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칠곡 가산의 대둔사에
종종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수필가 하재열과 커피 자리에서 절 이야기를 하였다. 칠곡 가산의 대둔사라는 절을 아느냐고 했다. 처음 듣는 절 이름이라서 모른다고 했더니, 수문대 출신의 이홍선님이 이 절에 온갖 정성을 다 바치는 보살님이라고 했다. 비구니승이 주재하는 조계종 소속의 사찰이고, 동화사의 말사라고 하였다. 요즘 절집 답사를 다니면서, 무명의 절도 많이 찾아다니다 보니 사이비 종교의 냄새가 나는 사찰도 있어서 실망이 많았다. 그러나 조계종 사찰이라면 우선은 마음이 놓인다.
절 이름을 처음 듣는다고 하니, 하선생은 내일 자기 차로 동행하자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도 봄도 아닌 어중간한 날씨에 마땅히 찾아갈 만 절도 떠오르지 않아서 어떻게 할까라고 고심중이었다. 왠 떡이냐, 싶은 기분이었다.
내일 오전에 지하철 용산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전상준 샘에게도 연락하여 동행하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절집 답사를 준비하면서, 어제 하선생이 점심 공양도 있을거라 하여 점심 준비를 하지 않았다. 점심 준비를 하지 않으니 답사 준비에 시간여유가 생긴다. 집 밖을 나서니 날씨가 많이 풀렸다.
용산역에서 전상준, 하재열 선생을 만났다. 집사람까지 네 사람이 동승했다. 대구의 서북쪽은 남쪽에 사는 우리 부부에게 낯선 곳이 많다. 용산역에서 한티재까지 이르는 길은 처음 가는 길이었다. 나무도, 숲도 그리고 마른 갈대가 메우고 있는 하천도 보여서 풍광 구경으로 지루하지 않았다. 한티재 아래로 뚫은 터널을 지났다. 삼존불을 모신 군위의 석굴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지점까지 와서 좌회전했다. 칠곡의 가산으로 나가는 길이라고 했다. 여기서부터는 아직 한 번도 와 본 일이 없는 길이고, 골짜기였다.
길은 실같이 좁고 구불구불하다. 잎사귀 하나 달고 있지 않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 서 있는 산 속으로 굽이굽이 도는 길은 몹시 가파르다. 만약 내가 차를 운전해야 할 처지라면 찾아 올 생각을 감히 하지 않았을 만큼 험하다. 이제나, 이제나 하는 마음이지만 목적지까지는 아직 멀다고 하였다.
산 고개를 넘으니 골짜기 안에 작은 마을도 나오고 손바닥 만한 밭도, 논도 나온다. 아마도 이곳에 살았던 예전 사람은 산에 둘러싸여 바깥 세상을 구경할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았을 것 같다. 이곳은 가산산성에서 멀지 않는 산골마을이라고 했다. 조선시대라면 역병도 난리도 피해갈 듯하다. 정감록이 꼽을 피난지가 아닐까도 싶다.
차도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가파른 길을 달려서 닿은 작은 마을이다. 조금 더 오르니 절이 있었다.
“어, 큰 절이네,”
나는 이런 산골이면 겨우 법당 한 채가 전부인 암자 같은 절이리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을 뛰어넘어 법당도, 산신각도 요사체도 갖춘 큰 절이었다. 신라고찰이라고 말로만 전해올 뿐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삼국통일을 이룬 힘이었던 신라 화랑도들의 수행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절이 앉아 있는 곳은 가산 동측 해발 420m정도의 산허리이다.
신라 고찰이라고 전해지고 있었으나. 터만 덩그러이 남아있는 폐사지 였다. 신라를 알리는 유적도 유물도 없다. 스님들이 와서 천막을 치고 절집을 세우려 했으나.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 포기하고 돌아가셨다. 그때의 사진이라면서 보여주었다. 비니루 천막인데, 누더기로 덕지덕지 땜질을 하여, 사람이 기거하기가 불가능해보였다. 여러 스님이 거쳐갔으나 절을 다시 일으키는 일을 포기하고 떠나갔다.
그러다 1994년에 지금 주재하고 계시는 비구니 스님이 들어오셔서 오늘의 절을 일구어 냈다고 한다. 1999년에 주불당인 극락전을, 더 전인 1998년에 지금 우리가 차를 마시고 있는 심검당을 먼저 지었다. 2004년에 산신각을 세웠다. 산신각을 이처럼 일찍 지어올린 것은 절에서 산신각을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리라, 나는 우리나라의 절터는 거의 대부분이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의 우리 토속 신앙터라고 믿는다. 그래서 절마다 산신각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믿는다.
최근에는 절에 화재가 있어서 2022년에 요사채를 지었다. 요사체를 지을 때 이홍선 보살님 부부가 많은 도움을 드렸다. 그래서 이홍선 보살님 부부가 이 절의 제일 돈독한 불자라고 하였다. 요사체까지 들어선 대둔사는 작은 절이 아니고, 큰 절이 되어 있다.
따진다면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치고 최근에야 태어난 절이다. 전체 건물의 배치는 오른쪽이 뒤쪽으로 물러나 있다. 터의 생김새 때문이라 생각된다. 창건 이후의 사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가 1840년(조선 헌종 6) 대홍수로 절터 전체가 물에 잠겼다. 1992년 다시 수해로 대웅전이 무너져서 폐사지처럼 되었으나, 1999년 새로 극락전을 세워서 오늘의 절로 일으켰다. 대둔사(大芚寺)의 사명이 크게 싹을 틔운다는 뜻이다. 절집도 완성되었고, 스님들도 모여들어 수행하고 있으니 이제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울 일만 남았다. 대둔사는 또다시 새로운 생명의 싹을 틔워낼 것이다.
해남의 대둔사가 원래 크다는 뜻의 '한'에 '둥글다'거나, '덩어리'란 의미를 가진 '듬'이나 '둠'을 쓴 한듬, 한둠으로 말하거나, 혹은 큰 대(大) 자를 쓴 ‘대듬사’ 또는 ‘한듬절’로 불리웠다. 칠곡 가산의 대둔사 역시 언어로 풀이하면 그런 뜻이 아니었을까, 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이 사찰의 사하촌을 ‘한듬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절마당은 곱게 빗질을 하여 쓰레기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빗질한 자국도 선명하고, 가지런하다. 문득 운보 선생의 빗질하는 스님을 그린 ’바보 산수화‘가 떠오른다. 나는 그 그림을 보고 무척 평화로운 분위기를 느꼈다. 지금이 그런 기분이다.
중년은 넘어 보이는 여스님이 절마당을 어슬렁거리는 우리를 심검당으로 불렀다. 신발을 벗고, 심검당 안으로 들어서니 스님은 우리에게 보이차를 끓여서 따루어 주었다. 지묵(志墨)스님이라고 했다. 초창기의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절의 내력을 이야기해 주셨다.
하선생이 이홍선님에게 전화했고, 이홍선님은 왜관에서 일부러 찾아오겠다고 하나 보다. 나는 법당에 들려서, 삼배만 올렸다. 그리고는 심겸당에서 여스님이 따뤄주는 보이차를 마시면서, 스님의 말씀을 들었다. 이 사이에 이홍선 님이 왔다. 서예도 하고, 수필도 쓴다면서, 부부가 이 절에 지극정성을 다하여 도운다고 하였다.
집사람은 법당에 들리면 나보다 절도 더 많이 하고, 더 오래 머물렀다. 오늘도 그랬다. 나는 절마당으로 나와 멀리서 흐릿한 모습으로 보이는 팔공산의 비로봉이며, 동봉을 바라보았다. 산들이 첩첩이다. 하선생이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해지면 진달래가 산을 덮고, 절마당에는 할미꽃도 무리지어 핀다면서, 그때 한 번 더 옵시다. 한다.
나는 108사의 답사를 목표로 절집을 찾아다니면서 해인사, 통도사 하는 역사적인 절로부터, 폐사지까지, 불당과 요사체만 겨우 갖춘 작은 절까지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시골장터처럼 붐비는 큰 절보다는 새소리, 바람소리만 들리는 한적안 절이 더 좋다. 절 분위기란 이래야 한다는 내 믿음 때문이리라.
오늘의 대둔사는 조용한 산골 절 분위기만이 아니다. 저 멀리 바라보니 봄빛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중간의 산들은 능성이 겹치면서 작은 타원을 만들고, 그 너머로 보이는 팔공산 주봉들은 하늘인지, 구름인지, 산봉인지 구분이 안된다. 나도 몰래 선경에 들어선 기분에 젖어 있는데 하선생이 ’꽃이 피면 우리 한 번 더 옵시다.‘라고 했다.
나는 상념을 깨고, ’그럽시다.‘라고 했다.
아내는 정원수도 있고, 앉을 자리도 있는 절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주소 :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가산로1길 272-59 (가산면)
소재지: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96-1
지정번호:대한불교조계종 전통사찰 87호
첫댓글 불자가 아니지만
글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대둔사 저도 처음 들어보지만 선생님이 갔던 길 되짚어 가 보고 싶네요.
저희 집 뒤 가산산성 안에도 혜원정사라는
아담한 절이 있습니다. 산책길에 무심히
들어가 보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