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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
히데요시의 막료 이시다 미츠나리는 전국 통일 후 무사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부하 제장들의 여력을 해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 침공을 계획했다고는 하나 그 역시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표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참전 주요무장도 회의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히데요시 만큼은 늙은 모친에게 "올해 가을은 명의 황궁에서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말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면이 있다.
히데요시의 의도는 정말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는 것이며, 성공하면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반항적인 군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국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만약 성공했다면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예 일본 본토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말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발표했을때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하의 군대는 오슈 진압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의 통일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조선 침공을 계획한 것으로 이는 소속 무장이나 동맹 다이묘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에 파병된 군대는 히데요시파 군대가 중심이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대표적인 히데요시 다음가는 대영주 이에야스에게는 아예 병력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임진왜란에서 입은 타격은 나중에 히데요시파가 도쿠가와파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 이외에도 호쿠리쿠 지역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우에스기 가문 역시 히데요시가 직접 가서 동맹을 권고한 세력이었지 패배하고 항복한 것이 아니며 히데요시 마저 크게 두려워했을 정도로 강한 세력이다보니 역시 건드릴 수 없었기에 사후 임진왜란에는 개전 후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자신의 대리로 하여 3개월간 전선을 감독하게 하고, 결국 소수 병력을 이끌고 도해하여 웅천에 왜성을 쌓고 철수, 이후에는 종전시까지 나고야성에만 머물렀다. 동북의 모가미 역시 히데요시에게 패배한 적도 없고, 강력한 세력이다보니 군량만 보내고 역시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는다. 북륙의 마에다 가문 역시 어느 정도는 우에스기를 견제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역시 마찬가지. 다테 같은 경우에는 어쨌든 패배했다고도 볼 수 있는 세력이라 소수의 병력만을 요청했는데 다테 마사무네가 자발적?? or 히데요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다수 병력을 보낸다. 반면에 동북 지역이라도 난부나 츠가루 같은 경우에는 히데요시에게 패배한 애들이라 다수 병력을 동원. 즉 결론적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모리든, 시마즈든, 우키타든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항복하여 종속됐던 세력들만 임진왜란에 참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 히데요시에게 전쟁으로 패배해서 항복한게 아닌 대등한 다이묘들은 애초에 참전시킬 계획도 그럴 수도 없었던 것이다.
조선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2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원 명령으로 나고야에 결집, 후에 조선에 침공한 일본군의 주 병력 편제 및 참전 장수들의 목록. 흔히 세간에는 20만이 침공에 동원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6~17만 정도. 호왈해서 부풀렸을 가능성이 짚다.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30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그 중의 절반의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래 편제를 보면 서일본 내의 주요 무장들은 거진 다 참가 했으나 동일본 내의 무장들의 참여도는 비교적 낮다. 하지만 개중에도 참전했거나 하다못해 군량이라도 댄 케이스는 적지 않다. 서일본에서 주요 무장은 주코쿠 지방의 모리 가문, 간사이 지방의 우키다 히데이에, 큐슈 섬의 시마즈 가문, 시코쿠 섬의 초소카베 모토치카인데 이들은 전부 참가했다. 그러나 동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호리 히데하루, 마에다 토시이에 등 빠진 이들이 적지 않다. 다만, 다테 마사무네, 우에스기 카케카츠, 난부 노부나오 등은 이후에 참전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다만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히데요시의 대리로서 3개월간 전선 감독만하고 돌아온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군량을 내놓아야 했다. 가모 우지사토는 병 때문에 빠졌고 왜란 중에 죽었다. 나중에 히데요시의 유언 집행인으로 유명해진 오대로의 참전 여부만 보자면 서일본의 모리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다가카게, 우키타 히데이에는 참전했으나, 동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빠졌다. 다만, 훗날의 에도 막부와는 달리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다이묘 간 영지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들이 선봉장을 맡은 것이다. 아버지의 신분조차 불분명한 히데요시는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치는 가로들이 없었다. 때문에 시종들을 중용했는데, 서일본을 평정한 이후 이렇다할 공로가 없는 시종들에게 서일본의 영지를 나누어 주고 다이묘로 신분을 격상 시켰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즐비한 네임드 무장들을 배제하고 이들 시종 출신 다이묘에게 선봉장을 맡기거나 기타 주요한 자리를 주었다.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처조카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임드급 무장에 비해 영지도 작고 듣보잡에 가까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들에게 선봉장 자리를 주며 키워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의 아버지가 히데요시의 부하로 활약했고, 임진왜란때야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젊은이들로 역시 히데요시의 직계 부하를 키워주기 위한 배치다. 즉 1, 2, 3, 5군 대장은 일본 내에서는 네임드 무장이라고 할 수 없는 무명의 젊은 장수들이다. 심지어 우키다 히데이에는 가문빨은 상당하지만 히데요시의 양자 버프로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로 8군 대장이자 총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알턱이 없는 조선에서는 가토 기요마사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을 대표하는 장군 정도로 착각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일종의 외교 사절인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네가 히데요시를 죽이고 왕을 하라!" 라고 설득하게 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천황은 만세일계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하자 사명대사가 "히데요시가 왕이 아닌건가? 천황은 또 누구고?"라고 하는 촌극이 일어났다.
결국 일본은 침공했다. 그동안 조선이 비변사를 세우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대비책이 없진 않았으나 20만 대군의 대규모 침공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700척 18,700명(경상 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 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을 이끌고 제일 먼저 침공했다. 갑작스레 적의 대군을 맞은 부산진 첨사 정발은 매뉴얼대로 백성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배 3척을 자침시킨(전선, 중선, 방패선 각 1척) 다음 600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개전 직전 서평포(부산 사하구 일대)와 통합된 다대포진 군사들도 첨사 윤흥신의 지휘아래 14일 ~ 15일 이틀에 걸쳐 싸우다 전멸했다. 남동부 방위 중심지인 동래성에는 개전 하루도 채 되지 않은 4월 14일 경상 좌병사 이각과 양산 군수 조영규,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집결했다. (경주 판관 박의장과 밀양 부사 박진은 도착하기 전에 동래성이 포위되었다.) 경상 좌수사 박홍도 군사들을 소집해 육전에 나섰다. 왜침이 대비한 매뉴얼이 사전에 있었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작동한 것이다. 문제는 왜군은 너무 많고, 또 강했다. 동래성도 하루를 버티지 못했고 동래성 북쪽 소산역에 진을 친 박진의 500 군사도 압도적인 숫적 열세에 손쉽게 무너졌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동래성 구원에 실패한 후 경상 좌수영의 함선을 자침시킨 후 경주로 퇴각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은 자신이 지휘해야할 울산의 경상 좌병영 군사들을 내버린 후 북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분군법에 따라 동래성을 지키러 떠난 양산 군수 대신 양산을 지키던 영산 현감 강효윤은 4월 17일 일본군 선봉대의 공격을 받자 북문으로 빠져나와 밀양으로 퇴각했다. 4월 18일 고니시군의 본대가 양산에 입성했다. 1차 방어선이 무너지자 박진은 영남에서 북상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낙동강변 험로 황산과 작원 잔도에 2차 방어선을 쳤다. 진주에서 개전 소식을 접한 경상 감사 김수는 4월 16일 낮 밀양에 도착해 도내 총동원령을 내리고 진주와 함안의 군사들을 동원해 박진을 지원하고자 했다. 당시 박진이 거느린 군사는 너무 적어서 황산과 작원 잔도 전체 구간을 방어하긴 무리여서 작원 잔도 끝부분만 차단하고 있었다. 황산 잔도를 건넌 고니시군 선봉대는 작원에서 박진군과 교전을 벌였다. 전투는 상당히 치열했는데 선두가 차단된 고니시군 선봉대는 주력 일부를 금병산 능선으로 우회시켜 조선군의 배후를 차단해 포위섬멸을 시도했다. 허를 찔린 박진군은 무너지고 박진은 간신히 빠져나와 밀양성에 불을 지르고 가족을 대피시킨 다음 빠져나왔다. 이로서 영남의 2차 방어선도 무너졌다. 4월 17일 영산으로 물러났던 김수는 18일 박진의 패전 소식을 듣고 초계로 물러났다.
경상우도는 4월 19일 구로다 나가마사와 모리 요시나리의 3번대, 4번대 485척이 김해 죽도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전란에 휩싸였다, 김해성은 하루동안 치열하게 저항해 4차례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초계 군수 이유검이 먼저 서문으로 달아나버렸다. 김해 부사 서예원이 이유검을 붙잡으려고 성을 나갔다 그대로 진주로 도망치면서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져 밤에 동문을 넘어온 왜군에게 함락되었다. 창원에 있던 경상 우병사 조대곤이 지원하려 했으나 급하게 모은 200여명의 병력으로는 성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초계 군수 이유검은 4월 26일 김수에게 참수되었고 병력 운송중에 사고가 생겨 아예 지원도 못간 의령 군수 오응창 역시 6월 처형되었다.
한편 유사시 비상 연락망으로 쓰이던 봉화가 전달되지 않았다. 선조 수정 실록 4월자에 실린 경상 좌병사 이각의 장계에는 봉수군 오장이 왜선 400척을 목격하고 즉시 보고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봉화 체계가 완전히 작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일 저녁에 한양으로 들어와야 했던 봉화는 들어오지 않았고,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봉수군이 실수로 반대 방향으로 봉화를 올렸다는 것. 한양의 조정은 4월 17실 신시, 저녁 무렵에나 상황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 속도는 그냥 마편으로도 도달 가능한 속도인 만큼, 봉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맞다.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는데 중앙에서 경장을 파견하는 건 진관체제도 똑같다. 진관 체제는 소규모 병력이 각지에서 분산되어 방어하게 되어있고 각 진관이 윗선의 허가없이 타 진관을 지원하는 일은 성종대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즉, 일개 고을 내지는 도 단위로 감당할 규모를 넘어선 대규모 공격에 대한 고민이 매우 부족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1~2개 도에서 병력을 모으고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이 이들을 지휘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진관 체제라고 현지 지휘관에게 대규모 병력 지휘권을 주진 않았다. 그런 면에서 북방 지역은 현지 병사가 지휘하게 하고 남방도 지방군과 중앙군의 역할을 나눠 상당 부분 재량권을 부여해 병력을 집결시키고 다중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제승방략은 상당히 진보된 제도였다. 왜침이 전례없는 대규모에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지 제승방략이 병력 모아놓고 경장만 기다리는 제도라서 무너진게 아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오위진법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방 기마 민족과의 투쟁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대 기병 전술로 보병 중심인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 문제는 전쟁 후 명의 절강 병법을 받아들인 후에 개선되었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 등 총병력은 약 17만이었다.
•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22,000명, 죽령/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19,000명, 조령/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11,000명 추풍령 등 15만 8,000
• 제1군은 중로(中路)로 동래-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驪州)-양근(楊根)-용진(龍津)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
•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언양(彦陽)-경주(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한강,
• 제3군 우로(右路)는 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북상하였다.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상황이 그 상황인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삼포왜란 같이 가벼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 칭송받던 이일을 내려보내 간단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일의 군대가 먼저 상주에서 가토에 의해 패배하였고, 당황한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 그 역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했다.
신립이 이끌었던 경군(京軍) 기병대의 수효는 사료에 따라 다르나 5천에서 1만 정도로 보이고, 대략 8천으로 보기도 한다. 이 부대는 창기병 편제가 거의 없는 궁기병 위주였다. 궁장 경기병으로 유명한 몽골군이 병력의 5분의 2는 항시 중기병으로 무장한 것을 생각하면, 조선군 기병의 충격력은 상당히 빈약한 상태였다. 조선의 편제상 창기병은 반드시 일정 비율을 갖추어야 했지만, 세조 대에 조선군의 인사 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되면서 창검의 운용은 사실상 잊혀졌고, 창기병 역시 대부분 궁기병으로 대체됐다.
신립은 전투에 앞서 넓은 들판으로 적을 끌어내어 기병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패배했다. 신립이 그러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데, 당시 신립이 지원받았던 병사들의 기량 문제가 크며,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고 심지어 행군 중에도 탈영할 정도였고, 이러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기 위해 신립은 배수진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신립이 북방 유목민(주로 여진족)과의 기병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날린 것을 고려할 때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평지를 고르다 보니 전투 장소가 탄금대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탄금대 전투 당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 신립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신립이 받았던 병사들이 저질이라는 말은 연려실기술에만 나오는 말로, 선조 수정 실록에는 이들은 한양을 지키던 중앙군과 군적에 올라간 병사들로서, 전마를 지급받은 기병 8,000여 명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거기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정병 8,000명과 합한 16,000명의 대병력이었다. 따라서 신립의 과오 덮어주기용이다, 기병은 급조해서 만들어지는 병종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만 조선 전기 중앙군이란 것이 이 수준임을 생각하면 중앙군부터가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닌 오합지졸일 가능성이 크다. 조선군이 저리 된 건 오랜 평화와 세조 때 이뤄진 군제 개악이 합쳐져서 이뤄진 결과다. (다만 북방에 있던 조선군의 경우는 여진족들이랑 허구한날 싸웠기 때문에 정예였다.)
프로이스 신부의 일본사에 이 탄금대 전투가 묘사되어있는데, 조선군이 8만이라는 점은 의구스러우나 반월진으로 돌격한 조선의 기병대가 양익에 조총 사격을 받고 후퇴했다가 1-2차례 재공격을 가했으며, 일본군이 붕괴하지 않고 창검 따위로 조직적으로 대응하자 조선군이 붕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탄금대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신립의 공격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1, 2, 3차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군은 탄금대에서 대패했으며, 일본측 기록에서는 수급 3천개의 전과를 올렸다. 이로서 한양과 왜군 사이를 가로막는 야전군은 사라졌고 방법이 없어진 선조는 수도 한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택한다.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20일 만인 5월 3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은 최단시간내에 한양을 점령할 수 있었으나 선조를 잡지 못한지라 왕을 사로잡아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은 실패했고, 최단 시간 한양 점령만을 목표로 하면서 제껴두었던 다른 지역들을 근거로 관군과 의병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특히 경부가도에서 비껴있어서 초기에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던 조선 최대의 곡창 지대 호남이 아래 서술하는 반격의 근거지가 된다.
그러나 전라도를 중심으로 재야 인사 곽재우, 김덕령, 60세의 고령인 고경명 등이 이끄는 의병이 활발히 일어나고 일본으로부터 건너오는 일본군의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던 해군을 이순신 장군이 번번히 격퇴하자 전황은 고착된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의병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래에서 설명할 권율 장군과 김시민 장군의 활약으로 육로에서 전라도를 잘 버텨냈기 때문에 수군 기지도 운용 가능했던 것.
이 과정에서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임명되어 분조를 이끌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보여줘, 광해군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반면 임해군의 경우 부하였던 국경인이 임해군의 처신에 불만을 가지고 임해군을 넘겼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당시 선조는 분조를 맡긴 자기 아들 광해군마저 경계하는 형상을 보인다.
왕이 몽진하자 도성에 분노한 민중이 들이닥쳐 방화와 약탈이 발생했다. 선조 수정 실록에 따르면 방화의 주체를 간민과 난민으로 지목하고 있다. 불은 장예원에서 시작해 곧 전체 궁궐을 태워버렸다고 한다.
의주로 피난간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가려고 수 차례 요동 총독에게 가서 요청하였으나, 너무 빨리 도망쳐오니깐 오히려 일본과 합세해서 중원을 침공하려는걸로 의심한 명이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사실상 오지말란 소리다)하고 배를 전부 자기들 쪽으로 가져가 버리자 뜻을 단념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요동에서도 조선의 왕이라는 작자가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때 여진족을 이끌고 세력을 넓힐 기회를 노리던 누르하치가 입지를 넓히기 위해 몇 차례 원병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이를 거절했다. 누르하치가 여진족 전체를 통일한 것은 1613년의 일이고 대칸의 직위에 오른 것, 즉 완전 평정이 끝난것은 1616년의 일이나, 이 때의 누르하치는 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로 이미 이성량 등의 지원을 받아 거병한지 10년이 넘은 다음 으로, 1586년에 벌써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이고 건주 여진을 완전히 통합하여 건주 여진의 칸이 되었고, 건주 여진의 수도까지 새롭게 축성할 정도로 강한 세를 키운 상태였고, 여진족 중 가장 강한 라이벌이었던 예허 부와는 사돈 관계를 맺고 동맹을 맺어 사실상 여진족 최강자로서 주변에 대적할 자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지만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뭐로보나 믿을수가 없는, 임진왜란 이전 최고 주적이었던 여진족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조선 조정이 분별이 없진 않았으며, 또한 실제로 여진족에 대한 위협은 자세한 정보 수집을 통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정말 엄청나게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도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기에 원병을 거절한다. 일본에는 마상에서 돌격하는 기병이 없으며 가토 기요마사 역시 함경도 이북에서 오랑캐들에게 발려서 진군을 그만 둔 기록이 있으니 원병이 왔다면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과연 제대로 싸우기는 했을지가 의문이니 선조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격, 강원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은 왕자들을 맞이하는데 음식과 물목이 부족하다며 행패를 부리다 같은 조선인의 배반으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토의 부대는 이 시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중국 침공의 맛보기(?) 차원에서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들까지 공격하고 그들의 성 하나를 점령하여 일본 역사 최초의 대륙 침공을 시행했지만, 그 후 여진족의 강렬한 반격을 계속 받자 피해를 최소화 하자는 차원에서 바로 후퇴하고 조선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러운 야사들이 많지만 이 전쟁의 목적이나 전략적인 시각에서 보나 참전할 필요성은 명백했다.
우선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은 명나라를 정복하여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지, 단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래 도요토미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통보한 요구사항도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정벌할 것이니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고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과의 외교 창구를 담당하고 있던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는 그 요구 사항이 조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불손한 내용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국서의 내용을 온건하게 돌려 말한답시고 살짝 바꿔서 전했는데, 이 또한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치러 가는데 조선은 그 침공할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북쪽에는 북원과 적대적이라 베이얼 호 전투로 카라코룸을 파괴한 역사도 있었고 토목의 변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남쪽 국경에는 베트남과도 전쟁을 치뤄 점령했다가 물러난 적도 있다. 게다가 이때까지는 큰 위협은 아니었지만 여진족도 있다. 이런 판국에 일본은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적대적인데다가 2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데, 조선을 집어삼키면 국력이 더 커지고 명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려 요동, 동남부 해안가, 그리고 수도 북경이 위협받게 된다. 그러면 명나라의 동북 국경에 못해도 수십만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고 이 막대한 비용을 두고두고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이 북원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침공한다면 아무리 명나라라도 간단히 막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건국 이후 명나라에 침략은 커녕 절대적인 우호국이었으니, 당연히 조선을 살려두는게 명나라에 이득이 된다. 온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이는 건 명나라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단기적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는게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참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을 것이다.