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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흥선대원군의 첫 번째 성공적인 개혁정책은 서원철폐이다.
두 번째는 호포법 실시이다.
영조의 가장 치적이랄 수 있는 균역법에서 부족한 징수부분을 채워준 게 선무군관포 ( 영조때 부를 축적한 양민들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와 과거 응시권을 보장해주고 매년 포 한 필을 받았던 세금)인데 중간계층인 양인들이 주로 부담했다.
조선후기 막바지에 들어서는 상공업과 농업의 발달로 평민 중에 부를 축적한 이들이 돈을 내고 양반신분을 얻기도 했다. 그 수가 상당해서 양반들은 면세, 면역의 특권이 있어 국가 재정이 엉망이었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기존의 균역법을 폐지하고 호포제로 바꿔 실시했다. 즉 선무군관 개념도 사라지고 양반등 모든 계층에게 년 포 한 필씩을 세금으로 내게 했던 것이 호포법이다.
영조때 어사 박문수가 주장했지만 기득권층 양반들 격렬한 반대로 박문수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순조 때 효명세자가 대리청정할 당시에 또 다시 시도를 해 보지만 효명세자가 급사하는 바람에 무산 된다. 호포법은 오래 전부터 꼭 있어야 할 법이었지만 흥선대원군 시대에 와서야 실시 된 것이다.
그러나 서원철폐에 이어 호포법 실시는 이기적인 기득권층 양반들에게 강힌 반발을 샀고 흥선대원군 몰락의 이유도 된다.
세 번째는 삼정의 개혁과 사창제 실시이다.
흥선 대원군은 낭인 생활을 일반 백성들과 오래 했었기 때문에 삼정의 문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삼정개혁을 보자면 전정은 양전사업을 통해, 군정은 호포법을 통해, 환곡은 사창제를 통해 각각 삼정문란을 개혁하였다.
환곡은 원래 가난한 농민을 돕기 위해 실시한 빈민 구제책이다. 흉년이나 춘궁기에 가난한 농민들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기에 약간의 이자를 쳐서 환수하는 제도라서 '환곡(還穀)' 이라 이름 붙은 것이다.
빈민 구제책은 삼국 시대부터 실시되었던 제도로 고구려에서는 진대법을 시행하였고, 고려에서는 의창과 상평창을 두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이 심해지면서 환곡은 삼정 중 가장 문제가 많았고, 농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다.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고자 했던 흥선 대원군은 환곡부정을 대대적으로 정리했고 특히 환곡에 관에서 관리가 간여하지 않고, 지역민들이 자치적으로 마을 단위로 공동 운영하도록 하는 사창제(사적인 창고를 운영)를 시행하였다.
네 번째는 비변사폐지 의정부부활로 왕권강화다
이 문제는 한 꼭지로 다룰 만큼 왕권과 신권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로 복잡하다.
우선 비변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원래 비변사는 국방 문제에 대처하는 임시 기구로 출발하였다. 비변사는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계속된 성종 때 의정부와 병조 이외에 국경 지방의 요직을 지낸 인물을 필요에 따라 대책 마련에 참여시키게 되고, 이들을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이라 한 것이 시작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난을 수습, 타개하기 위해 비변사를 전쟁 수행을 위한 최고 기관으로 활용하면서 그 기능이 확대, 강화되었다. 즉, 수령의 임명, 군율의 시행, 논공행상, 청병(請兵), 둔전, 공물 진상, 시체 매장, 군량 운반, 훈련도감의 설치, 산천 제사, 정절(貞節)의 표창 등 군정, 민정, 외교, 재정에 이르기까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사무를 처리하였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기능이 확대, 강화된 비변사는 권력의 집중으로 여러 부작용이 생겼다. 효종 때 비변사의 폐지를 주장한 대사성 김익희가 지적하였듯이, 군사 문제를 협의하는 관청이라는 명칭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비빈(妃嬪)의 간택까지도 처리하는 등 국정 전반을 관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비변사는 전후 복구와 국방력 재건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그대로 존속되었다.
인조 때에 이르러 서인 정권은 후금과의 전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군사와 정치의 권한을 장악하기 위해 새로운 군영들을 설치하는 한편, 비변사의 제조당상(提調堂上)을 겸임하는 등 비변사를 통해 정부의 전 기구를 지배하였다.
이제 비변사는 임시군사대책 기관으로부터 정책결정 기구로 그 성격이 변모한 것이다. 이에 따라 비변사는 더욱 확대되고, 권한도 강화되어 의정부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 뒤 효종과 현종 때에도 비변사의 정치적 지위는 동요하지 않았다. 주요 정책의 일부는 대신들만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는 방식이 새롭게 채택되기까지 이르렀다.
즉 왕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어떻게보면 정도전이 조선창업 시 주장했던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생각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신하들은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고 자기 배 채우는데만 집중했다.
조선은 이 처럼 신권이 강한 나라였다. 현 입헌군주국 처럼은 아니었지만 조선 초기 태종, 세조, 연산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비변사였다. 그런 비변사를 폐지 한다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었다. 왕실권한을 확대하려 한 흥선대원군에게 비변사는 눈에 가시였고 기어코 혁파하고 공식적 기구인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다섯 번째는 과거제 재정비와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등용과 서얼차별 금지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안동김씨, 풍양조씨 세도정치가 실시되면서 과거제는 형식에 불과했고 직책에 따라 액수가 정해진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매관매직은 당연히 본전을 찾으려는 부정부패가 일상화 되었고 죽어나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 전국적으로 민란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 과거제를 대원군은 원래대로 정비하고 서얼이라도 인재로 생각되면 과감히 등용했다.
마지막으로 법전의 정비이다.
흥선대원군은 민생안정과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대전회통과 육전조례 등의 법전을 정비하였다.
이처럼 흥선대원군 섭정 10년은 조선 왕들 그 누구보다 치적이 많다. 흥선대원군은 국가재정확보, 민생안정, 왕권강화 정책 중 민생안정책을 가장 중시하였다.
이유는 민생이 안정되면 국가재정의 확보와 왕권강화는 자연스럽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만약 흥선군이 외세가 밀려오던 조선말기가 아닌 조선 중기쯤 집권을 하고 이런 개혁 정책을 내 놓았다면 조선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삼정문란정비, 호포법 등 개혁정치는 앞서도 말했지만 순조시대 효명세자 대리청정 때 시도 되었던 일들이다.
당시 효명세자는 조정에 '삼정이정청'까지 설치하고 삼정문란문제를 풀어보려고 노력했지만 노회한 세도정치세력이 하는 척만 하다가 효도세자가 요절하자 있으나마나 한 정책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것이 효명세자 요절 32년 후 효명세자 비인 조대비에 의해서 흥선군이 섭정을 시작하고 효명세자의 못다 핀 개혁정치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만약 효명세자가 요절하지 않고 대원군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정치가 효명세자 시절에 이루어졌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변했을까?
그러나 효명세자가 살아있어 왕이 되었다고 해도 어느 정도 개혁은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큰 변화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효명세자의 할아버지인 개혁군주 정조도 개혁을 시도 했지만 대원군 처럼 개혁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정조사후 그 개혁조치들은 노론들에 의해 너무 쉽게 더 큰 반동으로 무너져 내렸다. 당시 그만큼 노론 양반기득권층의 뿌리는 깊고도 넓었다.
순조시대는 노론세력중에서도 안동김씨, 풍양조씨 세도세력이 막강한 힘을 막 펄쳐나가려던 시기이다. 그리고 대부분 노론세력들이었던 신하들과 양반세력 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자기들 기득권이 침해되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효명세자가 아무리 개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30년 후 흥선대원군의 개혁은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안동김씨가 세도를 할 동안 안동김씨는 지배층 양반인 노론마저 거의 모든 벼슬에서 물러나게하고 안동김씨와 그 추종세력만 남아 일가문 독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게제도 형식적으로 만들었고 매관매직으로만 벼슬을 팔았다.
이제 조정에 남은 것은 안동김씨와 그 추종세력들 뿐이었다. 벼슬에서 밀려난 노론 양반집단도, 하물며 안동김씨 추종세력도 흥선군의 막판 흥정에 바로 넘어 올 정도로 안동김씨 일가문독재에 신물이 나 있었다.
그것을 기회로 여긴 조대비와 흥선군에 의해 안동김씨 세력이 제거 되자 당장은 흥선군 독주에 제동을 걸만한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잦은 민란으로 의식이 상당히 깨어있는 일반백성들이 흥선대원군 개혁정치를 전폭적으로 지지했기때문에 흥선대원군의 과감하고 전광석화 같은 개혁정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면 독이된다. 흥선대원군은 개혁정치 성공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을 넘어 무리수를 두게 된다.
가장 큰 무리수는 '경복궁중건'과 '당백전발행'이다.
우선 경복궁중건부터 살펴보자.
경복궁중건은 당시 조선의 재정으로는 무리수였다. 궁궐하나도 지을 수 없을 만큼 조선 조정의 재정은 빈약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백성들에 의해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해야만 왕실의 자존심과 권위가 선다고 봤다.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기 직전까지 안동김씨 외척들이 서원을 통해서 세력을 펼치며 세도 정치기가 이어진다. 이 기간동안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등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왕권은 세도가에 눌려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흥선 대원군은 세도가를 누르고 왕권을 강화시킬 필요성을 느꼈기에 경복궁을 중건하게 된 것이다.
우선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로 부터 뺒은 재산과 조대비가 내탕금으로 내놓은 십만냥을 가지고 경복궁 중건에 나선다. 하지만 그 돈으로 중건하기에는 턱도없이 부족했다.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원납전을 납부하게 하였다. 그때만해도 흥선대원군의 여러 개혁정치에 백성들이 큰 호응을 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자진해서 원납전을 내고 경복궁을 짓는데도 나섰다. 경복궁타령을 흥겹게 부르며 왕실 중건에 백성들도 힘을 기꺼이 보태주었다. 대원군은 인부들을 위해 술과 농악대를 동원해주기도 하는 등 경복궁 중건은 화기애애한 커다란 국가적 행사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의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경복궁중건 공사가 시작되어 한참 잘하고 있는데 경복궁 공사장 목재 창고에 큰 불이 나면서 민가까지 태우는 대화재가 발생했다. 당연히 대화재로 경복궁 중건 공사에 큰 차질을 빚게 된다.
대원군은 이에 전국 각지에서 목재와 석재를 모아오라 명령하게 되고, 모자라는 돈을 메우기 위해 다시 원납전을 거둬들였다.
백성들도 처음에는 원해서 낸 원납전이었지만 이번에는 원망스런 원납전이 되어 많은 돈이 거둬 들여지지 않는다. 흥선대원군은 이번에는 양반들에게도 원납전을 거둬들인다.
하지만 조정의 재정압박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김병학의 건의로 죽을 꾀를 내는데 당백전이라는 돈을 발행하여 공사비에 충당하고자 했다.당백전 발행이 경복궁 중건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지만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당시 조선 조정재정은 형편없었고 또 외세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한 거액의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임시수입이 시급했다.
이리하여 흥선대원군은 1866년에 당백전을 주조·발행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당백전은 종래 주로 사용되던 상평통보에 비해 액면가치만 100배가 되는 고액전이었다. 그러나 당백전의 실질가치는 상평통보의 5.6배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낮았고, 화폐단위도 일반 상거래에서 통용되기에는 너무 컸다.
또한 조선조정도 당백전을 자기들 물품구입의 수단으로만 썼을 뿐 조세수납에서는 받아 들이지 않았다. 참으로 기가막힌 일이었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행해놓고 세금으로 내는 것은 받아 들이지 않았으니 스스로 그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는 화폐유통 기본도 모르는 바보같은 행위를 했다.
당백전이 남발되면서 그 가치는 폭락하는 반면 물가는 급등하게 되었다. 결국 발행되기 시작한 지 반년 만에 주조가 중단된다. 10월에는 유통조차 금지되었다. 그러나 당백전은 이미 종래의 화폐제도가 문란해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화폐경제 확대·발전기에 유통경제면에 나타났던 발전 전망도 흐려놓기 시작했다.
당백전은 지금도 쓰고 있는 재미있는 말도 유행시킨다. '땡전 한 푼없다'
이 말은 인기없는 당백전의 줄임말 당전에서 강하게 발음하다보니 땡전으로 변화된다. 개나 물고다닐 흔하고 인기없는 당백전 한푼도 없을 만큼 곤궁하다는 표현이다.
지금까지도 '땡전 한 푼없다' 말이 쓰이고 있을 만큼 당백전이 그 당시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 알만하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정부라는 곳에서 화폐를 발행해놓고 자기들 물건 살 때는 그 화폐를 사용하고 일반 백성들이 정부에 세금으로 낼 때는 안 받아 주는 화폐라니 코메디도 이런 코메디가 없었다.
흥선대원군의 당시 생각정도나 개혁의 한계가 보이는 일이다.
이후 1867년 당백전의 통용금지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역시 악화인 중국동전 300만~400만 냥을 수입·유통시킴으로서 조선 화폐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1876년 개항한 이후 일본을 비롯한 서양제국의 근대화폐가 유입되고, 1883년에는 악화 당오전을 또 한 번 남발하게 됨으로써 화폐경제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당시 조선 지도층의 정신세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조선이 망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의 최대 실책으로 쇄국정책을 꼽는다. 사실 '쇄국정책'이란 말은 일제가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말이고 '대외통상수교거부정책'이란 용어가 정확하다.
서원철폐, 호포제 실시, 경복궁 중건에 원납전 강제 징수등으로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던 양반기득권 세력은 당백전 발행 등으로 흥선대원군이 일반 백성들에게도 신망을 잃게 되자 흥선대원군을 밀어낼 기회를 잡는다.
노론을 필두로한 양반기득권 세력은 스물두살 성인이 된 고종의 직접통치를 이유로 민비(명성황후, 당시는 민비로 불렸기에 민비로 표현)를 필두로 한 민씨 세력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을 물러나게 하는 계기로 만들고 만다.
그 일에 앞장 선 분이 흥선대원군과 대외정책에서는 여러 점에서 생각이 같았던 위정척사파의 대표인물 최익현이었으니 역사는 참 아이러니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