 위력뿐만 아니라 그 폭탄을 목표지점에 투하할 수 있는 장비의 수준, 외교적인 상황, 폭탄의 보관/유지비용, 상대국의 폭탄 보유여부, 상대국의 요격전력 등등 여러가지를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이때문에 똑같은 폭탄이라도 어떤 상황에선 무용지물이 될수도, 어떤 상황에선 지구정복의 열쇠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때문에 상이한 대상의 우열관계를 비교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많은 경우 별 의미도 없습니다.
한편, 기초기술이나 자원 등 기본재료의 수준 우열관계를 평가하는 건 상대적으로 훨씬 수월한 작업입니다. 수학, 물리학, 화학 같은 기초과학 지식들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동일하게 적용되며 각자의 다양한 상황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주는 기본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상황과 비교적 무관하게 효용을 발휘하는 분야라는 점이죠. 동서양의 기술수준의 '우열관계'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갑옷이나 전술 같은 응용과학 부문을 비교하는 것보다는 기초과학의 수준을 비교하는 게 훨씬 낫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과학 수준을 결정하는 것 역시 사회적, 자연적, 경제적 요인 등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장인들의 비밀결사 성격이 강했던 중국의 묵가는 춘추전국시대동안 각종 전쟁기계 제작에 참여하면서 상당한 수준의 물리학,역학지식을 축적하고 활용했었지만 한대 이후 묵가의 씨가 말라버리고 전쟁기계 수요도 뚝 떨어지면서 이들의 물리학 지식도 함께 묻혀 버렸습니다. 서양에서는 그리스/로마시대의 과학지식이 기독교가 득세하면서 메말라버리고 기초과학의 주도권을 이슬람권에 내준 사례도 있고요. 또 같은 서양이라도 근대이전의 과학적 성과들은 내내 지지부진하다가 근대들어 비로소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순수과학이 종교나 정치적 제약으로부터 자립성을 획득하고 지식 자체가 하나의 독자적인 산업이 되면서 갑자기 폭발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중세시대의 기초 과학 수준은 서양이 특별히 아랍이나 중국에 비해 월등하진 않았다고 봅니다. 분야별로 유럽, 아랍, 중국 등이 특별히 강세를 보인 부분들은 있었지만요. 근대 과학혁명 이전 세계의 과학수준은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사실 다 거기서 거기라서 누가 낫네 마네 하는 건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합니다. 해부학 같은 것도 서양에선 르네상스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이지 해부학의 꾸준한 전통이 있었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레오나드로 다빈치가 교회의 눈을 피해 해부용 시체를 구하려 한밤중 몰래 공동묘지를 파야 했다는 건 르네상스 초기의 해부학 연구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어땠다는 걸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죠.) 동양에서 해부학연구가 수행되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동양에서도 사체가 은밀히 거래되는 경우도 많았고 특히 사형수의 시체같은 건 공공연하게 해부되는 경우도 꽤 빈번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좀 유별나게 유교원리주의를 추종해서 그렇지. 사실 같은 동양이라도 변방이었던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는 전반적으로 봤을 때 상당한 수준의 기술격차가 존재했습니다. 한국과학의 수준을 동양과학의 수준과 동일시하는 건 좀 무모한 발상이라 생각합니다. 이건 마치 중세 러시아의 기술력을 중세서양기술력의 대표격으로 삼는것과 비슷한 거죠.) 식물학, 수학, 공학, 제철기술, 측량술 등등 여러 분야에서 중국과학의 성과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다만 중국과 서양의 과학기술이 워낙 오랜 시간동안 따로따로 발전하다 보니 내용과 분야가 서로 워낙 들쭉날쭉하게 달라서 양자의 수준을 비교하는 작업 자체가 상당히 어렵고 어불성설인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처럼 전세계적으로 기술이 표준화가 되어있는 상황과는 전혀 다르죠.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지금의 과학사 연구수준, 특히 동양과학사 연구수준에서 섣불리 누가 낫네 마네 하고 결론짓는 것은 매우 성급하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겁니다.
ps4: 이 글은 제 주관이 많이 들어있는 글이므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전 역사전공자가 아니라 단지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회학도라서 사회변동론 같은 분야에 대해서는 좀 아는 편이지만 구체적인 역사지식으로는 - 아마 우리나라 평균적인 대중보다야 많겠지만 - 역사전공자들과는 상대가 안될겁니다. 단지 제 글들은 제 사회학적 지식을 기초적인 역사분석에 적용해보는 습작 정도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수십 명의 병사가 한꺼번에 타고 올라가 성벽에 뛰어 내릴 수 있는 용도의 이동식 사다리인 운제도 있었고, 이동식 공성탑 역활을 하는 누각도 개발해 사용했습니다. 또, 안시성 공략 당시에는 성벽을 마주보는 크기의 토산(土山)까지 만들었습니다. 동양의 공성 기술이 그렇게까지 낙후된 것은 아닙니다.
전상용님->조총을 군기시에 보관하게 한 것만으로 조총의 효용을 크게 인정한 것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총을 처음 본 조선인들의 평가내용중에 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차라리 활을 쓰는것만 못하다고 한 내용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총이 조선에 소개된건 임진왜란 발발 한참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란시 왜군의 조총을 보고 충격을 받은 조선군의 모습만 봐도 조총이 그동안 조선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군기시에 보관한것 뿐만 아니라 조총에 대한 모든 전술적 유용성에 검토가 들어갔고 칼해님이 지적하신 것과 같이 "지금 쓰고있는 무기를 쓰는게 낫다" 라는 결론이 나온것이죠. 조선 군관들이 보기엔 총통이나 조총이나 그놈이 그놈같은 무기였을 것이고, 또한 생산단가가 더욱 더 커질게 뻔하므로 조총무장을 보류한 것이라 볼수 있습니다. 실제 일본군에게서 조총 활용법을 익힌 후에는 대규모 조총 생산에, 나중에 가선 머스켓 까지 복제하는데 성공하죠. 뭐 벨테브레가 복제한 머스켓은 "그놈이나 그놈이나 주의"로 사장당했습니다만 -ㅅ-;;
타메를랑님->동양의 공성전 기술이 낙후한게 아니었단 점은 저도 본문에서 밝혔습니다. 오히려 고대에는 동양의 공성기술이 서양에 전래되 서양공성기술을 발전시키기도 했죠. 제가 서양투석기가 앞섰다고 말하는 시기는 이보다 한참 후대인 중세 중반 이후를 얘기하는 겁니다. 이시기에는 서양이 동양보다 우수한 투석기를 제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서양의 공성전기술이 동양으로 역유입된 사실을 봐도 어느정도 분명한 것 같습니다.
글쎄요... 서양투석기가 시기적으로 봤을때.. 인간의 힘을 주로 이용하는 인력식 투석기에 의존한 기간이 중국이 그리스 보다 더 길었습니다.동양의 공성기술이 서양에 전파됐다고 했는데.. 투석기에 한해선 서양이 전혀 낙후되지도 않았고.. 양양포 같은걸 쓰기 시작할 무렵에야 인력에 의존하지 않는 포를 사용하는데..
줄로 당겨서 쏘죠..당나라 진나라..묵가 집단이라든가.. 그리고 명나라나 조선이나 당시엔 승자총통은 유행하던 무기였습니다.문제는 조총이 왔을때 굳이 대량으로 보급되어 있는 승자총통을 대체할만큼 대량 생산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하는 문제죠.대량생산 할때도 따로 기관을 두고 국가적인 사업을 해야 하는데 여러가지 복잡하죠..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비틀림(torsion)을 이용한 투석기가 인력적 효율성에서는 유리할지 모르나 실제 성벽 파괴에서 중국의 투석기를 능가할 위력을 발휘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비틀림을 이용한 투석기는 투석거리는 카운터웨잇식 투석기에 비해 길지만 쏠 수 있는 발사체의 무게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실제 성벽파괴라는 면에서는--성벽파괴에는 발사체의 무게가 사거리보다 중요합니다--중국식 투석기가 뒤떨어졌으리라 보기는 힘들다봅니다. 물론 카운터웨잇식 투석기의 위력의 후덜덜함은 양양포와 호준, 칠초포의 사례에서 증명되었습니다만.
어차피 동양, 특히 중국에서 인력이 남아 도는데, 굳이 비틀림을 이용한 투석기를 쓸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 카운터웨잇식 투석기는 서양쪽에도 중국보다는 꽤 일찍 쓰였습니다. 이슬람에서 최초로 개발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럽에서도 꽤 일찍부터 쓰인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남부유럽에서는 습한 기후 때문에 위력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판타지 라이브러리 들먹이긴 그렇지만 양양포가 초포들 보단 한세대 앞선것이고 칠초포가 사용할수 있는 탄환의 무게가 54~60kg 양양포가 최대 90kg 이라고 써져있는데 몽골군이 굳이 초포를 쓸거 같으면 양양포같은걸로 남송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투석기의 옳바른 발전과정의 선택은 기계식이지 인력식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기술적 균형상태의 돌파여부가 그 사회의 기술패러다임을 결정한다'는 태제를 증명하기 위해 많은 근거와 가설들을 제시하셨지만 글 전체 분위기가 웬지 산만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예를 들어 님은 서두에서 '자, 그럼 오늘의 주제인 공성전 기술로 넘어가 봅시다. 중세말 동양의 투석식 공성무기가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해 있었다고 일단 보고, 그렇다면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라고 먼저 이 글의 주제를 밝히고 계십니다. 허나 뒤에 가선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죠. '동서양의 기술수준의 '우열관계'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갑옷이나 전술 같은 응용과학 부문을 비교하는 것보다는 기초과학의 수준을 비교
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허나 그렇게 따지면 '공성무기' 역시 활이나 갑옷과 마찬가지로 응용 과학 부문에 속한 것 아닌가요? 제 말이 맞다면 결국 님이 네 번째 문단까지 할애하신 공성무기 관련 부분들은 사실상 본문의 주제와 별로 관계가 없을 뿐더러 님의 궁극적인 주장과도 서로 배치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님이 내세우신 가설 -이미 경갑체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데, 충격전에 새로 관심을 갖게 된 황제 하나가 중갑을 새로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그러나 그럴싸한 중갑을 만들고 활용하기에는 아직 노하우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갑에 비해 상당히 '비효율적인' 수준의 갑옷이 만들어졌고, 이것을 한번 입어본 황제는 중갑의 효용에 회의를 느끼고 더이상의 개발을 중지합니다. 반면 일찍부터 중갑 위주의 전술이 발달했던 서양에서는 중갑에 대한 기술적 배리어가 오래전에 극복되었기 때문에 지속적 투자가 순조롭게 이뤄졌죠.- 역시 뒤에 가서는 '역사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단순하고 순리에 맞는 방향으로 흐르는 겁니다."라는 주장을 통해 사실상 그 근거가 부정되고 있습니다. 즉 가정의 출발은 '개인(황제)에 의해 만들어 지는 역사'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개인은 역사를 만들 수 없다는 또 다른 성격의 주장을 하고 계시는 거죠.' 물론 님이 쓰신 글은 지적 박식함이 묻어있는 훌륭한 글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일관성은 좀 부족한 것 같네요. 그것만 좀 더 보완하시면 더욱 훌륭한 글이 될 것 같습니다.
투석기도 유럽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바가 있다는군요ㅡ유럽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대포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대포가 풍포라는 이름으로 1004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것은 프레임에 설치하여 회전시키는 대형 투석기로서, 투석기의 들보끝에 매어 잇는 로프를 동시에 당겨 발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투석기는 유럽에서는12세기 초 모사라베 필사본에 처음 등장했고 북방 십자군이 리스본을 공격하던 때인 1147년에 다시 등장했다ㅡ린 화이트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대신 추를 이용하는 카운터웨잇식 투석기는 서유럽에서 최초로 등장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3세기 초 이슬람 서적들이 카운터웨잇 투석기를 프랑크형, 서유럽형이라 칭했다고 하죠. 현대 실험에 따르면 십톤의 추를 가진 투석기는 이, 삼백 파운드의 돌을 삼백야드, 고대 비틀림식은 4~6
첫댓글 조총의 경우 따지자면 일단 조총을 처음 보았을때 선조는 조총을 군기시에 보관하게 합니다 이 군기시는 지금의 국과연이죠 그리고 이전에 점화식 발사체계인 승자총통 시리즈들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조선은 총을 무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다양한 공성무기를 개발해 사용한 적도 있었는데, 동양의 공성기술이 낙후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원나라가 남송의 양양성을 공격할 때 사용한 투석기(회회포-만자니크)는 훌라구가 정복한 페르시아 지역에서 차출된 이슬람 기술자들에 의해 발명된 것입니다. 그걸 서양의 기술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죠.
645년 5월 17일, 이세민이 이끄는 수십 만의 당군이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했을 때 포차를 사용했었죠. 포차(抛車)는 투석기인데, 3백 근 무게의 석탄을 1리(250미터)나 날릴 수 있었고, 성문과 성벽을 부수는 공성 망치인 당차(撞車)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십 명의 병사가 한꺼번에 타고 올라가 성벽에 뛰어 내릴 수 있는 용도의 이동식 사다리인 운제도 있었고, 이동식 공성탑 역활을 하는 누각도 개발해 사용했습니다. 또, 안시성 공략 당시에는 성벽을 마주보는 크기의 토산(土山)까지 만들었습니다. 동양의 공성 기술이 그렇게까지 낙후된 것은 아닙니다.
전상용님->조총을 군기시에 보관하게 한 것만으로 조총의 효용을 크게 인정한 것이라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조총을 처음 본 조선인들의 평가내용중에 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차라리 활을 쓰는것만 못하다고 한 내용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조총이 조선에 소개된건 임진왜란 발발 한참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란시 왜군의 조총을 보고 충격을 받은 조선군의 모습만 봐도 조총이 그동안 조선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군기시에 보관한것 뿐만 아니라 조총에 대한 모든 전술적 유용성에 검토가 들어갔고 칼해님이 지적하신 것과 같이 "지금 쓰고있는 무기를 쓰는게 낫다" 라는 결론이 나온것이죠. 조선 군관들이 보기엔 총통이나 조총이나 그놈이 그놈같은 무기였을 것이고, 또한 생산단가가 더욱 더 커질게 뻔하므로 조총무장을 보류한 것이라 볼수 있습니다. 실제 일본군에게서 조총 활용법을 익힌 후에는 대규모 조총 생산에, 나중에 가선 머스켓 까지 복제하는데 성공하죠. 뭐 벨테브레가 복제한 머스켓은 "그놈이나 그놈이나 주의"로 사장당했습니다만 -ㅅ-;;
타메를랑님->동양의 공성전 기술이 낙후한게 아니었단 점은 저도 본문에서 밝혔습니다. 오히려 고대에는 동양의 공성기술이 서양에 전래되 서양공성기술을 발전시키기도 했죠. 제가 서양투석기가 앞섰다고 말하는 시기는 이보다 한참 후대인 중세 중반 이후를 얘기하는 겁니다. 이시기에는 서양이 동양보다 우수한 투석기를 제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서양의 공성전기술이 동양으로 역유입된 사실을 봐도 어느정도 분명한 것 같습니다.
글쎄요... 서양투석기가 시기적으로 봤을때.. 인간의 힘을 주로 이용하는 인력식 투석기에 의존한 기간이 중국이 그리스 보다 더 길었습니다.동양의 공성기술이 서양에 전파됐다고 했는데.. 투석기에 한해선 서양이 전혀 낙후되지도 않았고.. 양양포 같은걸 쓰기 시작할 무렵에야 인력에 의존하지 않는 포를 사용하는데..
줄로 당겨서 쏘죠..당나라 진나라..묵가 집단이라든가.. 그리고 명나라나 조선이나 당시엔 승자총통은 유행하던 무기였습니다.문제는 조총이 왔을때 굳이 대량으로 보급되어 있는 승자총통을 대체할만큼 대량 생산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하는 문제죠.대량생산 할때도 따로 기관을 두고 국가적인 사업을 해야 하는데 여러가지 복잡하죠..
그리고 승자총통보다 조총이 낫습니다.지금하고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무기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비틀림(torsion)을 이용한 투석기가 인력적 효율성에서는 유리할지 모르나 실제 성벽 파괴에서 중국의 투석기를 능가할 위력을 발휘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비틀림을 이용한 투석기는 투석거리는 카운터웨잇식 투석기에 비해 길지만 쏠 수 있는 발사체의 무게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실제 성벽파괴라는 면에서는--성벽파괴에는 발사체의 무게가 사거리보다 중요합니다--중국식 투석기가 뒤떨어졌으리라 보기는 힘들다봅니다. 물론 카운터웨잇식 투석기의 위력의 후덜덜함은 양양포와 호준, 칠초포의 사례에서 증명되었습니다만.
어차피 동양, 특히 중국에서 인력이 남아 도는데, 굳이 비틀림을 이용한 투석기를 쓸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아, 카운터웨잇식 투석기는 서양쪽에도 중국보다는 꽤 일찍 쓰였습니다. 이슬람에서 최초로 개발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럽에서도 꽤 일찍부터 쓰인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남부유럽에서는 습한 기후 때문에 위력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양양포 vs 호준포,초포 씨리즈의 위력대결에서 양양포가 위력에서 졌다는 겁니까?근거가 뭡니까.?
뭔 소리합니까? 카운터웨잇식 투석기의 위력이 후덜덜하다고 했는데 뭔 호준포한테 졌다고 그러시는지 이해가 안갑니다만.
판타지 라이브러리 들먹이긴 그렇지만 양양포가 초포들 보단 한세대 앞선것이고 칠초포가 사용할수 있는 탄환의 무게가 54~60kg 양양포가 최대 90kg 이라고 써져있는데 몽골군이 굳이 초포를 쓸거 같으면 양양포같은걸로 남송을 공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투석기의 옳바른 발전과정의 선택은 기계식이지 인력식이 아니라는 이야기죠.
제가 비교한건 카운터웨잇식-인력식이 아니라 비틀림-인력식의 비교입니다만.
지금 글에 혼동이 왔는데 카운터 웨잇이 인력식을 말하는거 아닙니까.근데 그 범주에 왜 양양포가 들어갑니까?
양양포가 인력식입니까?
비교 대상에 대해, 카운터웨잇식이 인력식에 앞선다는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카운터웨잇식-양양포, 인력식-호준, 칠초포. 그리고 앞에서 한교님께서 예로 드신 그리스, 로마식은 비틀림이고, 인력식이 비틀림에 비해 위력이 떨어지느냐에 대한 생각입니다만.
밑에 비교 예시에 양양포 호준포 칠초포가 나란히 들어가서 무슨얘긴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기술적 균형상태의 돌파여부가 그 사회의 기술패러다임을 결정한다'는 태제를 증명하기 위해 많은 근거와 가설들을 제시하셨지만 글 전체 분위기가 웬지 산만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예를 들어 님은 서두에서 '자, 그럼 오늘의 주제인 공성전 기술로 넘어가 봅시다. 중세말 동양의 투석식 공성무기가 서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해 있었다고 일단 보고, 그렇다면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라고 먼저 이 글의 주제를 밝히고 계십니다. 허나 뒤에 가선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죠. '동서양의 기술수준의 '우열관계'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갑옷이나 전술 같은 응용과학 부문을 비교하는 것보다는 기초과학의 수준을 비교
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허나 그렇게 따지면 '공성무기' 역시 활이나 갑옷과 마찬가지로 응용 과학 부문에 속한 것 아닌가요? 제 말이 맞다면 결국 님이 네 번째 문단까지 할애하신 공성무기 관련 부분들은 사실상 본문의 주제와 별로 관계가 없을 뿐더러 님의 궁극적인 주장과도 서로 배치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님이 내세우신 가설 -이미 경갑체제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는데, 충격전에 새로 관심을 갖게 된 황제 하나가 중갑을 새로 한번 만들어 봤습니다. 그러나 그럴싸한 중갑을 만들고 활용하기에는 아직 노하우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갑에 비해 상당히 '비효율적인' 수준의 갑옷이 만들어졌고, 이것을 한번 입어본 황제는 중갑의 효용에 회의를 느끼고 더이상의 개발을 중지합니다. 반면 일찍부터 중갑 위주의 전술이 발달했던 서양에서는 중갑에 대한 기술적 배리어가 오래전에 극복되었기 때문에 지속적 투자가 순조롭게 이뤄졌죠.- 역시 뒤에 가서는 '역사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대한 흐름이기 때문에, 단순하고 순리에 맞는 방향으로 흐르는 겁니다."라는 주장을 통해 사실상 그 근거가 부정되고 있습니다. 즉 가정의 출발은 '개인(황제)에 의해 만들어 지는 역사'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개인은 역사를 만들 수 없다는 또 다른 성격의 주장을 하고 계시는 거죠.' 물론 님이 쓰신 글은 지적 박식함이 묻어있는 훌륭한 글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일관성은 좀 부족한 것 같네요. 그것만 좀 더 보완하시면 더욱 훌륭한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승자총통이 조총보다 우수하다고 한적은 없는데요 ㅡ.ㅡ;;;그냥 그와 비슷한 류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총의 효용을 우습게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 것인데
상용님한테 쓴거 아닙둥~ OTUL
OTUL은 뭡니까??U존재는 혹시 똥배...
투석기도 유럽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바가 있다는군요ㅡ유럽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대포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대포가 풍포라는 이름으로 1004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것은 프레임에 설치하여 회전시키는 대형 투석기로서, 투석기의 들보끝에 매어 잇는 로프를 동시에 당겨 발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투석기는 유럽에서는12세기 초 모사라베 필사본에 처음 등장했고 북방 십자군이 리스본을 공격하던 때인 1147년에 다시 등장했다ㅡ린 화이트 중세의 기술과 사회변화
대신 추를 이용하는 카운터웨잇식 투석기는 서유럽에서 최초로 등장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3세기 초 이슬람 서적들이 카운터웨잇 투석기를 프랑크형, 서유럽형이라 칭했다고 하죠. 현대 실험에 따르면 십톤의 추를 가진 투석기는 이, 삼백 파운드의 돌을 삼백야드, 고대 비틀림식은 4~6
0파운드의 돌을 사백오십야드 날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